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Days

BETTER DAYS 07

료켄유사♀

쓈's Universe by 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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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요약 - 유사쿠는 실연당한 것에 힘들어하다 겨우 인정했다.

햇살이 옅은 아침. 료켄은 눈을 떴다. 추운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대로 자고 있었던 지라 몸이 쑤셨다. 낮게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자 몸이 마치 삐끄덕 소리를 내는 듯 했다. 부스럭, 대신 부케가 소리를 내었다. 생기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부케는 많이 망가져있었다. 료켄은 부케를 보며 아버지의 육체를 모시고 있던 침상에 앉았다.

"유사쿠."

료켄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케를 바라볼 수록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많이 상했지만 그래도 예쁘다는 생각이 드는걸 어찌할 수 없었다. 부케를 쓰다듬으려던 손을 내려 더는 아버지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시트를 쓸었다. 아버지……

아버지라면 지금의 나를 보고 어떤 말씀을 하실까? 호통을 치실까?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실까? 료켄은 아버지께 부끄러움 없이 이 땅에 서 있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죄의 길을 먼저 떠나신 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선택이 옳다. 부케를 버리자. 아버지께서도 그리 말씀하시겠지. 료켄은 그렇게 생각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창 밖을 한번 보고 라운지를 나갔다. 넓은 집에 찬 공기가 가득 차있다. 리빙 룸으로 들어가 쓰레기통에 부케를 버렸다. 누군가 치워주길 바라면서.

"……"

료켄은 장식장 한 켠의 화병을 들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다시 품에 안은 부케를 화병에 꽂고 최대한 모양을 잡아보았다. 줄기에서 떨어진 꽃은 꽃잎을 떼 작은 유리병에 넣었다. 집중해서 부케를 다듬은 보람이 있게 나름 괜찮은 모양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료켄이 시계를 보았다. 8시가 다 되어간다. 유사쿠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학교에 갈 준비를 하려나.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으려나. 아니, 잊자. 갈아입을 옷을 들고 찬 몸을 덥히기 위해 씻으러 갔다. 료켄은 셔츠를 벗다가 깨달았다. 옷에서 꽃 향기가 난다. 새벽 내내 그렇게 꼭 안고 있었으니 당연하지만 자신에게서 다른 향기가 나는 것이 처음이라 신기했다. 옷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향기롭다.

'나쁘지 않아, 네 냄새.'

료켄의 안에서 어제 유사쿠가 미소 지으며 했던 말이 향기처럼 울렸다. 사랑스러운 유사쿠. 너의 냄새는 이런 향기일까? 다시 유사쿠 생각이 났다. 료켄은 세차게 고개를 저어 유사쿠의 잔향을 날려보냈다. 옷을 바구니에 넣으며 나의 냄새든, 너의 냄새든 결국 샴푸나 바디워시의 향 아닌가- 하고 냉정하게 넘겼다.

료켄이 천천히 씻고 나오니 집 안에 찬 공기는 없었다. 천장의 온도조절기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와 집을 포근하게 덥혔다. 스펙터가 아침 일찍 온 모양이었다. 역시 료켄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스펙터가 따뜻한 아침 차와 빵을 들고 리빙 룸으로 들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료켄님. 자금처리보고서는 정오 즈음 올라올 예정입니다."

"그래. 전뇌 바이러스의 증거자료들은 정리가 다 끝났나?"

"그것들도 오늘 올라올 것입니다."

"좋아, 내일 자이젠 아키라를 만나는 것이 좋겠군."

"네, 그쪽에 메시지를 보내놓겠습니다."

스펙터는 바로 물러나지 않고 료켄의 안색을 살폈다. 료켄은 굳이 스펙터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잠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펙터는 새벽에 구운 스콘입니다. 라고 말하고 나서 물러났다. 부슬비 내리는 아침인데 참 바지런하다. 식사를 하며 태블릿으로 덴 시티의 소식을 살펴보았다. 큰 사건사고 없이 평화롭다. 이 평화는 오래가지 않겠지. 덴 시티가 떠들썩하게 되기까지 보름도 남지 않았다. 료켄은 눈 앞의 부케를 바라보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햇빛은 옅고 부슬비가 내린다. 회색 빛의 하늘 아래에는 자연의 침묵이 놓여졌다. 료켄은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여전히 무겁다.

료켄의 코에 부케의 꽃향기가 희미하게 감돌았다.

**

알림이 울리기 직전 아이가 유사쿠를 깨웠다. 힘들게 몸을 일으킨 유사쿠에게 학교에 갈지 쉴지 아이가 물었다. 상태가 나쁜 편이 아니라 간다고 대답했다. 유사쿠는 밤새 흘린 땀을 씻어내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몸이 춥거나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지만 혹시 몰라 약을 먹기로 했다. 약을 먹는 유사쿠에게 아이가 말했다.

"유사쿠쨩, 오늘은 듀얼디스크 차고 가."

"왜?"

"그냥."

유사쿠는 갸웃거렸지만 아이는 딱히 이유를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드라마 볼 거 아니였어? 묻자 아이는 응. 볼 거야. 짧게 대답하고 교복 겉옷과 가방을 챙겨주었다. 아이가 따라오지 않을 거라면 굳이 찰 이유가 없는데 이유는 모르지만 아이가 원하는 대로 듀얼디스크를 찼다. 최근 링크 브레인즈에 접속할 일이 없어 거의 차고 다니지 않았는데도 듀얼디스크의 착용감은 여전히 익숙했다. 로봇삐를 껴안은 아이가 집을 나서는 유사쿠를 배웅했다.

"다녀오세요, 주인님! (^▽^)/ "

"우산 챙겨가~."

등굣길에 부슬비가 내린다. 공기는 차갑다. 유사쿠의 입에서 희미한 입김이 나왔다. 투명한 싸구려 우산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회색빛이다.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 같은 회색이다. 진하지는 않지만 언제까지고 그곳에 있을 듯한 회색. 아, 그러고 보니 료켄이 자주 입는 재킷이 꼭 저런 회색이었지. 료켄의 등이 떠올랐다. 앞에 료켄의 등이 아른거린다. 유사쿠가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료켄도 멀어졌다. 닿을 수 없다. 유사쿠의 손과 시선이 힘없이 내려갔다. 그래. 닿으면 안돼. 닿으려고 하면 안돼. 우산을 낮게 쓰고 시선을 앞에 두었다. 춥고 쓸쓸한 공기와 함께 학교로 가는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로 들어온 유사쿠는 교실 가장 뒤쪽, 선생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쪽에 앉았다. 늘 앉는 그 자리. 의자가 차갑다. 뒤에서 보는 교실의 풍경은 언제나와 같았다. 넓은 교실의 안 띄엄띄엄 학생들이 모여 수다를 떨거나 가볍게 놀고 있다. 유사쿠는 뒷자리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 모습을 본다. 언제나 그랬듯이.

"안녕, 유사쿠."

"어어. 안녕."

어느새 타케루가 유사쿠의 옆에 앉았다. 타케루는 밝게 웃었다.

"몸은 어때?"

"괜찮아. 약 먹었어."

"다행이다. 그래도 피곤하면 말해, 보건실에 데려다 줄게."

"고마워."

"……"

유사쿠는 타케루를 보지 않아도 그가 망설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나는 괜찮아,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타케루가 먼저 방긋 웃었다. 타케루는 자연스럽게 숙제의 모르는 부분을 물었다. 괜한걸 물어서 안 좋은 생각이 나지 않게 배려해주는 거라는 걸 유사쿠도 알았다. 아직 태블릿 사용이 서툰 그에게 모르는 문제 말고도 여러 가지를 알려 주었다. 타케루는 열심히 유사쿠의 설명을 따라갔다. 그는 가끔 비어있는 자신의 듀얼 디스크를 쳐다보기도 했지만 둘은 최대한 밝게 우정을 나누었다.

"안녕, 후지키군."

"안녕. ……이건?"

"레몬 꿀 절임이야."

수업이 시작하기 전 아오이가 찾아와 인사를 건냈다. 유사쿠 앞에 내려놓은 작은 종이 가방 안에는 예쁘게 포장된 잼 병이 들어있었다. 얇게 썰린 레몬이 진한 꿀 속에 차곡차곡 담겨져 있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미리 만들어 놨던걸 유사쿠가 감기 걸리지 않게 챙겨준 것이었다.

"뜨거운 물에 타서 차로 마셔. 그냥 먹어도 좋고…… 양은 얼마 안 되지만 다같이 먹어."

"이런걸…… 고마워."

"그럼."

아오이도 심플하게 더 묻지 않고 자리로 갔다. 유사쿠는 미소 지었다. 둘 다 고마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료켄은 유사쿠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사쿠는 아직 료켄을 보내지 못했다. 그것을 깨닫고 유사쿠는 약 기운에 몸을 맡긴 채 수업 내내 잠들었다.

꿈에는 료켄이 나왔다. 유사쿠에게 건너 와 준 그때의 료켄이. 작은 료켄은 지금의 료켄이 되어 유사쿠 앞에 서 있다. 둘 사이에는 넓고 깊은 골이 있다.

료켄…… 나는……

눈물이 볼을 적셨다. 몸이 흔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흔들림에 꿈뻑 눈을 뜨자 타케루가 유사쿠를 업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아, 깼어? 교실보다는 보건실에서 자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 미안."

"……"

"나 신경쓰지 말고 더 자."

유사쿠는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눈부시지 않은 햇빛과 규칙적인 타케루의 발소리가 유사쿠를 깊은 잠으로 이끌었다.

료켄은 여전히 저 너머에 있었다.

**

비가 그친 오후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이 많다. 료켄은 자신의 방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어제보다 잔잔해졌다. 눈부시지 않은 햇살 덕에 보고서를 계속 검토하던 눈의 피로가 조금씩 풀려간다. 우득우득 스트레칭으로 굳은 몸을 풀자 그제야 배가 고파왔다. 스펙터가 점심으로 미리 준비해준 샌드위치와 커피에 손이 갔다. 커피는 차갑고 샌드위치는 빵이 말랐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늘 있는 일이라 그조차 익숙한 맛이었다. 차가운 커피로 입가심을 하자 휴식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이를 닦고 잠시 쉬기로 하였다. 오늘 할 일이 많이 남지 않아 여유가 있었다. 최대한 유사쿠와 관련된 생각을 하지 않으면 휴식이 되겠지. 료켄은 그렇게 또 유사쿠 생각을 해버렸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할 수록 신경이 쓰이고 괜히 불쑥불쑥 떠올랐다. 치약의 민트 향이 료켄의 호흡을 상쾌하게 바꾸었지만 뇌가 상쾌하지 않다. 자꾸 유사쿠가 생각나서 지끈지끈 거릴 지경이었다. 삣. 옆에 놓아둔 듀얼디스크에서 알람이 울렸다. 자연스럽게 착용하고 알람을 확인했다.

"판도르냐."

"안녕하십니까, 료켄님."

인간의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오라며 자유롭게 놓아두었던 판도르가 료켄의 듀얼디스크로 찾아왔다. 판도르가 우아하게 인사했다. 다시 돌아올 기간을 정해 둔 것은 아니지만 료켄의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료켄이 물었다.

"그래. 모험의 성과는 어땠지?"

"인간이란 역시 참으로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바와 달리 스스로의 변화가 빨리 찾아오는 듯 합니다."

"흠."

인간의 시시비비에 관한 것은 지금 판도르가 중점을 둘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료켄은 판도르의 대답에 만족했다.

"뭐, 그렇지. 인간이란 그렇게 복잡하고 이율배반적이지."

"네. 저는 그것을 지금 료켄님을 보며 다시 느끼고 있습니다."

이 대답은 예상 외였다. 하지만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였다. 료켄은 말하지 않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판도르는 신경쓰지 않고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에게서 대략적인 상황을 들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부탁을 받아 제 예정보다 일찍 료켄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둠의 이그니스가…… 무슨 부탁이지?"

"료켄님께서 후지키 유사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달라는 부탁입니다."

"……쓸데없는 참견이다. 무시해."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이름을 듣는 것 만으로도 료켄님에게서 슬픔과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답지 않게 말문이 막혔다. 유사쿠…… 유사쿠가 다시 생각나고 그만큼 가슴이 떨렸다. 한숨이 나왔다. 이번에도 그런 료켄을 판도르는 개의치 않았다.

"료켄님. 후지키 유사쿠는 료켄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럼 됐어."

"아쉬움이 감지됩니다."

"녀석에게 전해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너도 마찬가지다."

"저는 아이의 부탁도 있지만 료켄님을 위해 왔습니다."

판도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를 위해? 네가 지금의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료켄은 말로 하지 않았지만 그런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판도르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럼 어째서 물러나지 않는 거냐."

"료켄님께서 망설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수하기로 결심했다. 망설이지 않아."

"네, 그 결심은 매우 굳셉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후지키 유사쿠에 대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료켄은 힘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정확해서 소름이 돋는군. 판도르가 후후 웃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 편하게 앉고 판도르에게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유사쿠의 청혼이 사실은 기뻤다는 것, 거절하면서 마음이 아팠다는 것, 유사쿠가 무척 사랑스럽다는 것, 그만큼 유사쿠를 사랑하면 안 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사랑과 현실이 쥐어짜는 피를 토할 듯한 괴로움, 함께 도망가고 싶지만 결국 자수를 선택해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것 등등. 판도르는 진지하게 들으며 료켄을 관찰했다.

"정말…… 고백하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사랑이 느껴집니다."

"인간들에게는 때로 고백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때가 있어."

"후지키 유사쿠를 위한 결정이시겠지요. 사랑을 고백하면 그녀가 포기하지 못 하고 평생 괴로워 할까봐."

"그래, 맞는 분석이다. 그리고 동료들과 아버지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다."

"료켄님."

판도르가 망설인다. 한층 더 생각하는 판도르를 기다렸다. 료켄이 예상했던 것 보다 오래 고심한다. 말해도 될지 어떨지 고민이 될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지만…… 판도르가 중얼거렸다. 아마 양날의 검 같은 말을 하려는 것 같다. 료켄은 말해 보라며 고개를 까닥였다.

"AI는 인간과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 제가 말할 것이 두 분과 인간 사회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흠."

"저는 두 가지를 제안하려 합니다. 우선 료켄님께서 후지키 유사쿠에게 솔직해지시는 건 어떨까요?"

"이미 솔직하다만."

"후훗."

"……아까도 말했지만, 고백하지 않는 것이 맞는 선택이다."

"저와 아이의 계산으로는, '맞는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료켄은 반문하지 않았다. 판도르가 계속 말하게 두었다.

"료켄님 당신을 위해서라도 솔직하게 사랑에 관해 대화해 보시길. 두 분이 '운명'이라면 분명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글쎄. 우리는 그런 운명으로 이어 진 것이 아닐 텐데, 로맨스 소설같은 이야기를 하는군."

"그런가요? 이런 것도 결국은 로맨스 아닐까요?"

햇빛 한 줄기가 료켄의 방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햇빛이 료켄의 눈에 들었다. 날이 개기 시작한다. 하늘 저 너머에서 햇빛이 구름 사이로 마치 레이스 커튼처럼 넓고 부드럽게 펼쳐졌다.

**

유사쿠는 학교가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덴 시티를 한참 거닐었다. 한쪽 손에는 쿠사나기가 타준 레몬차를 들고 서늘한 가을의 바람을 맞으며 발이 가는 데로 걸었다.

'오늘은 도와주지 않아도 돼.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

일도 돕고 아오이가 준 레몬 절임을 맡길 겸 카페 나기에 들렸더니 쿠사나기가 차를 타주며 유사쿠를 보냈지만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리고 따뜻하고 상큼달달한 레몬차와 가을바람의 조합이 썩 괜찮았다. 많이 자서 굳은 몸이 풀리는 느낌이라 걷는 것도 좋았다. 오랫동안 걸어도 유사쿠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마음과 생각이 몸과 따로 노는 것을 빼면. 꿈에서는 끝끝내 닿지 않는 료켄이 나왔고 지금 유사쿠의 머릿속에도 료켄이 가득했다. 가끔 시큼하게 씹히는 레몬의 과육 때문에 생각이 끊기지만 료켄은 여전히 유사쿠의 안에 있다. 그를 놓아야 하는데 유사쿠는 그러기가 몹시 힘들었다. 포기를 결심했어도 어떻게 포기해야 할지 몰랐다. 이렇게 다 마신 테이크아웃 컵을 버리듯이 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애당초 인간관계가 거의 없던 유사쿠는 자신과 이어져있는 타인을 끊어버리려는 것이 처음이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렇게 넘겨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과연……?'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다.

과연 나는 료켄을 잊을 수 있을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갈매기가 유사쿠의 바로 옆을 날았다. 심상에 빠져있다 갑자기 나타난 갈매기에 유사쿠는 깜짝 놀랐다. 갈매기? 유사쿠는 어느새 바다까지 와있었다. 가끔 쿠사나기가 가게를 여는 바로 그곳에. 스타더스트 로드, 그리고 료켄의 집. 유사쿠는 저 멀리 료켄의 집을 바라보았다. 그제와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여기 오면 안돼. 입을 꾹 닫고 발걸음을 돌렸지만 아까까지와 다르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료켄의 집에서 멀어질 수 없었다. 잔잔한 바다의 소리가 유사쿠의 마음을 쓰다듬었다. 어제의 거친 바다와는 놀랍도록 다른 바다. 여전히 파도가 높긴 하지만 사납지 않다. 물색이 탁하지 않다. 유사쿠는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역시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아이."

듀얼디스크로 아이가 찾아왔다. 아이는 날씨 괜찮네- 만 말하고 말하지 않았다. 늘 종알종알 뭐든 이야기하는 아이가 조용해지니 유사쿠는 오히려 불안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도 유사쿠를 쳐다보았다. 둘이 눈을 맞추고 서로를 살폈다.

"에휴~ 멋있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이거 은근 어렵구만."

"무슨 이야기. 괜한 소리 하지마. 그냥 입 다물어."

"너무하네, 유사쿠쨩."

성큼성큼 솔티스가 다가와 유사쿠 옆에 앉았다. 집에 있던 기체다. 아이가 그쪽으로 옮겨갔다. 아이는 유사쿠를 더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해변의 난간에 기댔다. 난간이 높지 않아 위험하다고 유사쿠가 말했다. 그럼 다른걸 가져오면 돼~ 아이는 가볍게 말했다. 곧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유사쿠를 바라보았다.

"있잖아, 유사쿠."

"왜."

"너는 료켄이랑 이루어지지 않아도 만족해?"

유사쿠는 괜한 소리에 대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이도 유사쿠가 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를 구원하고 네가 10년 동안 찾아다니던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간단히 잊을 수 있어?"

"……"

"결혼하자고 생각한 상대를 그렇게 간단히 잊을 수 있어?"

"불가능한 건 아냐."

"남들은 몰라도 넌 못할걸."

유사쿠는 화가 났다. 아이의 말을 무시 할 수 없었다. 너무 맞는 말이라.

"단념할 수 있느냐 못 하느냐가 아니야. 해야 해."

"왜? 료켄이 거부하니까? 료켄이 멀리 떠나니까?"

"그래."

"그렇다고 네가 포기를 하다니, 난 이번에 솔직히 실망했어."

이제 유사쿠는 아이를 노려보았다. 아이는 유사쿠의 서리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아이는 스스로 지금 두 가지 의미로 맞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던 플레이메이커가 이렇게 쉽게 사랑을 포기하다니, 글쎄."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야. 료켄이 거부하니까, 나는,"

"료켄이 왜 거부하는지 그것도 못 알아채는 것에도 실망포인트 적립이야."

"나는 피해자니까…… 당연해…"

"음음, 그래, 맞는 말이네. 그것도 맞대.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

"뭔데."

"그러니까 그걸 못 알아채고 있다니까, 그 플레이메이커가."

아이는 자꾸 말을 돌렸다. 찌를 곳은 찌르면서 핵심은 피한다. 유사쿠는 우선 생각했다. 아이는 어떤 지점으로 유사쿠를 유도하고 있다. 여기서 아이가 괜한 말이나 틀린 말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료켄이 거부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 료켄과 얽힌 이틀을 되짚어보았다. 천천히, 자세히, 기억 속의 료켄을 살폈다. 점점 료켄이 거칠게 밀어낸 순간이 다가온다. 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네가 그러면 나는 널 밀어낼 수 없어!!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내 운명에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너와 함께 운명에서 도망가고 싶어……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돼, 나는 그러면 안돼…!'

너와 함께 운명에서 도망가고 싶어……

마음을 고백한 순간의 료켄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아.

별빛처럼 반짝하고 끊어져 있던 서킷이 이어졌다. 햇볕으로 덥혀진 따뜻한 공기가 유사쿠를 감쌌다. 빛이 깃든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진 서킷은 지금 이 순간 유사쿠에게 힘이 되지 못한다. 료켄이 자수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는. 다른 더한 괴로움이 유사쿠를 엄습했다.

"그래도…… 내 짝사랑이 아니라도, 포기 해야 해. 료켄은, 료켄은……"

유사쿠는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아이는 유사쿠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바다 앞으로 데려왔다. 힘 없이 따라온 유사쿠에게 바다 바람이 불었다. 아이는 유사쿠의 손을 양 손으로 잡았다.

"정말 네가 포기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을까?"

"없어……"

"포기하게, 플레이메이커? 서렌더야?"

유사쿠는 우물우물 입을 움직였지만 결국 서렌더 선언을 하지 못 했다. 과연 나는 료켄을 잊을 수 있을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료켄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괴로움의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아이가 유사쿠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나는 네가 바라는 것을 이루었으면 좋겠어. 그 '료켄과 새로운 미래를 잡는다'는 바람 말이야."

"어떻게…?"

"글쎄. 그건 내가 제시할 것이 아냐. 있잖아, 지금 내 몸은 솔티스라 편리한 기능이 엄청 많아."

이번에는 유사쿠의 어깨를 잡고 료켄의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새하얀 료켄의 집이 유사쿠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눈도 엄~청 좋거든. 저기, 저 창문에서 료켄이 널 바라보고 있어."

당연히 유사쿠의 눈으로는 저 먼 곳의 빛나는 유리창 속 실루엣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료켄에게 가봐. '바람'을 붙잡아, 유사쿠."

따뜻한 햇볕과 바다 바람을 타고, 유사쿠는 료켄의 집으로 달려갔다. 마지막 마음을 전하기 위해.

**

료켄은 유사쿠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너희들의 제안인가."

"그렇습니다. 어떠신가요?"

"터무니 없군…… 결정은 우리가 한다. 판도르, 정문을 열어라."

료켄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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