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산장

살인산장 (2)

이 수상한 산장에서, 당신은 더 수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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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알립니다.


박강인은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김종민, 유병재?”

생각지도 못한 호명에 둘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살인감옥에서 박강인과 처음 대면 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온몸이 테이프로 의자에 결박된 것도 아닌데, 극심한 공포에 입조차 뻥긋할 수 없었다. 

거의 5년 전의 일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박강인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다시 마주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이 깊은 산속에서 말이다. 설마 우리가 살인감옥을 탈출한 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나? 언젠가 다시 마주칠 날을 기다리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걸까?

“김종민, 유병재, 맞냐고요.”

박강인이 재차 물었다. 종민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마, 맞는데요. 근데 왜요?”

이름을 확인하는 살인마에게 대꾸하는 건 썩 현명한 짓이 아니었지만,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을 다시 주워 담기는 불가능했다. 병재가 팔을 꽉 잡자,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한지 깨달은 종민이 헉하고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강인은 덤덤하게 카운터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집어 손을 내밀었다. 한주먹으로 숨겨지는 작은 물건이었다.

“뭐, 뭐예요?”

병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지만, 박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내밀고 종민과 병재 둘 중 한명이 물건을 받아 가길 기다릴 뿐이었다. 힐끗,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가면 때문에 표정을 읽기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병재가 손을 내밀자, 활짝 펼쳐진 손바닥 위로 짤그락 소리와 함께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건네받은 건 다름 아닌 열쇠였다. 예상치 못한 물체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박강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체크인됐고, 방은 302호입니다. 1층은 공동시설이니 알아서 편하게 쓰고, 이따 7시 반에 바비큐 파티 있으니 그때까지 내려오시오.”

존대인지 하대인지 분간하기 애매한 말투로 안내를 마친 그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풀다만 스도쿠에 다시 집중했다. 그런 박강인을 종민과 병재는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어, 음, 그럼 일단 올라가 볼까요?”

“어? 어어, 그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몰라도, 더는 박강인과 같은 공간에 머물고 싶진 않았다. 종민과 병재는 잰걸음으로 산장 내부로 향했다. 입구를 벗어나자, 탁 트인 공용공간이 그들을 맞이했다. 커다란 티브이에 안락해 보이는 소파, 널찍하고 깔끔한 주방과 창문 밖으로 보이는 수영장까지. 딱 봐도 고급 펜션이었다. 살인감옥처럼 삭막하고 칙칙한 공간을 마주하리라 짐작했던 그들의 예상과는 천지 차이였다. 

“우와, 여기 꽤 좋은데? 벽난로도 있어!”

종민이 공용거실 한쪽 벽을 가리켰다. 기분 좋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벽난로 앞에는 한 젊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새로운 투숙객들의 등장에, 부지깽이로 장작을 들쑤시던 그가 잠시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멋지죠? 이렇게 불멍 때리기 딱 좋아요.”

“아, 그러겠네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종민과 달리, 한발짝 뒤에 서 있는 병재의 표정은 썩 좋진 않았다. 이 남자, 분명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다. 그것도 달갑지 않은 인연으로. 그러나 머리를 헤집어봐도 번뜩 떠오르는 기억이나 이름은 없었다. 

그 사이 도구를 내려놓고 일어선 남자가 종민에게 악수를 청했다. 키가 꽤 큰 편이었다.

“처음 오셨나 봐요? 저는 203호에 묵고 있는 오연범이라고 합니다.”

손을 맞잡는 종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오연범?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저는 김종민이라고 해요. 여기는 유병재.”

동생을 소개를 해주려고 뒤돌아본 종민은 그제야 병재의 얼굴이 잔뜩 굳어져 있는걸 알아차렸다. 오연범과 눈이 마주치자 금세 표정을 풀고 악수했지만, 몇 년이나 병재를 봐온 종민은 그가 몹시 불편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지.

왠지 이 남자 앞에서는 물어보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에 입을 다물고 있는데, 오연범이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 종민 씨나 병재 씨도 불 보는 거 좋아하세요? 전 좋아하거든요. 모든 걸 집어삼키며 타오르는 불을 보고 있자면, 그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를 살펴보고 있자면,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양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어….”

우수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 남자, 위험한 사람이다. 친하게 지내봤자 좋은 일 없을 것 같았다. 뭐라 대꾸해야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할 수 있을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는데, 옆에서 병재가 딱딱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저흰 짐 풀어야 해서, 그만 올라갈게요.”

단칼에 끊어낸 대화에 오연범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병재를 빤히 바라보자, 병재 또한 지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이번에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에, 둘 사이에 서 있는 종민만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볼 뿐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남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별안간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벽난로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러셔야겠네. 이따 저녁때 봐요.”

“가요, 형.”

종민이 급변한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자, 병재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계단으로 향했다. 종민은 별 저항 없이 순순히 동생의 뒤를 따랐다.

병재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들이 막 2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런 사람이랑 막 말을 섞으면 어떡해요!”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캐리어를 내려놓자마자 한마디 하는 동생에 종민이 움찔거렸다. 누가 들을까 봐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거였지만, 그 속에 담긴 책망과 걱정이 날카롭게 전해졌다.

“미, 미안. 누군지 몰라서 그랬어. 넌 저 사람 알아?”

“오연범이잖아요. 폭탄 테러리스트. 크레이지 하우스, 기억 안 나요?”

“아! 그때, 그 무의식…!”

“네, 맞아요.”

병재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단번에 기억 못할 법도 했다. 그들은 실제로 오연범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전신마취 된 상태로 무의식 탐사 기계에 연결되어있는 모습, 그리고 무의식 속에서 발견한 가짜 신분증 사진이 그들이 접한 오연범 실물의 전부였으니까. 게다가 그의 무의식을 탈출한 지 어느덧 3년이 다 되어 가다 보니, 가물가물할 만도 했다.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자, 예민하게 반응한 게 조금 후회가 되었다. 괜스레 2층에 늘어선 방을 한번 쭈욱 둘러본 병재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도 처음엔 그냥 어디서 본 거 같다 싶었는데…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때 오연범은 이미 검거된 상태였잖아요? 수사에 협조를 안 해서 우리가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 건데, 지금은 왜 멀쩡하게 활보하고 있는 거죠?”

“어? 그러게? 벌써 풀려났나?”

“에이, 설마요. 아무리 이 나라의 처벌이 약하다 해도 그렇지,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낸 테러리스트를 벌써 사회에 활보하게 둘리가….”

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오연범의 마지막 목표 테러 장소와 시간을 알아내긴 했지만,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수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박강인은? 박강인도 이상해. 혹시 우릴 기억 못하나?”

“모르겠어요. 이름을 알길래 기억하는 줄 알았더니, 예약이 되어 있어서 그런가 싶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요. 택시에서 정신 차린 것부터 해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쾅!

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종민과 병재가 펄쩍 뛰었다. 소리의 근원을 추측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성난 발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화가 잔뜩 난 산장 손님 한명이 문을 세게 닫고 나온듯했다. 몇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그러나 조금 전보다는 조용하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가 문 부숴 먹으려고 작정했나?”

“니 때문 아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노, 난 모르는 일이라니까?”

“그럼 여기에 그걸 가져갈 사람이 니밖에 더 있단 말이가? 대뽀까지마라, 이 형한테 다 걸린데이.”

“증거있나? 말하는 꼬라지 보니까 교도소장이 아니라 무슨 경찰이라도 된 줄 알겠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자리에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던 종민과 병재는, 큰소리로 다투며 계단을 내려오던 쌍둥이와 딱 마주쳤다.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구경만과 구경도였다.

아니, 이 사람들이 왜 여기서 나와??

“방금 오신 분들인가 보네. 좀 지나갈게예.”

박강인과 마찬가지로 쌍둥이 형제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듯 했다. 구경만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양해를 구하고, 둘은 별다른 시비 없이 잠시 멈춰선 ― 정확히는 충격에 얼어붙은 ― 종민과 병재를 스쳐 지나갔다. 내 물건을 훔쳤느니, 절대 아니라니 하며 투닥거리는 형제의 목소리가 1층으로 멀어져 갔다.

“방금 그 사람들 좀ㅂ―”

쉿! 종민이 형, 일단 방에 가서 얘기해요!”

병재가 말을 자르며 종민의 등을 떠밀었다. 종민은 불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금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칸, 한 칸을 오를 때마다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어서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방 안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누며 상황을 좀 정리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3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섯 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던 2층과는 달리, 3층에는 방이 세 개뿐이었다. 그 대신 남은 공간이 책꽂이와 편안한 의자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발코니까지 있어 바깥 풍경을 만끽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세컨드 거실을 떡하니 자리 차지 하고 있는 건, 마주 보고 앉아 장기를 두고 있는 장기두와 계수상이었다.

뭐지? 혹시 여기가 빌런들의 아지트라도 되나?

두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는지 계수상이 고개를 들었다. 단발단과 눈이 마주친 그는 불현듯 등장한 관객에 불쾌함을 표하듯 크흠, 크흠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러나 박강인, 구경형제와 마찬가지로, 그의 눈동자 속에서도 그들을 알아본 듯한 순간의 반짝임은 찾을 수 없었다. 조마테오 병원에서 어딘가 나사 빠진 듯한 뜬금없는 발언이나 행동 또한 없었다. 오히려 지금 그의 모습은, 처음 태양여고 교실에서 마주했던 엄격하고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에 더 가까웠다. 시선이 마주친 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장군.”

장기두가 탁 소리와 함께 장기 말을 내려놓자, 계수상의 관심이 다시 장기판으로 쏠렸다. 천마도령은 아예 종민과 병재는 안중에도 없는지, 이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계수상이 장기판으로 다시 눈을 돌리기 전에 그들을 찌릿 째려본 덕분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종민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가 병재의 팔을 잡아끌며 302호를 가리켰다.

“저깄네, 우리 방.”

장기에 몰두해 있는 두 빌런을 뒤로하고 302호로 다가갔다. 모던하고 고급스러운 다른 산장 시설과는 다르게, 문에 투박한 열쇠 구멍만 덩그러니 달린 걸 보니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냥 거기에 꽂혀있을 수는 없었다. 받은 열쇠로 문을 열자, 싱글 침대 두 개와 커튼이 쳐진 창문가에 놓여있는 1인용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욕실로 향하는 문이 그들을 맞이했다. 크지는 않지만 안락한 방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지금 그들에 눈에 들어 올리기 없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을 잠그고, 걸쇠를 걸었다. 왠지 그걸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탁자와 의자를 끌고 와 문을 막았다.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가벼워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허접한 바리케이드라도 치니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했고.

“여기 괜찮은 걸까?”

“전혀요.”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종민에 병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지.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만난 나쁜 놈들이 몇 명인데! 이쯤 되니 살인산장은 살인마들에 모이는 산장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진짜 이게 다 뭐야. 천마도령은 죽은 거 아니었어? 저 선생님은 왜 병원에 안 있고? 게다가 그 쌍둥이 둘 다 좀비에 물렸잖아!”

“방음이 얼마나 잘 되어있는지 모르니까 일단 목소리 좀 낮춰요, 형.”

“아, 어, 그래….”

혹시 몰라 문에서 멀어진 둘은, 방 안쪽으로 들어와 침대에 마주 앉았다. 매트리스가 한없이 푹신푹신했지만, 그들이 느끼는 불안을 전혀 해소해주지 못했다.

“형 말대로 지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천마도령이야 우리가 확실히 죽은 건지 확인을 안 해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박강인이 왜 산장을 운영하고 있고, 분명 좀비에 물렸던 구경만, 구경도 둘 다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또 조마테오 정신병원에 있어야 할 계수작과 경찰에 체포된 오연범은 왜 여기에 손님으로 머무르고 있는지… 게다가 분명 우리는 그 폐건물에 있었는데 왜 택시에서 깨어나서 여기로 오게 된 건지, 전부 말이 안 되는 것투성이에요.”

하나하나 이상한 점을 꼽던 병재가 한숨을 푹 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늘어만 가는 수수께끼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동생의 브리핑을 말없이 듣고 있던 종민이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가방에 뭐라도 있지 않을까? 단서가 될만한 게 있을 수도 있잖아!”

망설임 없이 행동을 개시한 종민은 캐리어를 가져다 눕히고는 지퍼를 당겼다. 여행용 가방을 열자,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처럼 누구나 여행에 챙길 법한, 지극히 평범한 여행 필수용품들이 들어있었다. 그래도 종민은 혹시 뭐라도 나올까 싶어 포기 하지 않고 계속해서 짐을 뒤적거렸다.

“뭐 있어요?”

어느새 다가온 병재가 종민의 어깨너머로 기웃거렸다.

“딱히 없는 거 같네. 근데 이거 다 내가 진짜로 입는 옷이야. 칫솔도 평소에 쓰던 거고. 니 가방엔 뭐 없을까?”

병재의 캐리어도 들여다보긴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종민의 것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옷과 세면용품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진짜 뭘까요?”

“그러게.”

머리를 싸매봐도 도통 무슨 영문인지 이해할 수 없고, 짐과 숙소 방을 뒤적거려도 나오는 단서가 없자, 둘은 일단 그들이 처한 현실을 안전하게 탈출하는 방법부터 고심해보기로 했다. 여기가 어디고,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극악무도한 빌런들이 득실거리는 살인산장에 갇힌 것 또한 변함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여기서 살아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파악해도 그만이었다.

“카운터에 가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

“아, 카운터에요?”

병재가 망설였다.

“괜찮은 생각이긴 한데, 그 카운터를 맡고 있는 게 박강인이다보니… 우리가 여길 떠나려고 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게 문제죠.”

“아, 그렇네….”

“걸어서라도 탈출해야 하나?”

“오늘은 좀 무리 아닐까? 비도 오고 곧 해가 질 거 같은데. 산속이라 더 빨리 어두워져.”

종민은 바깥을 확인하기 위해 창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튼을 열자, 우거진 녹음이 눈에 들어왔다. 비를 한껏 머금어 한층 짙은 녹색으로 칠해진 숲이 왠지 모르게 스산해 보였다. 

“비가 꽤 많이 오는데?”

종민은 표정을 찡그리며 쟃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문을 살짝 열고 손을 내밀자, 굵은 빗방울이 연신 손바닥을 때렸다.

“어쩔 수 없네요.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고 내일 빠져나갈 방도를 간구해봐야 할 거 같아요. 일단 방에만 있으면 그나마 안전하지 않을까요?” 

“근데 아까 무슨 바비큐 얘기하지 않았어? 우리가 안 내려가면 찾아오는 거 아냐? 그때 그, 그, 그거 있잖아, 그거 들고!”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종민이었지만, 숨겨진 뜻을 문제없이 해독한 병재의 표정이 굳어졌다.

“에이, 설마요. 여기에도 전기톱이 있을 리가….”

그때, 창밖에서 빗소리를 뚫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애타게 찾던 호동이 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위험한 걸 들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일단 손에 든 거 내려놓으시고….”

반가운 마음은 잠시뿐이었다. 대화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혹시나 큰형이 보일까 싶어 종민은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고 두리번거렸지만, 시야에 잡히는 사람은 없었다. 짐을 뒤적거리다 말고 일어선 병재도 어정쩡한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정확히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대화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위잉-

규칙적인 빗소리를 매섭게 흐트러트리는 전기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마?

절로 머릿속에 호동이 형을 상대로 전기톱을 치켜드는 박강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종민 옆으로 달려온 병재가 창문을 활짝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지만, 여전히 그 어디에도 맏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동이 형!”

“형, 위험해요!”

소리의 파동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위협적으로 허공을 가르는 앙칼진 소리에서 무언가를 가르기 시작한, 다소 무겁고 둔탁한 소리로.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순식간에 방을 가로지른 종민과 병재는 허겁지겁 빗장을 열어젖혔다. 옆으로 밀친 테이블과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손이 자꾸 헛짓했지만, 무사히 걸쇠를 푸는 데 성공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둘은 쏜살같이 복도로 튀어 나가 계단으로 향했다. 문을 잠글 정신 따윈 없었다. 조금 전까지 장기를 두고 있던 남자들이 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면서도, 막상 전기톱을 든 박강인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지, 방안에 숨어있는 게 최선이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 지금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호동이 형을 구해야 했다.

1층에 도착한 그들은 여전히 벽난로 앞을 지키고 있는 오연범과 어느새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는 계수상을 지나쳤다. 뒷마당으로 직행해 문에 몸을 던지다시피 했다.

“호동이 형!”

문이 열리자, 그들 눈에 들어온 건 의식을 잃은 채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호동이 아닌, 멀쩡한 모습으로 테라스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맏형이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봐봐요, 내가 종민이 형이랑 병재 형 목소리 맞다고 했지?”

뒤늦게 합류한 두 형의 모습에 안심이 됐는지 웃는 피오와.

“어? 우리 아까 전체 둘러봤을 땐 못 만났잖아. 언제 도착했지?”

반가워하면서도 어리둥절해하는 동현과.

“엇갈렸나 봐요. 그래도 다 모여서 다행인가?”

복잡한 심경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는 신동이었다.

예상과 다른 광경에 잠시 뇌가 멈춰버린 종민과 병재에게 맏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느그들은 여태까지 어디있었노?”

“호동이 형, 형, 안 죽었어요?”

“내가 왜 죽나. 별 일 없었제?”

“그게, 안 만났으면 좋았을 사람들을 마주치긴 했지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방금 전기톱 소리는 뭐였어요? 형 목소리를 들었는데 갑자기 전기톱이 켜져서 놀라가지고―”

“호동이 형 죽은 줄 알았어요!”

필터링 없이 말을 내뱉는 종민을 보며 호동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신동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모르면 그럴법하죠. 박강인은 저기서 나무… 베고 있어요.”

“…나무?”

신동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방에서 보이지 않던 마당의 반대쪽 끝에 위치한 건축물이 보였다. 본 펜션과 따로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창고였다. 반쯤 열려있는 문으로 쌓여있는 땔감 더미가 보였고, 창고 문 앞에서 서 있는 박강인은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장기두가 한손에는 우산을, 다른 한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는 서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탈출러들이 쳐다보는 사이, 장기두가 뭐라 말하며 우산을 접었다. 그러고는 통나무 하나를 집어 들어 평평한 흙바닥에 세웠다. 자세를 잡고 도끼를 들어 통나무를 내리쳤다. 전기톱 소리에 묻혀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한 번의 스윙으로 깔끔하게 쪼개진 장작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장작 패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대체 왜?”

힘 자랑이라도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중얼거리는데, 동료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대신 대답했다.

“벽난로에 쓸 게 얼마 없어서요.”

뒤를 돌아서자 문에 살짝 기대고 서있는 오연범이 보였다. 산장에 먼저 와있던 탈출러들도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얼굴에 경계심이 서렸다.

“아까 땔감이 거의 다 떨어졌다고 얘기했더니, 미리 준비해놓으시려나 봐요.”

그는 태연하게 웃으며 나머지 탈출러들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종민과 병재를 바라보았다.

“두 분이서 오신 줄 알았는데 다 같은 일행인가 봐요? 재밌네.”

대체 뭐가 재밌냐고 대꾸할 틈은 없었다. 오연범의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기 때문에.

“거, 길 좀 막지 말고 비켜보소.”

들려오는 사투리에 뒤를 돌자, 입구에는 양손 가득 접시를 든 구경형제가 서 있었다. 오연범이 옆으로 물러서자, 둘은 그와 탈출러들을 지나쳐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거기 멀뚱히 서 있지 말고예. 빨리빨리!”

“어서 준비해야 밥 먹을 거 아닙니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재촉하는 구경만과 거만한 말투로 거드는 구경도에 탈출러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희요?”

종민이 확인차 되묻자, 구경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교적 문에 가까이 서 있던 그와 병재를 펜션 안으로 살살 떠밀었다.

“당연하지예. 다른 분들도 어서 도우소. 밥은 다 같이 먹는 거니까. 가만있자, 지금 사람이 몇 명이고?”

 구경형제에 떠밀려 들어선 부엌 테이블에는 다양한 음식이 올려져 있었다. 상추와 깻잎이 담긴 바구니부터 구워 먹을 고기와 양파, 마늘에 버섯까지. 그 밖에도 여러 밑반찬이 놓여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된다고요?”

“밖으로 날라야지, 밖에서 고기 구워 먹을 거니까.”

“아, 예….”

아직 얼떨떨해하면서도 종민은 김치와 파무침을 집어 들었다. 다른 탈출러들도 각자 한두 개씩 접시를 집어 들고 야외 테라스 테이블로 나르기 시작했다.

“그럼 슨생님, 저희가 여기 처음이라서 그라는데, 원래 저녁은 손님들이 다 같이 모여서 먹는거지예?”

고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호동이 물었다. 친숙함을 나타내려 평상시보다 사투리를 강조하면서였다. 적송교도소에서 구경만에게 보였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는데, 전직 교도소장은 그 기억이 전혀 없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아, 처음이시구나. 첫날 저녁은 다 같이 바비큐 파티하긴 하는데 합석은 안 하셔도 되지예. 근데 오늘 같은 날은 비가 오다 보니까, 다른데 앉을 때도 마땅치 않아서 그냥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먹는거지예.”

“그러면 내일 아침 같은 경우에는….”

호동이 구경만과 대화하며 정보를 더 빼내려고 하는 사이, 조용히 듣고 있던 신동은 빈 접시와 수저를 차리는 척하며 병재에게 속삭였다.

“우리 기억 못하는 거 같지?”

“네, 확실히. 왜일까요? 좀비... 가 됐다가 인간으로 돌아와서 예전 기억을 잃었나 싶었는데, 그렇다기엔 다른 사람들이 말이 안 돼요. 계수작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렇다 쳐도요.”

“계수상 아니었어? 너 저번에도 그렇게 부른 거 같은데.”

“아, 그래요? 계수작이 입에 착 붙어서 그런가….”

“어울리긴 하지. 아무튼, 오연범은 우릴 모를 수도 있어도 박강인이나 천마도령이 못 알아본다는 건 말이 안 돼.”

수상한게 한둘이 아니었다. 갈수록 의문점만 늘고 있었다. 병재가 그와 종민이 도착하기 전에 아무 일 없었냐고 물으려던 찰나, 장작 패기를 마친 박강인과 장기두가 다가오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박강인은 별말 없이 테라스 한구석에 놓인 그릴을 끄집어내서 고기를 구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장기두는 어디서 찾은 와인 한 병을 들고 오는 오연범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이 원하는 장작, 다 패놨으니 가져다 쓰는 건 알아서 하시오.”

“오, 탱큐. 불이 꺼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요. 그나저나, 도끼 꽤 잘 쓰시네요?”

“종종 사용할 일이 있어서.”

“종종이 아닐 거 같은데….”

대화를 엿듣던 종민이 중얼거렸다. 그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장기두가 그쪽을 돌아보자 종민은 흠칫하며 젓가락 짝을 확인하는 척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장기두는, 다행히 별말없이 고개를 돌리더니 잠시 손만 씻고 오겠다며 안으로 사라졌다.

사람이 많아서인지 저녁 준비를 마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고기가 지글지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구워지고 있었고, 커다란 테이블에는 그릴 앞을 지키고 있는 산장 주인을 제외한 투숙객들이 빙 둘러 앉아있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짠 한번 해야겠지않나?”

“거 좋은 생각이다! 혹시 건배사 어떻습니까?”

구경도가 묻자, 쌍둥이 형이 동의하며 왼쪽을 바라보았다. 구경만의 제안을 받은 계수상이 순간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옆자리라서 그런지, 아니면 희끗희끗 보이는 흰머리 때문에 제일 연장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 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뭐가 됐던 구경만의 재촉을 이기지 못한 계수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킨 것치고는 일어서서 본격적으로 건배사를 준비하는 모습이 뭔가 우스웠다.

“그럼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겠습니다. 위대한 태양신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

저렇게 정체를 드러내고 되는 건가? 탈출러들은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리에 앉은 나머지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괴기한 광경이었다. 마치 이 정도쯤은 별 대수가 아니라는 듯이 심드렁했다. 그나마 비웃음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구경도와 오연범이 상대적으로 정상적으로 느껴졌을 지경이었다.

“태양교를 위하여!”

다른 투숙객들의 술렁임(혹은 무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 높여 외친 계수상이 잔을 들었다. 투명한 유리잔 속의 붉은 액체가 출렁였다. 

“그리고 영생을 위하여!”

아무도 건배사를 뒤따라 외치지 않았다. 영생이라는 단어에 장기두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을 뿐이다. 그러나 계수상은 딱히 누가 따라하리라 기대를 안 했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단숨에 잔을 비웠다. 고요 속에 잔을 탁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의자에 앉으려는 계수상의 몸이 휘청였다.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뭐라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그의 입에서 와인보다 붉은 피가 쏟아져나왔다. 쿨럭거리며 비틀거리던 그가 중심을 잃었다. 바닥에 쓰러진 계수상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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