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공간

하얀 공간 (1.5)

1.5화: 결의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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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원래 악령감옥 1화의 일부분이었으나 드랍해버리기엔 아쉬움이 남아 따로 짧게 올리는 연성입니다. 조마테오 병원과 어둠의 별장 그사이에 일어난 일로 봐주세요.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으나 방을 가득 뒤덮은 어둠은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일렁이는 핏빛 기억에 종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끝없는 꿈속에서 되풀이되던 소중한 사람들의 비명이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듯했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어둠 속의 그림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분명 처음부터 말했다. 포기하면 편할 거라고."

"어떻게 그래요. 난 못해요. 포기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게 뻔한데."

밤새 시달린 악몽의 여파를 말해주듯 종민의 목소리는 쉬어있었다. 침대 옆에 놓인 스마트폰을 힐끗 쳐다보는 두 눈엔 짖은 다크서클이 깔려있었다. 손을 뻗어 폰을 확인해보니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오늘도 잠자긴 그른듯했다. 

천해명과 의식을 공유하게 된 그날부터 천해명은 종민을 굴복시키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종민의 몸을 장악하거나 직접적인 상해를 가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악령이 아니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정신적 고문. 끊임없이 종민을 위협하고 몰아붙였다. 쉽사리 굴복할 종민이 아니었지만, 천해명은 매일 밤, 종민이 가장 무방비한 꿈속에서 그를 괴롭히며 무너트리려 하곤 했다. 잠이 든 순간부터 휘몰아치는 악몽에 종민이 밤을 새우는 게 일상이 돼버릴 만큼.

도움을 청해야 하나.

종민은 탈출러 단톡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해명과 강제 동거한 지 두 달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 아직도 천해명에게 시달리고 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걱정되었다. 왜 이제 와서 말하냐고 걱정어린 타박을 듣는 건 괜찮았다. 만약 아직도 그런 말 하냐며 안 믿어 준다면? 진짜라는 걸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까.... 더 이상 평소처럼 웃으며 괜찮은 척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다 내려놓고 빙의 당하면 어떨까 싶었다. 그땐 믿어주겠지. 믿을 수밖에 없겠지.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무 위험해. 천해명이 몸을 차지하면 뭘 할 줄 알고. 

잠시라도 나약한 생각을 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아, 그 기도문!

문득 조마테오 원장이 알려준 퇴마 주문이 생각났다. 원장님은 끝끝내 천해명의 이름을 몰라 퇴마에 실패했지만 탈출러들과 함께 악령의 이름을 넣어 다시 시도했을 때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한 줄기의 희망이 그를 일으켰다. 책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어둠 속의 그림자가 그를 쫒아오는 듯했지만 종민은 개의치 않았다. 서둘러 스탠드를 켜고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헤집었을까. 지금쯤이면 웬만한 단서는 찾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서서히 절망이 물밀듯 몰아치기 시작할 때 노트 사이에 끼어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종이가 눈에 띄었다. 구겨진 종이를 향해 뻗는 손이 떨려왔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집은 종잇조각에는 종민이 그토록 갈망하던 퇴마 주문이 적혀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책상에 올려둔 종이를 손바닥으로 눌러 반듯하게 펼쳤다.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서늘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천해명이 어깨너머로 쪽지를 살펴보고 있다는 걸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 밤엔 왜 이리 설치나 싶었는데 고작 이것 때문이었나?" 기도문을 훓어보는 천해명의 얼굴엔 비웃음이 흘렀다. "설마 이걸로 날 내쫒을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전에 성공했는데 왜 이번엔 안 먹힐 거라 생각하시는 거죠?"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지. 그때와는 다른 요소가 많아." 종민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천해명은 한숨을 쉬고는 선심을 쓰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거라. 그땐 왕희열의 몸에 내가 완전히 빙의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으냐? 이 주문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잖아요."

"효과가 있다면 네가 꽤 괴로울 텐데. 고통에 몸부림치다 의식을 잃어 주문을 되풀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이마에 성물도 그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럼... 멤버들한테 부탁해야겠네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듯 종민은 단호하게 천해명을 지나쳐 침대로 돌아왔다. 무심한척했지만 묘한 미소를 띠며 그를 응시하고 있던 악령이 신경 쓰였다. 평소 같으면 종민을 방해하거나 협박했을 텐데 자신이 위험해지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될 수 있음에도 가만히 있는다? 무슨 꿍꿍이일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아침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고 애쓰는 도중, 귓가에 천해명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넌 못 한다, 순수한 영혼. 나를 쫒아내서 흘리게 된 피가 다 네 손에 묻기 때문이지. 다시 한차례 자유의 몸이 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간다면 그자도 너처럼 나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어림도 없지. 나를 풀어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네 동료들을 네 눈앞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죽일 때, 넌 날 막을 수 없을 거다. 그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야."

조용히 천해명의 말을 듣고 있던 종민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이걸 얘기해주시는 건데요? 조용히 있었으면 원하는 대로 흘러갔을지도 모르는데. 원하는 게 뭐에요?"

"나와 내기를 해보지. 누가 이기는지, 누가 끝까지 버티는지. 어떤가? 이 상태로 지내기만 한다면 자네는 내가 다른 곳에서 활보하는 걸 막아 다른 이들을 지킬 수 있어. 네가 아끼는 멤버들까지도 말이다."

"...진다면요?"

"자네가 모든 걸 잃는 동시에 나는 막강한 순수한 영혼의 힘을 얻겠지. 어때, 해볼 만하지 않은가? 자네의 모든 것을, 수많은 사람을 위해."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질문이었다. 모든 것을 걸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니. 천해명이 옳았다. 종민의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었다.

"...좋아요. 누가 이기나 봐요. 난, 끝까지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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