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공간

하얀 공간 (5)

5화: 순수한 영혼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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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 이 글에는 다소 폭력적인 묘사가 포함되어 있으니 감상에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 글을 쓰는데 알게 모르게 큰 힘과 도움이 돼주신 317님께 감사드립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사악한 웃음소리와 함께 탈출러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벽에 빼곡히 붙여진 부적의 붉은 글자가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더니, 핏빛 액체가 되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노란 종이를 흥건히 적시며 흐를수록 색은 점점 탁해져 갔다. 땅에 닿을 때쯤에는 검붉은색을 넘어 새까만 점액으로 변한 이것은, 느리게 무의식의 바닥까지 점령하기 시작했다.

"병재야, 주문!"

기억이 이끄는 대로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호동이 소리쳤다. 병재는 속으로 빠르게 주문을 되뇌었다.

"다들 따라 해요! 영원하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나머지 탈출러들도 손을 빙빙 돌리며 입을 모아 합창했다. 6명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지하실에 메아리쳤다.

이제 다음 소절은 어쩌면 퇴마 주문의 가장 중요한 부분. 진명을 넣어야 할 차례였다.

"천해명, 천해―"

악령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그가 먼저 움직였다. 물결치듯 일렁이는 부채를 따라 거센 바람이 일었다. 휘몰아치는 강풍에 몇몇 탈출러들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 정도의 위력. 도무지 주문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천해명의 낮고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또 같은 수법으로 당할 줄 아느냐?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호동은 거친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팔을 뻗었다. 윙윙 귓가를 때리는 바람 소리를 뚫고 그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천해명!!"

그 모습을 본 악령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한번 부채를 고쳐잡더니, 더 큰 사선을 그리며 휘둘렀다. 한층 강도 높아진 칼바람에 천하장사마저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호동이 형!"

"형, 괜찮아요?"

맏형을 살피는 동안에도 병재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뭐가 문제지? 왜 주문이 안 먹히는 거지? 혹시 앞부분을 잘못 외워서 타격이 없는 건가? 급하게 기억을 들춰보던 중, 번뜩거리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조마테오 정신병원에서는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 간과해 버린 절차였다.

구마 의식의 첫 단계. 빙의된 악귀가 날뛸 수 없게 반드시 결박할 것.

"천해명을 어떻게든 잡아야 해요! 그때 침대에 묶여있었던 것처럼!"

"뭐, 미쳤어?!"

"그래야만 주문을 제대로 외울 수가 있어요! 아니면 계속 못 외우게 우릴 막을 거라고!"

"그걸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

좋은 질문이었다. 답이 없는 질문. 한마디로 우리 큰일 난 거겠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탈출러들을 보며 천해명이 한껏 비웃었다.

"멍청한 것들!"

모두가 두려움에 섣불리 악령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와중에, 유독 한 사람의 시선만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병재의 설명이 없었더라도, 천해명의 기세등등한 태도가 아니었더라도, 종민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건 아까 천마도령과 대치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상황이야. 무조건 도망쳐야 해. 

이따금 무모하다고 한 소리 듣는 그였지만, 이 자리에 버티고 서서 천해명과 기싸움을 하는 것만큼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치던 중,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마네킹 부품이 눈에 들어왔다. 널브러져 있는 손가락 하나가 까닥였다. 종민은 눈을 깜박였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마네킹 조각들이 조금씩 움찔거리며 살아나고 있었다. 

저것들을 조종하던 천마도령은 분명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당혹스러움도 잠시, 마네킹 부속품들 뒤로 검은 액체가 흐르는 게 보였다. 근접해 있는 손 하나가 꿈틀거리며 도망치려 했지만, 액체가 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토막 난 팔은 검은 물질에 닿자마자 부식되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녹아 없어졌다.

"우, 우리 도망가야 하는 거 아냐?"

마네킹 부품들을 손으로 가리키자, 형과 동생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바닥에 손톱자국까지 남기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팔다리들이 하나둘 검은 액에 먹히고 있는데.

"엘리베이터로, 빨리!"

병재의 외침에 너도나도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해명이 뒤따라오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지하실을 벗어나자 길게 뻗은 복도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좀전의 새하얀 공간은 어디 갔는지, 이곳 역시 벽에서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자, 빠른 속도로 잠식되고 있는 지하실이 보였다. 출렁이는 검은 물결이 방금 올라온 계단에 닿자, 층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스러지며 서서히 붕괴하던 계단은, 얼마 못 가 모든 걸 집어삼키고 있는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닿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몸이 절로 움직였다. 탈출러들은 복도 끝에 보이는 승강기를 향해 내달렸다. 무서운 속도로 바닥에 흥건히 고이기 시작한 검붉은 액체가 밟을 때마다 찐득거리며 그들을 붙잡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 복도가 원래 이렇게 길었던가? 저 멀리 보이는 피난처는 도무지 가까워질 줄 몰랐다.

"엘리베이터가 왜, 왜 이렇게 멀어? 나만 그렇게 느껴지는 거 아니지?"

신동의 말에 다들 헐떡거리며 동의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복도를 모차렐라 치즈처럼 길게 늘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대로면 영영 끝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박마가 목사님이 하신 말씀 기억해요? 자각몽에 대해서?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자각해버리면 악몽으로 변질할 위험이 있다고. 악령들이 그걸 이용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잖아요!"

병재의 설명에 탈출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으나, 우려에서 우러난 표정인지 당장 숨넘어갈 것 같아서 그런 건지 구분하기는 불가능했다. 아마 둘 다겠지만.

종민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병재의 말이 옳았다. 바닥을 뒤덮은 검붉은 액체는 어느새 검은 점액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저 멀리 보이는 복도의 벽과 바닥도 지하실 계단처럼 조금씩 부서져 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블랙홀처럼 모든 걸 집어삼키는 그 암흑 한가운데에는 이 모든 상황의 발단, 천해명이 있었다. 그는 허공에 둥둥 떠서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아니, 쫓아온다기보단 따라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듯했다. 마음 내키면 언제든 잡을 수 있는 독 안에 든 쥐를 가지고 장난치는 고양이 같은 여유로운 모습이었으니까.

"뭐? 우리 큰일 난 거야? 그럼 이제 어떡해?"

 동현이 재차 해답을 재촉해도 병재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 상황을 피해야 한다고만 했지, 막기 실패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말 안 해줬어요!"

"아니, 그걸 얘기 안 해주면 어떡해?"

"내 말이!"

다른 층으로 향하는 계단마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검은 물질에 뒤덮여 있었다. 약해진 디딤판 몇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계단 전체가 부서지며 풀썩 내려앉았다. 탈출러들은 계단에 깔리는 걸 피하려 반대편 벽에 최대한 붙어 달렸지만, 그 벽도 액 범벅이 된 지 오래라, 머지않아 칠흑 같은 까만 공간으로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도착할 기미가 안 보였던 승강기가 눈에 띄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탈출러들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하나둘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발 빠른 동현이 넘어지다시피 하며 제일 먼저 골인에 성공했고, 막내가 그 뒤를 따랐다. 병재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던 종민 역시 승강기를 고작 몇 걸음 앞두고 있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엘리베이터 벽과 충돌을 피하려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데 섬찟한 무언가가 그의 발목을 낚아챘다.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사이, 뒤따라오던 신동과 호동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넘어지면서 쓸린 손바닥과 무릎이 아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리를 내려다보자, 검붉은 액체에서 솟아난 손이 그의 발을 옭아매고 있었다.

"종민이 형! 내 손 잡아요!"

그 사이 안전하게 엘리베이터에 다다른 병재가 손을 뻗었다. 내민 손을 잡으려 종민 역시 몸을 일으키며 팔을 뻗는데― 

"위험해!"

난데없이 피오가 병재를 힘껏 뒤로 끌어당겼다. 둘이 뒤로 넘어지기가 무섭게 승강기 철창문이 거칠게 닫혔다. 방금까지만 해도 병재 팔이 있었던 곳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 났을 터. 병재가 종민에게 정신 팔린 사이, 천해명이 또다시 부채를 들어 올리는 걸 막내가 본 덕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안도할 경황도 없었다. 그건, 새로운 장애물이 그들과 종민을 갈라놨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종민아!"

순식간에 승강기 밖에 남겨진 동생을 본 맏형은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양손으로 철장을 잡고 옆으로 당겼지만, 문은 꿈적하지도 않았다. 옆에서 신동이 빠르게 열림 버튼을 연타해도 강제로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형! 조금만 기다려요!"

동현까지 합세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운동부 두 명이 달라붙어도 철장문은 굳건하기만 했다. 

초 단위로 점점 단단해지는 듯한 검은 액체에서 발을 빼기를 잠시 포기한 종민은, 천해명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확인하려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점차 가까워지는 악령의 번뜩이는 눈빛에서 위험을 감지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동료들에 대해서.

"거기서 나와! 나와야 해!"

하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덜커덩.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승강기가 살짝 내려앉았다. 탈출러들의 가슴도 같이 철렁였다. 평소 같았으면 구석으로 다이빙했을 파이터를 포함한 모두가 하나같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무리가 갈까 봐 호동과 병재는 요주의 인물(동현)을 진정시키며 겨우 고개만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왠지 천장 너머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지탱하고 있는 케이블이 조금씩 끊어지고 있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안전한 탈출구가 돼줄 거라 믿었던 승강기는 어느새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이 돼버렸다. 

"작별 인사는 이쯤에서 하도록 하지. 곧 찾아갈 테니 너무 섭섭해하진 말고."

천해명이 탁 소리 나게 부채를 접자, 전보다 커다란 우지끈 소리가 들리더니, 승강기 케이블이 뚜두둑거리며 끊어지는 게 미세하게 느껴졌다. 반응할 틈도 없었다. 탈출러들이 감금된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추락했다.

"안돼!!"

종민의 목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는 승강기 속, 무중력상태에 이른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쾅!

세게 부딪힌 이마가 얼얼하게 아파져 왔다. 다른 사람들도 다를 바가 없는지 양옆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고이는 눈물에 눈을 깜박이는데 천장이 스르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뭐지, 우리 그대로 죽은 건가? 설마 사후세계에서는 움직이는 천장이 유행하는 인테리어야?

병재는 이내 깨달았다. 움직이는 건 천장이 아닌 그들이라는 걸. 탈출러들이 누워있는 엔트리 스퀘어가 서서히 유리 케이스를 벗어나자, 낯익은 탐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을 벗어나 현실 세계로, 심리수사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박마가가 다가왔다. 탈출러들은 아직 좀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멍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병재처럼 갑작스럽게 깨면서 유리 케이스에 머리를 부딪혔는지, 머리를 문지르는 동현도 보였다.

"슨생님, 종민이는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종민 씨의 무의식에서 강제로 연결 해제된 것 같습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천해명이... 천해명이 강제로 종민이 형이 꿈꾸고 있다는 걸 인식시켜버린 거 같아요. 갑자기 상황이 빠르게 바뀌더니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이렇게 깨어났어요."

병재의 대답을 들은 박마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몇 분 전부터 종민 씨의 무의식이 급격하게 불안정해지더니... 그런 일이 있었군요."

"종민이 형이 천해명한테 잡히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다시 들어가서 형을 구해야 해요!"

옆으로 다가온 피오도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지금 진짜 위험한 상황이라고요! 빨리 다시 안 들어가면 난리 날 거 같은데."

"그건..."

난처한 표정의 박마가가 대답하기 전에 벽에 걸려있는 화면이 켜지더니 유심히 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탈출러들은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스크린 앞으로 몰려가 간곡하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박사님, 저희 다시 들어가야 해요! 큰일 났어요 지금!"

"이대로 가다간 형이 진짜 위험해요!"

조급한 마음에 한꺼번에 터져 나온 목소리가 탐사실을 어지럽게 울렸다. 유심히는 침착하게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다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걱정과 의욕은 잘 알겠습니다만, 현재로선 다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무의식이 너무 불안정한 상태라서 접속하기도 전에 끊길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지금 연구원들이 종민 씨의 상태를 모니터링하면서 안정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상황이 바뀌는 대로 알려드릴 테니 일단 대기해 주세요."

다시 화면이 검게 변하고 탐사실에는 탈출러들과 박마가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박마가가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시 무의식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저 종민에게 아무 일 없길 바라는 것일 뿐.

"종민이가 괜찮아야 할 텐데..."

"종민이 형,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요."


눈앞에서 탈출러들이 추락한 걸 직관한 종민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충격적인 광경에 이건 꿈이라는 위안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가까스로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검은 손을 뗀 그는, 빠르게 질주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엘리베이터가 있던 텅 빈 공간으로 다가섰다.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상과 다르게, 처참하게 부서진 승강기는 보이지 않았다. 흔적 없이 동료들을 삼켜버린 끝이 없는 어둠만 그를 맞이할 뿐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늠할 수 없는 높이 때문인지 동료들을 잃었다는 충격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코앞의 낭떠러지에 조금 전까지 그를 붙잡던 손의 공포는 까맣게 잊혀졌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이 절로 움직였다. 한 발짝 한 발짝 뒷걸음질 쳐 최대한 벼랑에서 멀리 떨어지려 했지만, 종민은 두어 걸음도 떼지 못하고 홀연히 그의 뒤에 나타난 벽에 부딪혔다.

벽? 갑자기 웬 벽?

홱 고개를 돌리자 바로 뒤에 서 있는 천해명과 눈이 마주쳤다.

"눈앞에서 험한 꼴 당한 동료들을 두고 혼자 도망치려고?"

소스라치게 놀란 종민이 악령에게서 떨어지려 다시 뒷걸음치는데, 발이 삐끗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늘한 손이 그의 어깨를 꽉 잡은 덕분에 그대로 추락사하는 걸 면할 수 있었다.  

"좀 전 까지 그렇게 끈끈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실망이군.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데 이제 순순히 그 몸의 통제권을 넘기는 게 어떠냐?"

앞은 천해명, 뒤는 낭떠러지. 명백한 사면초가임에도 불구하고 종민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내뱉은 대답에 천해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쯧, 소리를 냈다.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이, 이거 놔요!"

"놓으라고?"

위협적으로 번뜩이는 눈을 보니 아차 싶었다. 그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종민은 어깨를 붙들고 있는 손을 떼어내려 노력하면서 동시에 절벽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애를 썼지만, 천해명이 그런 그를 놓아줄 리가 없었다.

"동료들을 뒤따라갈 생각을 하다니 아주 감동적이야.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안돼!"라고 목청껏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등이 떠밀려졌다. 슬로우 모션에 걸린 것처럼 모든 게 느리게 펼쳐졌다. 중심을 잡으려고 공중을 허우적거리는 손과 조금씩 뒤로 젖혀지는 몸. 온몸이 허공에 붕 뜬 걸 느낀 순간, 다시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를 잡아당기는 중력의 힘이 작동하자,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곤두박질치는 그를 내려다보는 천해명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낮고 차가운 웃음소리는 마치 악령이 그와 함께 하강하는 것처럼 바람 소리와 섞여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끝없는 낙하에 종민은 눈을 꽉 감았다. 날카로운 바람이 얼굴을 연신 때렸다. 무서웠다. 이대로 끝인 건가,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즉사겠지? 만약 안 죽더라도 엄청 아프겠지? 더 이상 천해명한테서 도망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닐 텐데...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호동이 형이랑 다른 얘들이 나 구하러 여기까지 와줬는데 다 이렇게 끝이다니... 죽고 나서 미안함에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쯤, 갑자기 모든 게 멈췄다. 자유 낙하가 끝나고 낙하산이 펴지면서 몸을 홱 잡아당기는 것처럼, 급작스러운 정거에 눈이 번쩍 떠졌다. 

위, 아래, 양옆 따질 것 없이 모든 것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여있는 공간이었다. 안 보이는 힘이 그를 안전장치처럼 잡고 있어 허공에 붕 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시 추락할까 얼어붙어 있던 종민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버둥거리며 팔다리를 움직였다.

"뭐야, 여기―"

무작정 도와달라고 외치려는 찰나, 툭, 밧줄이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그를 잡고 있는 힘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다시 추락할 거라는 공포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도 잠시, 종민은 곧바로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세게 부딪힌 팔꿈치와 무릎이 욱신거렸다. 고작 30센티 정도의 허공에 떠 있었던 거 같은데, 어디가 바닥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암흑이 집어삼킨 공간이었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멤버들이나 승강기의 흔적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살펴보는데 너무 멀리 추락해서인지 그가 떨어진 구멍마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어둠에 익숙해지면 조금 다를까, 눈을 연신 깜박이며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으, 여긴 또 뭐야..."

왠지 가만히 있기가 꺼려져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둘러보던 중, 서늘한 바람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그의 주변을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재빨리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호동이 형? 얘들아?"

돌아오지 않는 대답. 종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 방금 그게 동료 중 한 명일 리가 없다는걸. 천해명일까, 아니면 아까 그를 잡아끌던 끈적한 손? 혹은 어둠 속에 숨어 그를 노리는 다른 무언가?

불안감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뭔지 몰라도 이 자리에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될 거 같지? 잠시 망설이던 종민은, 자리를 박차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이곳이 어딘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아는 것 하나 없었지만, 움직이기 시작하자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의 그 섬뜩한 느낌이 그의 뒤를 쫓고 있다는걸.

수상한 기운을 떨치려 종민은 이를 악물고 속도를 올렸다. 쭉 가다가 왼쪽으로 홱 꺾는가 하면, 얼마 안 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앞에 펼쳐진 건 끝없는 일정한 검은 어둠이라,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큰 원을 그리며 같은 자리를 맴도는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그저 등 뒤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기척을 떨치는 데 집중할 뿐.

그러나 종민의 바람과는 달리, 지쳐가는 건 그뿐이었다. 계속된 뜀박질로 숨이 차오르자 지쳤는지 몸이 무거워진 느낌을 받았다. 속도도 점점 느려지면서 집중력도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웅웅거리며 다가오는 목소리와 서늘하게 몸을 감싸오는 차가운 공기에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터였다. 그제야 종민은 깨달았다. 무겁게 몸을 두르는 듯한 서늘한 공기는 사실 공기가 아니었다는걸... 어느 순간부터 뒤에서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는 천해명이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처, 천해명!"

악귀를 떨쳐내고 다시 한번 도주하려 했으나 천해명이 더 빨랐다. 너무 갑작스러워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쿵 하고 바닥과 강렬하게 충돌한 고통이 온전히 전해지기도 전에 등에 강한 압력이 가해졌다.

"얼마나, 얼마나, 이 순간을 꿈꿔왔는지."

종민의 등위에 발을 떡하니 올리고 선 천해명은 이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그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고진감래라더니... 오로지 이날을 위해 참고 견딘 치욕은 결코 헛된 게 아니었나 보군. 지금 네가 이렇게 내 발밑에 엎드려 있는 걸 보면."

웃음소리와 함께 등에 가해지는 힘이 한층 강해졌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던 종민은 고통스러운지 윽, 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 종민을 내려다보며 이 순간을 만끽하던 천해명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홱 젖혀지는 머리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천해명의 조롱은 끝날 줄 몰랐다.

"어떠냐, 옴짝달싹도 못 하는 이 기분이? 벌써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듯한데 그것참 안됐구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텐데."

종민이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천해명은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같이 지내며 쌓아온 정을 봐서, 지금이라도 내게 협조한다면 네 목숨만큼은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싫어!"

종민이 거세게 고개를 흔들어도 천해명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봐도 압도적 우위에 있는 건 이 몸의 주인이 아닌 그, 천해명이었다. 그는 선심 쓰듯 부드러운 말투로 계속해서 종민을 회유했다.

"제대로 이해를 못 한 거 같으니 내가 친히 설명해 주지. 왕희열, 그 이름을 기억하나? 조마테오 정신병원에서 내가 잠시 몸을 빌렸던 대학생.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설마 순진하게 나를 쫓아냈으니 그래도 친구들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 하루하루 잘 살아갈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직도 온 세상은 그 아이를 보며 살인자라고 손가락질할 텐데 말이야. 사실이 아니라는 걸 뒷받침해 줄 증거 하나 없으니까. 만약 네가 계속 날 거부한다면 너는 그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황에 부닥칠 것이야. 어때? 이제 생각이 좀 바뀌었나?"

 얼굴을 툭툭 치면서 비웃는 천해명에도 종민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처음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저도 모르게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천해명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나름 강한 퇴마사였던 조마테오 원장이 그렇게 한순간에 죽임을 당한 그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또렷해서 절로 두려움이 앞섰다. 

갈등하는 그의 마음을 읽어낸 듯, 악령은 계속 달콤하게 속삭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처음에는 네 손으로 동료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괴롭고 견디기 힘들 수 있겠지만, 그때뿐일 거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니니까."

동료라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호동이 형, 동현이, 동이, 병재, 그리고 피오까지. 아무리 천해명이 약속하는 고통이 두렵고 무서워도 절대 그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그를 붙들어 주는 이유가 있었다. 

"거짓말!"

힘껏 소리치자, 등 위의 발이 한껏 그를 더 강하게 짓눌렀다.

"멍청한 놈! 아직 네놈이 제대로 이해를 못 했나 본데, 날 거부할수록 더한 고통만이 널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천해명이 뭐라 협박하든, 종민은 뒷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들을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다. 여태까지 낯선 공간과 도망칠 수 없다는 공포에 짓눌려 있었을 뿐, 포기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시 한번 명확히 인지한 후로는 끝까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고개만 흔들던 그는 목소리 높여 싫다고 더 강하게, 더 단호하게 저항하며 몸부림쳤다.

그런 종민의 모습을 본 천해명은 기가 찼다. 굴복시키기 쉽진 않으리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대항할 줄은 미처 몰랐다. 무서워하면서, 발밑에 깔려 꼼작도 못 하면서, 뭘 믿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걸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하, 하고 비웃으며 온 힘을 다해 지르밟자, 종민이 저도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순수한 영혼이라 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조금전에 기두와의 싸움에선 내가 널 이끌었다는 걸 잊지 말거라. 너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무리 발악해도 네놈 같은 게 절대 날 이길 수 없다고!"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천해명은 종민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강하게 바닥에 내리쳤다. 

"이렇게 무력한 네 모습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그 고집을 꺾지 않을 셈이냐?"

강렬한 충격에 머리가 울렸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압박과 통증에도 종민은 이를 악물었다. 순순히 따르든, 끝까지 저항하다 몸을 뺏기든, 천해명이 다른 탈출러들을 죽일 건 불을 보듯 분명했으니까.

"당신이... 당신이 포기하지 않듯이 나도 절대 몸 내어줄 생각 따위 없어요! 호동이 형이랑 애들이 곧 날 찾으러 올 테니까!"

뭘 믿고 동료들을 이렇게까지 믿고 의지하는 건지. 자길 구하러 돌아온다는 확신이 어디 있다고. 천해명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십 년을 먹여주고 재워준 양아들이라도 한순간에 배신하는 마당에 뭘 믿고?

절로 헛웃음이 나게 하는 대답에 악령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누르던 발을 뗐다. 쉽사리 굴하지 않는 종민의 모습에 질린 건지, 일단 한 발짝 물러서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내리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호흡이 편해진 것도 잠시, 날아온 발길질에 다시 숨이 턱 막혔다. 극심한 고통에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몸이 절로 반 바퀴 돌려지더니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종민이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천해명은 화풀이하듯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듯 너도 그렇게 버려지고 나서야 정신 차릴 거냐? 누군가를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네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 설령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널 구하려 한다 해도 절대 여길 찾아올 수 없을 거다. 좋게 좋게 가려 했더니 감히 끝까지 반항해? 좋다, 누가 이기냐 해보자! 내가 베풀어 준 호의를 제 발로 걷어찼으니 이제 네 인생에는 이것보다 더한 고통이 줄지어 몰려올 것이다!"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인정사정없이 숨통을 죄어오는 손길을 빠져나오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이 두렵고 괴로운 상황을 벗어날 순 없었다. 초가 다르게 점점 몸에 힘이 빠지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컥컥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상황에도 종민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천해명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포기... 안해...!"

시선이 맞닿자, 가소롭다는 듯 종민을 비웃던 천해명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림자가 까맣게 드리운 얼굴 속, 희게 빛나는 눈동자라니. 짧은 찰나에 온전히 마주한 새하얀 눈빛 속에서 느껴진 압도적인 힘에, 그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두려움은 잠시였다. 오히려 더 욕심이 났다. 애초에 순수한 영혼이란 양날의 검이 아닌가. 날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득이 될 수도, 실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정도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지금, 강하게 나가서 이 자식을 굴복시키는 게 최선이다. 

체중을 실어 목을 더 세게 짓눌렀다. 그렇게 대담하게 소리쳐 놓고 힘 한번 주니까 다시 컥컥거리면서 말도 못 하는 바보 같은 자식. 우습기 짝이 없었다. 역시 이제 와서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었다. 

저항이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목을 옥죄는 손을 떼려는 시도도 점차 힘을 잃고 있었다. 이 녀석도 이제 끝이라고 자만한 순간, 마지막 힘을 쥐어짠 종민이 손목을 움켜쥐며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다시 흰 눈과 마주친 그 순간, 짧고 강한 고통이 붙들린 손을 휘감았다. 불에 덴 듯한 강렬한 통증에 천해명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휙 빼며 뒤로 빠졌다.

자유의 몸이 된 종민은 콜록거리며 연신 숨을 들이켰다. 연기라도 흡입한 것처럼 타오르는 목구멍에 정신 차리기란 불가능했다. 한시라도 빨리 악령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긴 했지만, 마음과 다르게 몸은 산소를 공급하는 데 급급했다.

그사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자기 손과 종민을 번갈아 보던 천해명은, 종민 주변에 아주 연하게 일렁이는 흰 기운이 피어오르는 걸 알아챘다. 종민이 연거푸 기침하는 동안에도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하얀 기운은 점점 짙어지더니, 이내 그를 온전히 뒤덮었다.

"네놈...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영안을 개방했느냐 말이다!"

뒤늦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걸 인지한 천해명은 자존심에 제대로 생채기가 난듯했다. 그러나 단념할 순 없었다. 저렇게 목에 시퍼렇게 올라오는 멍을 보이는데, 순수한 영혼이 거의 손바닥 안에 들어왔는데, 이대로 관두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다시 한번 덤벼들었지만, 이번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종민을 감싸고 있는 흰 기운에 막혔다. 살이 타는듯한 고통에 천해명은 몸부림치며 물러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미처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종민도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으로부터 그를 감싸는 하얀 기운. 확실히 천해명과 영력을 합쳤을 때랑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따스한 그만의 힘. 

천해명이 더 이상 함부로 공격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종민은 비틀거리면서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심호흡 몇 번 한 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천해명한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네가 나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포된 협박에도 종민은 입을 다물었다. 숨을 옭아매던 그 손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했다. 언제까지 이 보호막이 남아있을지 모르는 데다,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애초에 이곳을 혼자 빠져나가는 게 가능한지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천해명이 뭐라 하든 종민은 뒤를 돌아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겠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는 생각 하나만을 붙잡고, 귓가에 맴돌며 그를 쫓아오는 듯한 천해명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그를 감싸고 있는 포근한 하얀 빛과 함께 검은 공간을 쭉쭉 나아갔다.

하지만 뛰고 또 뛰어도 바뀌는 게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렸는데 주변은 한결같은 어둠으로만 가득했다. 제풀에 지쳐 점점 걸음이 느려지는데, 천해명의 오만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멍청한 것! 네가 지금 하는 짓이 쓸데없이 힘 빼는 거밖에 더 있느냐?"

자리에 멈춰서서 천해명을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악령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 데다 목소리도 사방에서 울려 어느 방향으로 도망쳐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니, 사실 종민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 깨달았는지 뭐라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은 천해명을 약화시키는 것, 그 하나뿐이라는걸. 버텨야 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 맞서 싸워야 했다.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조금 움츠리고서 암흑을 응시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처음처럼 마냥 겁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즉각적인 위협이 덜해지자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침착해졌다고 해야 할까.

"어, 어차피 지금 저 못 건드시잖아요! 이러다 우리 둘 다 여기 평생 이러고 있을 수 있어요!"

"평생? 네가 지금 네 능력도 컨트롤 못 하는데 과연 이 대치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까 궁금하군. 네 기운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기미가 보이는 순간, 그 방어막을 산산조각 박살 내고 널 차지하겠다! 그때엔 네 동료들도 처참하게 짓밟혀 줄 것이다!"

천해명이 온갖 고통을 약속하면서 으름장을 놓는 동안, 종민은 악령의 위치를 찾으려 계속 두리번거렸다. 눈을 부릅뜨고 온 정신을 집중하자, 새까만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을 천천히 빙빙 맴돌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무언가. 천해명이 틀림없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제 어떡하지? 천해명은 내가 눈치챈 걸 아직 모르는 거 같은데...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아까처럼 천해명에게 붙잡힐 것 같았다. 퇴마까지는 못하더라도, 끝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선택지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종민은 천해명을 모르는 체하며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내 힘이 약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쪽도 약해질 수 있잖아요!"

시간을 끌려 아무렇게 내뱉은 말에 천해명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네놈이 날 한번 막아섰다고 아주 기고만장해져서는 나와 동등하게 맞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구나! 제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는 놈이!"

떠벌 떠벌 떠벌. 천해명은 계속해서 왜 이 모든 저항이 헛수고인지 조목조목 나열하기 시작했지만, 종민은 더 이상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내 힘? 아까 보니까 천해명이 이 힘 때문에 날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던데... 왜 갑자기 발현된 거지? 장기두랑 싸울 때는 천해명이 강제로 끌어올려서 그런 거라 치더라도 조금 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땐, 점차 혼미해지는 정신에 두려움이 밀려왔었지만, 동시에 어떻게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여기서 포기해버리면 날 찾으러 온 형과 동생들은 뭐가 되겠냐고. 포기하지 말고 죽기 살기로 버텨야 한다는 마음이 온몸에 가득 찼었으니까. 

설마 그건가? 굴하지 않겠다는 소신. 이 힘을 다루는 방법을 정확히는 몰라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천해명도 나를 쉽사리 건드리지 못할지도 몰라! 

시커먼 암흑 속에서 한 줄기의 빛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 종민은 계속해서 모르는 척, 겁먹은 척하면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냥 당신이 포기하면 안 돼요? 계속 이렇게 나쁜 짓 하다간 벌 받아요! 이대로 가다간 진짜 뭔 일 난다고요!"

실없고 황당한 이야기를 내뱉는 종민에 천해명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네가 이런 헛소리를 내뱉으며 시간을 끌어볼 생각인가 본데, 다 부질없는 일이다. 넌 이미 네 손바닥 안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래도 종민은 지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그를 감싸고 있는 빛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도,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그로선 섣불리 잘못 덤볐다가는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길 승산이 있는 건 천해명이 방심했을 때를 노리는 것이기에...

"호동이 형 기억하시죠? 진짜 무서운 형이에요! 동현이도 마찬가지고. 마음만 먹으면... 아, 근데 걔는 귀신 무서워하니 안 되려나?"

"허튼소리 하지 마라! 그리고 누굴 보고 귀신이라는 거냐! 네놈이 감히 나를 한낱 귀신 따위로 칭해?"

"그, 그렇지만 귀신 맞잖아요!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게 딱 귀신 아녜요?"

악의는 없었지만 어째 악령의 화만 돋운 거 같았다. 뭐가 어찌 되었든 천해명이 흥분한 지금이 그가 기다리던 기회였다.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알짱거리는 천해명을 확인한 종민은 천천히 돌아섰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를 노리는 살기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여전히 천해명 특유의 역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지만, 완전히 등을 돌리자 더 이상 시야에 악령이 들어오지 않았다. 종민은 두려움과 불안을 꾹 억누르고 무방비한 척 연기를 하며 천해명이 먼저 다가오게끔 등을 내어주었다.

빈틈을 포착한 천해명은 망설임 없이 두 손을 뻗으며 종민에게 달려들었다. 훅 다가오는 살기에 종민은 재빨리 뒤돌아서면서 천해명의 팔을 꽉 잡았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악령의 얼굴에는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붙잡힌 팔에서 물밀듯 밀려오는 통증에 천해명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런 그를 종민이 놓아줄 리가 없었다. 

"네놈이 정말 겁을 상실한 모양이구나!"

천해명이 뭐라 하든 종민을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둘 사이에는 터질 듯이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러면 내가 포기할 줄 아느냐? 계속 나에게 대들다가는 결코 네놈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놓아주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종민에 천해명은 이판사판이다 싶었는지, 종민을 기절시키려 온 힘을 다해 다시 한번 목을 졸랐다. 이미 크게 타격 입은 곳을 노리는 게 제일 효과적이라는 생각에 손톱까지 세워가면서.

종민은 종민대로 여기서 물러서거나 천해명을 놓쳐버리면 다음 기회는 없으리란 걸 직감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피부를 짓이겨도, 종민은 죽기 살기로 팔에 매달렸다. 이미 신체적 한계에 다 다른지 오래였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종민의 집념이 강해질수록, 그의 의지를 대변하듯 그의 눈동자는 더 밝고 더 희게 빛났다. 서로 마주친 상태로 노려보고 있던 탓에 천해명은 종민의 눈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 가운데에 자신의 힘에 부친 표정을 보자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솟구쳤다.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자기 모습과 대비되는, 종민의 올곧은 눈빛에서 오는 두려움.

힘에 부치기 시작한 천해명이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을 반영하듯, 검은 공간이 불안정해지면서 여기저기 실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천해명!"

쩌저적.

온 힘을 다해 악령의 이름을 부르자, 그와 동시에 둘의 머리 위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면서 그 틈으로 빛이 조금씩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하늘에 햇살이 밀고 들어오듯 둘 머리 위에 환하게 쏟아져 내리는 빛에 천해명이 깔아놓은 어둠도 점자 옅어지고 있었다.

힘이 점점 약해지는 걸 느낌과 동시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공간마저 잘게 부서져서 사라져가는 걸 본 천해명은 악을 쓰며 순수한 영혼의 이름을 불렀다.

 

"김종민!!"

몸을 뺏는 건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악령은 소멸을 피하려 발악하며 온 체중을 실어서 죽일 듯이 종민의 목을 깊숙이 긁었다. 이미 한계점에 다 다른지 오래였지만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있던 종민은, 천해명의 일격에 순간 시야가 흐릿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손을 놓쳤다. 천해명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빛 사이에 홀로 남겨진 종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뒤늦게 살았다는 안도감이 서서히 물밀려 들어오면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주변에는 익숙한 하얀 공간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던 종민은, 햇살이 내리쬐듯 그를 따스하게 감싸는 하얀 빛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돌아온 건 청각이었다. 여러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 바삐 움직이는 발소리, 삑삑거리는 여러 기계음. 귀 기울여 집중하고 있자, 차츰 다른 감각들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피부에 닿는 메탈의 감촉에 으슬으슬 추위가 느껴지면서 어딘가에 눕혀져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다음에야 천천히 눈이 떠졌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하얀 빛에 눈이 부셨다. 조금 전에 그가 있던 하얀 공간의 따스한 빛과는 조금 다른, 강렬한 형광 불빛. 익숙해지려 눈을 깜박이는데 불쑥, 시야에 안경을 쓴 한 여자가 들어왔다.

"김종민 씨, 정신이 드십니까?"

습관적으로 예? 하고 되묻으려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말을 안 한 것처럼 목이 뻑뻑했다. 뻐근한 몸을 움직여 느릿느릿 일어나 앉자, 종민은 자신이 실험실 같은 이상한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기계와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처럼 보이는 사람들. 몇몇은 그가 일어나 앉자 허둥지둥 다가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한사람이 그의 이마에 붙여져 있는 패치를 제거하자, 그제야 종민은 자신이 일부 기계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몇 번의 헛기침을 하고서야 목소리가 약간 돌아왔다.

"예에? 여기가 어디...? 이게 다 뭐예요?"

여자가 입을 떼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피오, 동현이, 호동이 형, 동이, 그리고... 병재는 어딨지? 아, 하필 동현이랑 호동이 형 사이에 껴서 안보였구나. 

하여튼,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들이었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돼준 사람들.

"종민아!"

"종민이 형!"

탈출러들은 하나같이 달려와 종민을 끌어안았다. 종민도 그들을 힘껏 끌어당겼다. 따뜻하다. 조금 숨이 막혔지만, 아까와는 천지 차이였다.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만끽하려 절로 눈이 감기는, 그런 기분 좋은 숨 막힘.

"괜찮아요? 어디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죠?"

"형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천해명은? 천해명은 어떻게 됐어요?"

"종민이 형, 우리가 누군지 기억나요? 혹시 까먹었거나 하면..."

대답할 틈도 안 주고 쏟아지는 질문에 종민은 한결같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야, 동현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걸 까먹겠냐? 나 구하러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오기 있어?"

"우리도 가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여기 슨생님들한테 물어봐라! 그리고 천해명은 어케된건데?"

큰형의 재촉에 못 이겨 질문에 답하려던 종민은 금세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천해명은― 동이아, 너 울어?"

나머지 탈출러들도 고개를 돌리자, 소매로 빨개진 눈시울을 닦는 신동이 보였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형."

피오가 신동을 토닥여 주는 동안, 종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천해명, 아마 당분간은 우릴 괴롭히진 못할 거 같아. 잘됐지?"

설령 그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곁에 이 사람들이 있는 이상, 끝까지 싸울 이유가 있는 이상, 천해명은 절대 이기지 못하리란 걸 이젠 누구보다 종민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하얀 공간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들 좋아해 주시고 아껴주셔서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조만간 후기로 찾아뵐게요.

카테고리
#2차창작
캐릭터
#천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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