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공간

하얀 공간 (1)

1화: 악령감옥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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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 이 글은 "종민에게 빙의를 시도했다가 도리어 갇혀버린 천해명"이라는 소재를 추천받아 쓴 연성입니다.  


, 불이 나갔다. 순식간에 어둠이 모든 걸 집어삼키는 듯했으나 다행히 작은 비상등이 켜지면서 탈출러들을 암흑으로부터 지켜주었다. 하지만 얼굴에 피어오르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순 없었다. 문이 닫힌 화물 엘리베이터 안의 그들은 꼼짝없이 갇힌 신세였다.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작은 공간에 익숙하고도 섬뜩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마의 목소리.

"너희들은 절대로 날 이길 수 없다. 여기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거의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첫 탈출부터 이랬었다. 마지막 퍼즐을 풀고 탈출에 성공했다고 기뻐하며 문을 열었을 때 탈출러들을 기다린 것은 출구가 아닌 또 다른 방이었듯, 악령을 퇴마했다고 안심했었지만 천해명의 혼은 완전히 소멸한 게 아니었다.

"이제 십 분밖에 없어, 우리 시간."

무겁게 내려앉는 침묵을 깨는 신동의 말에 병재는 구겨진 수첩 페이지를 펼쳐 단서를 되짚었다. 몸이 없는 상태의 악귀는 악취를 풍기고, 그걸 일정 시간 이상 맡으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단 십 분. 모두 일사불란하게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혹시나 왕희열 씨가 아는 게 있나 싶어 깨워보려고도 하고, 프레임 열쇠판의 전서체도 한 글자, 한 글자 살펴보며 답을 추측해보려고 했으나 딱히 소득은 없었다.

종민은 구석에 세워져 있는 병원 침대로 눈을 돌렸다. 오랫동안 방치된 여러 의료 기구들이 나뒹굴고 있는 게, 뭔가 있을 법해 보였다. 고개를 숙여 침대 주변을 뒤적이던 그때,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목뒤를 휘감고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 뒤에 바짝 붙어 서서 목덜미에 차가운 입김을 내쉬는듯한 섬뜩함.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리가 쭈뼜서는 느낌.

급히 뒤돌아봤지만 보이는 건 분주히 단서를 찾아 헤매는 멤버들뿐이었다. 상상이었을까, 순간의 착각이었을까. 종민은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듯한 목덜미를 문질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걸 알려야 할지 고민하던 도중, 병재의 탄성이 들렸다. 왕희열한테서 무언가를 찾은듯했다. 자연스레 모든 시선이 단서소리꾼의 손에 들린 천 조각으로 쏠렸고, 단서를 찾았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기분 나쁜 냉기는 잠시 잊혀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기에 탈출러들은 집중해서 전서체 판에서 글자를 찾기 시작했다. 종민이 신동에게서 세 번째 프레임 키를 넘겨받아 마지막 글자에 끼우던 그때, 얼음장처럼 싸늘한 손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가차 없이 목을 파고들며 빠르게 숨통을 조여오는 손길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놓쳐버린 프레임 키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길게 귀에 울리는듯했다. 놀란 멤버들이 무슨 일이냐고, 괜찮냐고 물었지만, 종민에게는 물속에 천천히 가라앉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릴 뿐이었다. 입을 열어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는 탈출러들에게 닿지 못했고, 곧 시야 끝에서 어른거리는 암흑이 모든 걸 집어삼키며 종민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눈꺼풀 사이로 밝은 빛이 스며들어왔다. 눈을 감은 상태인데도 눈이 부셨다. 종민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여긴, 평범한 곳이 아니야.

천천히 눈을 뜨자 텅 빈 백색 세상이 그를 맞이했다. 몸을 일으켜 앉아봐도,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봐도 흰색뿐이었다.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보이는 것은 수평선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하얀색뿐.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이 희한한 세상을 살펴보던 종민은 문득 자기가 더 이상 병원복을 입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무늬도 글자도 없는 새하얀 셔츠와 바지 내려다보자 언뜻 불안감이 솟구쳤다.

"나... 죽은거야?"

"곧 죽을 거나 다름없을 영혼이지."

낯선 목소리에 흠칫 놀라 뒤돌아보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공간에서 남자가 입고 있는 알록달록한 한복과 붉은 갓은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당겼다. 

종민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누, 누구세요?"

"역시 이 모습으론 못 알아보려나? 게다가 좀 전에는 경황이 없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 드디어 제대로 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 반갑군, 순수한 영혼. 천해명일세."

"예?! 천해명?!"

놀라서 뒷걸음치는 종민을 보자 그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래, 저 웃음소리! 분명 좀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들은 그 섬뜩한 웃음소리랑 똑같아!

"곧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목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영혼.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영혼." 그는 잔잔히 종민의 말을 정정했다. "목숨과는 큰 차이가 있지. 자네 입장에서는 별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제 영혼을 죽이겠다는 거예요?" 문득 천해명이 그 대학생에게 빙의해 몸을 차지했었다는 게 떠올랐다. "아까 그 사람한테 한 것처럼?"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어. 이미 늦었으니까 넌 조용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여기가 어딘 줄 알겠나?"

"어...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죽으면 이런 곳에서 깨어나던데.... 아니면 무의식 속이라던지...."

"무의식이라... 꽤 근접했군. 네 영혼이라면 믿겠는가?"

"예? 제 영혼이요?"

"그래. 이렇게 순수한 영혼은 정말 오랜만이야.... 아주 좋아.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그릇 같군." 당황스러워하는 종민은 더 이상 안중에도 없는 듯 주위를 살피던 천해명의 차가운 눈이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내 취향대로 물들이는 재미가 있겠어."

천해명이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완벽하게 이해는 안 돼도 그가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종민은 알 수 있었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야 할 텐데...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사방이 똑같이 생겨 구분이 안 될뿐더러 그 어디에도 출구처럼 보이는 문은 없었다. 아니, 벽이나 문 자체가 없었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겠다고 생각한 종민은 악령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다행히 천해명은 혼자 뭐라 중얼거리며 킬킬거리느라 바쁜듯했다. 기회를 포착한 종민이 살금살금 걸음을 떼기 시작했지만 몇 걸음 못 가서 들키고야 말았다.

"어딜 가는 거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빠르게 변명해보려 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예? 그, 그게 전 그냥 산책이나 해볼까 하고...."

어물쩍거리며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는 종민을 천해명은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내게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방법도 없고. 몇 시간 전, 병원 휴게실에서 우리가 마주쳤을 때 너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셈이다. 급속도로 망가져 가는 몸뚱이로 마지막 복수라도 시도해보겠다고 다소 대책 없이 휴게실로 아들을 찾아간 게 행운이었지. 덕분에 네 존재도 알게 되고 내 계획도―"

"아들이 이 병원에 있어요?"

"너보다 어른이 말하는데 끼어드는 거 아니다."

"어휴, 완전 꼰대시네...." 천해명이 째려보자 종민은 빠르게 사과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천해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순수한 영혼이 근처에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곧바로 망가진 몸을 버리고 더 알맞은 그릇으로 갈아탈 계획을 고심하기 시작했지. 근데 때마침 고맙게도 원장이 자기 손으로 널 데려오더군? 그자는 몰랐던 거지... 네가 양날의 검이라는 것을...." 

그 순간을 떠올리며 천해명은 피식 웃었다. 

"자길 도와 날 퇴치할 수 있으리라 믿었겠지만, 오히려 내 손아귀에 널 넘겨준 거나 마찬가지야. 별도의 방해 없이 널 가까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오래 볼 수 있었을 때 난 깨달았다. 네가 진짜 누구인지, 너와 있던 자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내 악령감옥을 헤집어놓은 자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다. 이제 너를 차지함과 동시에 너의 손을 그들의 피로 물들여 꿈꾸던 복수를 쟁취할 것이다!"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심취한 천해명은 드라마틱하게 말을 끝맺으며 순수한 영혼을 공포심으로 압도하려고 했지만, 막상 그가 눈을 떴을 땐 종민은 이미 저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어휴, 진짜 미쳤나 봐, 저 사람! 왜 저래...." 종민은 뛰어가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아, 이미 죽었으니까 사람이 아닌가...."

거리를 확인해보려고 뒤를 돌아보자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악령과 눈이 마주쳤다. 식겁한 종민이 속도를 올리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던 그때, 어느새인가 자기 앞에 서 있는 천해명과 맞닥트렸다.

"으억!"

종민은 기겁하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분명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경고했을 텐데. 괘씸죄로 맨정신 상태에서 네 손으로 직접 동료들을 죽이게 해주지."

"자, 잠깐―!"

천해명은 뒷걸음치는 종민에게 팔을 뻗었다.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종민의 목을 옭아매는 느낌과 함께 몸이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는 게 느껴졌다. 빠르게 모든 걸 뒤덮는 어둠과 함께 종민은 다시 한번 의식을 잃었다.


​"종민이 형!"

"제 말 들려요? 뭐라고 대답 좀 해봐요!"

꺼져있던 볼륨을 서서히 올린 것처럼 주변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익숙한 멤버들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이겨내고 눈을 억지로 뜨자 흐릿했던 세상이 차츰 초점이 맞춰지며 점차 또렷해졌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그를 반겼다.

"종민아! 정신이 좀 드나?"

"형, 괜찮아요?"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세상이 핑 돌았다. 놀란 피오가 종민이 뒤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동현의 등에 업혀있단 걸 알아차렸다. 종민이 의식을 잃은 사이 탈출에 성공했는지 탈출러들은 조마테오 병원 입구 근처에 서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형이 갑자기 쓰려졌잖아요. 기억 안 나요?"

"우리 다 얼마나 놀랐는데요." 막내가 좀 전에 일어난 일을 다시 회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이 형이 뒤에서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머리 다쳐서 큰일 날 뻔했어요."

"그래? 야, 동현아. 나 좀 내려줘 봐." 

파이터의 넓은 등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 종민은 얼굴을 찡그리며 흐릿한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애를 썼다. 

"한자를 찾은 거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로는 잘 모르겠어. 갑자기 모든 게 깜깜해지고...." 그때 종민을 둘러싼 멤버들 뒤로 왕희열이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천해명!"

갑작스러운 종민의 외침에 다들 그가 가리키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왕희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기는 천해명이 아니라는 듯 격하게 머리와 손을 내저었다.

"왕희열 씨는 저희가 좀 전에 퇴마 성공했잖아요. 안 그래도 형이 기절한 동안 잠시 얘기 나눠봤는데 제정신인 거 같아요."

"그래! 근데 그 악마가 나한테 들어오려고 했다고!"

"너한테 말이가?"

"예!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곳에서 막, 내 몸을 차지해서 형이랑 애들 다 주, 죽이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다 갑자기 깨어났고!"

"종민이 형, 진정해봐요." 병재는 흥분해서 평소보다 더 버벅거리는 종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니까 형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천해명이 말 걸어오면서 형의 몸을 차지한다고 했다고요? 형한테 빙의해서 복수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깨어난 거고요?"

"어!" 

탈출러들은 믿기 힘들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종민을 봐선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였다.

"진짜야! 눈을 뜨니까 온통 하얀 곳인데 거기서 그 사람이― 아, 저기! 동현이 뒤에 있네!"

그 말을 들은 동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내던져 거리를 벌렸고, 옆에 서 있던 신동과 호동도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모두가 피한 그곳에는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데요?"

하지만 종민의 눈에는 허공에 살짝 떠 있는 천해명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성이다가 왕희열 쪽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여갔다.

"니 지금 장난할 때가?"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천해명이 안 보여요? 봐봐요, 지금 왕희열 씨 옆을 맴돌고 있―"

자기 이름을 들었는지 잠시 멈춰 선 천해명은, 뒤돌아 위협적인 속도로 종민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놀란 종민은 뒤로 넘어질 뻔했다.

"네 이놈, 내게 무슨 일을 한 거지?"

"예?"

"원래대로라면 네 몸은 내 것이어야 하는데 왜 내가 이 꼴이냐 말이다! 급한 대로 부적절한 다른 몸에 들어가려고 해도 네가 막고 있지 않으냐!"

"예? 제가요? 저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쪽이 맘대로 들어와 놓고...."

억울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지만 천해명은 믿지 않는듯했다.

"너같이 하찮은 것이 감히 날 상대로 재주 좀 부려보려는 모양이구나. 오냐, 어디 해보자꾸나!"

"아, 아잇! 제가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한편, 천해명이 보일 리 없는 다른 탈출러들은 허공에 대고 대화하는 종민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장난은 아닌 것 같죠? 종민이 형 진짜 연기 못 하잖아요."

병재의 말에 동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내 생각엔 아까 넘어질 때 머리 부딪힌 거 맞는 거 같애."

"아니면... 쇼크 같은 거제. 종민이 폐소 있잖아. 아까 그 밀실에 꽤 오랫동안 혼자 갇혀있기도 했고...."

"근데 폐소 맞다고 해도 환시랑 환청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

"근데 진짜 천해명이 종민이 형 몸에 들어갔으면 왕희열처럼 되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빙의돼서 자기 친구들 죽이고 그랬다잖아요. 근데 종민이 형은 지금 너무 멀쩡한데? 지금 저러는 거 빼고...."

신동의 지적에 탈출러들은 머릴 맞대고 수군거리는 걸 멈추고 종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투명 악령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지금 뭐가 확실한지도 모르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일단 집에 가서 쉬게 하고 경과를 지켜보도록 하죠."

병재에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아무도 몰랐었다, 단순히 작은 해프닝이라 생각했던 일이 얼마나 복잡해질 줄은.


​"조심해라. 심상치 않은 곳이다."

'예? 지금 저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천해명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되묻는 종민을 타박하는 대신 말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심각함을 감지한 건지, 종민도 그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 탈출러들이 있는 곳은 작은 방안. 벽 한쪽에는 열 개의 액자에 십장생 그림이 걸려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사이즈가 제각각인 옷들이 한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탈출러들은 이곳이 옷방이나 옷 가게일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단서를 수집하려 1차 수색을 하는 중이었다. 

천해명과 함께한 지 어느덧 1년. 서로 엮이게 된 그날부터 천해명은 시도 때도 없이 종민을 굴복시키려 애를 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종민의 몸을 장악하거나 직접적인 상해를 가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악령이 아니었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은 천해명도 지쳤는지 전처럼 자주 몸을 강탈하려는 시도는 뜸해졌지만, 주변이 어수선하거나 종민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듯하면 여전히 몸을 차지하려 해보곤 했다.

그런 천해명이 직접 경고하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주의를 줬는지, 무슨 뜻인지 캐묻고 싶었지만, 늘 자기 할 말만 하던 천해명이 질문에 답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런 거에 굴할 종민이 아니었지만.

'뭐가 심상치 않은 건데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던지어본 질문에 돌아오는 건 원하던 대답이 아닌 한심스럽다는 눈초리였다.

"어딘가에 억눌려있다고 해도 온 천지에 진동하는 이 원한을 못 느끼겠느냐? 이런 일반인과 다를 것 없는 자에게 내가 붙잡혀 있다니...."

역시 쉽사리 말해줄 생각이 없는듯했다.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는 천해명을 빠르게 포기하고 종민은 다시 주변을 살피는 데에 집중했다. 이번 장소가 보통이 아니란 걸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방문을 열자 칠흑 같은 어둠이 탈출러들을 덮친 것이다. 혹시 이 암흑이 천해명의 경고와 관련 있을까?

탈출러들은 마네킹으로 가득한 다음 방에서야 단서를 찾는 데 성공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종민의 말에 따라 본격적으로 수색하려던 그때, 구석에서 뭔가를 본 동현의 비명으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둠 속을 서성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존재.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 

한동안의 소란 후, 탈출러들은 찾은 단서를 확인해보기 위해 옷방으로 복귀했다. 밝은 불빛 아래에 놓인 퍼즐 조각의 무늬는 어딘가 익숙했다.

"아, 잠깐만... 이 문양... 천해명. 천해명때 그 문양인 거 같은데."

병재의 말에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곁눈질로 살펴본 무당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거 그쪽이 쓰던 거 맞죠? 아까부터 뭔가 아는 눈치였잖아요.'

"내가 전서체를 애용하긴 했으나...."

'했지만?'

"됐다." 머릿속이 복잡한 듯 천해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뭐라고 단언 짓긴 이르니 단서나 모아서 추리해봐라. 너희들이 잘하는 게 그거 아니냐."

'예? 뭐라도 알려줘야 도움이 될 거 아니에요!'

종민이 항의했으나 천해명은 이미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암흑으로 들어가 나머지 퍼즐 조각을 찾아오는 수밖에.

다행히 두 번째 원정은 첫 시도보다는 탈 없이 흘러갔다. 발견한 8개의 퍼즐을 조합해 보니 가운데 조각 하나가 모자랐지만, 단서가 가리키는 글자는 악령감옥과 조마테오 병원에서 본 전서체라는 걸 유추하기엔 충분했다. 

더 이상의 단서 소득 없이 동료들을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종민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전서체 퍼즐. 마네킹 방과 복도 끝에 서성이던 사람 형태의 무언가. 벽에 야광으로 빛나는 전서체 판까지. 누가 봐도 이곳은 천해명과 연관 있는 듯 보였다. 멤버들에게 말을 해야 할까. 천해명이 뭔가 알고 있는 듯하다고. 여태까지 천해명과 함께 있었다고.

불이 들어오는 서재에 도착하자 탈출러들은 한숨을 돌렸다. 서로를 토닥이며 본격적으로 단서 수집에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낭에서 귀사모 티셔츠를 찾았고 한 뭉치의 서류도 발견했다. 단서를 읽는 병재의 입에서 천마도령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종민은 천해명의 낯빛이 급격하게 굳어지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 천해명하고 천마도령이 관계가 있네. '대한민국 넘버원 엑소시스트 천해명씨와의 단독 인터뷰. 제 신아들 중에 천마도령이라고 있는데 독일로 유학을 갔었거든요. 한국 무속을 세계화시켜야 한다고.'"

'신아들?'

"조용."  

계속해서 단서를 읊조리는 병재의 목소리를 듣던 천해명은 천마도령이나 천세만세교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신아들이기 하나 사이가 별로 안 좋은듯했다. 

이런저런 추측이 오가는 도중, 병재와 동이의 대화에 종민과 천해명 둘 다 흠칫했다. 

"근데 천해명은 우리가 없앴잖아요."

"그 친구가 천해명이 아니었고 천해명의 영혼이 들어간 거였으니까 그 영혼이 지금 딴 데로 간 걸 수도 있어."

"그럼 천해명을 천마도령이 죽였나?"

다시 한번 천해명이 움찔했으나 이번에 종민은 자기만의 고민과 씨름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멤버들에게 천해명의 존재를 알려야 하나.... 천해명과 강제 동거하게 된 그날 이후, 종민은 몇 번 더 탈출러들에게 천해명에 대해 말을 꺼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의심이나 걱정스러운 눈초리뿐이었고, 결국 멤버들에게 해결책도 없는 문제를 강요하며 걱정만 하게 하는 것 같아 점차 입을 다물게 되었다. 생각을 소리 내 말하는 것도 자제하며 노력한 덕에 멤버들은 종민의 상태가 일시적인 거라고 믿는듯했고, 종민도 그걸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것으로 받아들인 지 꽤 지난 터였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이 어둠의 별장이 천마도령의 소유라고 해도 그가 천해명의 신아들인 이상 천해명의 존재를 숨기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종민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천해명은 여기 있잖아?"

종민이 머뭇거리며 악령이 떠다니고 있는 곳을 가리키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본 탈출러들은 어리둥절해졌다. 곧 이걸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바뀌긴 했지만.

"아, 전에 형 몸에 들어갔다고 한 그거요?"

"야, 그게 언젠데 넌 아직도...."

"지, 진짜예요!" 호동이 한 발짝 다가오자 종민은 위협을 느낀 듯 허둥대며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년이 넘었는데 제가 아직 거짓말하고 있겠어요? 저도 쫓아내려고 온갖 방법 다 찾아봤는데 소용없었고, 이 자식이 아무것도 못 하니까 그냥 둔 거지, 나라고 좋아서 이러겠냐고요!"

"이 자식?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예전 같았으면 빠르게 사과했을 종민이지만 목전의 위협(강호동) 때문인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터득했는지, 천해명의 협박에는 동요하지도 않고 바로 무시해버렸다.

"종민이 형, 그럼 천해명한테 물어봐요." 호동이 다시 종민을 다그치기 전에 신동이 먼저 끼어들었다. "뭐 아는 거 없냐고."

"아까 처음 옷방에서 물어봤는데 말 안 해주더라고." 하지만 밑져야 본전. 종민은 목을 가다듬었다. "저기... 어, 천해명... 씨?"

침묵.

종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탈출러들에게 다가와 다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어떡하냐.... 천해명 삐진 거 같은데?"

"네? 삐졌다고요?"

"응.... 저기 책장 보고 서서 들은 척도 안 하네."

"삐졌다니. 한 번만 더 그 주둥이를 함부로 놀린다면 네 숨통을 옥죄어주지."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천해명이 서늘한 손으로 목을 감싸자 종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당에게서 빠르게 떨어졌다. 천해명이 종민의 몸에 손을 댄 것은 처음이 아니었고, 종민도 천해명이 자기에게 큰 해를 가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천해명이 종민에게 손을 댈 때마다 느끼는 불쾌감을 쉽게 무시하긴 힘들었다. 

"누가 봐도 삐지셨던 거 같은데... 그래서, 천마도령이 그쪽 죽인 거 맞아요?"

종민은 익숙한 듯 목을 문질러 피부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한기를 떨쳐내며 물었다.

"근거 없는 추측이나 난무할 바엔 그 시간에 단서 찾아서 빠르게 탈출하는 게 좋을 텐데? 여기 보통 위험한 곳이 아니다."

종민은 자신이 허공에다 대화하는 걸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탈출러들에게 천해명의 말을 전했다.

"대답 안 해주는데? 헛소리 말고 단서나 찾아서 나가재."

말도 안 되는 답변에 병재가 욱한 듯 투덜거렸다.

"아니, 뭘 알고 있으면 얘기를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빨리 나가라면서 탈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정보를 혼자 품고 있는 게 어이가 없네. 저희, 단서나 찾죠."

"내 저놈을 그냥...!"

종민은 다시 한번 서류를 집어 드는 병재에게 달려들려는 천해명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말렸다.

"아잇, 왜 이러세요! 참아요! 어차피 할 수 있는 것도 없으시면서!"

종민의 악의 없는 팩폭에 또다시 삐친 천해명 덕분에 탈출러들은 혹시 모를 무당의 훼방 걱정 없이 단서 수색에 집중할 수 있었다. 

촉이 이끄는 대로 책장을 살펴보고 있는 종민 옆으로 병재가 슬며시 다가왔다.

"형, 왜 말 안 했어요. 우릴 그렇게 못 믿어요?"

숨길 수 없는 섭섭함이 가득한 병재의 눈빛에 종민은 겸연쩍은 듯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얘길 해도 별 방법이 없는 거 같아서. 천해명이 그랬거든. 퇴마 주문을 써서 자길 쫓아내도 자긴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가면 끝이라고. 전처럼 무고한 사람들 죽이면 어떡해. 적어도 나랑 있으면 그런 일은 못 하니까... 내가 안고 가는 게 최선일 거 같아서....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괜히 너희 마음 안 좋게 하기 싫었어."

"그래도... 우리가 머릴 맞대면 뭔가 해결방안이 떠오를지도 모르잖아요. 앞으론 꼭 얘기해줘요."

"...응, 그럴게. 고마워."

​서재를 떠난 탈출러들이 불이 들어오는 다음 방에 도달한 건 한참이 지난후였다. 긴 여정에 지친 탈출러들은 다시 한번 마주한 환한 방에 안도하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기도문에 숨겨진 천 명의 영혼을 희생시켜 영생을 얻으려는 천마도령의 목적은 충격적이었지만 진짜 반전은 그다음이었다. 서랍에서 동그랗게 오려낸 왕뚜껑과 장기두 앞으로 발송된 우편물이 나왔을 때는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장기두와 천마도령이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을 때, 신동의 발견이 확신을 심어주었다. 벽에 걸린 천마도령의 초상화는 누가 봐도 장기두였다.

금고 안의 편지를 읽고 나자 차츰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주온이 가족의 뺑소니 사건, 조마테오 병원에서의 의문점들, 그리고 여태까지 어둠의 별장에서 천해명이 보인 비협조적인 태도까지.

"그럼... 정말 천마도령한테 살해당한 거예요?"

별생각 없이 소리 내 물어보는 종민의 목소리에 탈출러들은 종민의 시선을 따라 보이지도 않는 악령을 쫓았다.

"그래." 

자존심이 센 천해명은 자신이 신아들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더는 입 다물고 있는 게 의미 없으리라 느꼈는지 시선을 천마도령의 초상화에 고정한 채 생각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독일에서 귀국한 직후, 내 지시대로 목격자를 처리했다며 연락을 해왔지. 그래도 아들 된 도리로 한 번 찾아뵈려고 하는데, 내가 가둔 그 일가족의 원혼도 한번 볼 겸 악령감옥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냐. 하지만 그 자식은 내 얼굴을 본 지 몇 분 안되어 도끼를 들어서 날 살해했지." 

과거를 회상하는 천해명의 손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갈 곳 없는 녀석을 거두어 키워준 게 누구인데."

"도, 도끼로 죽였다고요?"

듣다 못 한 피오가 종민의 팔을 툭툭 치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형, 종민이 형. 천해명이 무슨 말 하는지 얘기 좀 해줘요. 저희는 못 듣잖아요."

"아, 맞다. 까먹었어." 

멋쩍게 웃으며 종민은 방금 들은 이야기를 탈출러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아니, 전달하려고 했다. 몇 마디 안 가서 두서없는 설명으로 탈출러들을 혼란에 빠트려서 그렇지. 결국 병재가 나서서 종민의 말을 정리해주었다. 

"그럼 천해명... 씨. 천세만세교나 여기, 어둠의 별장에 대해서 아는 거 있으세요?"

종민어 통역이 끝난 후, 누가 봐도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호칭을 붙이며 병재가 질문을 했다. 

"거기 아니고 여기." 

종민이 조용히 천해명이 있는 곳을 가리켜 시선을 정정해주었다. 그래봤자 병재의 눈엔 아무것도 안 보였지만. 

"장기두가 뭘 꾸미는지 알았으면 내가 이렇게 쉽게 당하진 않았을 테다. 그놈은 날 죽인 후, 곧바로 나를 악령감옥에 봉인해버렸어. 노렸던 거겠지. 내가 직접 만들고 관리한 만큼 악령감옥이 탄탄하고 견고해서 나조차도 나갈 수 없으리란 걸. 실제로 그러기도 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대학생 무리가 우연히 날 찾아올 때까진 말이다. 왕희열의 몸을 차지한 나는 내 악령감옥을 멋대로 둘러본 죄로 그의 친구들을 죽이고 장기두가 날 찾아오길 기다렸지. 분명 나와 관련된 소식에 귀 기울이고 있을 테니까."

"천마도령이 찾아오길 기다렸다고요?"

"그래. 내가 그렇게 살해당하고도 가만있을 줄 알았느냐? 악령감옥 부근에서 살인사건이 났다고 뉴스에 뜨면 장기두는 바로 그게 내 소행인지 알 테니까. 날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큰 위험 요소이므로 일단 날 지켜보고는 처치하려고 할 거라 판단했다. 녀석은 냉철해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장기두는 내가 예측한 대로 내가 있던 조마테오 병원으로 찾아왔지. 지금 알고 보니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환자들을 표교할려 한 것도 있다니 녀석에겐 일거양득이었던 셈이군. 녀석은 분명 독일에 있을 때부터 자기 종교를 설립하기로 마음먹었을 거다. 나에게 비협조적인 건 그 때문이겠지. 보아하니 천세만세교를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건 한국에 들어와서 날 살해한 후인 것 같군. 아쉽지만 천세만세교에 대해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거의 없어. 영생을 위해 이딴 짓을 꾸미다니, 한심하군.... 그것보다 뭘 하느냐, 네 동료들에게 내 말을 전하지 않고."

"예? 아아...." 

종민이 떠듬떠듬 병재에게 들은 얘기를 전하자 (중간중간에 천해명이 틀린 부분을 지적해준 건 덤), 병재는 새로운 정보를 정리해서 나머지 탈출러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천해명이 혀를 찼다.

"이래서 어느 세월에 탈출하겠느냐. 차라리 네 몸을 내게 맡겨라. 내가 직접 설명해줄 터이니. 이러다 기두가 먼저 들이닥치면 너희들 다 무참히 죽임당할 거다. 내 복수도 무산될 거고."

"제 몸 차지하려고 하셔도 못 차지하는 건 그쪽이잖아요!"

"네가 내가 장악하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그렇지!"

"예에? 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요?"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러다 속 터져 죽고 말지 내가."

"근데 이미 죽으셨..."

"조용!"

한참 이어지던 일방적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신동이 물었다.

"종민이 형, 천해명이 또 괴롭혀요?"

"어? 으응..."

"지금 우리가 천해명을 퇴마 못 하는 이유가 붉은 양념 마늘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퇴마한 후 천해명이 저희나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갈 수도 있는 리스크가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우리가 악령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모르니까. 천해명이 알려줄 리도 없고."

"그렇지."

"천마도령도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 사람한테 물어보자고? 무고한 천명의 사람을 자기 영생을 위해 희생시키려는 사람인데? 그건 좀...."

큰형의 만류에 신동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무래도 힘들겠죠? 우릴 먼저 죽이려고 할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일단 악령 소멸 방법도 언젠가 우리가 찾아내야 할 거 같아요."

"일단 천해명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는 못하니까...."

병재가 동의하며 종이에다가 메모했다. 이곳을 빠져나와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다 부질없는 일일 텐데 굳이 헛수고한다면 막진 않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기를 소멸시킨다는 얘기에 천해명은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든 그놈을 차지하든 해야 하니."

그렇게 다시 한번 불안정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전서체 글자를 찾고 탈출러들은 조심스레 어둠 속을 헤쳐 나갔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천마도령을 바짝 경계하면서.

​지하 작업실에서 원혼들의 애통한 이야기를 들은 탈출러들은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기로 약속하고 보일러실을 찾아 나섰다. 주차장에 다다르자 눈앞에 천개의 하얀 분골함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 충격적인 장면에 탈출러들은 잠시 말을 잃은듯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하 주차장의 단서를 대강 파악하고 지하 보일러실의 도어락 비밀번호까지 바꿔놓으며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두 명씩 세 팀으로 나눠서 각자 맡은 역할을 실행하기로 한 그때, 불이 꺼졌다.

짤랑짤랑.

어둠 속에서 가까워지는 방울 소리에 따라 심장도 요동쳤다. 이윽고 도어락 누르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지만, 다행히 바꿔둔 비밀번호 덕분에 문 열기에 실패한 천마도령이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탈출러들의 다급한 재촉에 병재는 무사히 호리병에 붙었던 부적을 뗐다.

"성공했군."

천해명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문 반대편에서 천마도령의 비명이 얼핏 들렸다. 이윽고 불이 다시 켜지고 탈출러들은 조심스럽게 문 앞에 모였다.

"아까 비명을 들은 거 같은데 난?"

"비명을 질렀어, 비명을. '안돼애'하고. 막 뭔가 이렇게, 뭐라고 해야 하지... 누군가에게 잡혀가는 듯한 그런...."

주변이 조용해진 걸 확인한 후 탈출러들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천마도령이 쓰러져 있는 걸 확인한 그들은 주차장으로 걸음을 내디뎠고, 동현은 서둘러 천마도령의 손에 있던 도끼를 발로 쳐냈다. 네 개의 전서체 글자를 찾아 주변과 천마도령을 살펴보는 도중, 곰곰이 장기두를 내려다보던 파이터가 말을 꺼냈다.

"영혼이 나와서 죽였나 보다. 그져?"

"죽진 않았어. 잠시 천명의 원혼에 당해서 의식을 잃었을 뿐이다."

"안 죽었다고요?" 

천해명의 말에 종민은 천마도령에게서 뒷걸음치며 탈출러들에게 들은 얘기를 전했다. 

"야, 천해명이 천마도령 아직 안 죽었다는데? 잠깐 기절한 거래."

"그럼 저희 빨리 나가야 하잖아요. 일어나서 또 우리 죽이려고 하면 어떡해."

걱정하는 막내를 안심시키려는지, 동현은 손에 잡고 있던 도구를 들어 보였다.

"괜찮아. 내가 도끼 들고 있어."

"그건 언제 또...." 

황당해서 뭐라 말하려는 병재의 눈에 저쪽에서 어느새 적외선 투시경을 쓰고 주위를 살펴보는 종민이 눈에 들어왔다. 참 알다가도 모를 형들 덕분에 병재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든 말든 단서 수색에 몰두한 종민은 투시경을 쓰고 주차장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곳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줄 알았던 전서체는 보이지 않았다. 발견에 실패해 실망하고 있는 종민 옆으로 천해명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어리석은 것들. 너희들이 이대로 어둠의 별장을 빠져나간다 해도 기두가 너희들을 내버려 둘 것 같으냐? 자기가 한 모든 일이 까발려질게 불을 보듯 뻔한데, 너희들이 도망가도록 놔둔다고? 그러지 말고 어서 네 몸을 내게 넘겨라. 내가 처리해줄 터이니. 어떠냐. 너희는 안전을 보장받고 나는 나대로 복수하고."

"우, 우리 빨리 나가야 할 거 같아요." 

종민은 잔뜩 골이 난 천해명을 무시하며 서둘러 다른 탈출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천마도령 그냥 두면 나중에 우릴 쫓아올 테니까 자꾸 자기가 대신 죽여준대요. 내 몸으로."

"천해명이 말이가?"

"예! 천마도령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난리예요. 그러니까 빨리 한자 네 글자를 찾아서―"

"천해명이 널 장악하려고 하면 급한 대로 종민이 널 기절시키면 되지 않나? 그럼 몸을 못 뺏을 거 같은데."

"아니죠! 제가 의식이 없으면 빙의하기 더 쉬울지도 모르잖아요!"

"근데 여태껏 너 잘 때 빙의된 적 없었잖아."

"그, 그렇긴 한데...."

호동의 논리에 종민이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동현이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제가 고통 없이 보내드릴게요. 7초면 돼요."

"야, 보낸다니!"

다가오는 운동부에게서 잽싸게 도망친 종민은 천마도령 옆으로 돌아와 절박하게 두리번거렸다.

"손, 팔, 이런 데 뭐 없지?"

병재가 수그려 한복 도포에 덮인 왼팔을 걷어붙이자 팔에 새겨진 선명한 네 글자가 보였다. 천마영생.

종민은 운동부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천해명은 전서체 판에 글자를 다 끼울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덕지게 종민을 협박했다. 문이 열리고 탈출러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당장 네 몸을 넘기지 못할까.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자식을 내 손으로 죽이고 간다. 지금 네 몸을 넘겨주면 네 친구들은 살려주겠다고 내 약속하지. 하지만 계속 나에게 불복한다면―"

종민의 옆을 따라오면서 협박하던 천해명이 말을 갑작스레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싸함을 느낀 종민도 뒤를 살펴보려는데―

"피해!"

하지만 천해명의 경고는 이미 늦었고, 종민은 눈 깜짝할 틈도 없이 주차장 쪽에서 휘몰아친 무언가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익숙한 공간이 종민을 맞이했다. 약 1년 전, 딱 한 번 와봤던 공간이지만 그만큼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막 퇴마 된 천해명과 처음 대면했던 하얀 그 세계. 종민은 그곳에 다시 와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눈앞에 서 있는 건 천해명이 아닌 그의 신아들이라는 점.

"혹시... 천마도령?"

"생각보다 상황 파악이 빠르군요. 그다지 놀란 기색도 없고."

"그, 그게...."

"그야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지." 

홀연히 종민 뒤에 나타난 천해명이 천마도령을 노려보며 쏘아 붙었다. 

"좀 전에 천 명의 원혼에게 입은 피해가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구나, 아들아."

"천 선생님? 선생님이 왜 이 자의 몸에...."

"순수한 영혼을 장악해서 힘을 얻으려는 게 너뿐일 줄 알았더냐?"

놀란 기색도 잠시, 천마도령은 차분함을 되찾고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조마테오 병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길래 뭔가 이상하다 느꼈는데 줄곧 이 자와 같이 다니셨던 겁니까? 근데 그것참 이상하네요. 제가 어둠의 별장의 주인이라는 걸 아셨을 땐 바로 절 처리하러 안 오시고 왜 방어적인 태도만 취하셨는지... 혹시 제 손에 돌아가시고 봉인 당하셔서 쉽사리 못 나서시겠던가요? 설마, 겁이 나서?"

신아들의 도발에 천해명은 코웃음을 쳤다.

"조심스러운 거면 차라리 낫지. 하지만 아들아, 곧 너도 알게 될 거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또 하나의 악령감옥이란걸!"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종민이 벌떡 일어나 끼어들었다.

"예?! 그 말은 천마도령도 내 머릿속에 갇힌 거예요?!"

"설마 순수한 영혼을 못 이겨서 여태까지 갇혀 지내셨던 겁니까, 선생님... 그러나 저는 다를 겁니다. 이제 제힘은 선생님이 아시던 제자 시절과는 또 다르니까요."

"저, 저기요! 제 말 좀―"

"좋을 대로 생각해라. 여기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우린 이미 망한 거란다, 어리석은 아들아. 하지만 네가 실패하고 날뛰는 꼴은 모처럼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구나."

종민은 직감했다. 이 둘을 이대로 뒀다간 자기가 돌아버릴지도 모른다고.

"아니 이게 말이 돼요? 둘 다 얼른 나가요, 제바알!!!"

그러나 종민의 아우성은 천씨부자의 불꽃 튀기는 눈싸움에 묻혀 대답 없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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