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탈출 단편 연성

첫 만남

희망과 피노, 그 아이들의 첫 만남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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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연관이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 이 글은 "희망이와 피노가 만난다면"이라는 소재를 추천받아 쓴 연성입니다.  


“희망아! 최희망!”

덜컥,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의 환한 불빛이 어두운 병실을 비추자, 침대와 여러 의료도구로 가득 찬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누군가를 찾는 듯, 연구원은 자리에 서서 고개를 내밀곤 작은 방을 이리저리 살폈다.



“얘가 이럴 애가 아닌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연구원은 한숨을 쉬며 침대 밑을 한 번 더 살펴보고는 뒤돌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작은 방이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의료기기와 벽 사이 좁은 공간에 웅크려 있던 소년이 몸을 폈다. 급하게 숨은지라 발각될 위험이 꽤 컸지만, 연구원이 불을 켜지 않은 덕분에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방을 가로지르더니, 문을 살짝 열고 복도의 동태를 살폈다. 

희망연구소를 떠난 지 어느덧 3년. 열두 번째 생일을 앞둔 희망이의 삶은 희망연구소에 머물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좀비가 사라진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났지만, PDS 바이러스의 유일한 면역자인 희망이는 진실이 뉴스와는 다르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지구상에서 좀비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희망이는 지금쯤 매일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연구소가 아닌 또래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떠들썩한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희망이가 마냥 한 연구소에서 지낸 것은 아니었다. 이연구 소장이 치료제 개발에 성공하고 바이러스 보균자를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연구원들은 희망이를 보내줄 준비에 분주해졌다. 희망이의 새 가족이 돼줄 적합한 가정을 물색하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매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연구원들은 희망이를 위해 작은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케이크를 자르기도 전에 날아온 긴급 통신에 파티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다. 사자회라는 조직이 이연구 소장의 연구소에 침입해 치료제와 모든 연구자료가 손실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일이 있었던 후, 희망이는 즉시 안전을 위해 좀 더 큰 단체가 관리하는 연구소로 옮겨졌다. 연구원들이 미안해하며 상황 설명을 해줬고 희망이도 자신이 필요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지만, 다시 연구소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는 게 마냥 달갑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문일까. 희망이는 가끔 가슴이 답답할 때면, 그 아저씨들이 찾아오는 상상을 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좀비들에게서 희망이를 구출해주곤 홀연히 사라진 그때처럼, 다시 한번 찾아와 이 지긋지긋한 연구소에서 자신을 데리고 나가주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이름도 모르는 그 아저씨들 생각에, 갑자기 갑갑해져서 방을 몰래 빠져나온 게. 별 이유는 없었다. 그때처럼 찬 밤바람이 쐬고 싶었을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방에서 나온 희망이는 길게 뻗은 통로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고요한 복도에 발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여기서 왼쪽, 그다음 코너에선 오른쪽, 그리곤 한 번 더 오른쪽으로 돌면― 

출입문 대신 막다른 길에 처음보는 문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어? 여기가 아닌가?”

당황한 희망이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아까 방에 잠시 숨어들었다가 나왔을 때 착각해서 길을 잘못 들었나? 방에서 나와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가야 했나?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기도 전에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함께 희망이를 찾는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최희망! 이 근처에 있는 거 다 알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다급해진 희망이는 숨을 곳을 찾아 눈앞에 보이는 문을 열었다. 그곳은 더는 사용되지 않는 창고인 듯 고장 난 물건들로 가득했지만, 지금 희망이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녔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난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를 찾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그제야 희망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긴박한 상황이 지나가고 나서야 아이는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 밑으로 흘러들어오는 불빛에 의지해 주위를 둘러보니 먼지 가득한 창고엔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었다. 바삐 돌아가는 연구소에서 버려지고 잊혀서 천천히 망가져 가는 곳. 부서진 기구나 작동하지 않는 의료기기투성인 이 공간에는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던 희망이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좆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섬뜩한 눈빛에 놀란 희망이는 뒷걸음치다 나뒹구는 파이프에 걸려 넘어졌다. 아파할 새도 없이 서둘러 고개를 들어봤지만, 뭉게뭉게 피어오른 뿌연 먼지구름이 가뜩이나 어두운 시야를 흐렸다. 콜록거리며 손을 내저어 빠르게 먼지를 흩트렸음에도 불구하고, 빨간 눈동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쿵쿵,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연구소에 좀비가 있다고?  연구원 삼촌들과 이모들에게 알려야 해!

서둘러 몸을 일으켜 문손잡이를 돌리려는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희망이는 수많은 좀비를 봐왔다. 아까 그것이 좀비라면 PDS 바이러스 보균자인 희망이를 공격하진 않더라도 가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좀 전 소음에 반응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이가 만난 어느 좀비도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시 창고 안쪽으로 고개를 돌린 희망이는 방금 빨간 눈동자를 봤던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자 희미했던 물건들의 윤곽도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무언가가 희망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반쯤 부서진 책상에 기대어 있는 사람 형상의 무언가. 아마 온전한 형태였더라면 희망이의 나이대나 조금 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인간모형의 로봇이었겠지만, 현재 그 몰골은 말할 수도 없이 처참했다. 한쪽 눈알은 빠져버렸는지 보이지 않고 목 아래로는 온갖 전선과 부품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나뿐인 팔도 툭 건드리면 빠져버릴 것 같았다. 

“로봇이 왜 여기 이런 곳에 있지?”

의문을 표하며 희망이가 조심스레 다가가자, 갑자기 안드로이드의 하나뿐인 눈이 떠지면서 붉은빛이 돌았다.

“뭘 봐?”

“으아아악!”

놀란 희망이가 뒷걸음치다 넘어질뻔하자 로봇이 소리 내서 웃었다.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은 듯, 목소리에 잡음이 섞여 지지직거렸다.


“마지막으로 보는 게 별 볼일 없는 애의 얼굴이라서 실망했었는데... 덕분에 실컷 웃고 가네. 고맙다.”

“너 뭐야?”

“내 이름은 피노. 보다시피 다 망가져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야. 너 같은 아이가 왜 이런 곳에 있지?”

피노의 눈이 희망이의 환자복을 훑었다. 빠르게 스캔을 마친 피노는 다 알겠다는 듯 거만하게 피식 웃었다.

“아, 너도 실험체 같은 건가? 네게 뭔가 특별한 게 있거나 인간에게 쓸모가 있나 보네? 물론 그러다가 그 사람들 마음대로 안 되면 버려지겠지만. 나이도 어린데 안 됐네.”

“아니야!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해? 그리고 너도 어른 로봇은 아닌 거 같은데!”

“보나 마나 뻔하니까. 그리고 난 몸만 10살 아이일 뿐이지, 너보단 훨씬 똑똑해.”

희망이는 피노의 삐딱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듯 했지만 그게 안드로이드에 대한 호기심을 꺼트릴 정도는 아닌듯였던듯, 대화를 이어나갔다.

“난 11살인데. 곧 생일이지만. 아! 나는 최희망이라고 해.”

이름을 들은 피노가 코웃음을 쳤지만, 희망이는 굴하지 않고 자기소개를 계속했다.

“좀비 바이러스의 유일한 면역자라서 여기 있는 연구원 이모들이랑 삼촌들이 내 피를 이용해서 백신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

“이용당하는 거 맞네.”

“아니라니까!”

“백신이 완성되는 순간 넌 팽 당할 게 뻔해.”

“아니지! 그땐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거지, 버려지는 게 아니야.”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희망이는 목소리 낮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널 만든 사람이 너 버렸어?”

비아냥거리던 피노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분노로 뒤덮였다.

“내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야! 말조심해!”

성난 피노의 목소리는 아이목소리보다 기계의것에 가까웠지만, 희망이도 화가 난듯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너도 방금 말 함부로 했잖아!” 

희망이가 모순을 꼬집어내자 피노는 말없이 희망이를 쳐다보았다. 금속 골격만 남은 얼굴로는 표정을 알기 힘들었지만, 왠지 피노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분명 맞는 말을 했는데 피노가 그런 반응을 보이자 억울하게 느껴졌지만, 희망이는 자신이 나이가 한 살 더 많으니 형으로써 이해해주자고 마음먹었다.

“... 알았어, 내가 사과할게. 함부로 말해서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하지만 피노가 사과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려버리자 희망이는 그냥 방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대적인 안드로이드에게 일부러 말을 붙여가며 마음에 상처를 받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뒤돌아서려는 그때, 문득 자신을 구해준 이름도 모르는 그 아저씨들이 떠올랐다. 좀비를 피해 케이지에 들어가 걸쇠까지 걸어버린 자기를 위해 애를 쓴 아저씨들. 왠지 고개를 돌려버린 피노의 모습이 자기 자신이랑 겹쳐 보이는 거 같아서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돌아가는 대신 피노 옆에 쭈구리고 앉아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있잖아, 나는 한때 내가 버려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옛날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좀비가 처음 나타나서 막 퍼지기 시작했거든. 그때 엄마 아빠 두 분 다 좀비한테 물리셔서 나 혼자 남겨졌어. 다행히 그 병원의 원장님이 좋은 분이셔서 날 보살펴 주셨어. 엄청 신경 써주시고 잘 해주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날 다른 데로 보낸다는 거야. 버려진 기분이었어. 그래서 원장님 동생이랑 같이 희망연구소라는 곳으로 가게 됐을 때, 한참 동안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어. 괜찮아졌을 때 즈음엔 거기 있던 사람들도 다 좀비에게 물려버렸지만.”

두 번이나 자신이 알고 지내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그건 아홉살 아이에겐 너무 가혹한 시련이었다. 또 한 번 되풀이된 참사에 희망이는 이젠 특정인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나쁜 일의 원흉은 자기탓인 것 같은 느낌.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 하지만 식료품 창고의 철창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을 때도, 희망이는 철장 열쇠와 GPS 발신기만은 꼭 손에 쥐고 있었다. 암울한 상황에도 무의식적으로 누군가 자기를 찾으러 온다는 희망을, 다시 철창 밖으로 나간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또 버려진 거 같았는데... 처음 보는 아저씨들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날 구해주길 전까지는. 그때야 알게됐어. 내가 포기하면 안되는 이유를. ‘희망아, 넌 우리들의 희망이야.’ 라고 그 아저씨들이 말해줬거든.”

어느새 조용히 희망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던 피노가 입을 뗐다.

“내 아버지도 내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셨지. 만들어진 날부터 늘 그렇게 말씀하셨거든. ‘피노야, 너는 인간이 못 하는 일을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해내어서 많은 도움이 될 거다.’ 라고.”

기억을 더듬는 피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 점점 늘어날수록 인간들은 날 경계했지. 날 감당 못할 거라고, 난 없어져야 한다고. 오직 아버지만 날 한결같이 믿어주셨지.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면서 끝까지 날 지키기 위해 애썼다고. 근데 그 남자들이 와서 모든 걸... 그 인간들만 아니었으면 아버지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을 텐데!”

아이 목소리와 섞여들리는 기계 목소리에서 피노의 응어리가 느껴졌다. 따듯한 체온이 로봇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이는 피노를 달래듯 조심스레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피노는 희망이를 밀치려고 했지만 팔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포기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 위로 따윈 필요 없어. 저리 가.”

희망이는 그런 피노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너에게도 희망이 있다는걸 알려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잘있어, 피노.”

들은 체도 하지 않는 피노를 어둠 속에 두고 희망이는 조용히 창고를 빠져나왔다.


희망이가 피노를 다시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였다. 

“왜 또 왔어?”

피노의 질문에 희망이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창고 문을 닫았다.

“자꾸 네 생각이 나서. 잘 있었어?”

“퍽이나.”

희망이는 말없이 책상 주위에 나뒹구는 잡동사니를 치우고는 피노옆에 쭈그려 앉았다. 희망이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자 피노는 한숨을 쉬며 입을 뗐다.

“저번에 연구원들한테 크게 혼났을 법도 한데, 한밤중에 여길 또 와? 보아하니 누구한테도 내 얘기는 안 한듯한데.”

일주일 내내 피노를 괴롭혔던 의문점이었다. 희망이가 떠난 후 피노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방으로 돌아간 아이는 연구원에게 안드로이드를 만난 얘기를 할 테고, 연구원은 그 즉시 사실 확인을 하러 창고로 찾아올 것이다. 피노를 발견한 후 상태를 살펴보고 경위 파악을 하려고 하겠지. 어디서 왔는지, 누가 이곳으로 옮겼는지. 판타스틱 로보틱스 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면 피노를 폐기하려 할테지만 그 회사에서 큰일이 있었던 만큼 연락이 닿고 상황 파악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전에 협조의 의사를 내비치면서 자신의 재능을 내세워 직원들을 설득시키면 그만이었다. 이미 피노는 한차례 인간들을 속일뻔한 전적이 있었다. 비록 실패해서 이 지경이 돼버렸지만, 이번만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 피노였다.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기만 한다면 어리석은 인간들을 이용해서 자기를 이 꼴로 만든 그 여섯 남자들을 찾아내서 복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피노는 연구원들을 설득할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고르고, 또 골랐다. 면접을 준비하듯, 예상 질문을 뽑아 완벽한 답변을 연습하며 긴장 속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도록 찾아오는 이가 없자 희망이가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롭게 쓸쓸히 잊혀져서 망가지라고 말을 안 한 걸까,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준 로봇이 불쌍해져서 보호해주고 싶은 걸까. 아무리 논리적으로 따져봐도 정답을 알 수 없었고, 아무리 여러 방면에서 살펴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인간이라서? 설마 이 터무니없는 점도 인간의 대단함에 해당되진 않겠지.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돌려봐도 해답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희망이가 다시 찾아오기를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다고 진짜로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얘기하면 널 고쳐줄 수도 있어서 얘기하고 싶었어. 근데 니가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아서. 널 도와주려고 해도 널 둘러싸고 이리저리 찔러보면 네가 더 사람들이 싫어질 거 같아서 그랬어.”

“너도 인간이잖아?”

“그건...”

희망이가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숙이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사실 나, 네가 저번에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 가끔 주사가 너무 무섭고 아프고, 또 여기에 있는 게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모든 게 싫어지고 싫증 날 때도 있거든. 내가 좀비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 게 너무 불공평하고 싫었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난 이제, 이게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걸 아니까.”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듯, 희망이의 얼굴엔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널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날 왜 이해하고 싶은 건데? 이해한다고 뭐가 달라져?”

“그래도... 너를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너도 좋지 않을까? 너도 달라질지 모르잖아.”

순간 칩이 오작동해서 희망이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나 싶었다. 

“너 혹시... 나랑 친구 하자는 거야?”

본심을 들킨 희망이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하지만 아이는 물러서지 않고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랑 친구 할래, 피노?”

당연히 거절해야 마땅했다.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왜일까, 그 순간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른 이유가.

“그래서 대단한 건데.”

“우리는 인간이 좋아.”

어쩌면 피노는 그 말속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인간이 대단한 이유. 인간이 좋은 이유. 제배도 박사가 떠나버린 지금, 어쩌면 이 아이가 알려줄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피노도 조금은 외로웠는지도 몰랐다.

“그래, 좋아.”

환해지는 희망이의 얼굴을 보고는 피노가 서둘러 덧붙였다.

“근데 네가 좋거나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야. 내가 거절하면 네가 찾아올 때마다 날 귀찮게 할 게 뻔해서 그런 거라고. 내가 편해지라고 하는 거니까 이상한 생각 마.”

그러던 말든 희망이는 신이 나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나 좋으라고 하는 일이야, 피노는 생각했다. 여기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이 아이를 잘 이용하면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어른보다는 조종하기가 편할 테니까.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여섯 명의 남자들에게 복수를 할수 있을 테니까. 그게 이 아이와 친구가 되는 유일한 이유야. 그렇게 혼자 거듭 자신을 설득하듯이 되뇌었다.

“좋아, 그럼 네 얘기나 좀 더 해봐. 궁금해.”

못 이기듯 덧붙이는 피노의 말에, 희망이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고요한 복도에 터질듯한 심장박동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희망이는 설렘과 긴장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이제는 익숙한 복도를 따라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피노와 친구가 된 후 열 번도 더 다니던 길이었지만, 어쩌면 오늘 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잘 돼야 할 텐데,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희망이는 가슴팍에 꼭 쥐고 있는 무언가를 들고 창고로 들어섰다.

“피노, 나 왔어.”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그래. 생일 축하해, 최희망.”

“고마워!"

희망이는 씨익 웃으며 피노쪽으로 다가갔다.

“하마터면 들킬뻔해서 오늘 못 올 줄 알았어.”

“또? 이제 익숙해질 때 안됐어?”

“내 탓 아니야! 지지난번에 들킨 후로 연구원 이모가 가끔 밤에 들여다본단 말이야.”

“그래, 알았어. 안 들켜서 다행이다. 안 그려면 또 한동안 못 만날뻔했잖아. 그때 안 오는 너 기다리느라고 목 빠지는 줄 알았다고. 적어도 잠들어버려서 못 왔을 때보단 낫지만. 그건 정말 어이없었어.”

겸연쩍은 듯 희망이는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 근데 내가 뭘 생일선물로 받았는지 봐!”

희망이는 자랑스럽게 품에 안고 있었던 물건을 내보였다. 작은 상자를 열자, 새 스마트폰이 그들을 반겼다.

“폰 받았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모르겠냐? 그 얘기를 해준 건 난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피노의 목소리 역시 상기되어있었다. 

“빨리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줘!”

“진정해. 잘 안 보인다고 막 꽂으면 내 뇌가 터져서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자, 일단 내 목덜미에 여러 개의 포트가 있을 거야. 위에서 3번째 포트에 네가 가져온 케이블을 꽂고...”

희망이는 피노가 시킨 대로 피노와 폰을 연결했다. 그러자 피노의 눈이 감기는 동시에 전선이 드러난 피노의 뒤통수에서 여러 색깔의 불빛이 반짝거리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피노가 해준 말에 따르면, 피노는 안드로이드인 동시에 A.I.이기 때문에 적당한 전자기기만 있다면 망가진 몸을 버리고 새것으로 갈아탈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안드로이드나 슈퍼 컴퓨터같은 대용량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기기가 제일 적합하겠지만, 아쉽게도 이 둘에게 주어진 옵션은 몇 없었다. 그중 가장 손에 넣기 쉬울 만한 게 스마트폰이었기에, 희망이는 다가오는 생일에 핸드폰을 요구하기로 했다. 피노가 스마트폰으로 옮겨간다면 더 이상 안드로이드가 아니게 되고, 자유자재로 행동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현 상태보다는 나을 테니까. 

허나 아무리 좋은 스마트폰이라도 피노의 방대한 데이터를 담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이 계획을 세운 후로는 피노는 틈틈이 필요 없는 데이터를 버리고 잘라내며 자신의 용량을 압축하고 축소했다. 비록 여태껏 쌓아온 인공지능 지식은 거의 버리고 가야 하겠지만 일단 인터넷에 연결만 된다면 웬만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었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나머지는 적당한 몸을 찾고나서 다시 딥러닝을 돌리면서 복수를 계획해도 될 터. 물론 희망이에게 복수에 대한 얘기는 비밀로 해야 했다. 지난 몇 주간 피노는 자기도 모르게 희망이랑 가까워지면서 희망이를 진짜 친구처럼 아끼게 되었기에 그를 실망시키거나 속상하게 하는 일은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은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언어 소통과 소중한 제배도와의 추억,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그 여섯 명의 남자들에 대한 기억까지 담았다.

그사이 희망이는 친구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언젠가 피노와 함께, 자신을 구해줄 아저씨들을 다시 만나 고맙다고 제대로 인사드릴 날을 그리며.

그러던 마침내, 스마트폰이 켜지더니 주황색의 구형 모형이 화면에 나타났다.

“안녕? 이번에는 제대로 인사해볼게. 내 이름은 피노. 다시 한번 만나서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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