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 그 후의 이야기
모든 것이 막을 내리고 나면
산들바람에 나뭇잎이 슥슥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따사로운 햇빛은 부드럽게 호수 표면으로 내려앉아 잔물결과 함께 일렁였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어느 봄날이었다.
호숫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둔덕 위 웅장한 목조 저택이 풍채를 자랑했다. 지은 지 꽤 되어 군데군데 오래된 티가 났지만 그 위엄마저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저택 한가운데에서 짙은 고동색 문이 열리더니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용케도 호숫가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빛줄기가 자글자글한 주름살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나무 아래 낡아빠진 의자에 주저앉았다. 영 건강치 못한 관절 탓에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몸엔 잿빛 갑옷이, 그의 손엔 길고 단단한 검이 쥐어져 있었다. 주위는 온통 불바다였고, 난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어떤 장대한 모험이라 할지라도 결국 끝나기 마련. 평생을 함께하자 맹세했던 친우들은 용을 죽인 후 각자의 인생을 위해 저마다의 길을 갔다.
노인은 잠자코 옛 추억을 회상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어느새 주변 풍경이 빠르게 변해갔다.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평범한 청년이었던 시절, 누군가로부터 예언을 받아 앞으로의 험난한 일은 꿈에도 모른 채로 희망을 안고 향했던 왕국의 수도, 동료들과의 첫 만남과 다툼, 그리고 결국 다시 힘을 합쳐 용을 쓰러뜨리고 모든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던 일까지. 인생의 커다란 사건들이 스쳐가듯 머릿속을 채우고 다시 흩어지길 반복했다.
기억 속을 여행하던 그는 이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직 아무런 고통도 희생도 벌어지지 않았던 때의 추억이었다. 동료들은 정확히 이 자리, 이 호숫가에서 햇살을 맞으며 서로 장난을 치곤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흐릿했던 과거의 인상은 점점 생생해져 마침내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듯했다.
-야! 내가 물 튀기지 말라고 했지!
-그렇게 매번 화만 내니까 네가 항상 더워하는 거야~ 이 기회에 물이나 묻혀서 머리 좀 식혀 보라고! 또 간다!
한 여자가 호숫가에 발을 담근 채 걸어가고 있는 남자에게 물을 뿌렸다. 남자가 신경질을 내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곤 오히려 물을 더 많이 뿌려댔다. 참다 못하고 남자가 멀리 떨어진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이봐 리암! 앨버! 너희들도 그늘에서 보지만 말고 이 자식 좀 말려봐! 아, 야!
-하하하하! 복수하고 싶으면 너도 들어오든가!
또 물을 튀긴 여자가 양손 가득 물을 담고선 다시 남자를 똑바로 보았다.
-설마 그걸 다, 야, 아니, 잠깐만, 잠깐··· 야!!
-하하하!
결국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성큼성큼 물에 들어가는 남자를 보며 리암이 쿡쿡 웃어댔다.
-아··· 정말 재미있는 녀석들이라니까. 그나저나 앨버, 넌 정말 물에 안 들어갈 거야? 나야 원래 물이랑은 잘 안 맞는다지만 넌 아니잖아. 계속 여기 있어도 되겠어?
용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가끔은 멀찍이서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법이지.
리암은 고개를 돌려 다시 손에 들고 있던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평화로운 하루였다. 햇빛이 쏟아지니 슬슬 졸음이 왔다. 용사는 잠시 눈을 붙였다.
-이봐, 이봐. 노을이 지고 있어. 일어날 때야. 아샤와 멜도 갈 준비를 모두 마쳤어.
용사는 끔벅 눈을 떴다. 정말 수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마지막 빛을 내뿜으며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자, 가자고.
리암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용사는 그 손을 맞잡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낮에 장난을 쳤던 두 사람이 장난스레 웃으며 그를 응시했다.
노인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과거의 추억은 그를 감싸는 햇볕만큼이나 눈부셨다. 이젠 그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갈 차례였다. 용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 그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참으로 평온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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