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뉴이어

수호미리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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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연관이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5!”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 되어 외치기 시작했다. 

“4!”

제법 추운 날씨였지만 발갛게 달아오른 열기로 현장은 후끈거렸다.

“3!”

너도나도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마음 한뜻으로.

2!”

다가오는 새해를, 새 출발을 기다리고 기대하며.

“1!”

시계 침이 자정을 가리키자 폭죽 소리와 함께 형형색색의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연달아 터지는 알록달록한 불꽃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쁘게 셔터를 누르며 이 장관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랑하는 가족, 친구, 혹은 연인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이 순간의 기쁨을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군중 속 한 쌍의 청소년도 그중 하나였다.

“수호야, 해피뉴이어! 올 한 해 정말 수고 많았어!”

미리의 환한 미소는 머리 위에서 터지는 폭죽보다 밝게 빛나는듯했다.

“고마워. 너도 수고 많았어.”

또다시 터지는 불꽃에 미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달아 터지는 폭죽 소리와 군중의 환호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지만, 수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행여나 불꽃놀이에 정신 팔린 사람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미리를 밀칠까, 평소보다 친구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주변을 살폈다.

“괜찮아? 있을 만해? 여기 말고 보신각에 갈 걸 그랬나?”

“거기도 사람 많잖아. 그리고 여기 온다고 허락받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거긴 더 멀어서 선생님들이 안 보내줬을걸?”

“그래도 폭죽보단 종소리가 더 듣기 낫지 않나 싶어서.”

“괜찮아! 이런 경험도 처음인걸. 제야의 종은 내년에 들으러 가면 되지.”

“내년….”

나중을 기약하는 말에 수호의 목소리가 한결 어두워졌지만, 시끄러운 주변 소음에 묻혔다. 수호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리는 장갑 한 짝을 벗더니 맨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수호, 니가 설명해주면 되잖아.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그래.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잠시 고민하던 수호는 미리의 손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선을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모았다 피며 폭발하는 폭죽을 표현했다. 미리는 간지러운지 연신 손을 꼼질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이렇게 펑 터지면서 밤하늘을 환하게 수놓았다가 반짝이면서 서서히 사라져.”

“상상만 해도 이쁘다….”

미리는 눈을 감고 마음의 도화지에 자신만의 불꽃놀이를 그렸다. 그런 미리를 수호는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눈에 담기 위해. 이 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하기 위해.

끝없이 이어질 듯한 새해 축하 공연은 대망의 화려한 불꽃과 함께 막을 내렸다. 자욱한 연기와 아울러 마지막 빛이 사라지자, 황홀한 마법의 주문에서 해방된 인파도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폭죽 소리에 묻혔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제대로 들리기 시작하자, 미리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났어?”

“응. 우리도 슬슬 돌아갈까?”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아쉬움에 쉽사리 걸음이 떼어지지 않는 듯, 미리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역시 잘 온 거 같아. 고마워, 수호야.”

“별걸 다. 나도 이럴 기회가 없었는데 덕분에 즐거웠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평소보다 긴 일정에 지친 듯, 미리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수호는 그녀가 잠시나마 편히 쉴 수 있게 어깨를 내어주고는, 버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하늘과 백사회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지 어느덧 다섯 달. 하늘에 쉼터의 실체가 낱낱히 까발려지면서 쉼터의 아이들은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몇 명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그건 돌아갈 곳이 있는 운이 좋은 소수였다. 수십 명의 청소년들이 하루아침에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지만, 전국에 있는 어느 청소년쉼터도 이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결국 아이들은 삼삼오오 자리가 나는 대로 각기 다른 쉼터로 헤어졌다. 물론,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원한다면 다시 학교도 나갈 수 있었고, 알바를 하거나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었으며, 외부와 자유롭게 연락할 수 있었다. 필요시 심리상담도 받을 수 있었다. 조금 노후화된 시설이었지만, 열악한 하늘에 쉼터보단 깨끗하고 안전했고, 규율을 따라 생활하는 건 여전했지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규칙이나 학대 수준의 체벌은 없었다.

수호와 미리가 머무는 시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성별의 숙소 출입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지만, 같은 쉼터로 올 수 있게 된 덕분에 시간만 잘 맞추면 밖에서 만나 자유롭게 얘기를 할 수 있었다. 학교보단 아르바이트를 택한 수호는 근처 편의점에서 조금씩 돈도 모으며, 백사회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느낌을 마음껏 누렸다.

이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간 달콤한 꿈에 불과했지만.

수호는 잠든 미리를 내려다보았다.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깊이 잠이 든 척 눈을 감고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코앞으로 다가온 정류장을 지나쳐 종점까지 미리와 같이 가고 싶었다.

이런 수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작별의 시간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매정한 버스는 어둠 속을 달리고 달려 그들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리를 깨워 정류장에 내리자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옷을 여미고 걸음을 재촉하며 쉼터로 향했다.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자 입구를 지키던 당직 선생님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재밌게 놀았니?”

“네! 덕분에 새로운 추억도 쌓고 즐거웠어요.”

밝은 미리의 표정에 선생은 미소 지으며 수호와 미리의 출입 시간을 기재했다.

“다행이네. 피곤하겠다. 어서 씻고 자렴.”

“네.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미리가 인사를 하자 수호도 덩달아 머리를 꾸벅 숙이고는 미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여자 숙소는 건물 반대편에 있었기에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잘 자, 은미리.”

“너도. 아침에 보자, 수호야.”

“응….”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호는 떠나기 전 미리를 꼭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하지만 미리가 눈치채고 그를 붙잡을 거 같아 말없이 뒤돌아서야만 했다. 선생님이 보고 계시기도 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향하는 수호 쪽을 미리는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뜬눈으로 이러다 밤을 새우겠다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깜박 잠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수호는 서둘러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잠시 따뜻한 이불속을 벗어났다고 그새 팔에 소름이 돋았다. 혹시나 다른 아이들이 불빛에 깨지 않을까 싶어 수호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잡아당겼다. 이불 아래에서 확인한 시간은 새벽 6시. 잠이 드는 바람에 예상보다 늦어진 시각이었다. 첫 차 시간에 맞춰 떠날 계획이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곧바로 출발한다면 선생님들과 마주칠 확률은 여전히 낮았다. 혹여나 낡은 침대가 삐그덕거릴까, 수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둠에 싸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거의 반년간 이곳에서 지낸 덕분에 방의 구조가 눈에 훤했다. 작은 방에는 두 개의 2층 침대가 마주 보고 있고, 그중 3자리는 그동안 같이 지냈던 남학생들이 곤히 잠들어있었다. 머리 위 바로 위층에서는 작게 코 고는 소리도 들렸다. 

머리를 부딪히거나 커다란 소리를 내지 않고 침대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수호는 잠들기 전 침대 발치에 미리 꺼내둔 옷을 집어 들었다. 최대한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그다음은 얼마 안 되는 짐을 챙길 차례. 서둘러 전날 밤 침대 밑에 밀어 넣어둔 백팩을 끄집어내 방금 갈아입은 옷을 쑤셔 넣었다. 한 손에는 가방을, 다른 손에는 패딩을 들고 떠날 채비를 마친 그는 방을 나서기 전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수호는 아무것도 모르고 곤히 자는 친구들에게 조용히 작별인사를 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복도에 나와서는 패딩을 입고 가방을 둘러맸다. 한 손으로 차 시간을 찾아보며 다른 손으로 패딩 주머니 속을 더듬어 편지를 꺼내려는데, 팔랑팔랑, 네모난 종이가 대신 떨어졌다. 바쁘게 화면 위를 오가던 수호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굳은 표정으로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심플한 하얀 메모지에 그려진 뱀이 눈에 들어왔다.

그 쪽지를 받은 건 평소와 다름없이 편의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편의점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왔다. 수호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은 편의점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과자 하나와 음료수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왔다. 지극히 평범한 검정 파카에, 깊게 눌러쓴 야구 모자. 바코드를 찍은 수호는 음료수가 원 플러스 원 상품인 걸 깨닫고 남자에게 하나 더 가져오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무심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금을 건넨 후 진열대 너머로 사라졌고, 얼마 안 있어 음료수 하나를 들고왔다. 그러고는 거스름돈을 받아들며 수호에게 자기는 필요 없으니 하나 드시라며 음료수를 건냈다.

수호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전에, 그는 물건을 챙겨 사라졌다.

얼떨결에 받아 든 음료수 뒤편으로 뻣뻣한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의아해하면서 캔을 빙 돌려보는데 백사(白蛇)와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음료를 내던지고 서둘러 밖으로 달려갔지만, 검은 파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코너를 돌아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차 한 대만 보일 뿐이었다. 수호는 주먹을 꽉 쥔 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라진 방향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었다. 백사회가 그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그의 현재 생활에 대해 얼마나 파악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유일한 단서라고 메모지를 전해준 심부름꾼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백사회에서든 편의점 손님이로든 초면인건 확실했다. 비슷한 나이대인 걸 보니 백사회가 편하게 이용하려고 거둬들인 아이겠지. 마치 수호 자신처럼. 다루기 쉽고 내치기도 쉬운, 보드 판 위의 졸병. 백사회가 더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느라 그를 찾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제 그 생활을 청산했다고 믿고 싶었는데, 이 모든 게 안일한 생각이었을까?

하긴. 거대한 세뇌실험에 연루된 사람이 아직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어느 범죄조직이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겠어.

손에 힘이 들어가자 흰 뱀이 형태를 알 수 없게 구겨졌다. 다시 현재에,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수호는 출구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사회 심부름꾼이 메시지를 전한 게 겨우 이틀 전. 그들은 분명 편의점부터 시작해서 근방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다른 아이들의 안전이 위태로워지기 전에 떠나야 했다. 미리를 다시 위험에 빠트릴 순 없었다. 

우편함 앞에 도착한 그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간결하게 '미리에게'라고 적힌 봉투 안에는 진심을 담아 점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편지가 들어있었다. 하고 싶었던 말과 할 수 없었던 말,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득 담긴 이 마음이 미리에게 닿기를 간절히 빌며 수호는 편지를 우체통안으로 밀어넣었다.

“잘 있어, 은미리.”

작별 인사와 함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새벽 칼바람이 유난히 매섭게 옷깃을 파고드는 듯했다. 고개를 떨군 채 천천히 버스정류장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발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수호야! 천수호 맞지?”

뒤를 돌아보니 그렇게 보고 싶었던, 그러나 만날 수 없었던 미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초점은 먼 곳을 향해있지만 곧게 뻗은 손은 늘 그렇듯,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 있었다. 수호는 그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너... 이 시간에 안 자고 뭐 해?”

“그럼 너는?”

눈이 마주친 게 아닌데도 수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럴만한 일이 있어.”

어느새 다가온 미리가 수호의 팔을 끌어안았다. 목소리가 작게 떨렸지만, 한겨울의 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설마 떠나려는 거야? 아니지?”

수호가 말없이 손을 꼭 쥐자, 미리는 그 침묵 속에서 대답을 읽은듯했다.

“왜? 인사도 없이 이렇게 훌쩍 떠나려고 하기 있어?”

“미안해. 사실 그저께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흰 뱀이 그려진 쪽지를 받았어. 누군지도 모르고, 붙잡기도 전에 사라졌어. 백사회에게서 벗어나 이제 모두가 안전할 줄 알았는데... 너무 안일했나 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았으니 곧 잡으러 오겠다는 거겠지. 그 전에 떠나야 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너희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수호야….”

“다신 너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미안해.”

그뿐만이 아니었다. 범죄조직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 된 그날 밤, 손을 꼭 잡고 바른길으로 이끌어준 미리 곁에서 지켜주겠다고 홀로 되뇌었다. 하지만 곁을 떠나야만 지켜줄 수 있는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 

“내가 여기 머문다면 백사회가 우릴 찾을 거야. 나뿐만 아니라, 너와 그때 하늘에 쉼터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다 처리하려 할 거야. 그러니 잘 있어.”

“안돼! 가지 마, 수호야!”

꼭 잡고 놓아줄 줄 모르는 미리에 수호는 멈칫했다. 뿌리치고 달아나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쫓아오려고 할 게 뻔한 미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도 됐고, 그를 붙잡아준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미리가 없었던, 미리를 몰랐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우습고 어리석은 걸 알면서도 수호는 그 자리에 말없이 서서 미리가 먼저 놓아주길 기다렸다. 먼저 뿌리칠 자신이 없어서. 먼저 포기한 쪽이 미리라면, 붙잡아줄 사람이 없는 이곳에 대한 남은 미련을 털어버리고 깨끗히 떠날수 있을거 같았다.

바보같이. 먼저 떠날 결심을 한 건 수호였는데도.

얼마나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을까, 새해에도 겨울바람은 매섭기만 했다. 

잡힌 손으로 미리가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게 전해졌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 힐끗 뒤돌아 본 수호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그를 꽉 잡고 있는 미리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앏은 잠옷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추운데 왜 아무것도 안 걸치고 나왔어.”

“너 놓칠까 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순식간에 마음이 약해진 수호는 미리를 데려다 쉼터 계단에 앉혔다. 입고 있는 패딩도 벗어서 미리에게 둘러줬지만, 그녀의 얼굴에 드린 그림자는 가실 줄 몰랐다.

“내가 떠나려는 거 어떻게 알았어?”

“기분 나쁜 꿈을 꿨어. 그리고 안 좋은 느낌이 계속 들었어. 아까 불꽃놀이 보러 갔을 때 너 다른데 정신 팔려있던 거 알아? 설명도 평소보다 영 부실하고, 헤어질 때도 평소랑 달랐어. 먼가 더... 긴 작별 인사를 하는 느낌. 마치 오랫동안 못 만날 것처럼.”

“아….”

티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미리에겐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번 깨니까 잠이 안 오더라. 물이라도 마실까 해서 식당으로 가려는데 네 발소리를 들었어. 알지? 나, 네 발소리는 완벽히 구분 가능하다는 거.”

“이 밤중에 룸메이트나 선생님들한테 안 들키고 용케도 잘 돌아다녔네.”

“내가 혼자 신하늘 원장실에 몰래 숨어들었던거 까먹었어?”

“그러네. 닉값했네, 은미리.”

미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듣기 좋았다. 추위와 함께 얼어붙었던 분위기를 단숨에 녹이는듯한 따뜻한 소리였다.

“정말 백사회를 막을 방법이 없는 거야? 도움이라도 요청해보면….”

“누구한테? 경찰? 그게 소용 있었다면 벌써 몇 명이라도 잡혔겠지. 백사회는 생각보다 교묘한데다가 규모도 커서 쉽지 않을 거야.”

수호의 말은 들은 미리는 고개를 떨구었지만, 좌절해서가 아니었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미리는 문득 하늘에 쉼터에서 그들을 도와준 남자들을 떠올렸다.

“그때 우릴 찾아낸 아저씨들은? 6명이라고 했었나? 그분들도 백사회를 아는듯했잖아. 확실히 백사회 편은 아닌듯했고.”

“그렇긴한데….”

일리가 있었다. 벽장 뒤 숨어있던 그들을 찾은 후, 남자들이 처음으로 한 말이 백사회가 오기 전에 탈출해야 한다였으니까. 수호가 남겼던 단서를 쫓아 비밀장소를 찾았다 하더라도, 애초에 어떻게 하늘에 쉼터와 백사회에 대해 알게 됐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분명 백사회가 최면 실험을 비밀리에 진행하러 갖은 수를 썼는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 뭐 하는 사람들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게 하나 없잖아. 우릴 구해줬는데 연락처는커녕 이름조차 몰라.”

“그렇네. 전에 경찰 아저씨들한테 물어봐도 그런 사람들은 모른다고 했고…. 아! 그 대박사건 피디님은 어때?”

“니가 제보했던 그 사람?”

“응. 경찰 수사가 더디다면 언론의 힘을 빌려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아. 우리가 무사하다는 걸 알면 기뻐하실 거 같기도 하고. 게다가 잘하면 그 여섯 명의 아저씨들에 대해 뭔갈 알아낼 수도 있잖아? 혹시 아직도 명함 가지고 있어?”

“아니, 난리 통에 잃어버렸어. 하지만 검색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미리는 씩씩한 목소리로 수호에게 말했다.

“좋아, 그럼, 아침이 되면 용 피디님께 연락부터 해보는 거다!”

어리둥절한 수호가 잠자코 있자, 미리가 손을 내밀었다.

“하나씩 천천히 해보는 거야. 결과는 모르는 법이잖아. 걱정하지 마, 수호야. 우린 지옥같은 하늘에 쉼터에서도 잘 버텨냈잖아. 어떻게든 살아남았잖아. 모든 게 잘될 거야. 우린 이겨낼 수 있어. 그러니 올해도 날 믿고 나와 함께 해줄래?”

저 멀리 빌딩 숲 사이로 떠오르는 붉은 해와 아울러 어두웠던 하늘이 점차 물러서고 있었다. 태양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고, 더 따듯하게 세상을 밝혀주고 있었다. 내리쬐는 그 빛속에서 수호는 반사적으로 미리의 손을 잡았다.

그래, 모든 게 잘될 거야. 여태까지 잘 이겨냈잖아. 비록 생각해 낸 해결책이 도움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미리와 함께라면 온 세상에 맞설 수 있을 거 같은 막연한 용기가 샘솟았다. 온 세상을 밝히는 저 태양처럼, 미리도 어두웠던 내 밤하늘을 밝혀주니까. 불꽃놀이처럼 찰나의 순간에 밤하늘을 장식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닌, 무엇보다 밝게 빛나는 태양 같은 존재니까. 그런 미리가 이끌어주니까.

그제야 수호는 검은 밤하늘 아래에서 하지 못했던 새해 인사를 웃으며 건낼 수 있었다.

“고마워, 미리야. 올해도 너의 곁을 지킬게. 정말로, 정말로 해피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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