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공간

하얀 공간 (3)

3화: 하얀 공간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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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알립니다.


숨 막히도록 무겁게 짓누르는 공기 속, 고요한 병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곤 침대 옆, 환자 모니터링 장비의 규칙적인 심장박동 신호음뿐이었다. 삑-삑-삑 끝없이 이어지는 소리를 음악 삼아 리듬을 타듯, 검은 화면 속 각양각색의 선들이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그중 하나를 하염없이 눈으로 따라 그리던 병재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한숨과 함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병원 침대에는 종민이 미동 없이 누워있었다. 들숨과 날숨에 따라 가슴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인공호흡기에 옅은 김이 서렸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낯설기 짝이 없는 형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진 병재는 얼마 못 가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어둠의 별장에서 천마도령, 그리고 천세만세교와 사투를 벌인 지 일주일이 훌쩍 지났지만, 섣부른 제사 종례로 쓰러진 종민은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보고 어깨를 흔들어봐도 종민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탈출러들은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종민을 즉시 병원으로 옮긴 것까지는 좋았으나, 의사들은 모든 검사 결과 수치는 정상인데 왜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원인불명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뭐, 당연한 얘기였다. 애초에 현대의학은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보니, 무당이니 빙의 시도니 진짜 원인을 백번 얘기해봤자 그런 주장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이 사태의 해결방안을 알고 있는 건 천마도령의 심복, 오은팔이 유일할 테지. 그러나 그와 다른 신도들은 천마도령이 돌아온다고 굳게 믿고 있어서인지, 경찰에 넘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정보를 알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곁을 지켜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암울한 현실에, 병재는 괜스레 이불을 좀 더 당겨 종민을 덮어주었다. 

"괜찮을 거예요."

옆에 앉아 있던 피오가 조용히 위로했다.

"그냥 이렇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잖아. 그리고 아직 종민이 형을 깨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창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신동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호동이 그 소리를 듣고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그래, 아직 모르는 거다. 벌써 이렇게 축 처져있을 필요 없어."

힘내라고 병재의 어깨를 툭툭 친 맏형은 나머지 동생들도 돌아보며 격려를 북돋아 줄 명언을 장전했다. 하지만 호동이 제대로 본인의 소신을 전파하기도 전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태껏 멍하니 벽에 걸린 시계만 쳐다보고 있던 동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오셨나 보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한 중년 남성이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 양복을 남자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동현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종교문제연구소의 박마가 목사입니다."

나머지 탈출러들과도 짧은 인사를 마친 박마가는 희생자들의 유족을 대신해 천마도령과 천세만세교의 만행을 밝혀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분이 김종민 씨겠군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침대로 다가간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탈출러들의 시선 아래, 종민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혹시 종민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내본 이메일이었다. 다행히 박마가는 선뜻 도와주겠다고 응했지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짧은 검진을 마친 후에도 박마가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자, 초조해진 호동이 조심스레 물었다.

"목사님, 종민이는 어때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이메일로 설명해주신 여태까지 있던 모든 일과 오늘 직접 봬서 확인한 상태를 종합해보니...  상황이 썩 좋진 않네요. 처음 천해명과 천마도령의 혼이 들어갔을 때도 쓰러졌다 했죠?"

"예, 잠시 의식을 잃었지만 몇분 안 돼서 바로 깨어났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름없는 형의 모습이었어요. 천세만세교에 따로 끌려간 후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사 중에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해요. 그 후에 의식을 잃어버렸어요."

병재가 덧붙이자, 박마가는 조금씩 퍼즐이 맞춰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까지는 종민 씨의 영적 힘이 우세했는데, 제사로 인해 타격을 받은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악귀들의 힘이 세지면서 위태로운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균형... 이요?"

의식이 없는데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탈출러들의 떨떠름한 표정을 본 박마가는 이해하기 쉽게 더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네. 퇴마사로서 상당한 능력을 갖추고 있던 조마테오 원장을 살해한 천해명과 천 명의 희생자를 낸 천마도령, 이 둘을 무의식적으로 붙잡고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게 순수한 영혼입니다. 정식적인 훈련을 받았더라면 이 악귀들을 단순히 누르고 있는 게 아닌,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요. 그래서 제사로 인해 타격을 받았어도 이 정도로 유지가 되는 겁니다. 아슬아슬했어요. 종민 씨의 힘이 조금만 더 약해졌더라면 두 악령 중 하나에 바로 잠식되어 빙의됐을 겁니다."

"저희가 조마테오 원장님이 쓰시던 퇴마 방법을 알고 있긴 해요. 이미 한차례 천해명한테 써보기도 했고... 근데 그런다고 악령이 소멸하지는 않더라고요. 섣불리 퇴마했다가 다른 피해사례가 생길까, 소멸 방법을 찾을 때까진 보류하고 있었는데... 이젠 가능할까요?"

혹시나 해 꺼낸 제안이었지만, 박마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퇴마란 말 그대로 악귀를 물리치는 의식이죠. 그렇지만 강제로 몰아내는 만큼 유의할 점이 있어요. 퇴마를 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악령이 두 손 들고 순순히 물러나지 않죠. 온몸으로 발악하며 몸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데, 이때 부마자에게도 타격이 있기 마련입니다. 종민 씨의 경우엔 악귀가 둘인데다가, 이미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무턱대고 퇴마 시도를 했다가는 오히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요.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좀 더 안전한 방법은 종민 씨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위태로운 균형이 언젠가 깨질 날이 올 겁니다. 한쪽이 이기는 때가 올 거란 말이죠. 종민 씨가 이겼다면 평소와 다른 없는 모습으로 혼수상태에서 깰 겁니다. 힘을 되찾아 악령들을 눌렸다는 뜻이겠죠. 그럼, 그때 가서 악귀를 소멸시키는 방법을 배워 비교적 안전하고 깔끔하게 이 사태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겁니다." 

한 줄기의 희망이 보이는듯했으나, 이건 답변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일이 잘 풀렸을 때를 가정한 대답. 조금 안심한 듯한 다른 탈출러들과는 달리, 신동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 반대 상황의 경우를 물어보았다.

"만약 천해명이나 천마도령이 이긴다면요?"

"천해명 혹은 천마도령이 이긴다면... 빙의된 상태로 깨겠죠. 그럼 퇴마하는 수밖에는 없겠네요.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다만 문제가 있다면, 빙의된 상태에서 깨어날 때를 대비해 숙련된 퇴마사가 옆을 상시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대비하기가 쉽지 않아요. 당장 내일이 될지, 몇 년 후가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한쪽이 지쳐 포기할 때까지 내면의 싸움은 계속될 테니까요."

뭐가 됐던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실에 탈출러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마가는 다시 입을 뗐다.

"저는 여러분이 천세만세교의 추악한 진실을 밝히고 가담한 자들이 처벌받을 수 있게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신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희생자들의 유가족도 깊이 감사하고 있고요. 사이비종교의 피해자들을 돕는 게 제 일인만큼, 종민 씨가 안전하게 깰 수 있도록 최대한 돕고 싶습니다."



그는 잠시 뜸 들이다 말을 이었다.

"종민 씨를 빨리 깨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리스크가 꽤 큽니다. 도리어 여러분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요. 그래도 고려해보시겠습니까?"

미동 없이 누워있는 종민을 빤히 바라보던 병재는 고개를 들어 박마가과 눈을 마주쳤다.

"뭔가요, 그 방법?"

"대략 설명해드리자면, 이론상으론 간단합니다. 외부에서 안전하게 깨울 방법이 없다면 내부에서 일을 진행해야겠지요. 종민 씨의 무의식 깊이 들어가 그를 깨우는 것입니다."


며칠 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판주에 있는 한 신축 건물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심리수사국"이라고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위축되는 명칭에 덜컥 겁이 나설까,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탈출러들은 잠시 머리를 맞대고 낯선 기관명에 대해 추측해보았지만, 경찰 쪽 관할일 확률이 높다는 거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마냥 주차장에서 서성일 수는 없는 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 어때라고 서로를 안심시키며 출입구로 향했다. 

빌딩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마가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인사를 마친 탈출러들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이리저리 바삐 오가는 사람들은 탈출러들에게 곁눈질도 주지 않았다. 특이점이라면, 경찰복 사이사이에 연구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꽤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눈으로 좇던 흰 가운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자, 피오는 고개를 돌려 박마가한테 질문했다.

"오컬트적인 방법으로 무의식에 들어갈 줄 알았는 데 전혀 아닌가 봐요. 여기 뭐 하는 데예요?" 

"심리수사국이란 범죄자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여러 수사 기법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경찰청 신설 부서입니다. 이렇게 고안된 수사 기법이 상용화되어, 현재 과학수사의 단점을 보완하고 한계를 넓혀 여러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범죄 예방, 진실 규명, 미제 사건 해결 등, 다방면으로요. 저 역시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의 심리에 대해 몇 번 자문을 받은 적 있어, 이렇게나마 여러분께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된 거고요."

그제야 왜 연구원들이 많은지 이해가 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과학적이고 체제적인 곳이네요."

"네, 전에 말씀드린 무의식 탐사 기법도 이곳에서 개발한 기술입니다. 다만, 아직 현장에 도입되기 전이라 일반인 투입 승인이 떨어질지는 미지수였어요. 이건 순전히 제 추측이지만, 성공만 한다면 의식불명인 환자를 깨울 수도 있는, 의학적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란 판단하에 허가가 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죠. 종민 씨에겐 악귀가 붙어있으니까요. 그로 인한 위험부담이 꽤 큰 만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 번 더 상의하셔도 좋습니다. 지금이라도 무르기엔 늦지 않았으니까요."

"종민이는 지금 어때요?"

탈출러들이 알기로는 종민은 몇 시간 전 이곳으로 옮겨져, 간단한 검사 후 무의식 탐사를 위해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조금 전에 잠시 뵙고 왔는데... 확실히 전보다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무의식 탐사 기법을 제외하더라도, 만약 빙의된 상태에서 깨어날 것에 대비해 대책을 세워두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동은 심각한 표정으로 동생들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마냥 손 놓고 기다리는 거보단 낫지 않겠나?"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훈훈한 대답을 고대했던 맏형의 기대를 잠시나마 박살 내놓았다.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면 그냥 기다리는 게 낫지 않아요?"

"시간 생각보다 금방 가요."

진심이 아닌 걸 알면서도 호동은 기가 찬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야, 너희들은―"

"할게요! 당연히 해야죠."

눈치껏 빠르게 끼어든 병재가 대신 답하자, 신동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에요, 호동이 형. 당연히 종민이 형을 구해야죠. 안 그럴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다른 탈출러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박마가가 미소 지었다.

"천마도령과 그의 신도들을 상대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도 느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을 구하려 하시다니 정말 대단한 분들이시군요. 세부 사항은 유심희 박사님께서 알려주실 겁니다. 아, 마침 저기 오시는군요."

저 멀리서 하얀 연구 가운을 입은 여자가 다가왔다. 자신을 유심희 박사라고  소개한 여자는, 안경을 고쳐 쓰며 즉시 본론으로 들어가 무의식 탐사 기법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의식 탐사 기법이란, 말 그대로 용의자의 무의식에 연결해 탐사자가 그 무의식을 실제상황처럼 인식하고 살펴봄으로써 용의자의 생각이나 의도를 파악하는 용도로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오늘은 원인불명의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를 깨우는 게 목표입니다. 자, 따라오시죠."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적힌 보안 문을 지나자 길게 늘어선 복도가 보였다. 여러 방을 지나쳐 어떤 문 앞에 멈춰선 유심희 박사는 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제법 널찍한 연구실은 한쪽 벽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기계장치와 스크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일하게 빈 벽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달려있었고, 그 너머로는 머리에 여러 개의 패치가 부착된 채 누워있는 종민이 보였다.

"보시다시피 이곳에서 저희가 모니터링하겠지만 아직 무의식으로 들어간 탐사자와 연락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바깥에서는 알 방도가 없기에 도움을 드리기도 힘듭니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분을 깨우기는커녕, 모두가 혼수상태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탈출러들은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미 몇 번이나 받았던 질문이었고, 그때마다 답은 한결같았다.

당연히 해야지.

"네, 할게요."

탈출러들의 대표로 병재가 답하자 유심희 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복도 끝에 있는 탐사실에서 대기하시면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유의 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 인사를 하고 탈출러들은 박사가 알려준 복도 끝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유리 체임버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외에는 한쪽 벽에 모니터가 달려있을 뿐, 방은 텅 비어있었다.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체임버 주변을 기웃대고 있는데, 박마가 목사가 따라 들어왔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단... 시도는 해봐야죠."

"알겠습니다...."

아직 걱정이 채 가시진 않았는지, 박마가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당부의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무의식이란 아직 밝혀진 것이 거의 없는 미지의 땅,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죠. 어쩌면 무의식이란 우리의 영혼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즉, 그 속에서 천마도령이나 천해명을 맞닥트릴지도 모르니 부디 조심하세요.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들을 막아서거나 혼란에 빠트리려 할 테니까요. 혹시 종민 씨를 찾지 못하거나 악령들의 방해로 같이 출구에 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여러분만이라도 빠져나오셔야 합니다. 현실 세계로 복귀하셔야만 종민 씨를 도울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있어요. 돌아오지 못한다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됩니다."

"걱정 마세요, 목사님. 반드시 종민이를 구해올게요."

"그리고 하나 더. 무슨 일이 있어도 종민 씨가 그곳이 무의식, 즉 꿈속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안 됩니다."

"왜죠?"

"루시드 드림(Lucid dream). 흔히 자각몽이라고 하죠.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자각한 후에는 모든 걸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악몽으로 변질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중에 공포라는 감정에 더 힘을 실어주게 되면 악귀들이 그걸 이용할 여지가 생기거든요. 꿈에 휩쓸려가게 될 수도 있고요. 그럼 종민 씨도, 여러분도, 훨씬 더 위험해집니다."

"네, 명심할게요."

그 순간, 모니터가 켜지면서 유심희 박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모든 준비는 마쳤습니다. 여러분들의 목적은 무의식으로 들어가, 김종민 씨를 찾은 후, 같이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박사의 말이 끝나자, 유리 체임버가 열리며 엔트리 스퀘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움도 잠시, 탈출러들은 지시에 따라 머리를 모니터 방향으로 두고 누웠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무의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출구는 자연스레 나타날 것입니다. 불빛에 실명할 위험이 있으니 눈을 꼭 감아주세요. 번쩍거림이 멈춘 뒤, 5초 후에 눈을 뜨시면 됩니다."

눈을 꼭 감아도 느껴졌다. 낯선 여정 속, 맞닿은 팔로 전해지는 동료들의 따스한 체온이. 그 온기에 의지해 미지의 세계로 의식을 맡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감은 눈꺼풀 사이로 번쩍거리던 붉은 불빛이 멈췄다. 탈출러들을 속으로 5초를 세어보았다.

"이제 눈을 떠도 되겠죠?"

"다 같이! 하나, 둘, 셋!"

맏형의 구호에 맞춰 눈을 뜨자, 곧게 뻗은 철창문이 그들을 맞이했다. 눈을 감을 때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깨어난 탈출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상보다 훨씬 생생한 감각에 정말 무의식 속으로 들어온 건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쇠창살이라면 감옥인가? 가장자리에 누워있던 신동은 온갖 추측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려는데, 벽이어야 할 측면에서 무언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으아악!"

엉겁결에 소리 지르자 곁에 있는 동료들이 덩달아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뒷걸음치며 다시 살펴보니 눈이 마주친 것은 다름이 아닌 거울 속의 자신이었다. 신동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깜짝이야. 왜 거울이 여기 있어...."

"여기, 3면이 거울이에요."

병재의 말이 옳았다. 철장문을 제외한 나머지 벽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닿을 정도의 커다란 거울로 덮여있었다. 마주 보고 있는 거울 중 하나를 들여다보자, 수백 명의 탈출러들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거 같은데? 이거 봐봐."

동현이 철장문 옆에 위치한 패널을 가리켰다. 여러 개의 버튼이 1열로 늘어서 있는 게, 확실히 승강기의 운전반과 유사했다. 문제는, 층수가 적힌 글자를 누군가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버린 듯,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네요.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엘리베이터와 비교하자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지만...."

"혹시 이걸 타고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종민이 형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려면 우리가 지금 몇 층인지부터 알아야 할 거 아이가."

"아, 그렇긴 한데...."

패널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역시 아무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나마 구분할 수 있는 거라곤 맨 밑에 있는 열림과 닫힘 버튼뿐이었다.

"아니면 이 층부터 살펴볼까요?"

창살 사이로 밖을 내다보자, 눈이 아플 정도로 유난히 새하얀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층으로 향하는 계단도 흰색, 복도 끝에 보이는 문도 흰색. 심지어 엘리베이터의 창살과 버튼도 흰색.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백색이었다. 아니, 단지 하얗다는 느낌을 넘어, 다른 색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각양각색의 탈출러들만이 이 퇴색된 세상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를 기시감에 피오가 속삭이듯 물었다.

"원래 꿈을 흑백으로만 꾸기도 해요?"

"그럴 수도 있지 않나? 근데 이건 흑백이라기보단 거의 그냥 백(白)인데?"

"종민이 형이라면 왠지 되게 컬러풀하고 천진난만한 꿈을 꿀 거 같았는데 예상외네요. 좀 삭막하다고 느껴질 정도?"

"일단 나가서 살펴봐야겠지?"

잠시 머뭇거리던 호동은 손을 뻗어 열림 버튼을 눌렀다. 덜커덩 소리와 함께 창살이 한쪽으로 접히며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섣불리 내릴 생각이 없는듯했다. 그저 미어캣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문밖을 주시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먼저 용기를 낸 맏형이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데?"

한 발짝, 또 한 발짝. 두세 걸음을 내딛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동생들은 그제야 한 명씩 호동의 뒤를 따라 승강기를 벗어났다. 앞서가던 호동은 걸음을 멈추고 계단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계단에 맏형이 혀를 내둘렀다.

"야... 이거 다 둘러볼 엄두가 안 나는데?"

"저기부터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막내가 복도 끝에 위치한 문을 가리켰다. 탈출러들은 좋은 아이디어라며, 말 꺼낸 김에 뭐가 있는지 정찰하고 오라고 피오를 앞세웠다. 형들의 등쌀에 떠밀려 별수 없이 문에 다가선 그는, 혹여 소리가 날까 천천히 문을 열고는 작은 틈 사이로 안쪽을 살폈다.

"뭐 있어?"

동현이 목소리 낮춰 물어보았지만, 피오는 대답하는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탈출러들에게 돌아왔다.

"왜, 왜?"

"여기, 거기, 거기잖아! 조마테오 병원!"

"뭐?"

형들이 하나같이 잘못 들었나 두 귀를 의심하고 있자, 피오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병재의 팔을 잡고 문 앞으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아까보다는 문을 더 열어젖혀 내부를 보여주었다. 

막내의 말 그대로였다. 건물의 구조는 ―바닥에 핏자국이 없다는 것과 이곳 역시 세상 모든 색이 지워진 듯 하얗기만 하다는 점을 배제한다면― 보는 즉시 조마테오 정신병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똑 닮아있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원장실이, 그 반대편에는 특수치료실, 그리고 길게 뻗은 널찍한 복도를 따라 늘어선 여러 방까지, 모든 게 똑같았다.

병재가 헉하고 숨을 들이마시자, 나머지 탈출러들도 웅성거리며 복도 입구로 모여들었다.

"아, 왜 하필 조마테오야..."

불현듯 당시의 무서운 기억이 떠오른 신동이 투정 부리듯 말했지만 피오는 오히려 조금 안심한듯했다.

"생판 모르는 곳보다 낫지 않아요?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조마테오인지는 모르겠지만."

막내의 말에 동의는 해도 막상 안으로 발을 딛는 건 또 다른 문제인지라, 탈출러들은 하나같이 문 앞에 모여 서서 복도를 기웃거렸다.

"그때 조마테오 정신병원에서 여기가... 5층이었던가? 어느 방부터 살피는 게 좋을까요?"

쿵쿵쿵. 

병재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복도 끝에서 누군가 주먹으로 벽을 내려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질겁한 탈출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었다. 

"뭐, 뭐꼬?"

"누가 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는 소리 같던데...."

"아, 시작부터 무섭게 왜 이래...."

"어디 사람이 갇혀있는 건가? 설마 종민이 형?"

"종민이 형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초반부터 들이닥친 시련에 탈출러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직도 귓가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맴돌았고, 당장이라도 소음의 원인이 그들을 쫓아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승강기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한참을 숨죽이고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함 살짝 가서 보고 올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울상을 지으면서도 탈출러들은 아까보다 현저히 느려진 속도로 다시 5층 복도로 향했다. 좀 전의 알 수 없는 굉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모든 게 섬뜩하리만큼 고요했다. 호동은 숨죽인 채 선두에 서서 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다가갔다. 긴 복도의 반도 못 가서 맏형이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되돌아오자, 동생들도 재빠르게 계단 근처로 대피했다.

"왜, 왜, 왜요?"

"왕, 왕희열이 쓰던 그 방에서 들리는 소리야."

"네에?"

"아, 왜 하필...."

"열지마요, 열지 마! 종민이 형이 아니면 어떡해!"

그렇다고 해도 확인도 하지 않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도중 신동이 의견을 냈다. 

"아니면 우리 다른 방부터 갈까요? 원장실이나 특수치료실에서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저게 종민이면 어쩌려고?"

"여태까지 잘 버텼는데 좀 더 감금된 상태로 있어도 될 거 같아요."

그래도 큰형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병재가 거들었다.

"동이 형이 맞아요. 저 방에 있는 게 종민이 형이라면 그냥 조금 더 갇혀있던 셈이지만, 만약 천해명이나 천마도령이면 어떡해요? 섣불리 문 열다가 우리 다 죽을 수도 있어요."

일리가 있는 말에 호동은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탈출러들은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5층 복도로 진입했다. 

쿵쿵쿵.

또다시 들려오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탈출러들은 몇초 전의 다짐이 무색하리만큼 허둥지둥 원장실로 도망쳤다. 쫓기듯 들어선 이 방 또한 흰색인 걸 제외하면 모든 게 기억 속 장소와 일치했다. 마주 보는 두 개의 소파와 그사이에 자리 잡은 커피 테이블,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원장 책상까지 다. 

딱 하나, 테이블 위에 떡하니 놓여있는 분신사바 종이를 제외한다면.

"저게 왜 여기 있어?"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분신사바 옆에는 한 권의 노트가 놓여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테이블로 직행한 단서소리꾼은 공책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악령감옥에서 본 내용과 같은 분신사바 시행법이 적혀있었다. 혹시나 다른 단서가 나올까 싶어 나머지 페이지도 훑어보았지만, 텅 빈 공백만 그를 반길 뿐이었다. 병재는 다시 분신사바 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우리가 악령감옥에서 했던 거잖아요. 근데 그때는 귀사모가 이미 한 뒤라 선이 그어져 있었고, 우리는 그걸 보고 내용을 추리만 하면 됐었는데, 이건 아무 표시가 없어요."

책상 서랍을 열어보던 동현이 멈칫했다.

"우리가 직접 해봐야 해? 또?"

"그럴 수도 있어요."

"근데 우린 종민이 형만 찾으면 되는 거 아녜요? 이, 일단 여기 다른 단서가 있는지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탈출러들 중 그 누구도 섣불리 분신사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막내의 의견을 따라 다시 원장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병재는 손에 노트를 꼭 쥔 채 천천히 원장실을 둘러보았다.

조마테오 정신병원과 닮은 구조. 악령감옥에서 봤던 분신사바 판과 노트. 천해명. 천마도령. 그리고 종민이 형의 무의식.

설마?

"갑자기 든 생각인데, 아까 박마가 목사님이 그러셨잖아요. 여긴 종민이 형의 무의식 속이지만, 천해명이랑 천마도령이 갇혀있는 만큼, 그 악령들의 영향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요. 그리고 우리랑 천해명이랑 천마도령, 모두가 가장 얽혀있는 장소가 조마테오 정신병원이잖아요? 그래서 종민이 형의 무의식이 그걸 반영하지 않았나 싶어요." 

병재가 자기 생각을 말하자, 신동은 살피고 있던 액자를 내려놓고 커피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럼 이 분신사바도 천해명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종민이 형의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확실히는 모르는 거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호동이 심각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이게 만약 종민이 때문이라면, 우리가 이걸 해봐야 종민이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겠네? 위치를 물어본다거나 해서."

"네, 어쩌면요."

하지만 그 누구도 분신사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여전했다. 꿈속이라고 귀신이 튀어나오지 않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 아니, 오히려 꿈속이니까 귀신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단서를 찾으려 수색에 더 박차를 가했다.

불행하게도 원장실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다른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탈출러들은 하나둘 커피 테이블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누가 주문을 외울지 한참을 옥신각신한 끝에, 가위바위보를 진 병재와 신동이 펜을 마주 잡았다.

"그럼 종민이 형 위치를 물어볼까요?"

"지금으로선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잠시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주문을 외웠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말씀해주세요. 귀신님 오셨습니까?"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의구심이 든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한결 서늘해졌다. 맞잡은 펜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지더니, 천천히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동그라미에 안착한 펜을 본 탈출러들은 하나같이 놀라 호들갑을 떨면서도 계속해보라고 재촉했다. 펜을 잡고 있는 두 사람 다 금방이라도 필기도구를 내던져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그나마 정신줄을 잡고 있는듯한 병재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질문을 던졌다.

"조, 종민이 형은 지금 어디 있나요?"

그러자 다시 한번 펜이 저절로 스르륵 움직이며 하얀 종이에 피처럼 붉은 선을 그어나갔다.

ㅇ... ㅗ... ㅂ... ㅐ... ㄱ...

"503호? 거기 왕희열 방 아냐?"

펜이 멈춰서자, 병재와 신동은 몸을 부르르 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테이블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진짜로 저절로 움직인 거예요?"

막내의 질문에 병재가 인상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기분 진짜 별로야...."

괜스레 찝찝한 마음에 펜을 잡았던 손을 털고 있는데, 동현이 그 펜을 불쑥 얼굴에 들이밀었다.

"하나만 더 물어보면 안 돼? 천해명이나 천마도령이 어딨는지."

"아니, 종민이 형 위치 알았으니 됐잖아요. 이런 거 오래 할수록 안 좋단 말이에요."

"그냥 하나만 더 물어봐."

"형이 해요, 그럼."

"아, 아냐. 여기서 볼 건 다 본거지? 빨리 가자. 귀신이 들러붙으면 어떡해."

병재는 서둘러 말을 바꾸는 동현을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그 또한 이 공간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들을 따라 복도로 나왔다. 

좀전의 노크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숨쉬기 조심스러울 정도의 묵직한 긴장감은 한 발짝씩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그 무게가 더해져 탈출러들을 압박해왔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복도를 걸어 도착한 503호에는 예기치 못한 난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닫이문 손잡이는, 조금 전 먼발치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다.

"어? 자물쇠로 잠겨있는데?"

"일단 노크라도 해볼까?"

호동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몇초간 적막이 이어지더니....

"누, 누구세요?"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종민의 것이었다!

"종민아! 종민이 맞제?"

"호, 호동이 형?"

호동이 문손잡이를 힘껏 옆으로 당겼으나, 쇠사슬만 덜그럭거릴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동현이 가세해도 겨우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틈만 생겼을 뿐이었다.

"형, 괜찮아요? 좀만 계시면 곧 구해드릴게요!"

대답하는 종민의 목소리엔 안도감이 가득했다.

"다 온 거야? 와, 나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작은 문틈 사이로 종민의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그가 문 가까이 다가오자 하얀 벽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진짜 종민이 형 맞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나지!"

"형, 거기 열쇠 같은 건 없어요?"

"열쇠? 아니, 없어. 그보다, 천마도령, 천마도령 조심해!"

"엑? 천마도령이요?"

"어! 천마도령이 막 쫓아와서 여기로 도망쳤는데, 문을 뭐 어떻게 했나 봐! 꿈적도 안 해!"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신동이 중얼거렸다. 

"아, 혹시 천마도령이 종민이 형을 여기 가둬버려서 형이 못 깨어나고 있었던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호동은 문틈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종민아!"

"예?"

"지금 보니까, 천마도령이 여기 자물쇠를 걸어 놓은 거 같거든? 우리가 열쇠 찾아서 올 테니까 좀만 기다려라잉."

"에? 다 가는 거 예요? 한 명이라도 여기 남아있으면 안 돼요?"

"여긴 너무 뻥 뚫려있는 복도라서 위험해. 금방 올 거니까 좀만 기다려."

빨리 와요! 라고 소리치는 종민을 뒤로하고 탈출러들은 아직 둘러보지 못한 다른 방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특수치료실은 기억 속 그 장소처럼 작고 협소했지만, 방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테이블이 비교적 텅 비어있어서 그런지, 현실의 공간보다는 휑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탁자 위에 가득했던 촛불, 십자가, 다양한 마늘이 담긴 작은 병들은 다 어디 갔는지, 이름 없는 유골함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문의 반대편 벽에는 작은 CCTV 화면이 있었으나, 지하실 침대의 모습이 송출되고 있던 실제 병원과는 달리, 이 스크린은 망가진 듯 지지직거릴 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거 악령감옥에 있던 그 분골함 아니에요? 이름이 안 쓰여있긴 한데...."

피오가 유골함을 좀 더 자세히 살피려 집어 들자, 짤그랑, 안에서 무언가 굴러다니는 소리가 났다.

"어, 뭐지?"

청아한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유골함으로 쏠렸다. 뚜껑을 열어보니, 열쇠 하나와 낯익은 프레임 키가 탈출러들을 반겼다.

"이거, 벽에 꽂는 거!"

예상치 못한 수확에 탈출러들은 기뻐하며 격하게 막내를 칭찬해주었다.

"그럼, 종민이 형을 데리고 이곳 탈출할 때 이 사각 프레임을 사용하는 건가?"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여기저기 잘 찾아봐야겠다. 열쇠도 찾았으니 이 방에서 더 이상 나올 건 없나?"

워낙 작은 공간이라 그런지 더 둘러볼 것도 없는 듯했다. 다시 복도로 나가려는데, 아까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병재가 입을 열었다.

"저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드는데... 이런 말 해도 돼요?"

"와? 뭔데?"

"방금 얘기를 나눈 사람이 종민이 형이 맞긴 할까요?"

"그게 뭔 소리고?"

"좀 전에 한 분신사바가 자꾸 마음에 걸려요. 이상하잖아요. 현실이라면 어느 귀신... 이나 원혼이 대답해준 거라고 추측이 되는데 여긴 종민이 형 무의식 속이잖아요. 그러면 누가 우리 질문에 대답해준 걸까요?"

허를 찌르는 질문에 맏형은 잠시 당황한듯했다.

"그냥... 종민의 무의식이니까 종민이가 무의식적으로 그런 답을 준거 아닐까? 우리한테 도와달라고? 유심희 박사님이 무의식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했잖아."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이곳엔 종민이 형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를 유인하려는 천해명이나 천마도령의 짓이다?"

"네, 그럴 확률도 있다는 거죠. 잘은 모르겠지만, 왜, 괴담 같은데 보면 목소리로 사람을 홀리는 귀신? 요괴? 그런 내용도 있잖아요."

복잡해진 경우의 수에 탈출러들이 망설이자, 잠시 고민하던 동현이 결단을 내려주었다. 

"그래도 확인을 안 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열쇠를 찾으면 한 사람이 언제든 문을 닫을 수 있게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문 여는 사람이 살짝 보고 종민이 형이 아니라는 신호를 주면 바로 문 닫아서 다시 잠가버려야 할 거 같아."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피오가 망설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신동이 거들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어. 기껏 해봐야 다른 층도 둘러보면서 추리에 도움이 될만한 다른 단서를 찾아보는 건데, 503호에 있는 사람이 진짜 종민이 형이라면 형을 혼자 내버려 두긴 위험하잖아? 우리도 무작정 돌아다니기엔 위험한 것도 마찬가지고. 악령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아... 그럼 일단 문을 살짝 열어서 확인부터 해봐야겠네요...."

다음 작전도 정했겠다, 열쇠를 챙긴 탈출러들은 특수치료실을 나와 다시 503호로 돌아왔다. 발소리를 들은 종민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징징거렸지만, 탈출러들은 그를 반쯤 무시하며 작전대로 운동부를 앞세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를 마쳤다. 

철컥, 열쇠가 돌아가며 자물쇠가 풀렸다. 호동이 손잡이를 칭칭 동여매고 있던 사슬을 풀자, 문을 잡고 있는 동현이 한껏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천천히 문을 옆으로 당기자, 환자복을 입은 채 문 앞을 서성이고 있던 종민의 모습이 드러났다.

"종민아!"

"호동이 형!"

종민의 얼굴을 본 탈출러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 괜찮아요? 다치거나 그런 건 없죠?"

"어, 어, 괜찮아. 좀 오래 갇혀있던 거 같긴 한데...."

종민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탈출러들은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섰다. 현실에서는 피범벅인 침대와 벽에 피로 쓰인 전서체가 있었으나, 이곳은 그냥 평범한 병실인 것처럼 보였다. 열려있는 캐비닛에는 배낭이 하나 들어있었는데, 종민이 이미 뒤져봤는지 모든 지퍼가 열려있었다.

"종민이 형, 아까 천마도령한테 쫓겨서 여기 들어왔다고 했잖아요. 그럼 천해명은 어딨는지 알아요?"

신동의 질문에 종민은 고개를 저었다.

"천해명? 천해명은 잘 모르겠는데... 아, 근데 그, 쇠는 찾았어! 저기 귀신 동호회 가방에서."

종민은 웃으며 손에 꼭 쥐고 있던 프레임 열쇠를 들어 보였다. 신동은 반가워하며 열쇠를 건네받았다.

"아, 다행이다. 그러면 우리 나머지 하나랑 어떤 글자에 꽂아야 하는지만 알아내서 나가면 되는 건가?"

"근데 프레임 키가 3개가 아니라 4개일 수도 있어요."

병재가 정정해주자 신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4개 일수도 있네...."

"그럼 종민이도 찾았으니, 어서 여길 빨리 벗어나자."

맏형의 진두지휘에 따라 탈출러들은 병실을 한 번 더 둘러본 후, 서둘러 비상계단 복도로 향했다.

"어디부터 수색하는 게 좋을까요? 위층? 아니면―"

병재가 말을 꺼내는 그때, 등골을 섬뜩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방울 소리. 탈출러들은 너도나도 목소리를 낮추며 입에 손가락을 댔다.

"천마도령, 천마도령!"

숨을 죽이고 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다행히,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아래층이 아닌 더 먼 곳인듯했다. 계단 근처를 배회하던 천마도령이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는지, 방울 소리가 차츰 멀어져갔다.

주변이 다시 고요해지자, 탈출러들은 하나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층부터 가야겠네요."

6층에 도착한 탈출러들은 혹시나 소리가 새어 나갈까 싶어 살포시 문을 닫았다. 철커덕하고 문이 닫히자, 순식간에 복도가 어둠에 휩싸였다.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서로를 꽉 끌어안으며 간신히 비명을 삼켰다. 저 아래층 어딘가에 있는 천마도령이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길 바랄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튀어나와 그들을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탈출러들은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에요, 방금?"

"문 닫으니까 불이 꺼졌어. 마치 어둠의 별장처럼."

"아, 제발... 왜 또 이러는데...."

파도처럼 들이치는 공포감에 신동은 동료의 등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그런 그를 막내가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다행히 그때처럼 완전 암흑은 아닌 거 같아요."

병재의 말처럼, 아직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이 워낙 새하얘서 그런지, 어렴풋이 건물의 윤곽이 보였다.

"어디부터 가야 하지?"

"휴게실이 가장 가깝지 않아요?"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나아가던 탈출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켜야 했다. 휴게실의 투명한 유리창 너머에는, 수많은 마네킹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의 별장에서 꼿꼿한 자세로 서 있던 모형들과는 달리, 이 마네킹들은 평소 병원의 모습을 그대로 박제한 것처럼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아, 아니다. 우리 다른 곳부터 가면 안 돼요?"

막내의 거듭된 부탁 끝에, 탈출러들은 결국 그들이 머물렀던 병실부터 수색하기로 했다. 겁 없이 성큼성큼 앞장서는 종민을 선두로, 나머지 탈출러들도 무사히 605호로 들어왔다. 문을 닫자 저절로 들어온 불빛에, 탈출러들의 안색도 한결 밝아졌다.

"여기 완전 어둠의 별장 같네요. 마네킹도 그렇고, 문 열면 불 꺼지는 것도 그렇고."

"그럼 뭐 있나 한번 찾아볼까요?"

"아, 그거! 여기 그거 있었잖아요, 그쵸, 형?"

종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갑작스레 침대 옆에 놓인 서랍장으로 달려가는 동현을 바라보았다. 

"응? 뭐가?"

서슴없는 손짓으로 동현은 수납장에서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이거 손전등이요. 그때 형이 찾았잖아요, 기억 안 나요?"

눈을 몇 번 끔벅거리던 종민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 그래! 내가 찾았었지! 이제 기억나."

동현이 손전등을 켜서 벽에 비춰보려 하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신동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현이 형, 조심해요. 종민이 형이 여기가 꿈속인 거 깨달으면, 우리 모두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조마테오 정신병원에서 일어난 일은 되도록 언급 피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 맞다... 그래야지."

종민의 눈치를 힐끗 살폈지만, 다행히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듯했다. 침대에 정신 팔린 형의 모습에 안심한 파이터는, 곧바로 손전등을 켜고 곧바로 종민의 침대 벽, 기억 속 그 자리에 불빛을 비추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선명한 글자가 벽에 나타났다.

天馬永生.

예상하던 내용과 다른 글자가 나타나자 탈출러들은 흠칫했다. 천마영생. 천마도령의 팔에 새겨진 그 글자가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순히 특수형광물질로 적힌 현실의 문구와는 달리, 이 네 글자는 날카로운 도구로 새긴 듯 벽이 움푹움푹 패어 있었다. 유난히 깊숙이 파인 부분에서 퍼런 진물이 흘러나와 벽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색깔만 새파랄 뿐, 왠지 피를 연상시키는 섬뜩한 액체에 피오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천마도령이... 한 짓일까요?"

"그럴 확률이 높겠지."

"근데 저 파란 물은 뭘까?"

다른 탈출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종민은 침대 위로 올라가 손을 뻗었다. 흐르는 물줄기가 전서체를 따라 그리는 손을 적셨다.

"아, 형! 찝찝하게 그걸 왜 만져요? 이리와요."

막내가 타박하며 팔을 잡아끌자, 종민은 멋쩍게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궁금해서 그래, 궁금해서."

"그래도 그렇지, 뭔지도 모르는데 막 만지다가 큰일 날 수도― 어, 뭐야?!"

걱정 가득한 얼굴로 종민의 손을 살펴보려던 병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 파란 액체에 닿았는데, 형의 손은 깨끗하기만 했다. 몇 번이나 손을 앞뒤로 뒤집고 만져보아도 파란 색소가 묻어나기는커녕, 애초에 젖지도 않은 것처럼 아예 물기가 없었다.

"뭐꼬 이게...."

"벽에만 묻어나는 건가?"

동현이 벽과 맞닿은 침대에도 불빛을 쏘아봤지만,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혹시나 싶어 침대 밑에도 손전등을 들이밀던 그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 프레임에 머리를 박을뻔했다.

"바닥에도 물이 고여있어! 웅덩이가 꽤 큰데, 여기 계속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냐?"

급격히 불안해진 탈출러들은 기억을 더듬고 머리를 맞대며 정체 모를 액체에 대해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아무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유추가 이뤄질 리 없었다.

"다른 방에서 단서를 찾아봐야 하나? 여기엔 뭐가 없지?"

"네, 어서 다른 곳도 둘러봐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래도 이제 손전등이 있어서 다행이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탈출러들은 문을 열고 다시 어둠의 세계로 발을 디뎠다.

빠르게 다른 병실을 둘러보았지만, 프레임 키도, 새로운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발걸음을 돌려 아직 살피지 못한 휴게실로 향했다. 유리창 가까이 다가가자, 마네킹들이 하얀 환자복과 간호사복을 입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천마도령이 간호사들을 포섭하고 몇몇 환자들을 어둠의 별장으로 끌어들여 살해한 걸 떠올리니, 들어가기가 더욱 망설여졌다.

"여기 꼭 들어가야 해?"

차마 말하지 못했던 모두의 생각을 동현이 내뱉었지만, 맏형은 무거운 목소리로 그래도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냐고 답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섣불리 용기가 안 나는지, 호동은 한참의 머뭇거림 끝에 휴게실 문을 밀었다. 맏형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동생들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살얼음 위를 걷는듯한 긴장감 속에서, 탈출러들은 숨죽이고 휴게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퍼즐에 집중하는 환자 마네킹도 있었고, 책을 보거나 바둑알을 가지고 노는 마네킹도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간호사 마네킹들은 대부분 환자 근처에 서 있었다. 

기괴하기만 한 광경에 탈출러들은 섣불리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입구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뭐해? 빨리 찾고 나가야지!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아, 종민이 형, 제발 좀...!"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종민은 홀로 앞장서서 가장 가까이 있는 마네킹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가 마네킹 손에 들려 있던 책을 빼앗아 펼쳐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제야 조금 안심한 나머지 탈출러들도 프레임 키를 찾기 시작했다.

혹시 숨겨진 메시지가 더 있을까, 손전등으로 이리저리 불빛을 비춰보던 파이터의 눈에 낯익은 파란색이 잡혔다.

"어? 이거 봐봐! 빨리!"

탈출러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동현은 잘 보라며 손전등을 간호사에게 비춰보았다.

"여기 간호사한테 불빛을 비춰보면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그치? 근데 이걸 여기 옆에 있는 환자 마네킹한테 옮겨보면...."

하얀 불빛이 마네킹에 닿자, 전에는 안 보이던 자국이 생겨났다. 병실 벽에 쓰여진 숨겨진 글자처럼, 환자 마네킹 등 뒤에는 날카로운 무언가로 내리찍은 듯한 시퍼런 상흔이 있었다.

"잠깐만. 다른 환자들에겐 해봤어요?"

신동의 말에 따라 다른 환자 마네킹에 불빛을 비춰보자, 다른 자국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든 마네킹이 상흔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상당수가 등, 목, 허리, 배, 다리, 등등 몸 곳곳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이것도 천마도령이 한 짓 같은데.... 봐봐요, 환자들에게만 이런 자국이 있고, 크기가 딱 도끼날 크기에요. 장기두가 병원의 환자들이 실종된 것과 관련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받고 있었잖아요. 실제로 많이 어둠의 별장으로 데려가서 죽였고... 거기엔 마네킹도 많았고 옷도 많았고...."

"그럼 이 표시가 있는 마네킹들이 다 천마도령이 죽인 사람들이라는 거가?"

놀란 호동이 묻자 병재가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발. 빨리 둘러보고 여길 나가야 할 거 같아요.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한껏 조급해진 탈출러들은 흩어져서 다시 휴게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혹시나 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동현은 계속해서 손전등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폈다. 그러던 와중,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얼핏 붉은색이 스쳐 지나갔다.

온통 흰색과 푸른 도끼 자국만 있는 이곳에서 붉은색? 혹시 다른 탈출러인가 싶어 둘러보았지만, 그 누구도 빨간색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어? 이상하다...."

하얀 불빛이 천천히 휴게실을 훑기 시작했다. 싱크대를 기웃거리는 호동을 지나, 식탁에 둘러앉은 여러 마네킹을 스쳐, 유리창 밖의 복도를 주시하고 있는 종민에 닿는 순간― 

"찾았다!"

피오의 승전보에 모든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휴게실 한구석에 서 있는 막내는, 장기판 위에 놓인 낯익은 가짜 장기알을 가리켰다. 동그랗게 오려낸 왕뚜껑의 "왕" 자 아래에는 프레임 열쇠가 놓여있었다. 

"잘했어, 피오야! 그러면 우리 이제 3개 찾은 건가?"

"맞아요. 이게 세 번째."

프레임 키를 집으려 왕뚜껑에 손을 대는 순간, 휴게실의 마네킹들이 삐걱거리며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굴 없는 마네킹의 습격에, 탈출러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뒷걸음질 쳤다.

"도망쳐, 빨리!"

모두가 허둥지둥거리는 사이, 어느새 문 앞으로 이동한 종민이 소리쳤다. 무서운 속도로 탈출러들을 에워싸는 모형들을 호동이 힘껏 밀치자, 간호사 마네킹, 환자 마네킹 할 것 없이 볼링핀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길이 트이자, 탈출러들은 달려드는 마네킹들을 피해 헐레벌떡 복도로 달려 나갔다.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몰라 계단 앞에서 우왕좌왕하는데, 아래층에서 미친 듯이 울리는 방울 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한결 또렷하고 가까이서. 조금 전 소란을 들은 천마도령이 계단을 뛰어 올라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빨리, 빨리, 엘리베이터로 가!"

병재가 열림 버튼은 연타하자, 문이 꾸물거리며 열렸다. 다들 서둘러 승강기에 올라탔다. 그 와중에 종민은 거울로 둘러싸인 엘리베이터가 낯선지 연신 두리번거렸다.

"뭐 눌러?"

"아무거나, 빨리!"

저 멀리 계단 끝에서 천마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탈출러들이 잘 알고 있는 어둠의 별장의 그 착장 그대로였다. 화려한 한복과 갓에, 날이 번쩍이는 도끼까지. 신동이 재빠르게 맨 아래층 버튼을 누르자, 철장이 스르르 움직이며 문이 닫혔다. 

천마도령은 엘리베이터를 붙잡지 못할 걸 알았는지, 온 힘을 다해 도끼를 던졌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연장에 탈출러들은 기겁하며 몸을 웅크렸다.

종민을 제외하면.

철창 사이를 통과한 도끼는 곧장 종민을 향했지만, 그는 슬쩍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날아오는 무기를 쉽게 피했다. 쾅 소리와 함께 도끼가 벽에 박히자, 쩍 소리와 함께 거울이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유리가 산산조각이 날까, 탈출러들은 손으로 머리를 감쌌지만, 다행히도 거울은 금이 갔을 뿐, 깨지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코앞에서 탈출러들을 놓친 천마도령이 울부짖었다. 벽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소리는 덜컹거리는 승강기 소음에 묻혀 점점 멀어져갔다.

"하마터면 큰일 날― 으악!"

가슴을 쓸어내리던 병재는 기겁하며 거울을 가리켰다. 깨진 거울로 종민과 다른 사람의 모습이 조각조각 보였다. 천마도령이 아닌, 한복을 입은 또 다른 사람. 뒤로 묶은 긴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 처음 봤지만,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다.

"천해명!"

종민의 모습을 한 그는, 깨진 거울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피식,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다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아깝군. 그래, 다시 한번 얼굴 마주 보게 돼서 반갑네들."

비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바라보는 악령의 모습에 탈출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오갈 곳 없는 작은 엘리베이터 안, 꼼짝없이 천해명과 갇혀버린 신세가 되었음을 절실히 깨달으며.

카테고리
#2차창작
캐릭터
#천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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