동재시목- 복사기는 알고있다

녘죠찌개 by 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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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가기 싫다. 모든 회사원들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생각일 것이다. 검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옆에 애인이 잠들어있다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동재는 아침잠 많은 제 애인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일어났다.

전에는 회사에 갈 이유가 있었다. 회사에 가야만 저 하얗고 뚱한 애인을, 당시에는 밉살맞지만 자꾸 신경 쓰이는 후배였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때는 괜히 없던 일도 만들어서 회사에 남은 적도 있었다. 순전히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지난 달, 동재는 결국 후배의 멱살을 잡으며 싸우다가 참지 못하고 고백했다. 저를 싫어하시는 건 상관없지만 업무에 지장이 생기는 건 곤란합니다. 이런 소리나 속터지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 내가 언제 널 싫어했어! 차라리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너 그만 좋아하게!”

“…저를 좋아하신다고요?”

“그, 그래. 왜, 난 너 좋아하면 안 되냐?”

‘’어쨌든 업무에는 지장 없게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게 다야?”

“뭐가… 말입니까?”

“내가 방금 고백했잖아! 좋다, 싫다. 뭐 그런 대답이 있어야지!”

그러자 후배는 방금까지 고백을 들은 사람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덤덤하게 있던 것이 무색하게 당황한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대답도 뭣도 아닌 소리를 했다.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거절의 말이었을테지만 저 로봇같은 머리통을 알고 있는 동재는 그정도도 예상밖의 긍정적인 반응이라 어, 어… 그래. 하는 소리만 뱉었다. 저 정도면 몇번 더 고백하면서 밀어붙여도 되겠는데? 홧김에 고백한 거면서 바로 태세가 전환 될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뒤 후배는, 아니, 황시목은 동재에게 찾아와 말했다.

“싫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좋다는 거야?”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이 실망할지도 모를 애매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서동재는 그런 거에 굴할 인간이 아니었다. 어딜가나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그는 얼굴이 꽤나 두꺼운 편이었고 그래서 선심쓰듯 제안할 수 있었다.

“내가 알게 해줄게. 일단 나랑 만나.”

때마침 시목이 일어났다. 머리에 까치집이 진채. 쟤는 어쩌자고 저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니까. 피식피식 거리면서 시목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던 동재가 아직 잠이 덜깼는지 반쯤 감긴 눈을 보다 놀렸다.

“그래서, 이젠 좋아?”

“…그만 놀리십쇼.”

평소처럼 뚱한 표정이지만 시목에게는 제법 부끄럽다는 표현인 걸 알아서 동재가 킥킥거리며 껴안았다. 안겨있던 시목이 출근해야 되는데요, 딱히 귀엽지 않은 소리를 해도 놔주지 않고 있던 동재는 정말 시간이 촉박해서 결국 출근 준비에 들어갔다.

“너, 내가 당부한거 안 잊었지.”

“네. 오늘도 10분 늦게 출근할 예정 입니다.”

“그래, 그래. 내가 말한대로만 하면 절대 들킬리 없어. 원래 사내연애는 둘 중 한명이 퇴사하거나 청첩장 돌리기 직전인 거 아니면 말하면 안 되는 거라고. 알았지?”

“진짜 늦으시겠습니다.”

둘이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을 때,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시목이 혹시나 직장에서 동재가 선을 긋는다고 섭섭해할까봐 동재는 앉혀놓고 오래오래 설교를 했다. 늘 그렇듯 제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는게 보이긴 했다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사내연애 여러번 해본 경험으로 충고해주는 거야. 새겨 들어.”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연애 경험이 많다고 제 입으로 떠벌리다니, 바로 차여도 할 말이 없는 실수였다. 그러다 뚱한 시목의 표정을 보고 안심했다. 이 나무 토막같은 게 질투를 할 것 같진 않아서였다. 묘하게 아쉽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동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내가 퇴근할 때 미리 연락할 테니까 너는 30분 뒤에 나와, 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출근은 나보다 10분 늦게 하고, 일 때문에 내 도움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 있을 때 오는거야. 그래야 몰래 만나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안 하지.”

제법 철저한 계획이었다. 이창준 검사장이 알았다면 일을 그렇게 해보라고 구박했을 게 분명했다. 분명 귀찮은 일들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재밌었다. 일단 회사에서 다들 사이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둘이 사실 사귀고 있다는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게 즐거웠다.

표현을 자제해야 한다는 게 아쉽지만 그거야 퇴근하고 집에 와서 잔뜩 하면 되니까. 다른 건 몰라도 시목은 연애에 대해 가르치는 맛이 있는 상대였다. 물론, 침대에서도. 어젯밤을 떠올리며 콧노래를 부르던 동재는 좋은 일 있냐는 말에 별거 아니라고 둘러댄 뒤 서류들을 훑었다. 그러다 시목에게 가야 하는 파일이 섞여 들어온 걸 발견했다.

이정도는 그냥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달라고 해도 되지만… 좋은 핑계다 싶어서 직접 들고 시목의 방으로 찾아갔다. 시목의 방 식구들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또, 오셨네요.”

“아 서류가 섞여들어와서.”

시목이 다가왔다. 이리 주시죠, 그러면서 서류를 가져가는데 괜히 장난 치고 싶어서 동재가 슬쩍 손가락으로 손등을 건드렸다. 시목이 눈을 끔뻑거리자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꾹 참은 동재가 나가려는데 최… 뭐였는데. 아무튼 시목의 방 식구가 말했다.

“전 가끔 복사기가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왜, 복사기는 회사 일에 대해 모르는게 없다잖아요. 누가 누구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사내연애를 하는지 같은 거요.”

“재, 재밌는 발상이네.”

사내연애 소리를 해서 움찔했지만 도로 자리에 앉는 걸 보니 그냥 별 의미없이 해본 말 같아서 동재가 대충 대꾸했다. 그리고 시목을 힐끔보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검사장이 호출했다. 옷 매무새를 다듬은 동재가 들어가 옆에 앉자 검사장이 말했다.

“이 자리 앉으니까 별별 소리가 다 들려. 요즘 아주 바쁜 것 같던데?”

“아이, 저 요즘은 딴 짓 안 합니다.”

“…그건 그렇고, 괜찮은 검사 한명을 사위로 들이고 싶은데 자리 좀 만들어달라는 부탁이 있었어.”

“아 저는 선은 좀-”

“황시목이, 어때.”

“…네?”

“좋잖아. 방송도 좀 타서 얼굴도 알려졌겠다, 얼굴도 그정도면 곱상하고.”

“황프로 그런 자리 싫어하잖습니까. 안 받을 겁니다.”

“안 받을 것 같은 거야, 그랬으면 좋겠는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이만 가봐.”

뭐지? 어딘가 찝찝한 기분으로 동재는 방에 돌아갔다. 그러다 점심을 먹으며 시목과 메신져로 대화를 하는데 문자에서 시목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얘는 어떻게 글자도 이렇게 시큰둥 하냐. 참나, 킥킥거리고 있을 때 강원철 부장검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얼른 받자 커피 마시게 잠깐 와, 하고 끊어버렸다.

툴툴거리며 갔더니 거기엔 시목도 있었다. 둘은 서로 시선이 마주치자 조금 눈짓을 주고 받았다. 시목도 갑자기 불려나온 눈치였다. 그때 커피를 쪽 빨아마시던 강원철이 동재와 시목을 번갈아보더니 말했다.

“너네는 애인 안 사귀냐?”

“네, 네?”

“….”

“아니 검사면 선 자리도 많이 들어오는 거 다 아는데, 둘 다 아무 소식이 없잖아.”

“그냥, 뭐, 아직 마음에 드는 사람을 못 만나서요.”

“….”

“그래? 그럼 이상형이 뭔데?”

“그건-”

동재는 시목을 슬쩍 봤다. 마음 같아선 제 옆에 있는 쟤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시목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마른 침을 삼킨 동재는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편 뒤 말했다.

“일단, 얼굴이 하얀 건 별로입니다. 얼굴에 점이 있으면 더 별로고요. 그, 얼굴에 점 있는게 관상학적으로 별로라고 하잖습니까.”

“너 그런 것도 믿냐?”

“그리고 키도 크고, 아, 체격도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시목에게 최선을 다해 시선을 보냈다. 진심 아닌 거 알지? 그러나 동재의 애인은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인지, 아니, 생각을 하고 있긴 한 건지 모를 표정으로 있었다. 그때 원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의외네. 난 네 취향이 완전 반대인줄 알았는데.”

“반대요?”

“얼굴 하얗고 점 있는데 살짝 아담한 사람이 취향일줄 알았다고.”

“아이, 무슨. 저 그런 사람 안 좋아합니다. 그, 그렇지. 황프로?”

“…네.”

“그럼 황시목은, 이상형 있어?”

“진중한 사람이 좋습니다. 속 깊고요.”

동재는 강원철이고 뭐고 바로 시목을 붙들고 물어보고 싶었다. 너 그거 나 들으라고 진심으로 말하는 거지. 나 안 진중하고 속 얕다고 꼽주는 거지? 너 어제는 너무 좋다며, 내 몸만 좋았던 거야? 너 그런 사람이었어? 그럴 수가 없어서 눈만 부라리는데 강원철이 웃으면서 동재의 어깨를 쳤다.

“잘 알았다. 그럼 들어가서 일 봐 둘 다.”

이런 얘기 하려고 부른거야? 동재는 오늘따라 상사들이 너무 이상해서 짜증이 나려고 했다. 아니 검사장은 일 연애 둘 다 잘만하고 있는 애한테 선을 보게 한다고 하질 않나, 부장 검사는 이상형 같은 걸 물어봐서 분위기 이상하게 하질 않나. 다들 왜 이래?

일단 중요한건 왜 상사들이 같은 날 미쳤는지가 아니었다. 방금 일로 생긴 문제를 해결해야 집에 가서 연애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재는 서류에 머리를 박고 미친듯이 일만 하면서 다들 퇴근하길 기다렸다.

-잠깐 남아서 얘기 좀 하자

그런 문자를 시목에게 보내놓은 상태였다. 초조하게 다른 사람들이 퇴근하길 다 기다리던 동재는 시목의 방 식구들도 퇴근한 걸 확인하자마자 주변을 살피며 시목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바로 잠궜다.

“야, 아까 그거… 진심 아닌거 알지?”

“뭐가 말입니까?”

“왜 아까 부장 검사님 앞에서 내가 한 말. 아니 그 분은 왜 거기서 그런 걸 물어보고….”

“괜찮습니다.”

“…신경 안 썼다는 말은, 안 하네?”

동재는 분명 시목이 기분 상한 걸 걱정해야 할 타이밍인데, 은근 기분이 좋았다. 얘도 나 때문에 속상하기도 하는구나. 맨날 혼자만 전전긍긍하는 줄 알았다. 입안을 깨물면서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꾹 참는 동재에게 시목은 덤덤하게, 그러나 동재를 쳐다보진 않으면서 말했다.

“전 선배님과 달리 이런게 처음이라 좀 당황했을 뿐입니다.”

“너, 내가 그 말한 것도 담아두고 있었냐? 야… 진작 말을 하지.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결국 동재는 못 참고 활짝 웃으며 시목을 쿡쿡 찔렀다. 하지 마십쇼. 뚱한 대답이 돌아오거나 말거나 괜히 건드려대던 동재가 시목의 허리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러자 시목이 닫힌 문을 슬쩍 보며 동재의 어깨를 밀었다.

“저희 조금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 부장 검사님이 부르신 것도 맘에 걸리고요.”

“맞아, 너 혹시 검사장님한테 연락 받았냐?”

“무슨 연락, 말입니까?”

“너 선보게 한다고 하시던데. 됐어, 됐어. 신경쓰지마. 내가 너 그거 싫어할 거라고 잘 말해뒀으니까.”

“…혹시 들킨 거 아닐까요.”

“에이, 우리가 뭘 했다고 들켜. 들키기는. 진짜로 복사기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를 거니까 괜찮아.”

낮에 들었던 우스갯소리를 주워 담으며 동재가 시목을 달랬다. 시목은 조금 껄끄럽지만 일단 넘어가자는 듯 에효, 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시목의 허리를 끌어안고 지분거리던 동재는 주변을 좀 살피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문득 낮에 있었던 복사기 소리부터 검사장, 부장 검사 일까지 스쳐지나갔다. 설마 진짜 다 눈치챘는데 조롱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그러다 고개를 털었다. 아냐, 완벽하게 숨기고 있는데 그럴리가. 그러다 바로 옆에 있는 복사기에 눈이 갔다.

빤히 노려보던 동재는 민망한듯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마저 숙여 시목에게 입을 맞추며 복사기의 눈을 가려봤다. 눈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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