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탈출 단편 연성

9월이 끝나면

날 깨워주세요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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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 아래에 삽입된 노래를 들으며 쓴 글입니다. 들으면서 글을 읽으셔도 좋고, 안 그려셔도 무방합니다.


오늘은 8월의 마지막 날이다. 식탁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탁상달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입에 대지도 않은 물컵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달력을 집어 들어 다 지나간 8월을 찬찬히 살핀다. 그러고는 페이지를 넘긴다. 한 번 더 넘긴다. 10월 달력을 내려놓는다.

내게 9월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9월을 기피한 것은 아니었다.

2018년 여름에 발생한 그 사건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악령감옥을 탈출한 뒤로 오랫동안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살아갔다고 얘기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죽지 못해 존재하는, 의미 없이 삶을 연명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듯했다.

동료들을 죽이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그 죄책감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빙의된 상태였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천해명이 저지른 살인이었다는 건 뇌리에 남지 못했다. 누가 뭐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내가 그들을 죽였다는 것. 내 손이 그들의 피로 물들였다는 것. 그리고 나 홀로 뻔뻔하게 살아남았다는 것뿐이었다. 

악령감옥에서의 기억은 희미했다. 머릿속에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모든 게 흐릿하고 불확실했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눈을 뜨자마자 빠른 속도로 아득해지는 악몽처럼. 이전까지의 모든 디테일은 사라지고 끔찍했던 마지막 장면만 남아 눈앞을 맴도는 것처럼. 그곳에 있었던 두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빙의된 상태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나 스스로가 그 기억을 묻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뭐가 진실이었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악몽보다 끔찍한 현실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세상을 피해 집에 틀어박혔다. 어둠 속에, 그림자 속에 숨어 몸을 웅크렸다. 

악령감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같이 있었던 다른 출연진들은 어떻게 된 건지 캐내려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잠시만 시간을 내달라고 소리치며 문을 두드렸다. 열어주지 않았다. 커튼을 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귀를 틀어막고 홀로 중얼거렸다. 끝없이 울리는 저 도어벨이 들리지 않는다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거짓말을 못 하는 편인데, 사람들 앞에 서서 입을 열면 내가 저지른 모든 게 까발려질 것 같았다. 두려웠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며 내 아픔은 한낮 유희 거리로 전락할까 봐. 온 세상이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이 내가 저지른 게 맞다고 단정 지으며 손가락질할까 봐. 그게 진실이 돼버릴까 봐.

현관문을 통과할 정도로 각별한 이들 역시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몰골이 말이 아닌데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다른 출연진들을 어떻게 됐냐고. 다른 점이라면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며 물어본다는 거였다. 질문 하나하나가 어떤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 잘못 던진 물음 하나에 내가 맞고 그대로 바스러질까 봐 걱정이라도 되듯이. 가끔은 알고 싶지 않은 뉴스를 전해주기도 했다. 수사에 진척이 있는지, 실종자 수색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대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부질없는 시도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응하지 않았다. 내 입이 열리길 고대하던 사람들도 긴 침묵에 지쳐 한숨을 쉬며 떠났다. 그 뒤로 찾아오는 사람이 차츰 줄어들었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나에게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했다.

빛이 한점 들어오지 못하게 늘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있었으니 낮과 밤의 경계선이 모호했고, 집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으니 계절이 변하는지도 몰랐다. 오랫동안 그러했다.

어느 날 무턱대고 집을 나서게 된 특별한 계기나 심경의 변화 따윈 없었다. 여전히 악령감옥에서의 기억은 날 옥죄어왔고, 존재가 흐릿해지기는커녕 매일 밤 조금씩 그 영향력을 넓혀갔다. 방을 가득 메우고, 거실을 가득 채워, 온 집안이 그들로 가득 찰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과 악령의 웃음소리로 메아리칠 때까지. 그래서 도망쳐 나왔다. 그뿐이었다.

무작정 달려 나와보니 아파트 현관 앞이었다. 서늘한 저녁 공기에 조금은 정신이 돌아왔으나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계단에 앉아 머리를 무릎에 파묻고 웅크려있었는지 얼마나 지났을까. 조심스럽게 날 흔드는 손길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날 찾아온 동생들의 손에 들려있던 케이크 상자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케이크가 뜻하는 바를 애써 모른척했지만. 끝끝내 그 케이크를 상자에서 꺼내지도 못하고 되돌려 보냈지만. 한참을 멈춰있던 나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느리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주민들의 왕래가 드문 새벽에 나와 멍하니 달을 바라보기도 하고, 거리를 정처 없이 거닐다 충동적으로 들어간 편의점에서 예전에 즐겨 먹던 과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사람들과도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 사건에 대해 질문받으면 입을 다무는 것은 여전했지만, 좁아졌던 세상을 조금씩 도로 넓혀나갔다. 그 일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가슴 깊숙이 덮어놓고 살았다. 

가끔 원치 않는 소식이 들려올 때도 있었다. 적막이 싫어 낮게 틀어놓은 티비에서, 핸드폰 화면을 넘기다 무심코 눈길이 멈춘 기사 헤드라인에서. 현장과 그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끝내 단서 수집에 실패했다고, 실종자 수색을 철수했다고. 간간이 들려왔다. 

그래도 견딜 만했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 견딜 만했다. 모른척하기가 점점 수월해졌다. 그 순간이 스쳐 지나가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게 불가능해진 것은

“…웬 케이크야?”

눈앞에 불쑥 나타난 케이크를 봤을 때.

“몰랐어? 오늘 오빠 생일이잖아.”

“올해는 해야지. 여태까지 그냥 조용히 넘어갔잖아.”

말이 계속 이어졌으나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세상으로 나와 맞는 첫 번째 생일이었다. 그 말은 악령감옥에서 빠져나온 지 어느덧 4년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안 할래.”

속이 메슥거렸다. 잠시 잊고 살았었다. 아예 잊어버린 건 아니었지만, 가끔가다 문득문득 떠올라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망각하고 있을 때가 더 많아졌다는 게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온 세상이 다 잊어도 나는 그러면 안 되는데. 그게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고 죗값인데. 그들의 목숨을 바쳐 얻어낸 삶인데. 어떻게, 감히, 내가.

“응?”

“근데 아직 케이크….”

“그냥, 그냥 나중에 해.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동생들 등 떠밀어 내보내고 현관 앞에 쭈그려 앉았다. 웃기는 일이었다. 정작 악령감옥에 간 7월은 무난하게 넘겼으면서, 뒤늦게 무너지는 꼴이라니. 어쩌면 빙의된 상태에서 보낸 두 달의 기억이 흐릿해서인지도 몰랐다. 끝이 없는 악몽 속을 헤매는 느낌이었으니까. 그 모든 게 선명해진 건, 악령감옥을 빠져나온 그다음 날.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경찰의 조사까지 마치고 난 뒤에야 집에 도착해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다음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 앉자, 모든 게 홍수처럼 밀려들어 왔었다. 

나는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형과 동생들은 그러지 못했구나.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겠구나. 추석이지만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고, 내 생일에도 다시는 축하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 보내지 못하겠구나. 케이크를 보니 그간 잠시 잊고 있던 그 고통이 되살아났다.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멍하니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비틀거리며 케이크를 지나쳐 방으로 향한다. 문을 닫는다. 세상을 다시 밀어낸다.

 남은 9월을 잠시나마 지워버린다.

그렇게 또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예전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사실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그저 카메라 앞에서 웃고 리액션을 했던 것처럼, 카메라가 돌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과 같이 있다면 웃어 보인다. 대부분 사람은 속아 넘어가 간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오랫동안 해왔던 일이고, 오랜만에 다시 하게 돼서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을 뿐, 금세 다시 익숙해졌다. 

아닌척하지만 사실은 지친다. 혼자 있을 때면 나는 집에 틀어박혀 살던 그 모습으로 돌아간다. 가만히 앉아 허공을 바라보기만 한다.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걸. 기억은 잊혀도 잃어버린 건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괜찮은 척을 해도 숨길 수 없는 건, 9월의 상처. 8월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문을 잠그고 커튼을 치고 칩거한다. 스케줄을 비워놓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는다. 내 생일에, 내가 다시 살아난 그날에 그들이 나를 대신해 죽었다는, 어떻게 보면 근거 없는 논리가 끊임없이 날 괴롭힌다.

딩동

벨이 울린다. 인터폰을 받지 않아도, 아무런 반응을 해주지 않아도 벨은 한번 울리고 만다. 생일이라도 혼자 있길 원하는 나를 잘 아는 사람이다. 한참 후에야 슬쩍 열어본 현관문 앞에는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한 상자가 놓여있다. 

재작년, 촛불을 붙이기도 전에 끝나버린 생일파티 이후로는 동생들은 이렇게 케이크만 두고 간다. 작년부터는 아예 1일부터 칩거해 10월이 찾아오기까지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올해도 슬쩍 동태만 살펴보고 간듯했다.

그 마음이 참 고맙게 느껴지면서도, 역시 이 케이크는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들은 죽었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서 홀로 또 생일을 맞이하고, 한살 나이를 먹어가고….

끝없는 상념에 또다시 사로잡힌다. 식탁 위에 놓인 케이크를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같이 동봉된 촛불에 눈길이 간다. 뭐에 홀린 듯이 비닐 포장을 뜯어 촛불을 꺼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잃어버린 생명의 개수만큼.

케이크에 초를 꽂는다. 불을 붙인다. 일렁이는 다섯 개의 촛불을 바라본다.

내 손으로 떠나보낸 형과 동생들을 뒤늦게나마 추모하며.

올해도 9월이 지나가기만을 고요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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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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