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공간

하얀 공간 (4)

4화: 위험한 동맹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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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 (구) 악령감옥 시리즈입니다. 예고 없이 제목 바꿔서 죄송합니다. 혼란 없으시길 바랍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마주한 것처럼,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는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창살 너머로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복도의 불빛은 탈출러들의 경직된 모습을 환하게 밝혔다 어둠 속에 숨기길 반복했다. 섣불리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두려운 살얼음판에서, 다섯 쌍의 눈동자만이 바쁘게 움직였다. 큰일 났다, 이제 어떡하지? 라고 묻는듯한 겁에 질린 눈빛과 나도 몰라.라고 회피하며 방황하는 시선. 그렇게 말 없는 대화를 이어가다가도, 자석이라도 달렸는지 눈길은 자연스레 동료의 모습을 한 악령에게 향했다. 신체의 모든 감각이 종민이라 말해도, 깨진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실체는 전혀 딴판인, 껍질뿐인 가짜.

동현은 손전등이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승강기가 크게 덜컹거릴 때마다 손전등의 불빛도 함께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얀 광선이 천해명의 몸에 닿을 때마다 그가 입고 있는 병원복은 거울에 비친 적색 한복으로 변했다. 조금 전 휴게실에서 봤던 그 붉은색. 조금만 더 일찍 알아챘더라면,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의심할 틈이 있었더라면, 이 작은 공간에 악령과 같이 갇힐 일은 없었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엎질러진 물이었다.

구석에 한껏 구겨져 있는 탈출러들과는 달리, 고작 두 걸음가량 떨어져 있는 천해명은 태연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혼자 탄 마냥 널찍한 공간을 떡 지키고 선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깨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깨진 틈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흰 병원복 소매가 거울 속 붉은 한복과 맞닿았다.

시간이 멈춘 듯 길게 이어지는 악령과의 숨 막히는 대치 상황.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한참을 말없이 거울만 응시하던 천해명이 눈을 돌려 엘리베이터 내부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탈출러들이 그를 건드리지 못하는 걸 당연시하는 여유로운 태도였다.

"참 재밌는 공간이군. 여길 통해서 이곳에 들어온 건가?"

종민의 모습과 종민의 목소리였지만, 걷잡을 수 없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현실 세계에서 종민이 빙의 당했다면, 아마 이런 모습으로 마주했겠지. 썩 달갑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자, 그가 탈출러들을 돌아보았다.

"그리 경계할 건 없어. 너희를 해할 생각이었다면 진작 하고도 남았다."

당연하게도 그 말을 믿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탈출러들은 여전히 경계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병재가 다그치듯 물었다.

"종민이 형. 종민이 형은 어딨어요?"

"안전한 곳에."

두루뭉술한 대답에 탈출러들의 얼굴에 드리운 의심의 그림자가 한결 짙어졌다. 안전한 곳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애초에 종민의 몸을 빼앗으려 무의식 속으로 침투한 거였으면서 7살 아이도 안 믿을 성의 없는 개소리나 내뱉다니. 그들을 단단히 낮잡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불신 가득한 탈출러들의 표정에도 여전히 천해명은 느긋해 보였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못 믿겠다는 눈친데."

"당연한 거 아녜요? 좀 전까지 형의 모습으로 우릴 속이려 하고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거짓말. 종민의 얼굴로 가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천해명을 보고 있자니 치가 떨렸다. 병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그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렸다.

띵.

청량하게 울려 퍼지는 도착음. 목적지에 다다른 철창문이 삐그덕거리며 열리자,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샘솟았다. 그러나 자리에서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악령과의 안전거리를 확보한답시고 무턱대고 모험하기에는 천해명과 문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도망칠 곳 없는 이 비좁은 공간에서 공격적으로 돌변하기라도 한다면....

불행 중 다행히도 그는 탈출러들을 해칠 생각은 없는듯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도리어 교착 상태가 길어질 기미를 보이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악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날 못 믿겠다는 건 이해하지. 하지만 이미 정체를 들킨 지금, 내가 더 이상 너희들을 속일 이유는 없다. 당초 순수한 영혼의 모습으로 둔갑한 건 너희의 도움이 필요해서였어. 너희들이 내 정체를 알면 이렇게 한마디도 안 믿을 게 뻔한데, 굳이 내 모습을 드러내서 영양가 없는 실랑이로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도움이 필요해서라니, 혼란이 밀려왔다. 잠깐이라도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작은 승강기는 그 정도의 여유도 허용하지 않았다. 현재로선 딱히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므로 탈출러들은 일단 천해명의 말을 들어나 보기로 했다.

다시 한번 병재가 총대를 멨다.

"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데요?"

"어둠의 별장에서 천세만세교가 드린 제사, 잊진 않았겠지? 비록 본래 목적대로 기두를 깨우지는 못했지만, 힘을 실어주기엔 충분했지. 덕분에 나와 순수한 영혼이 위태롭게 됐다.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느낀 점이 뭐였지?"

조마테오 정신병원 같다, 금방이라도 뭐가 튀어나올 거 같다, 누가 보고 있는 것처럼 왠지 모르게 섬뜩하다 등 여러 답변이 되돌아왔지만, 천해명은 막내의 말에만 반응했다.

"온통 새하얗다?"

"그래, 바로 그거야. 순수한 영혼답게, 때 묻지 않았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지. 그러면 여기서 질문. 보편적으로 사람에게 순수하다는 형용사가 가장 자주 사용될 때가 언제일까? 아마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닌지. 인간은 누구나 순백의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드물긴 해도 예외는 있다만. 하지만 여러 환경을 접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몸이 성장하고 자아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영혼에 자기만의 색을 입히게 되지. 그래서 일정 나이대가 지나면 순수한 영혼은 급격하게 드물어질 수밖에 없는 거고. 나쁜 건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일 뿐. 아까 우리가 병실에서 봤던, 벽에 새겨진 문구와 그 주변을 적시던 퍼런 진물을 기억하나?"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장황하게 영혼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건지... 신동은 일단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영생, 그거요?"

"기두가 새긴 글자지. 마네킹의 몸에도 흔적을 남겼던 것처럼, 그놈은 이곳을 자신만의 색으로 물들이려 하고 있어.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당신이 우릴 속이려고 지어낸 말인지 어떻게 알아요."

설명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병재가 시비를 따지려 하자, 그가 언짢은 듯 쯧, 소리를 냈다.

"여전히 못 믿겠다는 얼굴이군. 믿고 말고는 너네 자유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네놈들이 이 꿈의 일부가 아닌,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인지 알아차렸는지 아나?"

탈출러들이 하나둘 고개를 젓자, 천해명은 승강기 패널을 가볍게 두드렸다. 공허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답은 이곳에 있지. 원래 이 엘리베이터는 고장이었다. 문이 굳게 닫혀있길래 여기가 꿈의 경계선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마 너희들이 이곳에 들어오면서겠지. 관련 지식이 없는 놈들이 어떻게 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일단 넘어가도록 하고... 이 갈색과 은빛이 섞인 바닥, 너네가 입고 있는 다양한 색채의 옷 또한 꿈속의 형상이 아니라는 증거다. 다 순수한 영혼이나 기두, 혹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색이지."

"하지만 벽에 새겨진 글자나 마네킹의 파란 상흔은 손전등의 불빛으로만 보였잖아요. 당신이 조작한 걸 수도 있는데."

"내가 아니란 걸 증명할 방법은 없어. 그 손전등은 순수한 영혼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이 거울도 마찬가지. 압력을 가해 깨트리니까 그 수면 아래에 있는 능력이 드러나 실체를 보여주는 거다. 단지 녀석이 자기 힘을 사용할지 몰라 이런 식으로 극히 일부만 드러나는 거고. 내가 너희들이 순수한 영혼의 꿈속 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너희들이 녀석이 만들어 낸 일부분에 불과했다면, 나한테 속아 넘어가지 않았겠지. 무의식적으로 내 기운을 읽어냈을 테니까. 그냥 믿고 외워. 이곳에서 색깔은 단순 꿈속 색칠 놀이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단 말이다. 흰색은 그 녀석의 힘과 능력의 상징인 동시에 그 녀석 그 자체야."

호동은 다시 한번 손전등 불빛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면 저 일렁이는 붉은빛은 천해명의 색인가?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천마도령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왜 우리 도움이 필요한 거예요?"

긴 설명 끝에 드디어 제대로 된 질문을 받았다는 듯 천해명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공공의 적이 있으면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나? 인정하기 분하지만 나 혼자서는 지금의 기두를 이기기가 힘들어. 어딜 둘러봐도 그 녀석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정도야. 그나마 순수한 영혼과 힘을 합쳐야 대항 가능할듯한데, 문제는 기두가 접근할 수 없도록 미리 조치를 취한다는 게 녀석의 반감을 산 것 같더군."

종민에게 손을 댔다고 순순히 인정하자, 이전까지는 방어적이었던 탈출러들의 태도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형한테 무슨 짓을 한 건데요?"

"진정해라. 아까도 말했듯, 그저 안전한 곳에 밀어 넣었을 뿐이야. 녀석의 입장에선 날 못 믿는 건 이해한다만, 계속 날 경계할수록 결과적으로 기두에게만 좋은 일 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그 녀석이 날 믿을 수 있게 설득해 줬으면 좋겠군."

탈출러들의 날 선 표정을 본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날 경계하는 건 이해하는데,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어.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기두의 힘이 강해져 더 위험해질 텐데. 바깥세상에서 온 너희들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테고. 일단 기두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고, 나와의 일은 그다음이지 않겠나?"

아예 일리가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듣는 순간 종민의 상태가 점점 악화하고 있다는 박마가의 말이 떠올랐으니까. 그렇다면 촉박한 시간과 한정된 선택지 사이에서 무엇이 최선일까.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던 호동은 동생들의 의견부터 들어보고자 잠시 자리 좀 비켜달라고 (억지로) 부탁했다. 옆에서 얼른 나가라고 손짓하며 거드는 병재는 덤. 한참 동안 그들을 노려보던 천해명은, 결국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물러섰다.

그가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탈출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원을 그리고 서서 머리를 맞댔다.

"저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못 믿지! 나쁜 귀신의 말을 어떻게 믿어?"

"아, 알겠으니까 목소리 낮춰요, 동현이 형."

막내가 타박하자, 동현은 당장이라도 천해명이 공격할 거라 생각했는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파이터의 우려와 다르게,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한테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천해명이 하는 말 보면 종민이 형이 어딨는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그걸 못 믿겠다는 게 문제죠."

"어, 그렇지... 그게 문제지...."

천해명이 진실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에, 일단 그와 동행해 그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정말 종민이 그곳에 있다면 종민과 함께, 그렇지 않다면 그 즉시 천해명을 떨쳐내고 다시 종민을 찾으러 나서는 게 최선일 듯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동의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천해명을 어떻게 따돌리느냐인데....

"아까처럼 여기로 뛰어 들어와서 다른 층으로 이동하면 안 되겠나? 천마도령 그렇게 따돌렸잖아."

병재는 호동의 제안이 썩 탐탁지 않은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계단으로 도망치는 것보단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맞는 거 같긴 한데요, 계단으로 가면 계속 쫓아올 수 있으니까.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천해명의 주의를 끌어야 하는지 고민해봐야 할 거 같아요. 예를 들면 천해명을 방 같은데 가둔다든지 해서 몇초라도 시간을 버는 게... 무작정 도망치면 바로 뒤쫓아올 텐데, 그러다가 또 같이 승강기에 갇히게 되면 그때는 진짜 큰일 나요."

여태까지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신동이 입을 열었다.

"아니면... 병재야, 우리가 예전에 퇴마 주문 외운 거 있지? 혹시 그게 효과가 있을까?"

"아, 조마테오 병원에서 왕희열 퇴마할 때 외운, 그거요? 이게 종민이 형의 무의식 속이라서 어느 정도까지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예 퇴마까지 가능하다면 더 바랄 게 없긴 한데, 성물이 없으니 거기까진 안될 거 같고... 그래도 주문이 먹힌다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으니 꽤 유용하긴 할 거예요. 천해명한테 먹히면 천마도령한테도 효과 있을 테고... 문제는 그걸 지금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거죠."

"그러네. 지금 시험해보려 하면 천해명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주문 얘기가 나오자, 막내는 다른 걱정이 생겼는지 초조한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근데 그 주문 기억하고 있는 사람 있어요? 난 '악마야, 악마야. 이 남자의 몸에서 나가라.' 그 부분만 생각나는데."

"어어, 걱정 마 피오야. 혹시 몰라서 내가 종민이 형이 의식 잃은 그날 이후로 그 종이를 다시 찾아보긴 했는데...."

병재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그동안 조용히 악령의 눈치를 살피던 동현이 한껏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가 됐든 내 생각엔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거 같아. 지금 천해명의 표정이 심상치 않거든? 우리 대화가 너무 길어지니까 슬슬 의심하기 시작하는 거 같아."

파이터의 말에 탈출러들은 하나같이 뒤를 돌아보았다. 승강기 문에 비스듬하게 기대선 천해명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며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탁, 탁, 탁, 바닥을 울리는 심기 불편한 발소리가 그들을 재촉하는 듯했다.

탈출러들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다시 머리를 맞댔다.

"그럼 어떡하죠? 주문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아니면... 여기 들어오기 전에 박마가가 한 말 기억나요? 위험해지면 돌아오라고 했잖아. 자칫하다 잘못되면 종민이 형뿐만 아니라 우리도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차라리 현실로 돌아가서 재정비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요? 두 발짝 전진을 위한 한걸음 후퇴."

신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호동은 고개를 내저었다.

"좋은 아이디어이긴 한데, 내 생각은 좀 달라. 목사님은 상황이 이렇게 될지 모르셨잖아. 지금 이곳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바깥에서 알 방도도 없으니 조언을 구할 수도 없고. 지금 천해명, 천마도령 둘 다 우리 존재를 의식해버렸는데 우리가 나가버린다? 그럼 얘네들은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종민이를 없애려고 할 거야. 그렇게 되면 오히려 상황이 더 빠르게 안 좋아질 수도 있어. 내는, 우리가 모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기회라는 게 아예 없을 수도 있어."

"다음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호동이 형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신동은 고개를 들어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요?"

"일,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죠. 쉽지 않을 거란 걸 각오하고 온 거잖아요.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면 그때라도 탈출해서 다시 시도해 봐도 되는 거니까!"

씩씩하게 포부를 밝히는 막내 옆, 동현도 볼을 긁적거리며 한마디를 얹었다.

"솔직히 목숨 걸 각오까진 아니었긴 한데...."

진담 섞인 농담(?)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헤치고, 한마음 한뜻으로 손을 모았다. 차곡차곡 포개진 손으로 동료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고 작게 파이팅을 외쳤다. 혼자가 아니다. 여기에 있는 모두와 이 자리에 없는 종민까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다 같이 무사 귀환할 거라고. 피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형제니까.

피식. 산통 깨는 비웃음 소리. 문을 향해 몸을 돌리자, 재밌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천해명과 눈이 마주쳤다.

"드디어 결정 내린 거냐? 오래도 걸렸군. 쓸데없이 낭비한 시간 메꾸려면 서둘러야 할 테다. 따라와."

대답도 하기 전에 홱 뒤돌아선 그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복도를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 대고 병재가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아니, 지가 종민이 형으로 둔갑해서 속이려 해놓고는. 사람 못 믿게 만들어서 시간 낭비하게 만든 게 누군데 왜 우리 탓해?"

말은 그렇게 해도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느릿느릿 밖으로 발을 내딛자, 곧게 뻗은 복도가 그들을 맞이했다. 분명 맨 아래층에 도착했는데도, 출입구라고 보일만한 문은 전혀 없었다. 눈앞에는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과 비정상적으로 긴 복도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천해명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지만, 좀전의 다짐은 어디 갔는지 엘리베이터와 멀어질수록 차오르는 불안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미지의 공간을 둘러보는 것만 해도 무섭고 벅찬데, 그것도 모자라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악령을 따라가야 한다니. 그것도 종민의 모습을 한.

"그 모습 좀 바꾸면 안 돼요? 종민이 형 같은데 태도는 영 딴판이라 소름 끼쳐요."

보다 못한 피오가 한마디 하자, 병재도 거들었다.

"맞아, 믿음이 전혀 안 간다고요."

"안돼. 기두와 맞붙으려면 아무리 사소한 힘이라도 아껴두는 게 좋단 말이다."

천해명이 단칼에 거절하자 병재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모습을 유지하는 데 더 힘이 들어가지 않나?

반박하려던 차에, 뒤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크고 단단한 벽이 그를 밀치는 바람에 병재는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질 뻔했다.

"으악! 이게 뭔―"

"귀, 귀, 귀신이야!! 여기 귀신 있어!!"

"뭐가?? 어디??"

벽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호들. 바닥에 주저앉아 귀신을 봤다고 주장하던 그는, 덩달아 놀란 동료들의 겁에 질린 아우성을 무시하고 손전등을 휙휙 돌리며 그를 놀라게 한 것의 정체를 찾았다.

불빛이 멈춘 건 천장과 맞닿은 벽의 한 부분. 피처럼 진득한 퍼런 액체가 천천히 하얀 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6층 병실 벽에 새겨진 글씨에서 흘러나온 그 진물과 같은 색인 게 분명했다.

"아, 깜짝이야... 힐끗 보니까 저 파란 게 천장에 들러붙은 귀신인 줄 알았어. 이렇게 반쯤 뒤틀어진 자세로...."

뒤늦게 밀려오는 멋쩍음에 절로 말이 길어졌지만, 동현 때문에 더 놀란 동료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느라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 형, 제발...."

"놀랬잖아요...."

"안 되겠다. 누가 쟤 손전등 좀 뺏어라."

병재가 손전등을 가져가는 동안에도 동현은 변명하느라 바빴다.

"아니니까 다행이지, 위에서 덮쳤으면 우리 큰일 날뻔했어!"

"아, 알았으니까 그만 해요, 형."

이 모든 걸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천해명은 고개를 내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바보 겁쟁이들이 정말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어 이대로 버리고 갈지 말지 고민하는 게 분명했다.

"기두의 영향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서둘러."

한바탕의 소란 후에 도착한 복도 끝에는 익숙한 구조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섬뜩한 고어(古語)로 가득 차 있는 문. 악령감옥에서 수없이 본 그 문이었다. 손전등의 불빛이 닿자, 목재에 새겨진 글자가 붉게 달아올랐다. 천해명의 색이었다.

익숙한 전서체를 보자,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어? 우리 저거 글자 찾아야 하는 거 아녜요? 어디에 끼워야 하는지 모르잖아."

"그럴 것 없다. 내가 알고 있으니."

문 앞에 멈춰선 천해명은 뒤돌아 탈출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열쇠."

그러나 신동과 피오는 물건을 건네는 대신 일제히 뒤로 물러서면서 프레임 키를 꽉 쥐었다. 마치 천해명이 강제로 뺏으려 했다는 듯이.

"저 문 뒤에 뭐가 있는데요?"

"뭐긴, 너희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순수한 영혼이지."

"종민이 형이, 저 안에요?"

급격히 차오르는 초조함에 탈출러들은 서로 불안하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천해명이 만들어 놓은 결계 너머에 종민이 있다라... 여태까지 악령감옥이나 어둠의 별장에서 봐왔던 조금 독특한 잠금장치용이라면 모를까, 종민을 가두려고 만든 문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낚으려는 속임수 같았다.

한껏 딱딱해진 말투로 병재가 물었다.

"왜 저 안에 형을 가둔 거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요?"

천해명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못 믿겠다는 거냐? 평범한 밀실이었다면 이미 기두한테 잡혔을 거다. 이 정도는 돼야 어느 정도 버티지. 애초에 왜 프레임 키가 여러 장소에서 발견됐다고 생각하나? 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고 흩뿌려놓아서 그렇다. 기두가 열쇠 하나를 손에 넣는 바람에 아까 그 사달이 나버렸지만. 아, 그리고. 혹시나 해 미리 일러두는 건데, 몰래 도망쳐 글자를 찾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말아라. 암호 글자를 알고 있는 건 나뿐이다. 굳이 여기저기 힌트 뿌려서 위험을 높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망설이던 탈출러들은 결국 프레임 키를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곳 어딘가에 숨겨진 암호문이 없다면 저 문을 열 방법은 없을 것이고(진짜 종민이 저 안에 갇혀있는지 여전히 미지수이긴 하지만), 설령 어딘가 있다고 해도 천해명을 따돌리고 어디 숨겨져 있는지 모를 글자를 찾아 이 낯선 무의식을 헤매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컸기에.

사각틀을 넘겨받은 천해명은 망설임 없이 열쇠를 글자에 밀어 넣었다. 제대로 끼워진 프레임 키는 눈이 아플 정도로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철커덕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열리며 어둠 속으로 향하는 깊고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심상치 않은 광경에 머뭇거리고 있는데, 천해명이 앞장서라며 손짓했다.

"예? 먼저 가라고요?"

잘못 이해했는가 싶어 맏형이 묻자, 천해명은 당연한 걸 뭘 되묻냐는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기두가 언제 올지 모르니 난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겠다. 게다가 날 보면 순수한 영혼의 경계심만 높아져 너희들도 믿지 못할 테니 방해만 될게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천장을 응시했다. 탈출러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천해명은 뭔가를 알아챘는지 한결 심각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고 확인도 하지 않고 돌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탈출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파른 돌계단과 천장에 매달려 있는 오색 새끼줄이 악령감옥 지하실을 연상시켰지만, 사방은 조마테오 정신병원의 지하 밀실처럼 글자로 도배되어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벽을 가득 채운 게 성경 구절이 아닌 노란 부적이라는 것.

혹시 부적에 숨겨진 글자나 단서가 있을까, 플래시로 쭈욱 비춰보고 있는데 저 멀리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 누구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 병재의 흥분한 마음을 대변하듯, 손전등 불빛이 빠르게 지하를 훑었다. 어둠이 집어삼킨 지하실 구석을 이리저리 방황하던 불빛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동료를 비추었다.

"종민아!"

"종민이 형!"

난데없이 눈을 찌르는 환한 빛에 종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호, 호동이 형? 얘들아?"

흰 티에 흰 바지. 어둠 속에서 불빛을 받아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형상. 분명 종민이었다.

"형! 형, 괜찮아요?"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종민에게 서둘러 다가가려는데 갑작스럽게 팔을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휘청거리며 뒷걸음친 병재는 자기 팔을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신동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

병재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반가움과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저지른 불찰이었다. 자칫했으면 큰 위험을 초래했을 수도 있는 그런 실수. 손전등의 불빛에 비친 종민의 옷이 변함없는 흰색이라 해도, 애초에 천해명이 그들을 속인 것이라면 무용지물인 분별법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계단 위쪽에 서 있는 천해명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이 지하실에 갇혀있던 종민 또한 가짜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었다.

"병재야? 병재 맞지?"

익숙한 목소리에 종민은 눈부심을 피하려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렸다. 탈출러들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자―

"잠깐! 가까이 오지 마라!"

호동의 목소리가 지하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난데없는 큰형의 불호령에 놀랐는지, 종민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예에? 왜, 왜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잔뜩 겁먹은 종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위험을 찾는 사이, 호동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들이 찾던 진짜 종민인지 천해명의 또 다른 술수인지 판가름할 수 있을 법한 방법. 천해명은 모르지만 종민은 알만한 질문.

"꼼작 말고 거기 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알겠나? 우리가 악령감옥에서 2층 결계문의 암호를 어디서 찾았지?"

"... 예?"

"일단 대답해 봐."

뜬금없는 질문에 눈만 끔벅이는 종민의 얼굴에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났다. 길어지는 침묵에 역시 이 종민도 가짜라고 결론 내리려는 찰나, 그가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음, 전복죽?"

"확실해? 확실하냐고."

큰형의 압박 수사에도 종민은 굴하지 않고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한마디 한마디 덧붙일수록 기억이 또렷해지는지, 점차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었다.

"형이 찾은 거잖아요! 냄비 바닥에 새겨져 있는 거! 아무도 없는 곳에 죽이 따듯한 게 이상하다고 거기에 꽂히셔서 계속 그 얘기만 하시다가...."

천해명이라면 맞출 수 없는 문제였다. 주온이네 가족이 탈출러들을 위해 냄비 바닥에 암호문을 남길 때 천해명은 이미 왕희열의 몸에 빙의한 상태였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귀사모 살해 혐의로 구속됐으니까.

그렇다면...

"진짜 종민이 맞구나!"

그토록 애타게 찾던 종민과 조우했다는 생각에 그간의 걱정과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탈출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달려가 종민을 부둥켜안았다. 종민은 동료들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얼떨떨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그들을 끌어안았다.

"여태까지 여 있었나?"

다친 곳은 없는지 동생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큰형이 물었다. 며칠 동안 이렇게 꿈속에서 갇혀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흰 바지 아래로 빼꼼 보이는 맨발이 유난히 안쓰러워 보였다.

"천해명이 갑자기 여기로 밀어 넣어서... 아무리 둘러봐도 탈출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왠지 이 기분 나쁜 부적들은 건드리면 큰일 날 거 같고 해서... 왜 이렇게 늦었어요?"

투정 부리는 종민을 달래듯 병재가 토닥였다.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어요. 그건 차차 설명해드릴 테니 일단―"

재회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하실 입구를 지키던 천해명이 목소리 높여 경고했다.

"조용! 그 자식이 오고 있다."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종민도 찾았겠다, 이제 어떻게든 천해명을 따돌리고 천마도령을 피해 무의식을 빠져나오는 일만 남았는데, 하필 막다른 공간에서 두 악령을 상대해야 할 처지에 놓이다니. 이보다 더 최악일 순 없었다. 당황한 탈출러들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몰라 우왕좌왕거렸지만, 종민의 귀에는 동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계단 위 형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입구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남자는, 다름 아닌 그였다. 한눈에 봐도 흡사한 얼굴과 체형. 종민의 모든 걸 빼닮은 듯한 그 모습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파르르 숨결이 떨려왔다. 뭐야 저 사람? 누군데 나랑 똑같이 생겼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에 절로 한 발짝, 두 발짝 뒷걸음질 쳤다. 요동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그들을 둘러싼 공간이 지진이 난 것처럼 위협적으로 진동했다. 격렬한 흔들림에 놀란 동료들이 소리를 지르며 구석으로 피신했지만, 종민은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 저 사람 누구야? 왜, 왜 내 얼굴―"

"형, 이따가! 이따가!"

그 누구도 대답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흔들리는 건물에, 피오는 연신 질문을 던지는 형의 입을 막으며 탈출러들이 뭉쳐있는 구석으로 종민을 끌어당겼다.

이대로 모든 게 무너져 내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종민을 구하기는커녕 모두 이대로 갇혀 현실로 돌아갈 방도가 사라진다면 어떡하지? 누군가 무너진 잔해에 깔려 다치기라도 한다면?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억겁의 세월 같은 몇 초가 지나자, 진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모든 움직임이 멎고 나서야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탈출러들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분명 온 천지가 들썩였는데 천장이든 벽이든 무엇 하나 금이 가거나 무너진 것 없이 멀쩡했다.

흔들림이 완전히 멎자, 입구에 서 있던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리더니, 깃털처럼 사뿐하게 탈출러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안착했다.

"방금 그건―"

"쉿."

병재가 지진에 관해 묻기도 전에 천해명은 고개를 저으며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의 지시에 따라 귀를 기울이자, 복도에서 또 한 번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딸랑,

딸랑,

딸랑.

심장을 옥죄며 다가오는 방울 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더니 모든 게 조용해졌다.

이윽고...

계단 위에 검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펄럭이는 한복과 어느새 손에 다시 쥐고 있는 도끼.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복도를 빽빽이 채울 정도로 수많은 마네킹들이 소리 없이 천마도령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눈대중만으로도 퇴로를 완벽히 차단해버렸음을 직감할 정도로 절망적인 숫자. 천마도령 역시 자신이 압도적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지, 좀 전에 위층에서 탈출러들을 쫓아오던 때와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그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한구석에 뭉쳐있는 탈출러들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그들로부터 몇 걸음 떨어져 있는 천해명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모두 한곳에 모여있어 일이 수월하게 됐군요. 제가 효율을 중요시하는 걸 어찌 안 까먹으시고."

"너야 말고 다 이긴 판이라 생각하는지 기세가 등등하구나. 네놈이 날 이길 수 있을 거 같으냐?"

"이미 한번 이기는 바람에 지난 2년 동안 기생충처럼 이 몸, 저 몸에 붙어 다니시지 않으셨습니까?"

신아들의 차분한 도발에 천해명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하, 내가 또 너한테 당할 것 같으냐?"

"한번 일어난 일이 또 안 일어나란 법은 없습니다."

더 이상의 잡담은 시간 낭비라는 듯, 천마도령은 도끼를 들어 올렸다. 도끼의 날은 종민을 향해있었다.

"잡아."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마네킹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열을 맞춰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오는 게 꽤 위협적이었다.

"막아야 해!"

동현이 가까이 접근한 마네킹 하나를 힘껏 후려쳤다. 파이터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그것은 크게 휘청이더니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볼품없는 플라스틱 팔다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조금 전에 휴게실에서 맞닥트린 것들과 별다른 바가 없다는 걸 깨달은 동현은, 자신감이 생겼는지 다가오는 다른 마네킹도 연거푸 넘어트렸다. 호동까지 합세한 덕에, 서로 부딪히고 밀려 쓰러지는 그것들의 모습은 도미노를 연상시켰다.

생각보다 희망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했다.

"으아악, 저게 뭐야?!"

신동이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동현이 처음에 쓰러트린 마네킹들이 삐그덕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아니, 더 이상 마네킹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괴기한 형상이었다. 부서지면서 빠진 사지를 억지로 아무 구멍에 끼워 넣은 듯, 그것은 더 이상 사람 모형이 아니었다. 다리 대신 팔로 걷는 것도 있는가 하면, 머리가 두 개씩 붙은 것도 있었다.

"틈을 주면 안 된다!"

한 번에 서너 개의 마네킹을 넘어트리며 호동이 외쳤다. 맏형의 고함에 정신이 퍼뜩 들은 동생들은 다시 밀려오는 천마도령의 군대에 다 같이 맞서기 시작했다. 이미 막다른 곳에 몰린 그들인지라, 조금이라도 밀리기 시작하면 에워싸지는 건 순식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끝없는 사투에 모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이 많은 마네킹이 어디서 나오는지 섬뜩할 정도였다. 밀어 넘어트리기가 무섭게 뒷줄이 밀려왔고, 새로운 마네킹을 부수면 재조립된 그것들이 다시 생겨났다. 부서진 마네킹 팔다리와 머리가 점점 쌓여갈수록, 멀쩡한 형상의 마네킹이 드물어질수록, 피로도 급격하게 누적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르면서 이를 악물고 마네킹들과 사투하고 있는 종민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을 몇 개나 쓰러트렸는지는 까먹은 지 오래였다. 주먹을 쥔 손은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렸고, 납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팔을 휘두를 때마다 어깨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그것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종민을 향해 팔을 뻗었다. 거미줄처럼 옭아매는 손길들. 하나를 떼면 다른 것이 붙잡았고, 그것을 쳐내면 다른 손가락이 들러붙었다. 

덥썩, 발목을 붙드는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자 다리를 끌어안는 변형 마네킹의 하얀 손이 보였다. 반응할 겨를도 없었다. 순간 중심을 잃은 몸이 기우뚱,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종민은 빨려 들어가듯이 그대로 마네킹 속에 파묻혔다.

"종민이 형!"

"종민아!"

동료들의 다급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몸이 속수무책으로 천마도령 쪽으로 끌려가는 게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오기엔 역부족이었다.

"형, 내 손 잡아요!"

하얀 마네킹 파도를 헤치며 손을 뻗는 동현이 보였다. 손끝이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스쳤으나 그뿐이었다. 거세게 움직이는 그것들에 의해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안돼! 종민이 형!"

그때였다.

어디선가 태풍처럼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위태롭게 휘청이던 마네킹들은 결국 풍속을 견디지 못하고 볼링핀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쓰러진 마네킹들은 다시 움직이지도, 재생되지도 않았다. 한순간에 부서진 부품 사이에 덩그러니 남겨진 종민이 천천히 눈을 끔벅였다. 이건 분명 아까 그 남자가 서 있던 방향에서 불어온 바람.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니, 그와 닮은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복을 입은 긴 머리의 남자만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쫙 펼쳐진 붉은 부채가 들려있었다.

"처, 천해명!"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인 척 하던 게 천해명이었어? 도대체 왜? 방금 바람을 일으킨 건 천해명이 맞는 거 같은데... 왜 그를 구해줬는지, 왜 그의 모습을 하고 호동이 형과 동생들과 같이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마네킹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한 악령은 들고 있던 부채를 탁 접더니 떨떠름한 표정의 종민에게 다가왔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도망치려 하는 종민의 앞을 가로막고 선 천해명은, 다짜고짜 부채로 어깨를 쿡쿡 찌르며 천마도령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지하실 구석으로 그를 몰았다.

"뭐 하는 짓이냐? 정신이 있는 게야?"

"뭐, 뭐가요? 이, 일부로 잡힌 게 아니잖아요!"

천해명의 꾸지람에 종민은 한껏 쭈그러들면서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잡히고 싶어서 잡힌 것도 아닌데 무턱대고 나무라다니... 언제부터 걱정해주는 사이였다고. 솔직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네가 잡히면 모든 게 끝이다. 기두가 널 집요히 노리는 이유가 뭐일 거 같나?"

"그걸 알면서 그냥 지켜보고만 계셨어요? 방금 죽는 줄 알았다고요!"

"그게 방금 널 구해준 영혼의 은인에게 할 소린가?"

"애, 애초에 내 몸 뺏으려 했잖아요! 당신이나 천마도령이나!"

아, 천마도령!

잠시 다른 악령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종민은 서둘러 천마도령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계단 꼭대기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종민과 눈이 마주치자, 더 이상 이렇게 두고 볼 수 없겠다 싶었는지 그가 무기를 치켜들었다.

도끼날이 번쩍이며 허공을 가르자, 처참하게 부서진 플라스틱 부품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올수록 망가진 마네킹들도 쌓여갔지만, 천마도령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시선을 종민과 천해명에게 고정한 채 기계적으로 팔을 휘둘러 쓸모를 다한 장해물을 없애며 서서히 다가올 뿐이었다.

한 번의 움직임에 저항 없이 바스러지는 그것들은, 왠지 모르게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다 버려진 천세만세교의 신도들을 연상시켜서인지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잔혹함에 마냥 경악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천마도령의 길목에는 탈출러들이 여전히 그들을 둘러싼 마네킹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바닥에 나뒹구는 게 마네킹만이 아닐게 불을 보듯 뻔했다.

빠르게 좁혀지는 간격에, 마음이 조급해진 종민은 뒤돌아 천해명의 옷을 덥석 붙잡았다.

"뭐, 뭐라도 좀 해봐요! 아까처럼 장풍이라도 쏘든지!"

"아까처럼? 그때 너 구하느라고 아껴두었던 힘을 써버렸단 말이다."

천해명이 도울 기미를 보이지 않자, 종민은 목소리 높여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조심해! 천마도령!"

종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네킹에게 포위된 탈출러들이 천마도령을 피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저 무리를 뚫고 형과 동생들에게 갈 수 있을까? 나섰다가 또 붙잡혀서 도리어 천마도령 코앞까지 끌려가면 어쩌지? 걱정이 앞섰지만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먹을 꽉 쥐고 다시 그것들 품으로 뛰어들려 하는데, 천해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비, 비켜요!"

"다 같이 죽겠다는 건가? 안돼."

실랑이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천마도령과 탈출러들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무턱대고 나서지 말라고 했지, 마냥 손 놓고 지켜보라곤 안 했다."

차가운 손이 어깨를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손길에 종민이 움찔하자, 천해명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지그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실어 속삭였다.

"날 믿거라. 내가 도와줄 테니."

종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 같으면 바로 거절했을 그였지만, 싫다는 짧은 한마디는 까끌까끌한 모래처럼 혀끝에 들러붙어 뱉어지길 거부했다. 대답하는 대신 그는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바닥에 참혹하게 널브러진 마네킹이 자꾸만 쓰러진 동료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대로라면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끔찍한 광경.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답이 없는 질문에 절망이 물밀듯 밀려왔다.

다시 고개를 돌려 붉은 눈을 바라보는 종민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무기력감의 소용돌이가 요동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거절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결국 항복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옳지. 잘 결정했다."

나지막한 칭찬과 함께, 그가 손을 뻗어 종민의 눈을 덮었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이 전해졌다. 불쾌할 정도로 뜨뜻하면서도 동시에 기분 나쁜 서늘함. 묘하게 눈을 짓누르는듯한 느낌에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손을 떨쳐내려던 찰나, 시야를 가리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깜박이며 눈을 뜨자, 그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악령과 시선이 마주쳤다. 종민의 눈동자가 자기와 똑같이 붉게 빛나는 걸 확인한 천해명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떠냐? 일시적으로 네 영안(靈眼)을 개방시켰다."

눈을 감은 그 짧은 찰나 동안,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천해명이 옆으로 비켜서자, 전에는 보이지 않던 일렁이는 빛깔이 지하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치 조금 전의 어두컴컴한 지하실과는 전혀 다른 공간에 들어선 것처럼. 벽에 즐비하게 늘어선 노란 부적들은, 천해명과 같은 붉은 기운을 뿜으며 열린 문으로 흘러들어오는 시퍼런 힘을 제지하고 있었다. 천마도령 주위에 유난히 짙게 깔린 이 푸른 기운은, 같은 색을 띠고 있는 마네킹들과 얇은 실로 연결되어 있었다. 퍼런 꼭두각시들 너머로 오색찬란한 형과 동생들도 눈에 잡혔다. 죽은 것처럼 아무 느낌을 발산하지 않는 건, 끈이 잘린 채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마네킹들뿐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까진 좋았으나 눈을 압박하는듯한 불쾌함은 사라진 게 아니어서, 절로 손이 눈가로 향했다.

"눈에 열이 나는 거 같은데 이거 원래 이래요?"

"내 힘을 강제로 불어넣어서 그렇다. 불편해도 참아. 자꾸 만지지 말고."

천해명은 눈을 비비려 하는 종민의 어깨를 부채로 툭 치며 손을 쭉 펴라고 지시했다. 종민은 새로운 시각이 영 익숙해지지 않는지, 연신 눈을 깜빡이면서도 시키는 대로 순순히 팔을 뻗었다.

"기두를 중심으로 일렁이는 저 푸른 기운이 보이나? 어떻게든 그걸 뚫어야만 한다. 네 손바닥에 힘을 모은다고 생각하고, 날 믿고 집중해."

천해명의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단지 서늘한 체온 때문이 아니었다. 맞닿은 피부로 전해지는 붉은 살기. 매번 천해명과 닿을 때 어렴풋이 느껴지던 그 느낌이었다. 목덜미에서 시작해 심장을 거쳐 느리게 몸을 훑으며 손으로 흘러가는 악의에 속이 울렁거렸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역겨움을 억누르는데, 또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강제로 불어넣는 힘에 덮여,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감각.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게 그를 감싸고 있는 포근함.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게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내 힘이라는걸. 부드럽기에 강한, 그래서 천해명이나 천마도령이 쉽사리 꺾을 수 없었던 의지라는걸.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를 이끄는 천해명의 메스꺼운 기를 따라 새하얀 기운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조금씩 모인 기운이, 꽉 쥔 주먹 끝에 합쳐져 파르르 떨리며 출렁거렸다. 천해명의 지시 없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온 신경을 주먹에 집중하고 천마도령 방향으로 손바닥을 쫙 펴자, 기운이 장기두를 향했다. 위험을 직감한 천마도령이 도끼를 기준으로 방패를 구축해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총알처럼 날아간 기운은 잠시 악령을 둘러싼 푸른 기운에 막히나 싶더니, 이내 방어벽을 뚫고 그대로 장기두의 가슴을 강타했다. 그가 쓰러짐과 동시에 탈출러들을 에워싸고 있던 마네킹들도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종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았다. 천해명이 손을 떼자, 몸을 감싸고 있는 따스한 기운도, 역겨운 기운도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진작에 날 믿고 의지했으면 이렇게 쉬웠을 것을."

천마도령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한 종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방금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는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그건...?"

"그래, 믿기지 않지? 네게 이런 힘이 있다는 것도, 기두를 그렇게 무찔렀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지, 안 그러냐?"

"예?"

이상한 점?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종민이 눈만 끔벅거리자, 천해명이 묘하게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생각해 봐라. 애초에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지?"

"그건...."

 어?

기억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종민은 눈썹을 찌푸렸다. 지하실에 갇히기 전에 그는 끝없는 백색 벌판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니, 그랬었던 것 같다. 그러다 소리소문없이 덩그러니 나타난 하얀 문에 홀리듯 이끌려 문을 열고 긴 병원 복도로 들어섰고, 그곳을 헤매다 천해명을 만났었는데... 무(無)의 공간에 들어서기 이전의 기억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분명... 분명 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몸이 묶인 채 제단 위에 눕혀져 있었는데... 하얀 종이가 시야를 가리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이곳에 왔지?

천해명은 혼란에 빠져있는 종민을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리 당황할 건 없다. 이건, 한낱 꿈일 뿐이니까."

꿈?

그제야 퍼즐이 딱 들어맞듯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조각나 있는 기억의 파편.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 다시 생각해 보니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상황들.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깨닫자...

쿠구궁.

또다시 지진이 난 것처럼 벽과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쓰러진 마네킹을 넘어 종민에게 다가오던 탈출러들이 갑작스러운 진동에 휘청거렸다. 혼란을 틈타, 천해명은 사악한 웃음과 함께 종민을 거칠게 밀쳤다. 바닥에 쓸린 무릎과 손바닥이 아려왔지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쓰러진 천마도령 곁에 서서 손을 뻗고 있는 천해명이 보였다. 효력이 다했는지, 점차 가시는 눈의 통증과 함께 어지럽게 일렁이던 색도 덩달아 옅어지고 있었지만, 충분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천마도령의 파란 기운이 점점 천해명의 부채로 흡수되고 있었다. 동시에 시퍼렇게 물들어있던 바닥과 천장도 스멀스멀 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대로 보고만 있으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아직 악한 기운이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아서인지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지 않았다.

"형, 괜찮아요?"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허둥지둥 다가온 동료들의 얼굴에는 걱정과 당혹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병재와 피오가 팔을 잡고 그를 일으켜주었지만, 종민의 시선은 여전히 악령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천마도령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아들의 힘까지 모조리 흡수한 천해명은 부채를 쫙 펴서 입을 가리더니,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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