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엔 그르니에

인간의 독해 (下)

자캐 "루시엔 그르니에" 개인작

열람하기에 앞서: 이 연대기는 19세기의 인물을 서술자로 설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시대적 한계가 존재, 에이젠더 캐릭터인 루시엔 그르니에가 반복적으로 남성으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또한 살인 등의 반인륜적 행위가 가벼운 어조로 묘사되어 있으니 열람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저자는 서술자 및 등장인물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고증이 불충분합니다.

모티브가 된 도서: 이방인 (알베르 카뮈 작)

인간의 독해

w. 펌블

공판은 이른 아침에 시작되어 종일토록 이어질 전망이었다.

파리 시민들이 이토록 한 사건에 뜨거운 관심을 보낸 적이 있던가? 법정은 청중으로 들끓었다. 헌병들이 늦게 도착한 사람들을 해산시키느라 애를 먹을 정도였다. 나는 삼 열에 착석했다. 앞줄에선 수염이 희게 센 성직자가 연신 십자성호를 그으며 중얼대는 중이었고, 양옆과 뒷줄에는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부인네들이 무어라 수군덕거리고 있었다.

어떤 노인은 피고를 ‘루스’라고 부르며 그의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와이셔츠를 반바지 안으로 넣어 입고 다녔는데,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이는, 굉장한 비밀을 공유하는 듯한 목소리로, 루시엔 그르니에가 아내에게 줄 타르트를 사기 위해 디저트 가게에 줄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가벼운 탄식이 청중을 훑고 지나갔다. 몇몇 의사는 그의 안색을 미루어 볼 때 ‘결핵 환자일 가능성이 높다’며 준엄한 판결을 내렸다. 증언과 추측과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든 자신과 이 사태의 연관성을 증명하려 혈안이 된 이 광경이 나에겐 참으로 기이하게 다가왔다. 저들은 앵무새나 다를 게 없었다. 하나같이 재잘대고들 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지조차 모른다! 르콩트 베를렌의 오랜 벗조차 침묵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순간 어떤 냉담한 감흥, 빈정거리고 싶은 욕구를 느꼈으나 참는 데 성공했다.

문제의 피고가 법정에 들어서자 소란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헌병은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루시엔 그르니에의 수갑을 벗겨 주었다. 그는 손목을 문지르더니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말쑥한 법복 차림의 변호사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루시엔은 그와 손을 맞잡고 머리를 가까이 했다. 짤막한 대화 후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자들이 펜을 놀리는 소리와 배심원석에 앉은 늙은 노인의 잔기침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심 루시엔 그르니에가 내 쪽을 한 번은 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재판은 그럴 틈을 주지 않고 속행되었다. 벨 소리가 울리고 세 명의 판사가 들어섰다. 검은 법복의 젊은 판사는 지옥의 불길도 얼어붙게 만들 차가운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거의 적대적이게 느껴지는 태도로 소란은 용인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뒤이어 붉은 법복의 재판장이 자리에 앉더니 루시엔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젊은 살인자와 면식이 있는 눈치였다. 그는 침묵 끝에 증인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증인은 셀레스트였다. 증인석으로 오르는 사내의 풍채 좋은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선서를 마치고 손을 내리기가 무섭게 검사로부터 혹독한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가엾은 셀레스트! 그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는 얼굴로 ‘그렇다, 분명 다섯 번의 총성이 울린 후 그르니에 씨가 방에서 나왔으나 공포에 질린 기색은 아니었다’고 답했다. 검사는 만족한 얼굴을 했다. 변호사는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서더니 그렇다면 그가 평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냐고 물었다. 셀레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베, 베를렌 씨보다야 훨씬 좋은 분이었습니다….” 하더니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변호사는 당황한 기색 없이 루시엔이 그간 낸 부조금의 액수와 빈도를 증거로 제출했다.

모두의 기대와 다르게 지지부진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증언 속에서 루시엔은 수줍은 청년이기도 했다가, 비인간적인 아이였다가, 배려심 깊은 상사가 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겉도는 부적응자로 탈바꿈하는 일도 있었다. 주목할 만한 증인이라곤 르콩트 베를렌의 아내 뿐이었다.

여인의 체구는 작았다. 부인은 두 아들이 각각 네 살, 여섯 살이라고 밝혔다. 아이들의 체구에 맞는 상복이 없어 증인석으로 향하는 내내 바짓단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죽은 남편의 이름 앞에 달려있는 부채가 많아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고, 재산은 처분하고 있으며, 모든 걸 처리하고 나면 클레르몽페랑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생계를 꾸릴 계획이라 말하는 목소리는 조금밖에 떨리지 않았다. 나는 죽은 벗의 아내가 보여주는 꼿꼿함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 바로 뒤에 앉은 노파가 끌끌 혀를 차며 이렇게 말한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런 상황에 눈물도 비치지 않다니, 참 독하지.”

휴정과 재개가 반복되면서 모두가 지쳐갔다. 장내와 장외의 공기가 잘 순환되지 않는 탓이었다. 진실은 명백한 형태 없이 모두의 손아귀 밖을 맴돌았으나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게 느껴졌다. 그저 모두가 만족할 만한 명료한 결론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공판을 파하고 하루를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껏 맡은 재판의 팔 할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변호사만이 놀라울 정도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피고가 얼마나 반듯하고, 아내가 있으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신사인지 역설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탄식을 토했다. 그런 말은 루시엔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 중 누구의 얼굴로도 나타날 수 있는 악(惡)이란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루시엔 그르니에가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명백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파리의 시민들은 평소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것이다.

르콩트 베를렌의 놀라운 통찰을 빌리자면: ‘목을 잘라버리고 난 뒤엔, 우리를 불편하게 했던 것들이 실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양쪽 눈에 총알 두 발, 이마 정중앙에 한 발을 맞고 작고함으로써 자신의 어록을 입증했다.)

날은 서서히 기울었고, 증인들은 차츰 뜸해졌다. 재판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루시엔 그르니에의 주치의가 알제리 여행을 떠나 출석이 어렵다는 소식이 지나갔다. 침묵이 흘렀다. 변호사는 어색한 태도로 루시엔의 아내를 향해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프랑신은 침묵 속에서 고개를 저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뒷자리의 노파만이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모름지기 남편의 비애를 맞닥뜨린 아내라면 저런 자세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노파를 이해하길 포기했다.

그 순간 루시엔 그르니에가 움직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미동조차 없었던 그는 무서운 속도로 고개를 돌리더니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은 생전 처음 보았다. 깊은 안와 속에서 타오르는 검푸른 불길은 절망이나 분노 따위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도리어 오랜 연구의 끝을 앞둔 학자와 같은 환한 집념이 가면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가 함께 산책한 거리, 머리를 맞댄 채 바라본 하늘, 수없이 많은 낭만의 밤. 그런 갖은 추억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날 이해하지 않기로 한 건가?’

프랑신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기껍게 미소했다.

루시엔이 보인 갑작스런 움직임은 또다른 효과를 가졌다. 여태 당사자의 발언 한 번 없이 그의 운명을 처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법정의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재판장은 불안한 낯으로 헛기침을 하더니 루시엔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피고, 범행을 저지르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루시엔은 어느덧 웃지 않고 있었다.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나는 그 행동이 생각을 정리할 때 나오는 습관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으나 발언권이 없었다. 재판장은 재차 질문했다. 블라인드 너머에서 작열하던 태양이 흐린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청중과 검사와 변호사 모두 그를 뚫어져라 주목하고 있었다. 법정에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루시엔 그르니에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두 손을 가슴께까지 들어올렸다. “지병을,” 푹 잠긴 목소리가 흐릿하게 떨렸다. “앓고 있습니다.” 나는 왜 주치의가 참석을 거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것은 1인극이다. 루시엔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피를 찾아 손바닥을 더듬더듬 훑었다. 기이하게도 그의 고통에선 진실성이 엿보였다. 거짓 증언이 생살을 베어내고 있는 것마냥. 그는 마침내 눈을 감더니 피를 뱉듯 덧붙였다. “어머니 쪽 친척들 중에서 이런 짓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는 건 들었습니다. 조절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근래에 극심한 우울을 앓아서…. 순간 착란을 일으켰는지, 발포한 순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죄 많은 영혼이 신 앞에 사죄합니다.

마지막 문장이 혀 끝에서 떨어지자 모든 것이- 정말 모든 게 변화했다. 사람들의 얼굴 위로 놀람과 기쁨의 물결이 번져갔다! 집단적인 안도감이 어찌나 큰지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루시엔 그르니에는 인간이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엾고 초라한 악이다!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그러니 사형 선고까진 필요하지 않노라고.

그 때에 피해자의 아내는 그만 오래 참아온 울음을 터뜨렸다. 루시엔이 죽지 않으리란 사실을 한 발 앞서 짐작한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루시엔 그르니에는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3만 프랑의 보석금을 지불한 후 풀려났다. 일흔 번의 채찍질 이후 국외추방 예정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짤막하게 실렸다. 베를렌 부인은 집을 처분하고 두 아들과 함께 클레르몽페랑으로 내려갔다. 프랑신 그르니에는 남편의 회사 지분을 비롯한 전재산을 넘겨받은 뒤 두 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일단락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 르콩트 베를렌의 죽음은 여전한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이 내가 수소문 끝에 알아낸 그의 출소일에 감옥 밖에 서있었던 이유다.

금장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절뚝 걸어나오던 루시엔은 나를 발견하더니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입가에 미소를 띄운 것은 덤이었다. “항구까지 배웅해 주러 오신 겁니까?” 그의 음성에서 간신히 억눌러진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주저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군요. 실례지만 성함이 뭐였죠?”

“조르주 포르입니다.”

“네, 조르주. 마차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저는 그동안 좀 쉬고 있겠습니다. 이거야 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어렸을 때 회초리도 좀 맞아두는 건데요. 채찍질 당한 곳이 스치기만 해도 죽을 것 같군요.” 그는 나를 향해 짐가방을 건네주더니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눈을 감았다. 잇새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당당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시키는 대로 지나가던 마차를 불러세우고 짐을 실었다.

그는 나의 부축에 의지해 마차를 타더니 뒷자리에 엎드러졌다. “등이 아픕니다,” 칭얼대는 투였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제가 르콩트의 친구란 건 기억하고 계시나요?”

“오, 물론이죠.”

“당신에게 보복하러 왔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보복. 보복이라! 할 수도 있겠죠.” 그는 고개를 슬며시 옆으로 틀어 나를 보았다. “왜요, 죽이시려고요?”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이 설명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안 할 겁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병자가 낼 법한 소리가 간간이 이어졌다.

날이 참 좋았다. 말 두 필이 이끄는 마차는 경쾌하게 덜컹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그 다음엔 눈부신 바다가 창밖으로 펼쳐질 것이다. 나는 그의 핏기 없이 움푹 꺼진 뺨이며 소년같은 이목구비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입을 열었는데, 그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르니에 씨, 이 일은 당신과 저 사이의 비밀로 남겨둡시다. 법정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저를 신뢰해도 된다는 걸 아시겠지요. 그래, 앞으로 몇 명이나 죽일 겁니까?”

루시엔 그르니에는 눈을 떴다. 피로에 절은 검푸른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비탈길의 꼭대기에 접어든 마차가 기우뚱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는 당신은 앞으로 몇 명이나 죽일 겁니까?”

“저요? 저… 저는… 그르니에 씨, 저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당신과는 달라요.”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죠.” 루시엔 그르니에의 눈빛이 맑아졌다. 그가 짓궂은 기색 없이 몹시 진지했으므로 나 또한 진지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자, 그는 느리지만 또렷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경험은 실체의 소산입니다. 확실히 무엇이 있다고 고하지만, 그것 외의 딴것이어야 한다고 고하진 않습니다. 제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문장에서 도출할 수 있는 진실은 제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뿐입니다. 제가 앞으로도 살인을 저지를 사람인지는 저조차도 알 수 없어요…. 보십시오, 조르주. 살인자는 모든 문제를 살인으로 해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한숨. 그리고, “당신네들은 과하게 성급한 감이 있다니까요. 저도 그리 잘난 인간은 되지 못하지만은.”

나는 한동안 생각을 집중해 그의 장광설을 곱씹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항구 앞 붐비는 거리로 진입했다. 루시엔 그르니에는 몸을 일으켰고, 나는 마부에게 소리쳐 마차를 멈춰세운 뒤 짐을 내리는 것을 도왔다. 거대한 선박은 몸체에서 증기를 풀풀 내뿜으며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엔은 선장과 아는 사이인지 가벼운 악수를 나누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까지군요,” 그가 말했다.

“네,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조르주 포르.” 루시엔은 다시 한 번 나의 이름을 발음했고, 나는 그가 이번엔 내 이름을 얼마나 오래 기억할지 궁금해졌으나 묻지 않았다. 기적 소리가 울렸다. 마음씨 좋은 선원의 부축에 의지해 배에 오르던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젊은 추방자의 눈이 활기 넘치는 르아브르를, 사람들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고국 땅 위를 천천히 더듬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해말간 미소가 번졌다. 그는 검지와 중지에 입을 맞추더니 팔을 일직선으로 펼쳐 작별을 고했다.

“친애하는 동료 시민들이여, 부디 엿이나 처먹으시길!”

항구 위로 뻗어나가는 상쾌한 목소리. 선장은 당황한 얼굴을 했고, 나는 놀라지 않았다. 다소 극적이었던 커튼콜을 마지막으로 그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선박은 영국을 향해 나아갔다. 늘 그랬듯- 평온하게 흔들리면서.


이 회고록을 읽는 독자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루시엔 그르니에는 죽었다. 그가 영국에서 맞이한 결말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르콩트 베를렌의 죽음보다도 더한 난제로 우리에게 남았다.

도착 직후 흉흉한 소문이 따라다니던 것과 별개로 그의 마지막은 자애로 장식되었다. 어쩌면 젊은 살인자가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낸 다음 회개했을지도 모르겠다. 날숨이 마지막 불협화음을 낼 무렵 돌아온 탕아의 역할을 자처하기로 했다면, 그것은 비판받을 여지는 있을지언정 수수께끼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살인- 두 번째이자 최후의 살인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5년 전, 루시엔 그르니에는 고국으로 편지를 한 통 썼다고 알려져 있다. 수신인은 그의 아내였다. 편지의 내용은 단출했다. ‘언제나 관대했던 나의 프랑신, 염치없을지 모르나 이것은 나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자선 사업을 하고자 하니 부디 자금을 변통해주기를. 마음이 허용하는 데까지 부탁드립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프랑신은 별다른 답장 없이 넉넉한 액수의 금액을 부쳐주었고, 루시엔은 그 돈을 모조리 쏟아부어 고아원을 설립했다. 갈 곳 없는 아이들, 특히 아일랜드 출신의 아이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루시엔이 직접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잘 없었다. 나이 든 수녀들이 그의 몫을 대신했고, 설립자 본인은 건물의 앞마당이나 쓸면서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유일하게 엄격한 면이 있다면 아이들의 후견인을 선별할 때였다. 19세기라는 문명의 고점에 도달했음에도 우리 사회에 어둠이 남아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렇기에 사라진다 한들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는 아이라면 쉽게 범죄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날 찾아온 중년인 역시 상습적으로 후견 제도를 악용했던 자였다. 시설에서 한 아이의 입양을 두고 가벼운 말다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는 집에 가는 길에 실종되었다.

런던 경찰청은 수색 끝에 교회의 종탑에서 두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머리뼈가 완전히 으스러져 있어 신원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렸으나, 늘상 입던 옷이었기에 수녀들이 확인해줄 수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루시엔 그르니에였고 다른 하나는 그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밧줄로 사지를 결박당한 채였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었다. 그에 반해 루시엔에게선 어떠한 저항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중년인 옆에 반듯이 누운 채로, 새벽을 알리는 거대한 종이 자신의 머리를 바수어 놓기만을 기다린 것 같다고…. 부검의는 그렇게 진술했다. 말인 즉슨 이것은 살인 사건이었다.

무슨 이유였을까? 독자들이여, 이 일이 어떻게 프랑스와 영국 간의 외교 갈등으로 번졌는지, 또 루시엔의 장례식에 나타났다는 무명의 여류 작가는 누구였는지 등의 문제는 제쳐두고 생각해보라. 살인을 저지르고 쾌락을 좇던 이가 무슨 경위로 오 년간 절제된 자애의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그가 회개했다면 어떤 까닭에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극적인 서술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가 회개했으나 살인자의 본성을 저버릴 수 없었고 결국 또다른 악과 공멸하길 택했다고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을 위한 살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한 내가 본 루시엔 그르니에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도리어 수수께끼로 남기 위해 그런 짓을 벌였다면 모를까.

최후의 순간 그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눈앞에 그린듯이 선하다. 그는 중년인을 넘어뜨린 뒤 주먹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구타한다. 그러나 그의 숨은 아직 붙어있다. 루시엔 그르니에는 밭은 숨을 헐떡이며 피떡이 된 희생자를 종탑으로 끌고간다. 움직이지 못하게 묶은 뒤 종 바로 아래에 내려놓는다. 그 또한 자세를 반듯이 하고 곁에 눕는다. 코가 금속에 스칠 듯이 가깝다. 이제 안개가 걷히고 해가 떠오르면 종이 울릴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진동 에너지를 빨아들인 두 사람의 머리통은 사과처럼 으스러지리라. 아, 죽음이 지척에 가깝다. 기다리는 동안 중년인은 점점 공포에 질리고 루시엔은 실없는 이야기를 한다. 경험과 지식과 진리에 대해, 인간 본질의 한계에 대해.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그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그리고-

뎅, 종소리와 함께 그의 실체는 경험의 집합으로 고정된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추측이 다른 추측들보다 못할 건 없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루시엔 그르니에의 언급 자체를 피한다고 들었다. 그를 이해할 수 없어서 불편한가? 그의 삶이 모순덩어리로만 느껴지고, 나에겐 찾아올 리 없는 무정한 광기로 치부해 잊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삶에서 당최 무엇이 그리도 견디기 어려운 것일까.

한 젊은 살인자의 초상에 찰나의 서정을 덧씌우며.

어느 4월 7일의 저녁, 조르주 포르 쓰다.

1) 『순수이성비판』, 임마누엘 칸트, 박영사

2) 『지옥에서 보낸 한철』, 아르튀르 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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