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공간

하얀 공간 (2)

2화: 사이비 소굴

Be My Escape by 나무
7
0
0

※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천마도령. 천마도령까지 들어왔어."

종민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에 탈출러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둠의 별장에서 탈출한 지 몇 걸음 만에 종민이 쓰러진 것도 당황스러운데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라니.

"형 머릿속에요?"

"응...."

어지러운지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일어나 앉는 종민 뒤로 탈출러들은 복잡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여태껏 천해명의 혼이 붙어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가 틈틈이 몸을 내놓으라고 종민을 협박하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기절도 악령 탓이라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조마테오 병원을 탈출할 때도 종민이 쓰러진 건 천해명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천마도령이라니.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 상황에 탈출러들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천해명은요?"

고개를 들자 어느새 차고 안으로 되돌아가 쓰러져있는 천마도령의 몸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무당들이 보였다. 거리가 있어 둘의 대화를 엿들을 수 없었지만, 천해명이 자기 몸으로 되돌아가려고 시도하는 천마도령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며 타박하는 듯했다.

"아직 있어. 아까부터 천마도령이랑 계속 싸우는 중이야."

"니는? 니는 괘안나?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고?"

호동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걱정 가득한 동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종민이 괜찮다며 살짝 웃어 보이자, 그제야 경직된 탈출러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지만 머릿속에 악령이 두 명이나 들어와도 종민이 빙의되지 않았다는 것에 작은 위안을 얻는듯했다.

"근데 왜 이 사람들은 종민이 형을 노리다 되레 갇혀서 꼼작도 못 하는 걸까요?"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딱 그거 생각나던데. 불빛만 보면 앞뒤 따지지 않고 날아드는 벌레들?"

"벌레는 그러다가 타죽기라도 하지. 이 무당 놈들은...."

앞으로 두 명의 악령에게 시달릴 거라는 생각에 심란해하는 종민을 달래주고 있을 때였다. 검은 차 한 대가 마당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오더니 탈출러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차 문이 열리더니 일고여덟 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당신들 뭐야? 누군데 남의 사유지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어?"

"아, 그게...."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한 사내의 질문에 호동과 병재는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리려 진땀을 뺐다. 탈출러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남자들은 문이 활짝 열려있는 차고를 발견하더니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수백 개의 이름 없는 유골함 때문이 아니었다.

"천마도령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천마도령의 몸을 발견한 사내들이 허둥지둥 달려가 무당을 살폈다. 두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들 혹시 천세만세교 아냐?"

병재의 추측에 탈출러들이 술렁였다.

"엥? 다 죽은 거 아니었어?"

"그 외에는 여기에 올 만한 사람이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미동 없는 육신 옆에 꿇어앉아 애타게 천마도령을 깨우려 하는 한 남자를 제외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당의 몸에 섣불리 손을 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천마도령의 혼이 주변에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절박하게 그의 이름을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 사람들이 진짜 천세만세교라면 여기를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교주를 죽였다고 생각하기 전에."

"천세만세교 맞는 거 같아. 장기두의 눈빛이 이상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기 신도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마도령을 눈여겨보던 종민이 중얼거렸다. 빙의하려던 몸에 도리어 갇혀버린 것도, 자신을 찾는 신도들에게 어떠한 기별도 보낼 방도가 없다는 것에 착잡해 하는 기색 하나 없는 그 모습에 싸한 느낌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다. 탈출러들이 모르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빨리 가요."

숨죽이고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교주를 깨우려던 남자가 고개를 들더니 매서운 눈으로 탈출러들을 노려보았다.

"천마도령님께 무슨 짓을 한 거야! 저 사람들 당장 잡아!"

무리의 우두머리인듯한 사내가 소리치자 순식간에 적대적으로 돌변한 사람들이 탈출러들에게 달려들었다.

"차! 차에 타! 타고 문 잠가! 시동 걸려있어!"

신동의 외침에 탈출러들은 앞다투어 차로 달려갔다. 겁도 없는 한 신도가 달리기가 가장 느린 맏형에게 덤벼들었다. 한 명 잡았다고 외치려는 순간, 호동이 그의 손을 뿌리치자 남자는 중심을 잃고 낙엽처럼 힘없이 땅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본 천세만세교가 주춤하자 맏형은 동생들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내가 시간을 끌어볼게!"

저도 돕겠다며 동현도 길을 가로막는 데 동참하자, 신도들은 예상보다 견고해진 방어선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틈을 타 나머지 탈출러들은 차로 향했다.

앞서가던 피오가 문을 열고 먼저 차에 올라탔다. 종민도 막내를 따라 차에 탑승하려던 그때, 멀리서 들리는 천해명의 불호령이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뭐 하는 짓이냐!"

뒤를 돌아본 종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천세만세교의 신도들이 아닌 어느새 인기척도 없이 바짝 따라붙은 천마도령이었다. 도끼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든 천마도령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종민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목표물과 눈이 마주치자 무표정이었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위험을 직감한 종민이 반사적으로 머리를 보호하려 팔을 올렸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서슬 퍼런 도끼날이 허공을 가르자,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종민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종민이 형, 왜? 왜 그래요? 우리 빨리 가야 해!"

놀란 막내가 걱정스레 물으며 그를 재촉했지만, 종민은 머리가 깨지는듯한 통증에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형의 곁으로 되돌아온 피오는 종민의 머리를 살폈지만 어둑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아서일까, 아무 상처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예상치 못한 소란에 보조석에 올라탄 병재가 뒤돌아보았다. 

"종민이 형이 이상해요! 천해명이나 천마도령이 무슨 짓 한 거 같아!"

그 말은 들은 병재는 작게 욕을 내뱉으며 차에서 도로 내리더니 종민의 한쪽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빨리 태워! 형, 조금만 참아요!"

동생들이 양팔을 끌어당겨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갑작스러운 기립에 종민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지끈거리는 머리에 주변 소음이 더해지니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물밀듯 몰려왔다. 동생들은 종민을 다독이며 몸을 영 가누지 못하는 형을 부축해 차에 태우려 고군분투했다. 

그 광경을 운전석에서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신동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뒤에! 뒤에 조심해!"

천세만세교였다. 용케도 운동부를 피한 몇몇 남자들이 들이닥치자 차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탈출러들을 놓쳐버린다면 모든 게 끝장이란걸 뒤늦게 깨닫기라도 했는지, 신도들은 천마도령님을 헤친 것에 대해 천벌을 받을 것이라며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탈출러들을 거칠게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신동까지 합세한 동생들이 거세게 저항했지만, 부상자를 보호하면서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사내들을 끝까지 막기란 불가능했다. 거친 몸싸움 끝에 신도들이 제대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었던 종민을 끌어내리는 데 성공하자 승리를 확신한 천세만세교의 리더가 싱긋 웃었다.

짝짝짝. 

"자자, 험한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그만하시죠."

박수 세 번으로 모두의 시선을 끈 천세만세교의 리더는 세상 나긋한 말투로 으름장을 놓았다. 직접 말로 내뱉지만 않았을 뿐, 순순히 항복하지 않으면 누군가 피를 볼 거라는 반쯤 숨겨진 협박이었다.

축 늘어진 채 저항도 못 하는 종민의 모습에 맏형이 꽤 화난듯했다. 그러나 천하의 강호동도 위협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펼 뿐 섣불리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매섭게 노려보면서도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탈출러들의 모습에, 남자는 흡족하게 웃으며 탈출러들을 묶고 몸을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근데 누구세요?"

"이 와중에 그게 궁금하신가요? 오은팔이라고 합니다. 천마도령님의 둘도 없는 심복이라 해두죠."

"오른발?"

"오은팔!"

"그럼 천세만세교겠네요?"

"천마도령의 제자신가요?"

"천해명은 아세요?"

등 뒤로 손이 묶이는 순간에도 계속되는 질문에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궁금한 게 많은가 봐요? 보아하니 이것저것 아시는 것도 많은듯한데, 무슨 연유에선지 성굴을 헤집어놓은 것도 모자라 천마도령님이 의식을 잃게 만들고... 대체 당신들 정체가 뭐야? 방송국에서 나왔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남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딱 봐도 오합지졸인 사람들에게 천마도령님이 당하다니.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됐고. 천마도령님께 무슨 짓을 한 거지?"

탈출러들이 또다시 서로 눈치만 볼뿐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자(설명해도 섣불리 믿기 힘든 얘기긴 했다), 남자는 막내에게서 뺏은 가방을 뒤져보라 명령했다. 한 신도가 귀사모의 어둠의 별장 조사자료를 건네주자 오은팔의 눈이 번뜩였다. 탈출러들의 정체나 목적에 대해 뭐라도 알아낼 수 있다고 단정 지은 듯했다.

그러는 사이, 종민은 조금 정신을 드는 듯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고 소리가 울려 어지러웠지만, 휘몰아치는 통증에 상황 파악조차 할 수 없었던 좀 전보다는 견딜만했다. 어느새 손이 묶인 건지 혼란스러워하는 종민을 보자 탈출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세만세교가 서류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동현이 목소리 낮춰 물었다.

"형, 괜찮아요? 또 쓰러져서 놀랐잖아요."

"천마도령이 도끼로 머릴 내리쳐서 그래. 아직도 맞은 데가 욱신욱신해."

종민의 대답에 옆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병재가 경악했다.

"네? 도끼로요? 아니, 그 미친놈이...!"

 "나 머리에서 피 나?"

"아뇨, 외관상으론 아무렇지 않은데... 진짜 괜찮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천마도령이랑 천해명 뭐해요?"

"둘이 싸워. 또 싸워."

종민은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소란스러운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당들의 대화에 귀 기울여보니 천해명이 신아들에게 한창 잔소리를 퍼붓는 중인듯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인 게냐! 아니, 생각이란 게 있었긴 한 거냐? 그러다 녀석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선생님께는 큰일이겠지만 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왕 이 몸에 들어온 거 제대로 써먹어 볼까 했는데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으니 원래 제 몸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이 자의 몸과 정신을 훼손시켜 버리면 아무래도 저를 붙잡고 있는 힘이 약해질 확률이 높고... 천 선생님께서 이 몸을 손에 넣으시더라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실 테니 저에겐 나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천하의 썩을 놈. 나를 살해한 것으로 모자라...."

'그래서 절 죽이려고 한 거예요? 가지지 못한다면 부숴버리겠어, 뭐 그런 거예요?'

불쑥 끼어든 종민의 말에 천마도령이 어이가 없다는 듯 정색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맞구먼. 틀린 말은 아닌데." 

피식 웃던 천해명은 미끄러지듯이 종민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 정신이 좀 들었느냐?"

차가운 손이 턱 끝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종민은 반사적으로 진저리를 쳤다. 결박된 상태라 악귀의 손을 쳐낼 수는 없었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들자 웬일로 천해명은 종민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머리를 격하게 움직인 탓인지 다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종민은 어지럼증을 떨치려 눈을 꽉 감았다.

"머리에 난 상처를 봐주려고 한 것뿐인데 그게 그리도 싫으냐?"

반응이 재밌는지 실실 웃어대는 천해명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살며시 눈을 뜨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오은팔이 보였다.

"이분은 뭔데 송장처럼 축 늘어져 있다가도 물기를 터는 개처럼 고개를 흔들고 있을까? 혹시 파리가 꼬이나요?" 

남자는 종민 앞에 쭈그려 앉아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 아니면 귀신이라도?"

뭔가 알고 있다는 말투에 탈출러들의 표정이 굳어지자, 남자는 손을 뻗어 종민의 팔을 덥석 잡았다.

"잠시만 손 좀 빌릴게요."

"눈 마주치지 마라."

"이미 늦었습니다."

천해명의 조언이 없었더라도, 천마도령의 목소리에 가득 찬 확신에도, 종민은 본능적으로 계속 눈을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은팔은 종민이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뒷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젖혀 집요하게 종민의 눈을 쫓았다.

마주친 눈빛 속에서 뭔갈 읽어내는 이 익숙한 상황에 종민은 서둘러 눈을 감았지만 이미 남자는 무언갈 알아차렸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른 신도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자에게 뭔가 있다. '그곳'으로 끌고 가."

"예? 사, 사람 잘못 보신 거 같은데요!"

신도들이 종민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혹시 누가 다칠까 봐 여태껏 조용히 있던 다른 탈출러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종민아!"

"종민이 형!"

"이, 이거 놔요! 어디로 가는 건데요! 왜 자꾸 저한테서만 뭔가 보인다고 하는 건데요! 왜 나만—!"

종민이 발버둥 치든 말든 남자들은 차고에 늘어선 하얀 유골함 사이로 그를 끌고 가더니 어둠의 별장 안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머지는..." 

남은 탈출러들을 둘러보던 오은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하 작업실에 가둬놔. 천마도령님이 돌아오시면 희생제물로 딱 맞을듯하니."


양팔을 잡힌 종민이 꼼짝없이 끌려간 곳은 온갖 위협이 기다리는 미지의 장소가 아닌 낯익은 공간이었다. 계단을 올라 왼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자 칠흑 같은 어둠도, 아이가 속삭이듯 외우는 기도문도 아닌 따뜻한 불빛으로 가득 찬 1층 거실이 그들을 반겼다. 이미 여러 차례 지나다녔던 익숙한 곳이지만 캠코더의 녹색 화면이 아닌 본래의 색으로 가구들을 볼 수 있게 되자 전혀 다른 공간에 들어선 것 같았다. 

불빛 하나로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불빛은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3개의 자개장 중 유일하게 열려있는 맨 왼쪽 장롱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신도 한 명이 그 옆에 서 있는 걸 보아하니, 먼저 앞서가 문을 열어둔 듯했다. 몇 시간 전 탈출러들도 장롱을 확인해보았지만, 전서체를 발견한 오른쪽 농 외에는 안이 텅 비어있거나 문이 아예 열리지 않아 포기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그곳에 숨겨진 공간이 있을 줄이야. 종민은 기도문이 흘러나왔던 자개장을 힐끗 쳐다보았으나 호리병에 갇힌 원혼들을 풀어줘서인지 아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열린 장롱 앞으로 다가가자 뒤쪽이 뻥 뚫려있어 숨겨진 공간으로 통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각도에서 밀실 전체를 볼 수는 없었지만,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왠지 모를 섬뜩함에 종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들어가세요."

어느새 뒤따라온 천마도령의 조력자가 등을 떠밀자 종민은 휘청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가 좁아서 그렇지, 방 자체는 사람 열댓 명이 들어오기 충분할 정도로 큰 편이었다. 한쪽 벽에는 안방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천마도령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방석이 가지런히 깔린 그 앞에는 천마도령의 몸이 눕혀져 있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천장에서 길게 늘어트린 오방색 천이 머리를 간지럽혔고,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는 피처럼 유난히 붉은 글씨로 쓰인 수백 개의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러나 눈이 아플 정도로 다채로운 색상이 가득한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방 한가운데에 자리한 검은 목제 상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전서체가 빼곡히 새겨진 이것은 평범한 굿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높고 성인이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기다랬다. 어떻게 보면 희생양을 바치는 제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간 제물이 된 자기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자 종민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여, 여기 뭐예요? 뭐 하시려고 절—"

지이이잉.

난데없는 기계음에 뒤를 돌아보자 자동으로 닫히기 시작하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 얌전히 계세요. 곧 천마도령님을 모시러 오겠습니다."

"예? 저, 저기요!"

다급하게 출구로 달려갔으나 이미 문은 굳게 닫힌 후였다. 어깨로 힘껏 밀어봐도 꿈적도 하지 않는 문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몇 번 더 어깨 박치기를 시도하던 종민은 문 열기를 포기하고 옆에 서성이는 악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들, 뭘 꾸미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알고 있죠?"

당황한 듯한 종민을 지켜보던 장기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대답해줘도 아무 소용 없을 텐데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늦었다고."

반면 천해명은 다른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인지, 신도들이 사라진 문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는... 몇 년 전에 나에게 신아들로 받아달라고 찾아온 놈 아닌가? 이름도 같고. 근데 왜 네 놈을 따르고 있는 거지?"

"선생님이 거절하시자 저에게도 와서 받아달라 청하더라고요." 

"그래서 허락했단 말이냐? 나나 너의 명성에 못 미칠 정도의 하찮은 영력을 가진 자인데 그냥 다른 무당에게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나았을거늘."

"저 역시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받아주길 잘한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명예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쓸모없다니!"

천해명이 역정을 내든 말든 장기두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저자는 수행이 부족하긴 하나 평범한 신도보다는 아는 게 많아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곧 제 몸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정확히 이런 상황에 부닥칠 거라곤 예상 못 했지만, 그래도 비슷한 상황에 대해 대비를 해두었기 때문이죠. 그럼 전 일 처리가 잘 되는지 확인하러 이만."

할 말을 마친 천마도령은 유유히 벽을 통과해 밀실을 빠져나갔다. 

"저놈 자식이...!"

신아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못마땅하듯 혀를 끌끌 차던 천해명은 고개를 돌려 묶인 손을 풀려 애쓰는 종민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케이블 타이를 끊을만한 뾰족하거나 날카로운 물건이 없는 듯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제단 모서리도 뭉툭한 편인데다가 손이 등 뒤로 묶여 쉽지 않을 듯했다.

"멀뚱히 보지만 말고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어떻게 도우란 말이냐. 만질 수가 없는데."

"좀 전에 천마도령은 도끼로 제 머리를 내려쳤잖아요."

"너에게 정신적인 해를 끼치는 거니까 그렇지. 널 건드릴 수는 있어도 다른 물체에는 손을 못 대는 상태란 말이다. 그리고 그건 진짜 도끼가 아니고 기두가 만들어낸 일부분이고."

"그게 가능해요?"

"당연하지. 이런 것도 가능한데."

천해명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생김새가 일렁이며 변하기 시작했다. 덥수룩한 머리에 짖은 다크서클. 헐렁한 환자복에 소름 끼치는 붉은 눈. 왕희열에 빙의했을 때의 그 모습이었다. 

피범벅인 입으로 씨익 웃어 보이자 종민은 질색하며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아 씨! 그런 것 좀 하지 마요!"

"무료한 일상에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이럴 때가 아니라고요! 천마도령이 무슨 짓 하면 그쪽도 곤란해지는 거 아니에요? 적어도 무슨 일을 꾸미려는지 알아내야죠!"

종민의 반응이 즐기던 천해명은 그제야 웃음을 거두고 전서체가 새겨진 제단으로 눈을 돌렸다.

"저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겠지만 추측은 해볼 수 있지. 기두는 내가 자기에게 복수하려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 수단을 구축해놨을 테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빙의해 찾아올 수도 있으니 그걸 막기 위해 모든 신도를 죽이는 대신 믿을만한 몇몇은 살해 대상에서 제외한 듯 하고. 내가 육신이 없는 상태에서 찾아와 몸을 빼앗으려 할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준비도 해놨겠지. 예를 들자면, 부적을 사용해 내 힘을 억누르고 자기 힘을 증폭시켜 주도권 싸움에서 우위를 거머쥘 수 있게 말이다."

설명을 해줘도 종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천해명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그 부적 사용법을 자기 심복에게 일러주었을 게다. 자기가 의식이 없거나, 상태가 불안정해 보이거나, 딴 사람 같이 돌변하면 부적을 사용하라고. 예상했던 상황이랑 조금 달라졌겠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야. 그걸 너에게 붙이면 기두가 너보다 더 강해지겠지. 아까 말하는 꼬락서니를 봐서는 내가 너를 이용할 수 없게 널 망가트려 버리고 원래 자기 몸으로 돌아갈 셈인 것 같다."

"그럼 어떡해요? 막을 방법은 있어요?"

"없어." 

"예?"

"없다고. 툭 까놓고 말해서 네가 뭘 할 수 있느냐. 손이 묶인 상태에서 신도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나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고, 머리가 비상해서 짧은 시간 내에 탈출할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말솜씨가 좋다거나 연기를 잘해서 신도들을 혼란에 빠트려 기두의 행방을 헷갈리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없어."

"내, 냉정하시네요...."

"하지만." 천해명이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한다면 말이 달라지지."

또 이 얘기인가. 도돌이표처럼 잊을만하면 되풀이되는 회유에 종민은 단칼에 거절하려고 했다. 

천해명이 말을 이어가기 전까지는.

"이 순간, 네 동료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있을 수도 있다."

평소 같았으면 못 믿겠다며 한 귀로 흘려들었을 종민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귓가의 속삭임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잘 생각해봐라. 네 동료들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내가 저 신도들이었다면 나중에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그들부터 죽이고 널 처리하러 이곳에 올 거다. 천세만세교가 널 여기 가두고 그들을 먼저 처리하러 갔을 수도 있는데 마냥 손 놓고 있을 게냐?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자신이 있어? 이미 늦은 뒤에 땅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날 받아들여!"

"저는...."

종민은 눈을 떨구었다. 수백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수없는 잠 못 드는 밤의 끝자락에서도 꿋꿋하게 천해명을 밀어냈던 것처럼, 이번에도 언제 흔들렸냐는 듯 굳건하게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악몽 속에서만 보던 멤버들의 싸늘한 주검이 실제가 되어 눈 앞에 펼쳐질까 봐, 싫다는 말, 그 짧은 한마디를 쉽사리 뱉지 못했다.

"뭘 망설이는 게냐. 답은 하나뿐인데. 어서 내 손을 잡아."

무당의 재촉에도 섣불리 결정을 못 내리던 종민은 한참 후에야 망설이며 입을 뗐다.

"저... 지금 손 묶여서 있어서 그쪽 손 못 잡는데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허를 찔린 듯, 천해명은 한동안 입만 뻐끔거렸다.

"말로 하겠다고 하면 될 거 아니냐, 말로! 날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거지, 누가 꼭 손을 잡으랬느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손 내밀고는 내 손을 잡으라고 계속 그러셨으면서!"

억울함 가득한 눈빛에 천해명은 뭐라 쏘아붙이려다 뒷목을 잡았다. 악귀라서 망정이지 아니면 이미 혈압으로 쓰러지고도 남았을지도 몰랐다.

"두 분 꽤 친해 보이네요."

인기척 하나 없이 나타난 천마도령에 종민은 화들짝 놀라 천해명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무덤덤한 말투와는 달리 장기두는 도끼를 위협적으로 치켜들고 있었다. 둘의 거리가 좁혀지는 즉시 다시 종민의 머리를 내려찍을듯한 기세였다.

"그, 금방 왔네요?"

엉뚱한 리액션에 천마도령이 어이가 없는 듯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반면, 천해명은 어처구니없는 답변에 진절머리가 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벽 두어 개만 통과하면 되니까요. 그나저나 안방 밀실에도 들어갔다니... 당신들 이곳저곳 다 들쑤시고 다녔더군?"

"그, 그게 일부러 열려고 한 건 아닌데...."

종민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시도하며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였다. 좀 전의 기계 작동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천세만세교 신도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역시 당신이군요."

"예?"

뭐가요, 라고 종민이 묻기 전에 오은팔이 먼저 말을 이어 나갔다.

"혼이 굉장히 순수하면서도 뭔가 이물질이 섞인 듯한 괴리감이 느껴졌는데... 홀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역시 당신이 천마도령님이 실종된 것과 관련된 게 맞지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종민을 보자 그가 씨익 웃었다.

"자, 그럼 시작해봅시다."


문이 닫히자 다시 한번 암흑이 탈출러들을 집어삼켰다. 조금 전 와봤던 지하 작업실이지만, 손과 발이 묶인 채로 갇혀있으니 전과 다른 공포가 느껴졌다. 수백 명이 이 방에서, 어둠 속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곳이었다. 원혼들은 탈출러들을 해치지 않을 거란걸 알기라도 했지, 이제는 그들을 죽이고도 남는 자들이 이 건물 어딘가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들 괘안나? 동이는?"

맏형이 목소리 낮춰 물어보자 여기저기서 대답이 들려왔다. 신동도 뒤늦게 전혀 그렇지 않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답했다.

"지금 다들 상황이 어때요?"

"손을 벽에 있는 철조망? 같은 거에 묶어놓은 거 같아."

케이블 타이로 손을 등 뒤로 결박한 것도 모자라, 신도들은 탈출러들을 따로 떨어트려 앉히고는 검은 방수포 뒤에 숨겨져 있던 철조망에 다시 한번 손목을 고정해버렸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던 듯, 탈출러들의 발목까지 묶고 나서야 자리를 뜬 것이었다.

"역시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네요. 영생이 뭐라고 사이비 종교를 설립해 천명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나, 그런 인간을 교주라 믿고 따르면서 사람들을 어둠 속에 가두질 않나."

"아닌데. 사람보다 귀신이 더 무섭지 않아?"

동현의 반론에 사방에서 이해 못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지. 원혼들은 우릴 도와주기도 했잖아. 막 힌트도 주고."

"아, 그건 맞는데... 그래도 보통은 사람보다 귀신이 더 무섭죠."

"형 진짜 특이해요...."

대화가 잠시 멈추자 곳곳에서 케이블 타이를 끊으려 애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붙어있다면 서로 도와 결박을 풀 방법을 찾았을 텐데, 묶인 자리에서 꼼작할 수도 없었다.

"근데 저 사람들, 종민이 형한테 천해명과 천마도령이 붙어있다는 걸 알아챈 걸까요?"

"그러니까 따로 데려갔겠지. 여기서 빨리 나가서 종민이를 찾아야 한다. 저 사람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르잖아.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걱정하는 맏형을 안심시키려는 듯 병재가 말을 얹었다.

"어차피 종민이 형은 자주 기절하니까 괜찮을 거예요."

멤버들이 황당해하자 그가 빠르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 기절한 상태라면 오히려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거죠. 이상하지 않아요? 종민이 형이 지금 두 번이나 쓰러졌는데 그 두 번 다 악령이 빙의하려 달려들 때였어요. 그리고 한 번 몸에 들어간 악귀는 못 빠져나오고 있고요. 둘 다 생전 실력 있는 무당이었는데도.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론이긴 한데, 종민이 형이 자꾸 기절하는 게 일종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싶어서요. 이게 맞다면 오히려 저 사람들이 쉽게 천마도령을 꺼내거나 하진 못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러면 조금 안심인데...."

"네. 하지만 그건 정말 추측일 뿐이라서, 뭐가 됐든 여길 최대한 빨리 탈출해서 천세만세교를 막아야 하는 건 맞아요." 

"그래, 그럼 병재 말대로 여길 빠져나가는 방법을 고민해보자."

"아까 그 원혼들은? 다 성불해서 여기 없는 거지? 우릴 못 도와주는 거지?"

"조용한 거 보니 그런듯해요."

"아까 캠코더로 봤을 때 벽에 도구가 있지 않았어요?"

"저 사람들이 우리 여길 밀어 넣기 전에 다 치워버린 거 같은데."

"그럼 이걸 어떻게 풀ㄹ—"

부우우욱. 퍽.

갑작스레 무언가가 찢기는 소리와 둔탁한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방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막 터트리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동현과,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피오와, 뭔데만 남발하는 병재, 그리고 눈을 꽉 감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은 신동까지.

"진정! 다들 진정해라!"

큰형의 외침에 소란이 조금 잦아드는 듯했지만,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려봐도 나이트 비전이 탑재되지 않은 탈출러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 귀신이잖아!!"

"귀신 이제 없다니까요!"

"그럼 방금 그건 뭔데!"

"나야 모르죠! 근데 귀신일 리가 없—"

"으아아악!"

다시 한번 기절할 듯이 비명을 지르는 동현에 탈출러들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뭐가 내 다리를 만지고 지나갔어! 귀신이 있다고!"

"귀신 다 나갔다니까요!"

"확실해? 확실하냐고!"

"아니, 여기 남아 있는 혼이 있을 수가 없다니까요! 천해명이나 천마도령을 제외하면!"

"동현이, 네가 착각한 거겠지."

"이상하다. 분명 뭔가 느껴졌는데...."

동현이 조금 진정되면서 소동이 겨우 가라앉는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으아악, 저기! 눈! 눈!!"

이번에는 피오가 소리 질렀다. 다들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웬걸, 정말 방 가운데에 한 쌍의 노란 눈이 떠다니는 거 아닌가! 당연히 지하실은 다시 한번 난장판이 되었다. 

병재가 뭔가 이상한 걸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잠깐. 저거 고양이 아냐?"

병재의 말에 소란이 조금 가라앉는듯했다. 확실히, 어둠 속을 떠다니는 동그란 한 쌍의 눈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고 귀여운 동물의 것이었다.

"엉? 고양이??"

"고양이가 왜 여기서 나와?"

"아, 고양이! 내가 아까 부엌에서 고양이 봤다고 했잖아!"

"아니, 그러니까 고양이가 왜 여기에 있냐고. 천마도령이 고양이를 키우진 않을 거 아녜요."

"혹시 고양이 귀신 그런 건가."

호동은 체육부 동생의 엉뚱한 결론을 못 들은 척하며 다시 의문의 소리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

"문 닫히기 전에 들어왔나 보지. 그럼 아까 그 소리도 고양이 때문인가?"

"분명 부욱 찢어지면서 뭐가 떨어지는 소리도 났어요. 아! 그, 이 방은 비닐 같은 걸로 뒤덮여 있었잖아. 거기에 매달리다가 찢어진 거 아닐까요?"

"뭐가 떨어졌다고?"

바닥을 더듬거리던 동현의 손에 무언가 잡혔다. 

"아, 여기 뭐가 있어! 연장 같은데?"

"아까 벽에 무기 걸려있었잖아요! 신도들이 대부분 빼간 거 같긴 한데... 빠트린 게 있었던 건가?"

"손 조심해요, 형!"

"니퍼같아! 이걸로 케이블 타이 자를 수 있겠는데?"

주저 없이 행동으로 옮긴 동현이 한동안 니퍼를 가지고 케이블 타이와 씨름하는 동안, 나머지 탈출러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 툭 소리와 함께 동현은 손을 묶고 있던 플라스틱 끈을 힘겹게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됐어! 잠깐만, 곧 풀어줄게."

발목을 구속하던 케이블타이마저 잘라버린 동현은 바닥을 더듬거리며 아까 호동의 목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거 형님 다리에요?"

"그래."

"이거부터 풀고 손 풀어드릴게요."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갑작스레 문이 벌컥 열리며 신도 한 명이 나타났다. 차고로 향하는 문을 열어놓았는지 희미한 불빛이 방안을 비추자, 호동의 발목 케이블 타이를 끊으려 하는 동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눈 앞에 펼쳐진 예상치 못한 광경에 신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어떻게 풀려났어?!"

정신을 차린 신도가 칼을 치켜들고 동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동현이 사내의 손에 들린 무기를 눈여겨보며 칼을 쳐낼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문 가까이에 묶여있던 피오가 기지를 발휘해 곁을 지나치던 신도의 정강이를 힘껏 차버렸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남자가 다리를 잡고 주저앉자, 동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무기를 쳐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초크를 걸었다. 순식간에 붙잡힌 신도는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와, 팀워크 좋았다!"

"갑자기 동현이 형이 달라 보여요."

"그럼! 내가 누군데!"

"파이터인 거 아는데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여태까지 소리 지르면서 도망가는 모습만 봐서 그런가."

"... 내가 그랬다고?"

그다음부터는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미약한 불빛이었지만, 그 덕분에 케이블 타이를 자르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머지않아 탈출러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제 어떡하죠?"

"종민이를 찾아봐야지. 분명 어둠의 별장 안으로 끌고 갔으니 이곳 어딘가에 있겠지."

"그래도 이미 한차례 둘러본 공간이라 좀 수월하겠네요. 캠코더를 뺏긴 게 아쉽지만..."

"놈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조심해야 한다. 자, 그럼 나랑 동현이가 앞장설게."

"혹시 그 사람들도 무기를 들고 있진 않겠죠?"

"잔말 말고 빨리 와라."

지하에 있는 김에 가까운 곳부터 살펴보기로 한 탈출러들은 차고로 향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차고는 감금되기 전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밖으로 향하는 커다란 문은 여전히 열려있는 상태였고, 저 멀리 주차된 차도 보였다. 달라진 건 단 한 가지, 보일러실 문 앞에 쓰러져 있던 천마도령의 몸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자기네 교주를 차가운 바닥에 내버려 둘 순 없었겠지...."

"종민이 형이랑 같은 곳으로 데려갔을 수도 있어."

약속이라도 한 듯 탈출러들은 흩어져서 차고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주변이 안전한 걸 확인한 병재는 안고 온 고양이를 내려주었다.

"고마웠어. 여기 위험하니까 다른 데 가봐."

고양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데 보일러실 앞을 서성이던 큰형이 그를 찾았다.

"병재야, 여기도 열어봐야 하지 않겠나? 비밀번호가 뭐였지?"

"0301이요." 

병재가 입을 떼기도 전에 신동이 먼저 대답해주었다. 밝은 곳으로 돌아와서인지 창백하던 그의 얼굴에 혈색이 조금 도는듯했다. 

"아까 우리가 비밀번호를 바꿔놔서 아무도 못 들어갔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요."

"같이 가드려요?"

피오가 살펴보던 열쇠 프레임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호동에게 향하자, 자연스레 동현도 그 뒤를 따랐다. 큰형 그룹이 별 탈 없이 보일러실로 진입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신동은 병재에게 손짓했다.

"우린 차나 확인해보자."

"네, 그래요."

정렬하게 놓인 하얀 유골함을 따라 밖으로 향하자, 차가운 밤공기가 반겨주었다.

다다른 차량은 아까와는 달리 시동도 꺼져있었고 문도 잠겨있었다. 창문으로 차 안을 살펴봤지만, 특별하게 눈에 띄는 점도 없었다.

"여길 벗어난 건 아닌 거 같죠?"

"응, 확실히 이곳 빌딩 어딘가에 있나 봐."

병재는 고개를 들어 창문을 살펴보았지만, 유리란 유리는 모두 막아두어서인지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은 없었다.

"하나하나 다 살펴봐야겠네요. 형은 괜찮아요?"

병재를 따라 창문을 살펴보던 신동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솔직히? 쉽진 않은데 그렇다고 혼자 떨어져 있을 순 없잖아. 그게 더 무섭기도 하고, 더 위험할 수도 있고. 그래도 이미 한번 둘러봤던 공간이라 조금 나을지도 몰라."

"좀만 참아요. 종민이 형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최악의 상황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발걸음을 돌려 보일러실 팀과 만났지만, 그쪽도 별 특이사항은 발견하지 못한듯했다. 결국 맏형의 짧은 격려와 함께, 5인의 탈출러들은 자발적으로 다시 어둠의 별장 안으로 발을 디뎠다. 건물 구조를 익힌 터라 어둠에 익숙해지면 캠코더 없이도 전진할 수 있어 수색 속도가 빠를 것 같았지만, 어디선가 보초를 서고 있을지도 모를 신도들을 경계하며 숨죽이고 둘러봐야 해서일까, 생각처럼 속도가 나진 않았다.

특별히 달라진 점이 없는 부엌을 지나고 거실로 들어서자 긴장감은 한껏 높아졌다. 무사히 성불한 건지 아이의 기도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천세만세교 신도들이 가장 있을법한 곳은 안방이었기 때문이다.

"형들... 무슨 소리 안 들려요?"

잔뜩 움츠러든 막내의 목소리에 탈출러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무슨 소린데?"

"작고 빠르게 중얼거리는 소리요. 방울 소리도 들은 것 같은데."

"천세만세교가 근처에 있나?"

"야들아, 조심해라."

동생들에게 주의를 준 호동은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 문 앞에 다다랐다. 동현과 눈이 마주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하나, 둘, 셋, 세고 문을 세차게 밀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방은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지만, 탈출러들은 금세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갑작스러운 정전에 소란은커녕 작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 얼어버렸지만, 한참을 지나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제야 탈출러들은 조심스레 전진해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불이 켜지자 사람 온기 없이 텅 빈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분명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너무 무서워서 그런 거 아냐? 왜, 가끔 그럴 때 있잖아. 실제론 전화가 안 왔는데 울린 것 같은 착각이 든다든가, 그런 거."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라며 피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 저기 아까 뺏긴 가방!"

병재가 가리킨 곳에는 귀사모의 배낭이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안을 확인해 보니 들고 다니던 캠코더와 각종 단서 서류들이 그대로 있었다.

"이 사람들 여기 들렀다 가긴 했나 보다. 단서가 나올 수도 있으니 한번 뒤져봐요. 아까랑 달라진 게 있는지도 잘 보고요."

보초 임무를 자처한 호동을 제외한 나머지 탈출러들은 흩어져서 방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 스마트폰!"

신동이 탁자 위에 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자 탈출러들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아까 분명 폰 같은 건 없었잖아요. 가방이랑 놓고 간 건가?"

톡톡, 화면을 두드리자 장기두 사진이 나타났다.

"천마도령 핸드폰인가 보네. 비밀번호... 아까 저 금고 비밀번호가 뭐였지?"

"설마 같을까요?"

그래도 시도는 해볼 만할 듯하여 병재는 다시 통신요금서를 꺼내 전화번호 뒷자리를 불러주었다. 신동이 4자리 숫자를 입력하자 잠금이 풀리면서 화면이 바뀌었다.

"천마도령도 비밀번호 돌려쓰는구나. 똑똑한 사람이라더니...."

신동은 어이없어하는 병재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오은팔이란 사람과 문자를 자주 주고받았네. 병재야, 네가 한번 봐봐."

병재가 문자를 정독하는 사이, 동현은 머뭇거리면서도 벽장 뒤 숨겨진 방을 들여다보았다. 길고 좁은 밀실의 한쪽 벽에는 왠지 으스스한 조각상과 책들로 가득한 장식장이, 다른 쪽 벽에는 옷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실의 자개장 속에 숨어있던 아이처럼, 벽장 속 아이 원혼도 무사히 성불했는지 모든 게 고요하기만 했다.

"어? 여기 뭔가 이상한데?"

뭔갈 발견했어도 섣불리 더 깊이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 듯, 동현은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는 핑계를 대며 카메라를 찾았다. 피오가 캠코더를 들고 오자 동현은 한쪽 벽을 가리켰다.

"저기 왼쪽에 옷장, 우리 열어본 적 없었잖아. 근데 지금 열려있어."

"어, 그러네요?"

반쯤 열려 있는 옷장 문을 당기자, 한구석을 차지한 옷 외에는 다른 물건들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여기 제사에 쓰는 물건들이 많아요. 무당 방울이랑 무당부채 같은 것도 있고. 근데 빈 자리가 많은데?"

"아마 천세만세교가 가져갔을 거야. 단서 정리할 테니 다들 여기로 모여주실래요?"

단서소리꾼의 호출에 탈출러들은 탁자 주변에 둘러앉았다. 멤버들이 자리 잡은 걸 확인한 병재는 새로 얻은 정보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문자를 보니까 천마도령이 오은팔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많이 내렸더라고요. 아까 우리가 봤던 신도들의 리더요."

"우릴 가두라고 한 그 사람?"

"네. 천마도령이 공식적으로 천세만세교를 설립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 같은데, 오은팔에게 믿음이 특출난 신도들 몇 명을 뽑으라 해서 뒤치다꺼리를 맡긴 것 같아요. 거의 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 많은 시체를 혼자 처리하긴 불가능하니까...."

다들 천마도령의 그릇된 욕망에 희생된 원혼들을 떠올리는지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하지만 그게 이 사람들을 따로 뽑은 유일한 이유는 아니에요. 여기부터가 중요한데, 장기두는 천해명이 자기를 찾아와서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할 거라 믿고,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네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오은팔에게 여러 지시도 내려놨고요."

"그럼 신도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알 수 있겠네. 거기에 지시한 대로 할 거 아냐. 현재 같은 상황에 대한 건 없어? 장기두가 쓰러졌다거나 할 때. "

"여기 적어놓은 첫 번째 시나리오가... '수상한 사람이 나에 대해 적의를 들어내거나 죽이려 할 때.' 천해명이 다른 사람 몸에 빙의해 장기두를 죽이러 왔을 때 상황이네요. 종민이 형 몸에 들어갔지만, 빙의에 실패했으니 이건 아니고...."

혹시 몰라, 꼼꼼하게 다시 한번 내용을 읽어본 후에야 병재는 스크롤을 내렸다.

"'별안간 자신이 성격이 뒤바뀌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져 못 깨어날 경우.' 아, 이거에요."

헛기침을 한번하고 병재는 문자를 읽기 시작했다.

"'별안간 내가 성격이 뒤바뀌거나 정신을 잃고 쓰러져 못 깨어날 경우, 전에 경고했던 나를 노리는 악령의 짓일 테니 주의할 것. 흔한 악귀일 경우 굿을 하는 게 제일 이상적인 상황이지만 이 악령은 차원이 다르니, 조심히 상대해야 한다. 내가 돌연히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든, 의식을 잃은 상태이든 대처 방법은 같다: 제사를 지내 내 힘을 증폭시키고 악귀의 힘을 약화하는 것. 성격이 갑자기 바뀐 경우 이미 빙의가 된 것이고, 쓰러져 반응이 없는 것도 악령이 몸을 빼앗으려 고군분투하는 중이니, 나를 결박해 제사실로 데려가 의식을 준비해야 한다.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은 벽장 밀실 옷장 안에 넣어둠.'"

"그래서 옷장 안에 빈 곳이 많았네."

여기까진 이해했죠, 라며 동료들의 반응을 살핀 병재는 탈출러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계속해서 문자를 읽어나갔다.

"자, 제사 순서 읽어드릴게요. '첫째, 제단에 육신을 눕힌 후 움직일 수 없게 단단히 묶는다. 둘째, 양초에 불을 붙이고 향을 피운다. 특수재료로 제작된 이 선향은 영혼을 진정시켜 깊은 잠에 빠지게 하나, 향을 맡는 사람 모두 잠이 들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분향을 하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잠시 자리를 피하고 내 몸이' —지금 상황에선 천마도령의 몸이 아닌 종민이 형이겠죠— '잠에 빠져든 걸 확인한 후에는 환기를 철저히 해야 한다. 셋째, 육체가 수면 상태에 돌입한 게 확인되면 준비된 부적으로 얼굴을 덮는다. 부적은 나의 힘을 증폭시키면서 다른 혼의 영력을 억누르는 효력을 지니고 있는데 눈을 완전히 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의식을 진행하면 효과가 떨어질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넷째, 리더가 무당 방울을 흔들며 기도문을 외우면 신도들이 기도문을 되풀이한다. 기도문을 마친 후에는 엎드려 절을 한다. 이 과정을 열 번 되풀이한다. 마지막으로 부적을 떼서 불태워 버리면 내가 몸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병재가 말을 마치자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신동이 심각한 표정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오케이, 의식은 알았는데 이 사람들을 어떻게 막지? 기억나요? 저번에 태양여고에서는 로브를 입고 신도인척해서 성수에 졸리지를 탔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신도들이 로브같이 동일한 의상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서 천세만세교인 척할 수도 없을 텐데."

"형 말이 맞아요. 게다가 그때는 우리가 신전이 어디에 있고 그 안이 어떤지, 의식이 어떻게 치러지는지 영상을 통해 자세히 파악했는데 지금은 이 제사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죠. 무작정 부딪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아요."

"아니면 굳이 천세만세교인 척할 필요 없이 이 사람들 잠재워버리면 안 돼? 향 맡으면 잠에 빠진다며. 아까 나랑 피오가 저 옷장 안에서 선향 몇 개 봤거든? 제사실 찾은 다음에 문 살짝 열어서 입구 가까운 곳에다가 향 피워놓고 문 닫고 저 사람들 잠들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호동은 동현이 대단하다는 듯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고 이 기세를 잇자는 듯 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제사실의 위치.

"생각을 해보자. 일단 남은 장소는 2층뿐인데 거기엔 옷방, 마네킹 방, 그리고 서재뿐이야. 그 세 군데 다 종민이랑, 천마도령이랑, 그리고 일고여덟 명의 신도들이 들어가 있기에는 장소가 조금 협소하지 않나?"

"그렇긴 한데... 아까 차는 그대로 있었잖아요. 다른 데 갔을 거 같진 않은데."

"일단 2층까지 다 둘러봐야 할 것 같아요."

"근데 병재야, 제사를 중도에 끊으면 문제가 생길까?"

큰형의 질문에 병재는 문자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하지만 스크롤을 내리고 내려도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없자 급격히 복잡해진 상황에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겼다.

"주고받은 문자에는 그런 내용은 없네요.... 그런데 이 의식이 천마도령의 힘을 증폭시키는 거잖아요? 천해명이랑 싸웠을 때 자기가 이길 수 있게. 그런데 종민이 형의 그... 뭐라 해야 하나... 기? 영력? 그런 게 생각보다 강하잖아요. 천해명이랑 천마도령을 둘 다 잡고 있을 정도로. 그러니까 그 힘을 억누르고 있는 부적을 때버리면 다시 종민이 형의 힘이 강해져서 괜찮지 않을까요? 약간 모험인데... 지금 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거 같아요. 일단 천마도령과 천세만세교를 막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요...."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탈출러들 모두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누구도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초조해진 호동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럼... 일단 그 본거지를 찾아보자. 둘러보면 단서가 더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때 가서 다시 의논해봐도 되겠지. 상황이 굉장히 급박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그냥 급습하는 수밖에. "

맏형의 결정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기 전에 분주히 옷장 안에서 찾은 선향과 라이터를 챙기고 있을 때였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피오가 가방 안에 넣었던 장기두의 스마트폰을 다시 꺼냈다. 

"우리 이제 핸드폰이 있어서 한결 수월하게 다닐 수 있을 거 같아요. 이걸 손전등 대신 쓰면 되잖아."

"아, 그러네!"

신동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폰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잠금을 풀기도 전에 호동이 만류하는 바람에 금세 포기해야 했다.

"아냐, 아냐. 불 켜고 다니면 신도들이 우릴 쉽게 볼 수 있잖아. 폰은 위급한 상황이나 확실하게 안전할 때만 쓰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시무룩해진 신동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 그래요.... 그게 좋긴 하겠죠."

숨을 죽인 채 2층으로 진입한 탈출러들은 남은 방을 모조리 둘러봤지만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상하다....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공간이 있기라도 한 건가?"

"그럴 수도 있어. 여기 은근히 그런데 많잖아. 프레임 열쇠 숨겨둔 공간이라든지, 안방에 있는 밀실이라든지...."

"잠깐. 아까 피오가 거실에서 무슨 소리 들었다고 하지 않았어?"

"네, 희미하지만 방울 소리랑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 들었어요."

"거실... 거실이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생각에 잠긴 신동의 머릿속에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다.

"거실에 자개장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여기가 평범한 가정집이 아니긴 하지만 소파 앞에 장롱이라니. 흔한 구조는 아니잖아."

"내려가서 한번 살펴볼까?"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지 호동이 일어서자, 동생들도 따라 기립했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뭔가 수상해."

다시 1층으로 내려온 탈출러들은 조용히 거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병재가 몇 시간 전 아이가 숨어있던 자개장 문을 열어보자 빛나는 야광 글자가 보였다. 글자 주변의 바닥과 벽을 더듬으며 특별한 게 있나 살펴보는 도중, 자개장 벽 뒤쪽에서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울 소리.

놀란 병재가 간신히 입을 틀어막으며 뒷걸음치자, 다른 탈출러들이 목소리 낮춰 무슨 일인지 물었다.

"왜? 뭐 있어?"

"방울 소리. 자개장 너머에서 방울 소리가 들려요."

"거봐, 내가 뭐랬어요. 방울 소리 들린다고 했잖아!"

"그럼 저 너머에 숨겨진 공간이 있고 거기서 지금 의식을 행하는 중이네."

"빨리 막아야 한다, 야들아."

호동이 열어본 가운데 자개엔 아무것도 없었고, 맨 왼쪽 농도 살펴보려 했으나 문이 꼼작도 하지 않았다.

"안 열려요? 스위치 같은 게 있나 보다."

하지만 한참을 주변을 살펴보고 장롱을 더듬어봐도 특별한 장치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못 찾겠는데."

"아, 이런 건 종민이 형이 잘 찾는데... 하필 끌려가가지고...."

"폰으로 불이라도 비춰볼까요? 어두워서 못 찾는 걸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괜찮을까?"

"지금 신도들이 기도문 외우느라 정신없어서 괜찮을 것 같아요. 여기서 더 지체하다간 의식이 끝날지도 몰라요."

"동이 형, 핸드폰 좀...."

막내의 요청에 신동은 피오의 등에 파묻은 얼굴을 겨우 들더니 몸을 더듬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몇 초 후 환한 불이 거실을 밝히자, 어둠 속에 가려졌던 자개 모양 하나하나가 훤히 보였다.

"제가 들고 있을게요. 얼른 찾으세요."  

암흑 속에서 벗어나자 절로 힘이 솟는 듯, 탈출러들은 너도나도 수색에 박차를 가했다.

몇 발짝 뒤에서 불을 비춰주던 신동은 멤버들의 그림자가 그들의 시야를 방해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최대한 휴대전화를 높이 들고 있으려 애를 쓰는 도중, 마침 바로 옆에 있던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소파 위로 올라서자 조금 더 수월하게 자개장을 비춰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순간, 장롱 위에 무언가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어? 거기 위에 뭐가 있어! 병재야, 네 머리 위로 손을 뻗어봐! 아, 안 닿는구나...."

병재가 장신들 사이에서 홀로 언짢아하는 사이, 양옆에 서 있던 운동부가 손을 위로 뻗어 자개장 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거기서 좀 더 오른쪽! 근데 실수로 누르지 않도록 조심—"

신동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호동의 손끝에 버튼이 눌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동시에 달칵, 자개장 안에서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탈출러들이 뒷걸음치자, 장롱문이 열리면서 평범한 자개장 내부가 드러났다.

"엥? 아무것도 없는데—"

지이이잉.

텅 빈 내부에 당황하던 그때, 기계음과 함께 뒤쪽 벽이어야 할 부분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면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밀실이 나타났다.

하지만 별안간 열리는 문에 놀란 건 탈출러뿐만이 아니었다.

끝없이 되풀이되던 기도문이 별안간 뚝 끊겼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더니 자개장 통로에 한 신도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얼어붙은 탈출러들과 눈이 마주치자, 신도는 멍청하게 눈만 끔벅거렸다. 

순간의 정적.

그리고 그 뒤를 잇는 혼돈의 도가니.

"향! 향 꺼내, 빨리!"

놈들이 탈출했다고 고함지르는 신도의 목소리 너머로 병재가 소리쳤다. 피오가 허둥지둥 지퍼를 내리자, 병재가 가방 안에 들어있던 선향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어느새 달려온 신동도 가방에서 라이터를 꺼내 향에 불을 지펴주었다. 몇 개나 제대로 피워졌는지 확인할 새도 없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본 병재는 지체 없이 향을 자개장 안으로 던졌다.

"문 닫아요!"

지시할 필요도 없었다. 연습이라도 한 듯, 향이 던져진 걸 확인하자마자 장롱문을 닫은 운동부는 출구 앞에서 문이 열리지 않게 버티기 시작했다. 한발 늦게 도착한 신도들은 자개장을 부술 듯 두드리며 방에서 탈출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비밀 통로가 좁아 제대로 힘을 쓰기 힘든데다가, 문을 열려는 신도들과 뒤늦게 향을 발견해 밟아 끄려는 신도들로 나눠진 제사실은 난장판이 된듯했다.

모두 자개장에 달려들어 문이 열리지 않게 붙잡고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문 너머에서 소란이 점차 잦아드는 듯하더니 머지않아 모든 게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다 잠든 것 같지? 문 열어도 될까?"

"그전에 꼭 기억하셔야 할 게, 저희 냄새 맡으면 안 되니까 입으로만 숨 쉬어야 해요."

"아, 잠깐만! 아직 열지 말아봐요!"

뭔가 생각이 난 듯, 피오는 어리둥절한 형들을 내버려 두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막내의 손에는 화려한 무늬의 부채가 들려있었다.

"아까 벽장 안 옷장에서 이거 봤거든요. 좀 더 빨리 환기할 수 있게 가져왔어요."

좋은 생각이라며 너도나도 막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피오에게 환기 임무를 맡긴 후, 탈출러들은 조심스럽게 자개장 문을 당겼다.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문 앞에 널브러져 곤히 잠들어 있는 신도들이었다. 쿡쿡 찔러봐도 반응이 없는 걸 보아하니 잠에 깊게 취한듯했다. 

형들이 길을 막고 있던 신도들을 한명 한명 끌어내는 사이, 피오는 열심히 가지고 온 부채를 부치기 시작했다. 바람에 천장에서 길게 늘어진 오방색 천과 벽에 붙여진 수많은 부적이 일렁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핏빛 글자가 팔락팔락 흔들리는 광경은 썩 달갑지 않은 것이어서, 피오는 더 이상 이곳에 원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고개를 돌렸다.

팔이 슬슬 아파져 올 때쯤, 그만해도 될 것 같다는 형들의 말에 피오는 부채를 내렸다. 바로 밀실에 들어갈 거라는 예상과 달리, 끌어낸 신도들만 살펴보는 형들을 보자 살짝 걱정되었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아니, 문제까지는 아닌데 오은팔이 안 보이네. 방 안에 쓰러져 있나?"

"여기에 없다면 그렇겠지?"

"혹시 모르니 다들 조심해라."

호동을 선두로 탈출러들은 장롱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숙여야 하는 짧은 통로를 지나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제사실이 그들을 반겼다. 입구부터 즐비한 노란 부적과 다채로운 오방천, 한쪽 벽에 걸린 천마도령의 초상화와 그 근처에 쓰러져 있는 오은팔까지 모두 탈출러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지만, 멤버들의 시선은 오로지 길고 높은 목제 탁자 위에 미동 없이 누워있는 한 사람에게 향했다.

"종민아!"

"종민이 형!"

이름을 부르며 종민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누군가 그들을 밀치고 지나가 제단 앞을 막아섰다.

"안돼!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마세요!"

병재였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종민에게 다가가려는 걸 막아서자, 당황한 탈출러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하지만 병재는 혼란스러운 동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착하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는 뒤돌아 종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종민은 잠든 것처럼 보였다.

"병재야, 왜? 왜 그러는데?"

"여기 문 열렸을 때, 기억나요? 천세만세교는 한창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잖아요."

"그렇지. 근데 그게 왜?"

"천마도령이 지시한 의식의 마지막 절차가 얼굴을 덮어놓은 부적을 불태우는 거잖아요. 그런데 부적이 없어요. 의식이 끝나지 않았는데 부적이 사라졌어...."

병재가 훤히 드러난 종민의 얼굴을 가리키자, 그제야 나머지 탈출러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그건 잘...."

"혹시 바닥에 떨어진 거 아냐? 어서 찾아봐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탈출러들은 허둥지둥거리며 하나같이 부적 찾기에 몰두했다. 오은팔의 몸을 수색하던 동현은 그가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는 걸 발견했다.

"어? 라이터? 오은팔이 라이터를 들고 있는데?"

"라이터요?"

읏차, 소리를 내며 동현이 오은팔을 옆으로 옮기자, 남자의 아래에 깔려있던 종잇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싶어 종이 쪼가리를 집어 든 병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불에 타버린 듯 일부분만 남은 종잇조각은 누가 봐도 그들이 찾던 부적의 일부분이었다. 벽에 붙여진 노란 부적과는 달리, 하얀 종이에 검붉은 글씨로 쓰인 이 부적은, 대부분이 소실되긴 했어도 다른 부적보다 복잡하고 크기도 남달랐다. 얼굴을 충분히 덮을 수 있을 만큼.

"오은팔이... 의식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부적을 불태워버린 것 같아요."

"뭐?"

"우리가 들이닥치니까 리스크를 감수하고라도 의식을 억지로 끝마치려고 했나 봐요."

"아니, 잠깐만. 원래대로라면, 그러니까 의식을 제대로 끝냈다면, 천마도령이 깨어났어야 하잖아? 그렇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종민이 형이나 천마도령이나 둘 다 반응이 없잖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탈출러들은 해결책을 찾으려 애를 썼다.

"우리가 깨워야 하는 거 아니가? 그, 가위눌린 것처럼 종민이 혼자 못 일어나는 걸 수도 있잖아."

"근데 종민이 형이 아닌 천마도령이 깨버리면...."

"괜찮아. 아직 결박된 상태니까 섣불리 뭘 못할 거야. 여차하면 다시 기절시키면 되지.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른다는 거야. 단서도 없고."

"그렇죠...."

"근데 언제까지나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어. 신도들이 잠든 지 벌써 꽤 시간이 지났잖는데도 종민이가 아직 못 일어나고 있잖아. 내 생각엔 일단 깨우려는 시도는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애."

동생들은 주저하는 표정이었지만 호동의 설득에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종민아!"

"종민이 형, 저희 목소리 들려요?"

"형! 형, 정신 차려요!"

하지만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종민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깨를 흔들어도, 옆구리를 쿡쿡 찔러봐도, 느리게, 느리게 호흡을 뱉을 뿐이었다.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듯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