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산장

살인산장 (1)

어서오세요, 살인산장에.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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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알립니다.


“우리 어디 갇힌 거 같은데? 아무것도 안 보여!”

“우리 늘 갇혔었고, 안대 쓰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당연하죠, 라고 대꾸하려 했는데 안대 벗어도 아무것도 안 보이긴 하네요.”

늘 여느 때와 같은 시작인 줄 알았다. 그러나 종민과 병재의 말대로 안대를 벗어도 암흑만이 탈출러들을 반겼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다. 희망연구소의 냉동창고가 그러했고, 어둠의 별장에서는 새로운 공간을 탐색하는 매 순간 어둠이라는 형태의 두려움과 싸워야 했으니까. 그렇다고 겪어본 일이라 괜찮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지만.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신동이 한숨을 푹푹 쉬며 그 근심을 드러냈다.

“여기도 어둠의 별장 같은 곳은 아니겠지?”

“와, 그러면 쉽지 않을 거 같은데? 벌써 답답해.”

사실 상대적으로 겁이 적은 편인데다가 밤눈까지 밝은 종민에게 어둠은 발목을 잡을 정도의 제약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옥죄는 건 극도로 제한된 시야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가 아닌,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그의 발견 능력을 펼치지 못하게 막는 이 좁디도 좁은 공간이었다. 

갑갑한 건 다른 탈출러들도 마찬가지였다.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 있지만, 양옆 동료와 어깨가 닿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 눈앞까지 깜깜하다 보니 다칠까 봐 섣불리 움직이기도 꺼려졌다. 피오는 조심스레 팔을 옆으로 뻗어보았다. 팔을 쭉 펴기도 전에 벽에 손이 닿았다.

“여기 엄청 좁아요. 병재 형도 팔 닿겠는데?”

막내의 말에 형들도 주변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맏형의 듬직한 등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신동과 어이없어 하는 병재를 제외하면.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누가 봐도 나 놀리는―”

“야들아, 이쪽 벽은 선반인 거 같은데 여기 함 만져봐라. 뭐가 많다!”

동생들이 투닥거리기 전에 호동이 목소리를 높여 자신이 발견한 바를 알렸다. 운동부 형의 지시에 따라 동현은 벽을 더듬거리던 손을 호동의 방향으로 틀었다. 손에 단단하고 납작한 무언가가 닿았다. 순간 움찔했지만, 맏형이 미리 알려준 덕분에 곧바로 선반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용기를 얻은 동현은 먼지가 두껍게 쌓인 선반을 더듬으며 찔끔찔끔 손을 뻗었다. 어둠 때문에 거리감을 상실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선반 깊숙이 뒤적거려보아도 손에 잡히는 건 없는 듯 했다. 텅 빈 칸이라는 결론을 내리던 찰나, , 폭신하고 부드러운 털뭉치가 손끝을 간지럽혔다.

“끄으으읗아아아악!”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서는 동현 때문에 작은 공간이 혼란에 휩싸였다. 평소 같았으면 비명의 근원지에서 최대한 빠르게 멀어졌을 텐데 애석하게도 이 안에선 그게 불가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탈출러들이 아니었다. 미어터질 듯 좁은 공간에서 여러 명이 우르르 한구석으로 몰리자,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작은 방안 곳곳에 내려앉아 있던 먼지가 허공에 펴졌다. 코와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고운 입자에 몇몇 탈출러들은 연신 재채기와 기침을 해댔다.

“왜? 왜??”

“살아있는 게 있어! 털 달린 거 만졌다고 지금!!”

“뭐???”

동현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탈출러들은 더더욱 한 뭉텅이로 뭉쳤다. 선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덕분에 종민은 먼지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밀려들어오는 동료들의 압박에선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다른 탈출러들에게 떠밀려 벽과 밀착되자 뭉툭한 무언가가 옆구리를 쿡쿡 쑤셨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문손잡이였다.

“여기 문이야! 문이 있어!”

그렇게 외치며 종민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고리를 잡았다. 사실 누군가 말린다고 하더라도 이 난장판 속에서 제대로 들릴 리가 없긴 했다. 잠겨있지 않은지 문손잡이가 저항 없이 돌아갔다. 자유의 몸이 된 탈출러들은 서둘러 비좁은 공간에서 쏟아져 나왔으나 몇걸음 못가 그대로 멈추어 섰다. 새로운 공간 역시 불이 꺼져있는 데다가 창문도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도 캄캄해? 불 스위치 없어?”

한결같은 어둠에 절망한 신동의 목소리에 종민은 행동으로 답했다. 조심스레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벽을 따라 움직이며 손을 더듬었다. 이쯤 뭐가 있을 법도 한데… 아하, 찾았다! 작은 외침과 함께 종민은 스위치를 눌렀다. 달칵 소리와 함께 방이 빛으로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탈출러들은 눈을 가리거나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인상을 썼다.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불빛에 조금씩 익숙해지자, 새로운 환경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방금 나온 작은 방과는 다르게, 이곳은 꽤 널찍하고 쾌적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늘어난 공간 면적 덕분에 인구밀도가 줄어서 그런 느낌을 주었을 뿐이라, 사전적 의미의 쾌적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벽 한쪽을 차지한 안내데스크에는 알 수 없는, 알고 싶지도 않은, 검은 액체가 얼룩덜룩 묻어있었고(저거 피 아니냐는 맏형의 말에 막내는 혹시 모를 헛구역질을 피하고자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열댓개의 의자는 죄다 엎어지고 뒤집어진 채 서로 뒤엉켜있었다. 벽의 한 면에는 커다란 포스터가 몇 개 붙어있었지만, 안내데스크에 묻은 것과 같은 정체불명의 액체로 뒤덮여있거나 찢겨 있어서 성한 것 하나 없었다. 그리고 시선이 닿는 이 모든 것은 두텁게 내려앉은 회색 먼지로 코팅되어있었다.

“여기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병재가 딱히 누구에게 묻는 것도, 대답을 기대하며 던진 것도 아닌 질문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있던 곳이 창고였네요. 아까 동현이 형이 만진 거 저거 아녜요?”

뒤를 돌아 방금 나온 공간을 살펴보던 피오가 대략 동현의 팔 높이에 위치한 선반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먼지떨이가 놓여있었다. 

“아닌데. 저거 아니야. 분명 살아있는 거였어.”

“맞는 거 같은데.”

“나도 피오 말 따라 맞다에 한표.”

종민은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는 동현과 그를 타박하는 동생 둘을 뒤로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반대편 벽에 걸린 종이들이 그의 호기심을 끌었다. 똑같은 폰트와 비슷한 색감과 분위기. 비록 온전한 상태는 알 수 없다고 해도 벽에 붙여진 4개의 포스터가 동일하다는걸 유추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제일 구석에 붙어있는 포스터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상단에 큼지막한 글씨로 적힌 네글자. 

살인산장.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종민은 팔을 쓸어내리며 다시 포스터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살인산장이란 글자 아래에는 산장의 세모난 지붕으로 추측되는 목재 건축물의 일부분만 보일 뿐, 그 외에는 지저분하게 뜯겨나간 흔적뿐이라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살인산장이라. 혹시 여기가 살인산장은 아니겠지? 자꾸만 바로 옆 포스터의 검은 얼룩으로 눈길이 쏠렸다. 설마 저게 피? 애써 불안감을 억누르며 혼자 고심하고 있는데, 김호들 핀잔 주기를 마친 병재가 다가왔다.

“형, 뭐 찾은 거 있어요?”

“여기 ‘살인산장’이라고 쓰여 있는 거 말고는 딱히 뭐가 없어. 근데 누가 봐도 여긴 산장이 아닌 거 같지 않아?”

병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먼지 가득한 회색빛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외부로 통하는 창문이 없어서 백 퍼센트 확신할 순 없지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산장 분위기와는 멀긴 하죠. 방치된 지 오래된 로비나 대기실 느낌이랄까.”

“그치? 이런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도 이상해.”

“살인산장이라… 스릴러 느낌이 나는데, 영화 포스터 같은 게 아닐까요? 연극이나 뮤지컬일 수도 있고.”

“아, 그런가?”

확실히 산장보다는 훨씬 그럴싸했으나, 영화관이나 소극장이라고 단정 짓자니 그건 또 아닌 거 같았다.

 “아직 단서 나온 게 많이 없으니까 좀 더 둘러봐요. 차츰 알게 되겠죠.”

병재는 격려하듯 종민의 팔을 툭툭 두드려주고는 안내데스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포스터에 마지막 한 번 더 눈길을 준 종민 역시 동생의 말에 동의하며 다음 단서를 찾아 움직였다. 별 소득 없이 구석에 쌓여있는 의자 더미를 들추어본 후,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시작 방이었던 창고로 되돌아가 보았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건 여전했으나, 문을 활짝 열어놓은 덕분에 로비의 불빛이 쏟아 들어와 내부를 둘러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와, 이 비좁은 곳에 우리 6명이 다 들어가 있던 거예요?”

창고에 불쑥 머리를 들이밀자, 환했던 공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호동은 저리 가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종민아, 니 때문에 안 보이잖냐. 뒤로 좀 가보래이.”

종민은 멋쩍게 웃으며 뒤로 물러서는 듯했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5초도 못가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 나온 거 없어요?”

“아, 형, 쫌!!”

종민은 막내의 짜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작은 공간을 훑었다. 청소 도구부터 안 쓰는 의자까지, 창고 안은 한눈에 보기에는 별 연관성 없는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건 뭐야?”

그가 피오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가리켰다. 피오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식칼의 형태가 드러났다. 종민은 반사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에헤이, 형 놀랐지, 놀랐지? 이거 가짜예요.”

막내가 웃음을 참으며 칼을 살짝 던졌다 받았다. 도구의 크기에 비해 가벼운 손놀림을 본 종민이 안심하며 손을 내밀었다. 

“가짜 칼이 왜 이런 데 있어?”

피오에게서 건네받은 칼을 이리저리 살폈다. 한없이 가볍다. 다각도로 돌려봐도 날카로워 보이는 칼날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다.

“거기 손잡이에 글자가 새겨져 있던데.”

호동의 말에 종민은 손잡이를 더듬었다. 끝부분에 오돌토돌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을 찌푸리며 천장 가까이 칼을 들어 보이자, 형광등 아래 작은 글씨로 F.R.이라고 적혀있는 게 보였다.

“F.R.?”

“무슨 뜻인지, 무엇의 약자인지는 모르겠어요.”

“저기 포스터에 살인산장이라고 쓰여있거든? 병재는 영화나 연극 포스터 아니냐고 하던데?”

호동은 종민이 되돌려준 칼을 받아서 들고는 다시 한번 이니셜을 살폈다.

“그럼 촬영 소품이란 말이가? 퀄리티가 너무 떨어지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다시 단서를 수색하는 호동과 피오를 뒤로하고 종민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사실 조금 더 창고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좁은 공간에 셋이나 들어가 있으면 제대로 수색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별수 없이 창고를 둘에게 맡기고 아직 둘러보지 못한 곳으로 향했다. 안내데스크에는 동현과 신동, 그리고 그쪽으로 합류한 병재가 단서를 찾고 있었다. 

“뭐 있어?”

“카드키를 찾았는데 앞면이 조금 훼손되어 있네요. 그 외엔 별다른 건 없어요.”

종민이 다가오자, 신동이 문제의 카드키를 들어서 보여주었다. 그의 말대로 누군가 날카로운 도구로 카드 앞면을 긁은 듯, 쓰여있는 글자를 읽어내기란 불가능했다.

“여기 로비에 단서가 될만한 모든 것이 훼손되어 있는 게 마음에 걸려요. 호동이 형이랑 피오는 뭐 찾은 거 없대요?”

종민이 병재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어느새 창고에서 나와 합류한 둘이 대신 답했다. 

“저기 창고에서 칼 모형을 찾았어요.”

“단서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데이. 근데 단서일 거 같다는 그 느낌이란 게 있잖아.”

“뭘 찾았다고요?”

호동의 설명에 다들 집중하고 있는 사이, 종민은 안내데스크 뒤편에 위치한 문을 살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떡하니 명시되어 있는, 카드키로 열리는 문이었다.

“여기 열리긴 할까? 카드 망가졌다며?”

괜스레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역시 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동이 들고 있던 카드키를 내밀었다. 

“앞면만 긁히고 뒷면은 멀쩡해서 괜찮을 거 같아요. 여기 나올만한 건 다 나온 거 같죠? 한번 대보기만 해봐요, 형.”

카드키를 받아들고 디지털 도어록에 갖다 대보았다. 삐빅, 카드 인식음와 함께, 빨간 불빛이 두어번 깜박이더니 초록색으로 변했다. 이윽고 철커덕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잠금 해제가 되는 소리가 들렸다.

“되네?”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문고리가 저항 없이 돌아갔다. 종민은 문을 여는 대신, 뒤를 돌아 로비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갈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인데,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느낌이 안 좋을까. 

그가 망설이는 사이, 잠금장치가 삐-삐-삐 소리를 내며 다시 잠겼다.

“종민이 형, 무슨 문제 있어요?”

평소라면 이미 문을 열고도 남았을 사람이 망설이는 모습에 병재가 물었다. 종민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탈출러로서 수많은 장소를 탈출해왔고 인적이 뜸한 버려진 건물도 처음이 아니었지만, 미지의 공간을 탐색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새로운 문을 열 때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공포를 이겨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종민은 호기심이 거의 늘 겁을 이기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느낌이 좀….”

 그렇게 말하면서도 종민은 다시 카드를 갖다 댔다. 느낌이 안 좋다고 마냥 로비만 맴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은 생각보다 두껍고 묵직했다. 힘을 줘서 문을 힘껏 젖히자, 어두컴컴한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자, 움직임을 포착한 센서등이 켜지면서 복도를 회색으로 물들였다. 텅 빈 공간 끝에 있는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긴 아무것도 없네?”

동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탈출러들도 의아함을 느꼈지만, 별 망설임 없이 다음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 어쩌겠는가,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 복도를 가로질러 반대편에 도착하자, 그전까지는 몰랐던 소음이 작게 들렸다. 문 너머에서 낮게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정체불명의 기계 소리. 어쩌면 이곳은, 그들이 초반에 짐작한 것처럼 마냥 버려지고 잊혀진 공간이 아닐지도 몰랐다. 이번엔 종민은 망설임 없이 카드키를 갖다댖다.

껌껌한 어둠이 그들을 맞이했다. 슬슬 익숙해질 법한 패턴이었다. 새로운 문을 열 때마다 그들을 맞이하는 칠흑 같은 낯선 공간.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문을 열자, 바닥에 낮게 깔린 희뿌연 연기가 자유를 만끽하듯 스멀스멀 문턱을 넘어와 발목을 간지럽혔다. 

종민이 재빠르게 다시 문을 닫았다.

“여, 연기 뭐야?”

“다들 괜찮아요?”

“그런 거 같은데…. 몸 상태 이상한 사람 있나.”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탈출러들은 서로 상태를 확인했지만, 호흡곤란이나 두통 같은 이상 증상을 호소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들이마신 연기가 극소량이어서 그럴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문을 넘어온 연기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퍼져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제 어떡해요? 만약 이게 전에 검은 탑 때랑 비슷한 상황이라면….”

병재의 말에 탈출러들은 하나같이 미래대학교 지하 깊은 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의문의 가스가 연구원 여럿을 죽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의문점이 하나둘 떠올랐다. 여기는 연구소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가스가 새고 있지? 게다가 쓰러져있는 사람들도 없었다. 로비에는 오래된 핏자국같이 기분 나쁜 얼룩만 여기저기 묻어있을 뿐이었는데, 혹시 가스를 흡입하면 각혈하나?

이런저런 추측이 오갔지만, 확정지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니면 되돌아가서 창고에 쓸만한 게 있는지 한번 볼까? 하다못해 마스크라도 있을 수 있잖아?”

“근데 마스크가 도움이 될까?”

“글쎄요…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마스크? 마스크가 있었나?”

“아까 그런 건 못 본 거 같은데… 호동이 형은 보셨어요?”

탈출러들은 긴가민가해 하며 다시 뒤돌아서서 로비로 이어지는 문으로 향했다. 종민이 카드키를 대자, 빨간 불빛이 깜박거렸다. 전처럼 금방 초록으로 바뀌며 잠금이 해제될 줄 알았는데, 기계가 아까와는 다른 소리를 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거 왜 안 열려?”

종민은 다시 한번 키를 가져다 댔다. 삐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형이 잘못 대신 거 아녜요?”

신동이 카드를 대신 받아 디지털 도어록에 대었다.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게 왜 이러지?”

신동이 다시 한번 시도를 해보았다. 익숙한 삐빅 긍정음이 들리며,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지 그게 그들이 앞둔 로비 문이 아니라, 저 멀리 등 뒤에서 들려왔을 뿐.

“어?”

뭔가 잘못됐다. 머리가 이해하기도 전에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복도 반대편의 열린 문에서 희뿌연 가스가 터져 나왔다. 조금 전 바닥을 기며 발목을 핥던 정도와 비교될 양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복도가 안개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뭉게뭉게 피어나오는 가스는 빠르게 복도를 점령하며 탈출러들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열린 문 뒤편, 검은 암흑 속에서 레이저처럼 붉게 빛나는 여러 쌍의 눈이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문 열어!”

“빨리빨리!”

저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덧 복도에 가득 들이찬 연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동료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노이로제 걸릴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삐삐삐 소리가 문 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걸 알려줄 뿐이었다. 숨을 참고 부서질 듯이 문을 내리쳐도,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뿌예지던 시야는 몇초 못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전국 곳곳 산발적으로 내리는 비는 저녁 들어 점차 확대될 예정입니다. 밤사이 많은 양의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되며, 돌풍과 벼락을 동반해 요란하게 내리는 지역도 있겠습니다. 피해 없도록 주의하셔야겠습니다. 내일 역시 정체전선의 영향으로….”

낮은 볼륨으로 틀어놔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기상캐스터의 일기예보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기댄 어깨를 통해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의식이 돌아오면서 느껴지는 익숙하고도 편안한 흔들림에, 종민은 눈을 뜨지 않고도 자신이 차에 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형, 종민이 형! 정신 차려요!”

낮고 급박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게 느껴졌다. 종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꽤 편안한 상태여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대로 조금만 더 눈을 붙이고 싶었다. 

“종민이 형!”

 계속해서 다그치는 병재의 목소리에 ― 이젠 병재라는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종민은 억지로 눈을 떴다. 꽤 오래 잤는지 몸이 찌뿌둥했다. 하품을 삼키는 그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택시 기사의 뒷모습이었다. 

잠깐, 택시??

종민은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푸르게 우거진 산림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뭐야? 우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 원 참. 비 소식 있는데도 왜 굳이 꾸역꾸역 산속에 들어가려는지 모르겠네.”

택시 기사가 투덜거렸다. 종민이 눈을 끔벅거렸다.

“ㅇ,예?”

“그냥 혼잣말이에요, 혼잣말.” 

시선은 전방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누가 봐도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종민이 무슨 뜻이냐고 되묻기 전에, 병재가 팔을 살살 잡아당겼다. 딱히 시비 걸 생각이 아니라 순수하게 물어보려 했던 거지만, 일단 순순히 입을 닫고 좌석에 등을 기댔다. 백미러로 남자가 도로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종민은 옆 좌석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병재야, 우리 거기에 있지 않았어?”

중요 맥락이 다 빠져있는 질문에도 병재는 찰떡같이 종민의 뜻을 알아챘다. 그 역시 조용하게 답했다.

“맞아요. 연기 흡입하고 정신을 잃은 거 같은데 눈 떠보니까 택시 안이더라고요. 저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요.”

“호동이 형이랑 애들은?”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우리 둘밖에 없었어요.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그러게. 걱정되네.”

둘이 낮게 속닥거리는 사이, 택시는 산길을 벗어나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대화를 잠시 멈추고 창문을 살짝 내리자,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우거진 수풀과 굽이치는 물줄기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혼란스럽지만 않다면, 잠시 갈 길을 멈추고 차에서 내려 여유를 만끽하고 싶을 만큼. 그러나 알 수 없는 나머지 동료들의 행방에 그들의 심정은 점차 몰려오고 있는 먹구름처럼 잿빛이었다.

다리가 꽤 낮게 지어져서 조금만 비가 많이 와도 물에 잠길 것 같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병재가 손을 툭툭 쳤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듯한 하늘에서 눈을 뗀 종민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병재가 곁눈질로 기사를 가리켰다.

“근데 저분 어디서 본 거 같지 않아요? 낯이 익은데.”

“그런가?”

종민은 다시금 백미러를 통해 남자를 살펴보았다. 택시 기사를 하기에는 젊은 편이긴 하나, 그 외에 특출난 점은 없었다. 병재의 말을 듣고 보니 어딘가 익숙한 거 같기도 한데… 너무 빤히 쳐다봤던 탓일까, 거울을 통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종민은 재빨리 시선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리를 건너자 산 중턱에 위치한 펜션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생동물의 접근을 막는 견고한 울타리와 널찍한 마당,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3층짜리 건물. 산장 느낌 물씬 나도록 목재로 마감한 것과 뒤로 보이는 산맥을 모방한 듯한 뾰족한 삼각형 지붕이 인상 깊었다.

잠깐만, 삼각형 지붕?

“저게 살인산장 아냐?”

“네?”

뜬금없이 터져 나온 종민의 경악한 외침에 병재도 종민쪽 창문으로 붙어 밖을 내다보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진 택시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저기 지붕이 그 포스터에 나온 거랑 닮지 않았어?”

“어? 진짜 그런 거 같은데요?”

엄습하는 불길함에 종민과 병재는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말은 안 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 가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러나 얄궂게도 택시 기사의 모습을 한 운명은 그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도착했으니 꾸물대지 말고 내려요. 비 내리기 전에 돌아가고 싶으니까.”

기사는 투덜거리며 창문을 가리켰다. 어느새 비를 흩뿌리기 시작한 구름에, 앞유리창에 물방울 자국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저기, 중요한 걸 빼놓고 왔는데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면 안 되겠죠?”

병재가 조심스럽게 묻자, 기사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미덥지 않다는 표정으로 둘의 얼굴을 뜯어보며 천천히 답했다.

“안될 건 없죠. 일단 여기까지 요금부터 내면.”

기사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미터기를 툭툭 치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부분이 걱정되어 떠올랐다. 택시비는 어쩌지?

“가만있자, 지갑을 어디 뒀더라.”

어색한 말투로 시간을 끌며 주머니를 더듬는 병재를 따라 종민도 자기 몸을 더듬었다. 이제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바지 뒷주머니에 불룩한 뭔가가 느껴졌다. 지갑을 꺼내 펼치자, 약간의 현찰이 들어있었다. 택시비를 내기에는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병재의 지갑에 들어있는 돈과 합치니 겨우 요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길 벗어나서 내야 할 금액인데… 애석하게도 둘의 지갑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카드는 없었다. **페이로 지불할 수 있으려면 좋으련만, 아무리 몸을 뒤지고 뒷좌석과 바닥을 살펴봐도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그, 혹시, 여기 산속을 빠져나가면 근처 은행에 잠시 세워주실 수 있을까요? 나머지 요금을 낼 돈이 없어서….”

병재가 최대한 공손하게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미터기를 리셋하고 그들을 돌아보는 기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쩐지 둘이 계속 쑥덕거리는 게 수상하더라니…. 니들 남 등쳐먹고 사는 사기꾼이지? 내가 이런 일 한두 번 당한 줄 알아? 경찰 부르기 전에 당장 내려!”

“ㅇ, 예? 저희 그런 사람 아녜요!”

종민이 해명하려 했으나, 기사는 이미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다짜고짜 차에서 내리더니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억지로 끌어내질까 잔뜩 겁먹은 종민은 반쯤 뒤로 누워 병재에게 기댔다. 

“내릴게요, 내릴게요! 일단 내려서 얘기해요! 형, 괜찮아요?”

“어, 어….”

버티다간 정말 험한 꼴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둘이 차에서 내리는 사이, 기사가 차 뒤편으로 돌아가 트렁크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작은 캐리어 가방 두 개를 꺼내 펜션 쪽으로 힘껏 밀어버렸다.

“엥? 저거 우리 거야??”

종민과 병재가 있는지도 몰랐던 짐을 보고 잠시 갈팡질팡하는 사이, 기사는 다시 택시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가방을 살펴보려던 병재가 다시 뒤돌아섰다.

“기사님, 잠깐만요!”

병재가 창문을 두드려도 택시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핸들을 틀어 차를 돌리기 시작했다. 거친 운전에 병재가 다칠까 싶어 종민은 동생을 빠르게 뒤로 끌어당겼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기사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씨발, 좆같네.”

“뭐, 뭐 같다고? 저, 저게 말 함부로 하네!”

뒤늦게 발끈한 병재가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택시의 뒷모습에 대고 손가락질했다. 종민은 맥 빠진 표정으로 택시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걸 바라보았다.

“이제 어떡하지?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종민의 말대로 기사와 실랑이하는 사이 한두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병재는 한숨을 내쉬며 내팽개쳐진 캐리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게요. 비라도 피하려면 안에 들어가야 하나… 어?”

“왜 그래?”

갑작스러운 탄성에 의문을 표하자, 캐리어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병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제가 진짜로 쓰는 가방인데요?”

종민도 그제야 나머지 가방을 살폈다. 역시 익숙한 색깔과 브랜드의 캐리어였다.

“어? 나도! 그러고 보니 지갑도 내 거였는데? 신분증이랑 카드는 하나도 없었지만.”

다시 한번 지갑을 꺼내 살폈다. 역시 평소에 들고 다니는 그 지갑이 맞았다.

“뭘까요, 이게 다. 분명 우린 그 의문에 장소에 있었는데….”

“그러게. 꿈은 아닌 거 같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제안하는 병재도, 고려하는 종민도 썩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대로라면 비에 쫄딱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게 뻔했다.

“그래, 한번 가보자.”

굳은 다짐과 함께 캐리어를 끌며 종민이 앞장섰다. 두어개의 계단을 올라 숲속의 풍경을 반사하고 있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시원하고 쾌적한 내부가 그들을 반겼다.

카운터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초면이 아니었다. 무뚝뚝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며 몸을 일으키는 사내를 보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들을 압도한 건 거구의 몸집이 아니었다. 그가 쓰고 있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하키 가면 때문이었다.

박강인. 살인산장의 주인은 박강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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