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산장

살인산장 (3)

또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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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알립니다.


정적. 피를 토하며 쓰러진 계수상을 뒤따른 건 숨 막힐듯한 정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충격적인 광경에 모든 게 얼어붙은 것 같은 찰나의 순간. 그대로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그 시간을 깨트린 건, 폭발하듯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소음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의자가 거칠게 끌리는 소리, 자신도 모르게 건드린 식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경악 가득한 숨소리와 수많은 질문, 그리고 입을 틀어막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새어 나온 구역질 소리까지.

“이야, 이거 무슨 영화 보는 줄 알았네.”

소름 끼칠 정도로 태연한 목소리가 혼란 가득한 소음을 뚫고 들려왔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아닌, 화면 너머로 접한 허구의 사건인 것처럼 감탄하는 태도에 모든 시선이 구경도에게 쏠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자기 귀를 의심한 것도 잠시, 제대로 들었다는 걸 깨달은 종민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른 탈출러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눈앞에서 살해당했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계수상은 수 명의 무고한 여고생들을 죽인,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였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눈앞에서 한 사람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도 태평하게 영화 같았다는 감상평을 내뱉는다? 대부분 사람은 그러지 못할 터였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경악하고 있는 사이, 맏형이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심하다꼬?”

삐딱한 조소를 머금은 구경도가 돌아섰다. 당장이라도 조롱을 퍼부을듯한 기세였으나, 호동과 눈이 마주치자 거만한 태도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안면에 대고 비아냥거리기에는 호동의 덩치가 너무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그들 사이의 거리도 너무 가까웠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까닥하면 황천길을 건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구경도는 급히 주춤주춤 물러서며 꼬리를 내렸다.

“내, 내는 그냥….”

“미안합니다. 야가 가끔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성향이 있어서….”

구경도라 뭐라 반박하기 전에 그의 형이 끼어들었다. 웃으며 호동의 양해를 구한 구경도는 동생의 팔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러더니 대뜸, 철썩, 동생의 어깨를 후려쳤다. 

“아 씨, 아프다! 와 때리고 지랄이가!”

“내 니 말 좀 조심해뿌라 하지 않았나?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도 구분 못하노!”

“니랑 동갑이다! 꼴랑 몇 분 일찍 태어난 거 가지고 한평생 고막 테러를 해대노!”

“걱정도 못 하나! 니 그러다가 범인으로 몰리면 어떡할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형과 어깨를 문지르며 꼬박꼬박 대드는 동생의 말싸움이 끝없이 이어졌다. 뭐지? 별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마음의 소리일까, 아니면 말실수를 덮기 위한 눈속임용 연기일까? 현재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쌍둥이 형제의 대화를 엿듣던 신동은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겠죠? 계수상이 괜찮은지 확인도 하고. 죽은 게 아니라 잠시 정신을 잃은 걸 수도 있으니까.”

지극히 타당한 말이었지만 섣불리 자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동안 벽만 바라보고 있던 피오는 용기를 내어 힐끗,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실수였다. 다시금 솟구치는 토기에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피오야, 힘들면 잠깐 들어가 있어도 돼.”

“어우, 미안해요.”

“아냐, 괜찮아, 괜찮아. 들어가서 쉬고 있어.”

눈을 꽉 감은 채 입을 틀어막고 있던 막내는, 병재가 괜찮다며 등을 토닥여주자 그제야 자리를 피했다. 그는 뭐가 미안한지 연신 사과하며 산장 안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피오가 떠나고 나서도 아무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동현이 의연하게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내가 확인해볼게. 난 피는 괜찮으니까.”

바닥에 흩뿌려진 검붉은 자국을 피해 계수상에게 다가간 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레 팔을 뻗어 아직은 따뜻한 손목을 잡고 맥박을 짚었다. 몇초가 지났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세를 바꿔 목 옆을 짚어보았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서는 동현을 지켜보던 호동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경찰에 신고해야긋다. 혹시 휴대폰 있으신 분?”

“제가 할까요?”

흥미로운 눈초리로 그들을 지켜보던 오연범이 선뜻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며 테라스 한구석으로 향했다.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지 불과 수 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신고 전화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태연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다른 투숙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나마 그들을 찬찬히 관찰해보니, 하나같이 눈앞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구경도가 무례한 발언으로 관심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그런 무심한 태도가 잠시 가려졌을 뿐이었다. 

오연범이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 비가 쏟아지는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던 장기두가 입을 열었다.

“날씨가 이래서 경찰이 올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 말을 들은 탈출러들 역시 근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끊임없이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를 마친 오연범이 썩 좋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지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출동하기 어렵다고 하네요. 헬기도 못 띄우고. 날이 개는 대로 온다고 하니 일단 최대한 현장보존하고, 위험하니까 단독행동하지 말라고….”

“그게 말이 되나? 여 살인마랑 꼼짝없이 갇혀있게 생겼는데?”

오연범이 말을 맺기도 전에 구경도가 화를 터트렸다. 수많은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 팔아먹었으면서 정작 범인과 같은 공간에 갇혀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샘솟은 모양이었다.

“뭐, 일단 와인은 피해야겠네요.”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하는 오연범이 심기를 거슬렸는지, 구경도는 분노의 화살을 그쪽으로 돌렸다. 

“와인 가져온 거 그쪽 아이가? 이 상황에서 태평한 게 영 수상한데?”

“제가 들고 왔다고 해서 독을 탄 사람도 저라는 건 억측이죠. 여기 있는 모두가 보는 가운데 병을 땄잖아요?”

“그, 그건….”

“오히려 수상한 걸 따진다면 이 와인의 주인, 박강인 씨죠.”

모든 시선이 산장 주인에게 쏠렸으나, 가면 때문에 그의 표정을 읽기란 불가능했다.

“난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신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와인이 아니라 와인잔일 수도 있죠. 정확한 건 수사를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럼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요. 현장보존부터.”

이렇게 뒀다간 저 빌런들 때문에 분위기가 더 나빠질 경우를 우려한 병재가 재빨리 중재에 나섰다. 그라고 저런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일단은 안전하게 이 산장을 빠져나가는 게 중요했다.

“여기 뭐 덮어놓을 거 없나? 이대로라면 다 젖을 거 같은데.”

종민이 테라스 바닥을 가리켰다. 아직 계수상에 닿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밤사이 비바람이 더 거세진다면 물난리가 날 가능성이 높았다.

“방수포로 덮으면 될 거 같다.”

“어? 방수포요?”

박강인이 조금 전 근처에서 통나무를 자르던 그 창고를 가리켰다. 

“창고에 있으니까 가져오면 될 거 같다. 두 개면 충분하겠지.”

“그러면 니들이 여기 방수포로 덮는 동안, 내는 저기 개천에 한번 갔다 올게. 다리가 얼마나 잠겼나 확인만 하게. 혹시 우산이나 우비 있습니까?”

호동의 질문에 박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비 입구에 있는 우산꽂이에 있소.”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을게요. 종민아, 가자.”

“예? 저요?”

“그라면 여기 또 다른 종민이가 있나?”

“아니, 그건 아닌데….”

호동은 궂은 날씨에 나가기 싫어 뭉그적거리는 종민을 끌고 문으로 향했다. 그런 형들을 병재가 걱정스레 배웅해 주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너무 물가 가까이에는 가지 말고요.”

“그래, 니들도 조심해라.”

얼핏 들으면 그냥 조심하라는 뜻 같았지만, 동생들은 맏형의 그 말속에 숨어있는, 빌런들을 경계하라는 뜻을 곧장 알아차렸다.

“걱정 마세요.”

손을 흔들며 산장 안으로 들어선 호동과 종민은 잰걸음으로 로비 입구로 향했다.

“피오는 괜찮겠죠?”

우산을 하나씩 꺼내 들고 산장을 나서며 종민이 심란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실을 가로지르며 1층을 쓱 들러보긴 했지만, 그 어디에도 막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을 거다. 진정하려면 시간이 쪼매 필요하겠지.”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호동 또한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종민은 괜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산장은 내리기 시작한 어둠에 반쯤 감싸져 있었다. 몇시간 전, 막 택시에서 내렸을 때도 살인산장이 주는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내부에 숨어있던 과거의 악연들과 재회하고 나니,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러려면 비라도 빨리 그쳐야 할 텐데.

다시 한번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 가득한 쟃빛이었다. 산장 뒤로 보였던 산맥 또한 짙은 물안개에 숨겨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긴 진짜 뭘까. 포스터 속의 그 지붕을 응시하던 종민의 눈동자가 서서히 아래로 움직였다. 뾰족한 지붕 아래에 원형 창문, 그리고 그 밑에 주욱 늘어선 각진 객실 창문들. 잠깐, 원형 창문? 종민은 건물 벽을 따라 흐르던 시선을 다시 위로 끌어올렸다. 1층, 2층, 3층… 그리고 다락방. 그것은 분명 다락방 창문이었다.

다락방이 있다고?

처음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상하다 느끼지 못했다. 건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그는, 그저 산장 주인이 순전히 멋을 내려 다른 층과는 모양이 다른 창문을 달았을 거라 짐작했다. 허나 내부를 둘러본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3층에는 위로 가는 계단이 없다. 사다리도 보지 못했다. 창문이 있다는 건 지붕 아래에 공간이 있다는 뜻일 텐데, 왜 올라가는 길이 없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산장 주인인 박강인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건가? 혹시 살인하고 시체를 다락방에 유기….

“종민아, 안 오고 뭐 하나?”

맏형의 부름에 종민은 그가 생각에 잠겨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는 걸 깨달았다.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호동 옆으로 따라붙자 심각한 목소리로 맏형이 입을 열었다.

“종민아.”

“예?”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도 목소리를 낮추는 형에 종민도 덩달아 긴장했다. 혀끝에 맴돌던 다락방에 대한 얘기는 반사적으로 삼킨 침과 함께 절로 쏙 들어갔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종민은 괜스레 몸을 사리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러나 호동이 꺼낸 얘기는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느낌이 영 안 좋다.”

“예?”

“느낌이 안 좋다꼬. 오늘 와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듣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혼내실 줄 알았어요.”

“내가 이유 없이 혼내는 줄 아나? 니 또 혼날 짓 했나?”

위협적인 몸짓을 취하는 척만 해도 순식간에 대여섯 걸음을 도망가는 종민에 호동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종민은 웃으면서도 여전히 형의 눈치만 살피다가 호동이 다시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도로 옆으로 다가왔다.

“아무튼, 종민아, 느낌이 마이 안 좋다. 이제 시작일 거 같다.”

“이제 시작일 거 같다고요?”

“그래. 여기 더 있다가는 더 험한 꼴을 볼 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니는 그런 느낌 안 드나?”

눈앞에서 독살을 목격한 것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니.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말이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는 게 더 끔찍했다. 종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내일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글쎄다.”

호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천에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물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센 비바람에 부서진 나뭇가지들과 여기저기 고인 흙탕물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쪽 부근만 그런 게 아니라 다리 건너편도 마찬가지일터였다. 만약 나무가 쓰러졌거나 산사태가 난 곳이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코너를 돌자 하천이 나타났다. 호동과 종민은 물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멈추어 섰다. 이미 예상은 했었지만, 그들이 몇시간 전에 건너온 다리는 불어난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데요?”

“이거, 내일 못 나갈지도 모르겠는데.”

왠지 소용돌이치며 휩쓸려내려 가는 흙탕물이 그들이 처한 상황 같아서, 둘은 한참이나 말없이 거친 물결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한편,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동생들은 단서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호동과 종민이 떠나고 난 후, 다른 투숙객들은 흥미를 잃었는지 하나둘 자리를 떴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박강인은 그들이 계수상 주변을 빙빙 돌아도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들은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과 식기를 비교적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박강인의 눈길을 피해 계수상의 옷을 슬쩍 뒤져보기도 했으나 나온 건 객실 열쇠뿐, 다른 단서는 없었다.

병재가 재빠르게 204호 키를 주머니 깊숙이 찔러넣는 동안, 신동이 가짜 한숨을 쉬며 시선을 끌었다.

“수상한 점이 하나도 없는데… 차라리 창고에나 가볼래요? 방수포 가져오는 김에 다른 필요한 게 있는지 쓱 볼 겸?”

“그게 좋겠다.”

곧장 동의하는 동현과 달리, 병재는 산장 내부를 힐끗거렸다.

“근데 누가 피오랑 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혼자 오래 있으면 위험할 거 같아요.”

“그럼 병재, 니가 피오랑 같이 있어. 내가 동현이 형이랑 창고에 갔다 올게.” 

병재가 막내를 찾으러 떠난 후, 동현과 신동은 박강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물장구치는 수영장을 지나쳐 마당 끄트머리에 위치한 창고에 도착했다. 문 앞에 잠시 멈춰선 박강인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빼 들었다. 한눈에 봐도 묵직해 보이는 게 이 산장의 모든 곳을 드나들 수 있을 거 같았다. 그중 하나를 열쇠 구멍에 끼워 넣자, 끼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한쪽 벽을 따라 높이 쌓여 있는 통나무 더미였다.

“장작이 꽤 많네요?”

마른 나뭇더미를 훓어보며 신동이 말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박강인은 시종일관 무뚝뚝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곧장 답해주었다.

“캠프파이어를 하거나 직접 불 피워서 요리해 먹는 체험을 원하는 손님들도 있어서 그렇다. 방수포는 이쪽에.”

그가 반대편 벽을 가리켰다. 한쪽에는 전기톱부터 삽까지 다양한 도구와 장비들이 걸려있었고, 선반에는 수영장 청소도구, 페인트통과 붓, 손전등, 현재는 불필요한 겨울 가전 등 잡다한 물건들이 놓여있었다. 

박강인은 그 중 반듯하게 접혀 있는 방수포를 꺼내 동현과 신동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이거만 가져가면 되나?”

“…내가 한번 살펴보지.”

동현이 혼잣말처럼 던진 질문에 박강인이 그를 쓱 훑어보았다. 한박자 늦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전에 없던 경계심이 묻어났다. 문득 신동은 박강인이 자기 아버지를 닮은, 덩치 크고 힘 센 남자들을 주로 죽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 우린 먼저 가서 방수포 덮어놓을게요. 가요, 동현이 형.”

필요 이상으로 살인범과 붙어있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정 내린 신동이 동현에게 손짓했다. 동현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동생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선반을 훑어보는 박강인을 뒤로 하고 먼저 테라스로 돌아온 둘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방수포로 계수상의 시신과 테이블 전체를 덮었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그들은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산장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병재와 피오가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괜찮아?”

다가온 동현이 묻자 피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꽤 심하게 구역질을 한 탓인지 눈가가 조금 붉었다.

“이제 좀 나아졌어요. 자꾸, 자꾸 그 광경이 생각나서….” 

“아니, 아니, 떠올리지 마. 그러다 또 우웩할라.”

손사래를 치며 만류하는 동현에 피오가 살짝 웃음 지었다. 막내의 미소에 잠시 밝아진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 덮어놨어요?”

“응, 일단 오늘 밤엔 괜찮을 거 같아. 문제는….”

말꼬리를 흐리며 신동이 부엌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하나둘씩 부엌에 흩어져서 간단한 요깃거리로 배를 채우고 있는 다른 투숙객들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병재는 그가 하지 못한 말을 쉽사리 유추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저들과 같이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겠지.

“일단 호동이 형이랑 종민이 형 얘기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자리에 없는 두 형을 언급하려던 찰나, 로비로 이어진 통로에서 호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민도 어두운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우산을 가지고 나갔으나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인지 옷이 꽤 젖어있었다.

“야들아, 큰일 났다.”

“왜요?”

“생각보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여기서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지금 비가 그칠 기미도 전혀 안 보이다 보니 내일 나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다리가 완전히 잠겨서 안 보이는 데다 도로도 엉망이고.”

“아, 씨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깥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는 호동의 말을 끊으며 욕설을 내뱉은 건 구경도였다. 쌍둥이 형과 함께 부엌 테이블 곁을 서성이던 그는, 비관적인 전망에 화가 치밀어 오른 듯 했다.

“눈앞에서 살인이 벌어진 것도 개같은데 비 때문에 꼼짝없이 살인자와 갇히게 된다니, 이게 말이 되나?”

구경만이 그만하라는 듯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지만, 동생은 아직도 짜증이 가라앉지 않은듯했다.

“누굴 죽이고 싶으면 단둘이 어디 조용한 곳에서 독살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주고 지랄이가!”

“아니, 지는 돈 때문에 애먼 사람들을 좀비로 만든 놓고….”

테라스에 이어 또다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구경도를 본 병재가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한 소리 해줘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다른 사람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미 지나간 일이잖소. 짜증을 낸다고 해서 범인이 자백할 리가 없는데 적당히 합시다.”

한 마디를 뱉은 천마도령이 다시 덤덤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그런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자극됐는지, 구경도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한 의혹을 쏟아냈다.

“혹시 그쪽이 범인이가? 개수작인지 뭔지, 저 뒤진 사람이랑 장기 뒀더니 어디 찔리는 구석이 있나 보네. 도둑이 제 손 저린다더니!”

“제 손이 아니라 제 발 저리다가 옳은 표현이다. 그나저나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저자를 죽였다고 의심하는 건가?”

구경도의 지적에 장기두의 목소리가 한결 딱딱해졌다. 그러나 대꾸한 건 빙그레 웃고 있는 구경도가 아닌 그의 쌍둥이 형이었다.

“장기 진 게 분해서 살해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종민은 대략 두 시간 전에 본 광경을 떠올렸다. 그와 병재가 캐리어를 들고 막 3층에 도착했을 때, 천마도령과 계수상은 세컨드 거실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둘 사이에 사소한 다툼이 있었는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큰 싸움이 났다면 몰랐을 리가 없다. 전기톱 소리를 듣고 뛰쳐나가기 전까지는 줄곧 3층에 있었으니까. 

“이긴 사람은 나인데, 내가 저 사람을 죽였다고?”

“승패 관련이 아니더라도 말이 오다가 언성이 높아졌을 수도 있지예. 내 교도소에서 근무하면서 이런저런 사례를 많이 접했는데, 남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살인까지 할 수 있는 게 사람이더라꼬.”

그래, 예를 들면 불법 파이트클럽 같은 걸 연다던가. 병재가 옆에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종민은 혹시나 구경만이 그 소리를 들을까 싶어 병재의 팔을 툭툭 치며 무언의 만류를 전했다. 빌런들의 대화에 오연범이 합류한 건 그때였다.

“재밌게 놀고 있는 와중에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한데, 우리가 굳이 범인을 추려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뭐?”

“우리가 여기서 알아낼 수 있는 건 독살이다, 이 정도인데 굳이? 경찰이 와서 수사하는 게 훨씬 정확하고 빠를 텐데 괜히 이러쿵저러쿵해서 서로 의심하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죠.”

장기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팔짱을 끼고 몇초 동안 오연범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말 하는 거 자체가 굉장히 의심스러운데. 게다가 애초에 와인을 가져온 건 그쪽이 아닌가?”

자신에게 쏠리는 의심에도 오연범은 태연했다.

“아까도 말했듯, 전 그저 저녁에 곁들일 와인 있냐고 물어봤고, 산장 주인이 말해준 걸 가져왔을 뿐인데요.”

“난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박강인이 전과 다름없는 일관적인 태도로 반박하자, 이번에는 구경도가 말을 얹었다.

“마음에 안 드는 투숙객이면 죽일 수도 있지.”

“내가? 여기서 살인이 벌어진다면 내가 의심 1순위일 텐데도? 그 사이 까먹었나 본데, 죽은 사람한테 건배사를 권한 건 그쪽 형이었다.”

“내는…!”

다시금 시끄러워질 기미가 보이자, 호동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박강인씨, 저녁으로 먹을만한 거 있나요? 원래 준비해놓은 음식은 못 먹을 거 같은데.”

거기도 독이 있을지 모르니까. 호동이 덧붙이자, 박강인은 구경형제와 말싸움하던 걸 멈추고 부엌 캐비닛을 가리켰다. 

“라면도 있고, 통조림도 있으니 취향껏 찾아드쇼. 밀봉된 음식은 괜찮을 거 같으니까.”

그의 말에 따라 찬장을 들여다본 호동은 컵라면을 발견하곤 동생들을 불렀다.

“야들아, 여 와봐라. 뭐 좀 먹어야지. 니들은 뭐가 좋나?”

“마침 출출해지는 참인데 잘됐네요.”

눈치 빠른 신동이 다가와 손에 잡히는 아무 컵라면을 집어 들었다. 지금까지 피를 토하던 계수상의 모습이 문득문득 떠올라서인지 크게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안 들었으나, 자리를 피할 구실이 필요했다. 끼니는 완벽한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호동과 신동을 선두로 탈출러들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담아 들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까운 거실에 앉아도 됐지만 탈출러들은 방향을 틀어 위층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영 탐탁지 않은지 몇몇 투숙객들이 의심 어린 눈초리를 쏘아댔다.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꽂혔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몰려다니는 게 수상하다고, 같은 일행인데 따로 산장에 도착한 게 이상하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그 또한 외면하며 계단을 올랐다. 빌런들에게서 멀어지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끼리 조용하게 얘기를 나눌 장소가 절실했다.

“이쪽에 장기두가 앉아있었어요.”

3층 세컨드 거실에 도착한 종민이 탁자에 컵라면을 내려놓으며 한쪽 의자를 가리켰다. 경기를 치르고 뒷정리하지 않아 장기판 위에는 이전 게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살아남은 장기 말을 보아하니 장기두가 앉아있던 쪽이 우세했다.

“장기에서 이겼다는 천마도령의 말은 사실이었네. 보통 이긴 사람보다 진 사람의 살해 동기가 더 그럴법한데….”

호동이 장기판을 살피며 중얼거리자 신동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도 죽였다 안 죽였다 확신할 순 없는 거죠. 애초에 여기 믿을 수 있는 사람 한명도 없잖아요.”

“그건 그래. 나 여기 처음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랐잖아. 카운터에 박강인이 서 있어서.”

몇시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동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피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계수상이 쓰러진 뒤부터 말이 부쩍 줄었는데, 살짝 보이는 평소와 같은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저랑 호동이 형이 제일 먼저 도착했거든요? 방에 딱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데 누가 들어도 동현이 형이얗….”

“아닌데? 나 그렇게 크게 소리는 안 질렀는데?”

“질렀어요. 호동이 형이랑 나랑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투닥거리는 동현과 피오, 그리고 옆에서 한마디씩 보태는 호동과 신동 덕분에 단발단은 대략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처럼 두 명씩 택시에서 깨어나 이곳, 살인산장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병재 또한 그와 종민이 보고 느낀 바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포스터 속 건물이랑 똑같은 데다가 카운터에 박강인까지 있다 보니 여기가 살인산장이라 확신했는데, 다른 빌런들도 등장해서 혼란스러웠다 이거지?”

신동이 병재의 말을 다시 한번 정리하자 병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우리도 그래. 게다가 지금 봐봐. 우리 방 배정도 예전 살인감옥이랑 똑같아. 나랑 동현이 형, 호동이 형이랑 피오, 그리고 병재, 너랑 종민이 형.”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살인감옥과의 유사성에 병재의 표정이 한결 심각해졌다. 그가 이 새로운 사실을 곱씹는 동안 동현이 물었다.

“혹시 여러 명이 같은 꿈을 꾸거나 그럴 순 없는 거야? 분명 우리 다 먼지투성이 공간에 있었잖아. 가스 때문에 정신을 잃기 전까진. 다들 기억나?”

“기억나긴 하는데, 그런 게 가능해요?”

피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지만 이를 답해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 대신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던 병재가 입을 열었다.

“방금 동이 형이 살인감옥 얘기를 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데… 혹시 우리가 평행세계에 떨어진 건 아닐까요? 왜, 요즘 보면 이세계물도 많이 나오잖아요.”

“평행세계? 이세계? 뭔 소리야 그게?”

기억 못하는 종민을 위해 병재가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가 아는 세계와 무언가가 다른 세계요. 음, 살인감옥 무전기 생각나요? 거기선 다른 시간대의 평행세계였지만 여기는 저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지 않은, 그러니까 우리가 나타나 간섭하기 전의 세계라든지. 박강인을 보니까 뭐 그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탈출러들이 개입하기 전, 혹은 아예 개입한 적이 없는 세계라.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빌런들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얼추 설명되긴 했다.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끝없는 추측에 조금씩 지쳐가는 탈출러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호동은 목소리에 확신을 꾹꾹 눌러 담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튼, 지금 이 상황을 전부 이해할 순 없어도, 차츰 단서를 모아가다 보면 답이 나올 거야. 늘 그랬듯이.”

한명, 한명, 동생들의 눈을 마주치며 격려하는 맏형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저 사람들이 우릴 모른다는 거야. 만약 우릴 안다면 상황이 더 위험해질 수 있어. 우리가 저들한테 한 짓이 있으니까. 그게 우리 자신을 지키려다 비롯된 일이라도 말이야.”

“그쵸, 그쵸.”

병재가 맞장구쳤다. 천 명의 원혼을 풀어주고, 무의식에 들어가 숨기고 있는 정보를 빼냈다. 무간FC를 고발하고, 허를 찔러 역으로 좀비에게 물리게 만들었다. 정당방위였다고 해명해도, 저들은 다르게 받아들일 게 뻔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돼. 특히 종민이, 너 조심해라.”

“예? 저요? 왜요?”

“니 진짜 몰라서 묻나?”

괜스레 되물은 덕분에 한 트럭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늘 불안불안한 동생에게 잔소리를 쏟아붓는 호동을 다물게 한 건, 3층에 모습을 드러낸 구경형제였다.

“내일 뵙시다.”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린 구경만은 인사 없이 방으로 먼저 들어가 버린 동생을 따라 301호로 사라졌다. 반도 못 먹은 라면을 휘적이던 피오가 벽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우리도 방에 들어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요?”

“응, 그게 좋겠다. 계수상 방은 내일 뒤져보는 게 낫겠지?”

“계수상 방?”

“아, 맞다. 아까 호동이 형이랑 종민이 형이 잠깐 나가셨을 때….”

병재가 빠르게 204호 열쇠를 찾은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지금 우리끼리 자꾸 따로 움직이면 저 사람들이 더 의심할 거 같아서,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밤에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면 괜히 시비 걸릴 거 같기도 하고.”

그래봤자 호동이 형이랑 동현이 형이 있으니까 저쪽에서도 섣불리 뭘 못하겠지만. 병재가 운동부 두 명을 힐끗 쳐다보며 덧붙였다. 

“그래, 그럼 일단은 상황을 좀 지켜보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피곤한 하루였던 만큼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다며 맏형이 동의했다. 그제야 나머지 탈출러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1층으로 들고 내려간 쓰레기를 버리고 젓가락을 씻어 제자리에 돌려두었다. 뒷정리를 마친 그들은 2층에서 인사를 했다.

“그럼 다들 잘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문단속 잘하고.”

“네. 형들 먼저 들어가세요. 피오, 너도”

“안녕히 주무세요, 호동이 형. 애들아, 잘자!”

동료들이 안전하게 2층 객실로 들어서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단발단은 어느새 고요해진 3층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302호면 구경형제가 301호겠죠? 우리 바로 아래가 호동이 형이랑 피오고, 201호가 동현이 형이란 동이 형. 204호가 계수상. 나머지 2층 객실은 1인실인 거 같지만 누가 어디에 묵고 있는지 확실히 모르고. 아, 오연범이 203호랬나.”

“저건 뭐지? 박강인 방인가? 저기만 손님 방이 아닌데?”

종민이 가리킨 그들의 반대편 방은 유일하게 호수가 적혀있지 않았다. 겉으로만 봐도 꽤 널찍한 공간인데 문은 하나뿐이었다. 2인실 객실의 1.5배는 될 법한 공간에 병재가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가 보네요. 혼자 되게 넓게 쓰네.”

그렇게 말하며 302호 문을 열려는데, 열쇠가 헛도는 느낌이 들었다.

“…응?”

손으로 살짝 밀자, 문이 저항 없이 열렸다. 문 반대편에 위치한 창문이 활짝 열려있는 게 보였다. 그제야 종민과 병재는 그들이 전기톱 소리를 듣고 서둘러 뛰쳐나가느라 문을 잠그는 걸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 창문 열어뒀더니 완전 꿉꿉해졌어!” 

병재가 문단속을 하는 사이, 종민은 서둘러 창가로 직행했다. 어느덧 밖은 하늘과 숲의 경계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창밖의 풍경이 아니었다. 거센 비바람 때문에 창틀은 물론이고 바닥까지 일부 젖어있었다.

“여기 다 젖었어! 병재야, 여기 닦을 것 좀 가지고 와봐.”

종민이 창문을 닫고 주변을 치우는 사이, 병재가 화장실에서 수건 두 개를 집어 왔다. 그중 하나를 종민에게 건네주고 난 병재는 창가부터 훔치기 시작했다.

“다른 데는 괜찮아요?”

“그런 거 같은데? 침대가 안 젖어서 다행이다, 야.”

종민 또한 수건을 들고 바닥을 닦는데 합세했다. 물바다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팔린 까닭에, 문단속을 제대로 못 하고 나갔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혔다. 누군가 방에 몰래 침입했을 가능성조차 떠올리지 못한 건 그래서였다. 그렇게 전보다 조금 더 어지럽혀진 종민의 캐리어 내부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밤은 더욱 깊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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