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산장

살인산장 4화

모든 게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거예요.

Be My Escape by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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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tvN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여 만든 2차 팬 창작물로, 원작과는 무관하며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창작물의 등장인물들은 해당 출연진들과 다른 인물임과 작중 설정은 현실의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알립니다.


이른 새벽, 호동은 잠에서 깼다. 침대 옆 탁자에 놓여있는 디지털시계는 5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낮은 한숨과 함께 호동은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눈을 감고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어제 일어난 일과 오늘에 대한 걱정에 잠은 오지 않았다. 몇번이나 자다 깨는 걸 반복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아마 그만 그런 것이 아닐 테다. 옆 침대에서 막내가 연거푸 뒤척거리는 게 잠결에도 어렴풋이 느껴졌을 정도니까. 다른 방에 있는 동생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호동은 다시 되돌아 누웠다. 어스름한 방안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막내의 등을 바라봤다. 잠이 깊게 들었는지 막내의 윤곽이 느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다. 그 규칙적인 움직임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동은, 결국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지, 분명 한참을 잠들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아직 여섯 시도 되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창가로 다가가 살짝 커튼을 들춰 밖을 살폈다. 쟃빛 먹구름이 잔뜩 껴있어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지만, 밤새 요란하게 치던 천둥번개는 잦아들고 비만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커튼의 작은 틈새 사이로 흘러들어온 푸르스름한 새벽빛에 지훈이 뒤척였다. 방에 계속 머무르다간 지훈을 깨울까 싶어, 호동은 잠시 나갔다 오기로 결정했다. 시계 옆에 비치된 종이와 펜이 있다는 걸 기억해낸 그는, 어둠 속을 더듬어 메모지 옆에 꽂혀있는 펜을 집었다. 행여나 혼자 깬 막내가 놀랄까 ‘물 마시고 올 거니 놀래지 마라’라고 짧은 쪽지를 남긴 그는, 간단하게 세수만 하고 방을 나섰다. 어제 반나절 이상 있었던 곳인데도 불구하고, 고요한 어둠 속에 반쯤 잠겨있는 산장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1층으로 내려와 불부터 켠 호동은 우선 테라스가 보이는 창가로 다가섰다. 의자로 고정해둔 덕에 간밤의 비바람에도 방수포는 날아가지 않고 잘 있었다. 조금 마음이 놓인 호동은 부엌으로 되돌아가 물을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연신 내리는 빗방울이 수영장 표면을 때리는 모습을 보자, 밤새 그를 뒤척이게 했던 걱정거리가 다시금 수면위로 떠올랐다. 

“오늘은 비가 그쳐야 할 텐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호동은 억지로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떼고 뒤돌아섰다. 비가 그친다고 불어난 계곡물이 단번에 줄진 않겠지만, 하늘이라도 개야 이곳에서 곧 탈출할 수 있다는 자그마한 희망이라도 보일 것 같았다. 거실로 향한 그는 소파 한구석에 던져진 리모컨을 찾아들고 티비를 틀었다. 그가 원하던 방송을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버튼을 두어번 눌러 뉴스 채널에 안착한 호동은,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 화면에 집중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기상특보를 시청하고 있는데, 위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릴락 말락 할 정도인 걸 봐선, 2층이 아닌 3층인 듯했다. 대화 내용은커녕 화자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호동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슬슬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 또한 기록적인 집중폭우가 내릴 예정입니다. 현재 레이더 상황을 보시면, 여전히 강한 비구름이….”

화면 속의 기상캐스터가 계속해서 일기예보를 이어갔다. 오늘 역시 호우경보가 내려졌다는 내용과 함께, 안전에 유의해달라는 당부의 말이 전해졌다. 전국의 강수량이 보도되고, 이어서 내일 날씨 예보로 넘어가려는 참이었다. 

“으아악-!”

쿵.

별안간 들리는 외마디 비명.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묵직한 추락음. 호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리모컨을 내팽개친 그가 창가로 달려갔다. 

“이, 이게 무슨 일이고!”

아니나 다를까, 폭우 속에 사람이 쓰러져있었다. 약간의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동 없는 몸뚱이에서 붉은 피가 서서히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누구인지 눈을 찡그리며 제대로 확인해볼 겨를도 없었다. 호동은 서둘러 뒷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제발, 제발 아들은 아니어야 할 텐데!’

밤새 뒤척이느라 지금쯤 깊은 잠에 빠져있을 막내가 떠올랐다. 너무 안일했다. 잠시라도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쏟아지는 비가 금세 온몸을 흠뻑 적셨지만, 그런 건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수영장으로 달려가는 그 짧은 거리 동안 다른 동생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종민이, 동현이, 동이, 병재. 그중 누구라도 그처럼 일찍 깨서 홀로 방을 나섰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라면….

호동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추락한 남자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동생 중 한명이 아니길 간절히 빌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남자에게 서서히 다가섰다. 

수영장을 둘러싸고 있는 하얀 타일 바닥에는 벌써 붉은 피가 흥건히 번지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는 피로 물들어있었고, 초점을 잃은 동공은 그가 떨어진 하늘을 향해있었다. 호동은 그 공허한 시선을 따라 위로 눈을 돌렸다. 3층 거실로 향하는 발코니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분명 이 사람을 떠밀은 자가 조금전까지 저 자리에 있었을것이다. 그리 높은 곳에서 떨어진 건 아니지만, 하필 아래가 타일 바닥이라 이런 비참한 결말은 맞은듯했다. 동생 중 한명이 아니었다라는 안도감과 죄책감은 잠시였을뿐, 곧 두번째 살인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다시금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호동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구경만의 눈을 감겨주었다.

전날 저녁에 느꼈던 그 감정이 또다시 밀려왔다. 계수상의 맥박이 더 이상 뛰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을때 밀려왔던 그 복잡 미묘한 감정. 분명 이자들은 쓰레기다. 천하의 나쁜 놈들이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고,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고한 여고생들을 죽였고, 자신의 유희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장난감 취급했다. 똑같이 당해봐야 싸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해본 적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보니…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복잡했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한발짝 뒤로 물러서는 호동의 발에 무언가가 채었다. 미처 보지 못했던, 한껏 구겨져 있는 종이뭉치. 방금 사람이 추락사한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수상스러운 물체. 혹시 추락하기 전까지 구경만이 쥐고 있던 건가? 호동은 이미 흠뻑 젖은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펼쳐보았다. 비에 젖어 번진 글자가 그를 맞이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오랜만의 재회를 위해 열심히 준비했거든.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땅이 꺼질듯한 한숨과 함께 신동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헝클어진 머리에 잠을 못 자 퀭한 얼굴, 막 침대에서 뛰쳐나와 구겨진 잠옷까지. 멀끔하던 어제와는 딴판이었다. 다른 탈출러들도 별다른 바가 없었다. 퉁퉁 부은 얼굴에 내려앉은 다크서클…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자다가 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라 뛰쳐나왔으니 그럴법했다. 깊은 잠이 들어 바로 눈을 뜨지 못했던 이들도 비명이 연쇄적으로 일으킨 다른 소란 때문에 곧 깰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직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지훈이 멍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상황 파악을 하고 신고까지 마쳤으나 일어나자마자 본 광경에 대한 충격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첫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12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다가, 오늘 역시 강한 비가 내려 이곳을 탈출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분위기를 더욱 처참하게 끌어내렸다. 거기다 호동이 발견한 구겨진 쪽지가 탈출러들의 근심을 한층 더해주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니, 미친 거 아냐?”

젖은 종이를 말리려 커피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범인의 메시지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던 종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병재는 까치집처럼 삐죽삐죽 솓아오른 머리를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죠. 게다가 오랜만의 재회라고 한 부분도 마음에 걸려요. 면식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의 말을 들은 호동은 쪽지를 처음 읽었을 때의 솔직한 본인 생각을 꺼냈다.

“난 그게 우리한테 하는 소리인 줄 알았어. 우리는 이 사람들을 다 알고 있는 데다, 결코 좋은 인연으로 엮인 건 아니잖나.”

“그쵸. 완전 악연인 셈이죠.”

“근데 저들이 하나같이 우리를 기억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게 이상하다는 거지. 혹시 지들끼리 짜고 모른척하는 걸 수도 있나?”

호동의 말을 잠시 고려하던 병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여기가 어제 얘기했던 평행우주라거나, 그런 거면 정말 우릴 모를 수도 있어요. 자기네들끼리 아는 사이일 수도 있고요. 애초에 우리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게 없다 보니….”

뭐 하나 확언할 수 없는 현실에 병재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간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신동이 토론에 뛰어들었다.

“만약 이게 우리를 향한 메시지라면, 좀 안 맞는 점이 많지 않아요? 범인이야 일부러 우릴 모른 척 할 수도 있지만, 다 같이 그럴 이유는 없잖아요. 저들이 다 공범이고 우리한테 복수하려 하는 거라면, 우릴 먼저 해하려고 하지 서로를 죽이는 게 더 이상하죠. 정말로 우릴 모른다면 우리에게 저런 메시지를 남길 이유는 더더욱 없고.”

신동의 지적에 나머지 탈출러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긍정하던 동현 역시 현 상황에 대한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누구한테 한 말이든, 내가 봤을 땐 이 사람 아주 작정한 거 같아. 어차피 고립되어 도망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경찰도 못 오겠다 싶으니까 이때다, 하고….”

“확실히, 복수한답시고 작정하고 칼을 갈았다는 느낌을 주긴 해요. 아무리 그래도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라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훈이 동의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지만, 충분히 그럴듯한 얘기였다. 애초에 저런 메시지까지 남길 자가 보통 살인범일 리가 없었다. 문제는, 이 살인산장에 갇힌 빌런들이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라서, 범인이 누굴지 감도 안 잡힌다는 것.

“누구 짓일까요? 설마 구경도는 아니겠지.”

병재가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온몸이 젖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은 형의 옆을 지키고 있는 구경도가 눈에 들어왔다. 쏟아지는 폭우에 구경만의 시신을 테라스로 옮긴 후 다른 사람들이 실내로 피신한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산장에 등을 돌리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런 뒷모습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지려다가도, 그가 벌인 짓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올랐다. 좀비로 만들어 팔아버린 그 많은 사람도 다 가족이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한 죄책감을 한 번이라도 느낀 적이 있을까.

“확실하게는 모르는 거지. 연기하는 걸 수도 있잖아.”

“만약 저 중 누군가에게 보내는 쪽지라면… 누굴까요? 구경형제? 그래서 둘 중 한명을 죽이고 나머지한테 저런 메시지를 남긴 건가? 그 둘에 대한 악감정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들키는 바람에 구경만을 죽여야 했을지도 모르지.”

“하….”

떠오르는 온갖 가능성에 머리가 복잡한 듯 병재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덕분에 조금 가라앉았던 까치집 머리가 다시 엉망이 되었지만,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다들 비슷한 심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뭐가 됐든 지금은 섣부른 결론을 내리긴 좀 어려울 것 같아. 단서가 더 필요한데…."

신동의 말에 동현은 커피 테이블에 펼쳐놓은 메시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글씨체라도 비교해봐야 하나? 왜, 그런 거 있잖아, 글씨체로 범인 잡아내는 거.”

“진짜 그래야 하나? 잉크가 많이 번진 게 좀 문제긴 한데….”

병재의 말대로, 비에 흠뻑 젖은 탓에 글자가 꽤 번져있어 정확한 비교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현재로서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정보는 글씨체가 꽤 정갈하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범인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던 것도 반듯한 글씨 덕분이었다. 악필이었다면 번진 글자를 암호처럼 해석해야 해서 꽤 시간을 잡아먹었을 터였다.

병재가 동현의 제안을 고려하고 있는 사이, 여태껏 조용하던 막내가 입을 열었다.

“근데 이거 방에 비치돼있는 메모지 아니에요?”

“아, 맞네! 똑같은 거 맞다!”

종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호동이 불쑥 끼어들었다. 다시 보니 확신했다. 방에서 나올 때 막내에게 메시지를 남겼던 그 메모지와 똑같다고.

“어? 그러네? 이거 방마다 있나 보다! 다른 방을 수색하면 뭔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종민의 말에 호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서가 나올 거란 보장은 없지만, 뭐라도 해봐야지. 문제는 저 사람들이 순순히 협조해주겠냐인데….”

“일단 3층―”

동이가 입을 열려던 찰나, 뒷마당으로 향하는 문이 벌컥, 거칠게 열리더니 구경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게 영락없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으나, 눈빛만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탈출러들이 잘 알고 있는 평소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감출 시도조차 없는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그가 거실에 앉아있는 탈출러들과 부엌에서 여유롭게 어슬렁거리는 빌런들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태평하게 아침 식사를 하는 오연범에서 멈추어 섰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구경도에도 오연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들고 있던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넘어가나? 니가 그렇고도 사람이가!”

어제저녁에 계수상이 죽었을 때는 만사 귀찮다는 태도를 내비치다 이제 와서 손가락질하는 게 내로남불이 따로 없었지만, 굳이 이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그냥 넘어가시죠?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오연범의 코앞으로 다가온 구경도가 순간 그를 때릴 듯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연범 또한 지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였으나 탈출러들의 걱정과는 달리, 구경도는 주춤거리며 한걸음 물러섰다. 막상 머리를 맞댈 정도로 가까워지니, 얼마나 키 차이, 덩치 차이가 나는지 세삼 깨달은듯했다. 괜한 시비를 포기한 그는, 그 대신 주변을 빙 돌아보며 한명, 한명과 눈을 맞추었다.

“이 짓 한 새끼 잡으면, 내 가만 안 둔다. 지옥을 맛보게 해줄 테니 두고 봐라!”

경고의 말과 함께, 홱 돌아선 그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시야에서 사라졌다. 탈출러 몇몇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서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고, 나머지 빌런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몇초간 그들의 눈치를 살피면 동이가 낮은 목소리로 아까 하려던 제안을 다시 꺼냈다.

“일단… 3층 거실부터 살펴볼까요? 어제 찾은 열쇠로 계수상 방도 살펴봐야 하고.”

“그래, 그게 좋겠다.”

탈출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으로 향했다. 발코니로 향하는 3층 거실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내리는 비로 인해 흥건히 젖은 데크 위로 걸어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구경만이 추락한 장소가 보였다. 지금은 시신을 옮긴 데다 비에 핏자국까지 다 쓸려나간 상태였지만, 범인이 그를 밀친 자리를 특정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호동이 형, 구경만 발견하고 여기 올려다봤을 땐 아무도 못 봤다고 했죠?”

“그래. 소리 듣고 바로 달려 나갔는데, 그사이에 도망친 모양이야. 아무도 없었어. 조금 지나니까 박강인이랑 종민이랑 병재가 내다보더라.”

“여기 숨을 만한 곳은 없는데….”

동이가 주변을 살피는 사이, 병재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한 시간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저랑 종민이 형은 비명소리에 깼어요. 처음엔 상황 파악이 안 돼서 좀 우왕좌왕하다가 창문을 내다봤는데, 우리 방에선 딱히 보이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복도로 나왔는데 박강인이 뛰어나가길래 일단 따라갔죠. 그리고 테라스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구경만이 죽어있었어.”

종민이 낮은 목소리로 병재의 말을 대신 끝맺어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동이가 물었다.

“구경도는요?”

“구경도는 좀 더 있다가 나왔어. 소란스러워지니까 나온 거 같긴 한데 정확한 건 모르지 뭐.”

“한번 물어봐야겠네요. 구경만이 언제 방을 나섰는지, 그 외에 다른, 특이한 일이 있었는지 아냐고.”

구경도의 방을 힐끗 쳐다봤으나, 굳게 잠긴 문은 고요하기만 했다. 질문은 나중에 하는 게 좋겠지. 지금은 건드려봤자 제대로 된 답변을 얻지 못할 것 같았다.

“당시에 2층은 어땠어요?”

병재의 질문에는 동현이 답해주었다.

“우리도 비슷해. 소리에 놀라가지고 깼어. 방에서 나오는데 지훈이랑 마주쳤어. 얼굴이 완전 하얗게 질려있더라.”

“아니, 그건 형 때문이잖아요!”

“나? 나 때문이라고?”

동현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막내가 기가 찬다는 듯 어이없는 숨을 내쉬었다.

“저는 구경만이 그, 떨어지기 전에 깼어요. 호동이 형이 안 계시길래 어디 가셨나 하다가, 메모 발견하고 형 찾으러 가려고 했거든요? 근데 복도로 나오자마자 비명이랑 쿵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옆방에서도 막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동현이 형이 소리까지 지르는 거예요!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막 문 두드린 건데… 어휴.”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지 지훈이 헛웃음을 지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동이는 딱히 웃음을 참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거 동현이 형이 침대에서 떨어져서 그래. 이 형, 비명 듣고 놀라서 침대에서 굴러떨어졌어.”

동현은 민망한지 괜히 룸메이트를 끌어들였다.

“동이, 너도 지훈이가 막 문 두드리니까 놀랐잖아!”

“그건 형도 마찬가지잖아요.”

투닥거리는 겁쟁이 두 명을 보며 맏형 둘이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그래서 그렇게 시끄러웠던 거였어? 나랑 병재는 2층에도 무슨 일 일어난 줄 알았잖아.”

“느그들 밖에 나오는 데 오래 걸린 이유가 그거였나.”

평소와 같이 쓸데없는 얘기로 대화의 흐름이 바뀌자, 병재가 끼어들었다. 평소라면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것도 웃기고 즐거웠겠지만, 지금은 아직 할 일이 태산이었다.

“아무튼! 지훈아, 그럼 네 방에서 나오자마자 알아차린 특이점이나 수상한 사람 있어? 3층에서 막 뛰어 내려오던 사람이 있다던가?”

작은 소란은 금세 가라앉았고, 나머지 탈출러들의 시선 또한 막내에게로 쏠렸다.

“어… 아뇨? 솔직히 형들 걱정에 정신이 다 그쪽에 가 있어서 잘 모르겠어요. 시끄러워지니까 천마도령이랑 오연범도 방에서 나오긴 했는데, 다른 이상한 건 못 느꼈어요.”

그 말은 들은 동이가 다시 한번 3층을 둘러보았다.

“3층에서 뛰어 내려오던 사람이 없었다면, 범인은 구경만을 민 다음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숨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소란이 이니까 그때 아무것도 모른척하면서 다시 나왔을지도 몰라.”

“그럼… 구경도나 박강인일 확률이 높겠네요. 아무래도 2층 투숙객이라면, 밀자마자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3층보단 동선이 길어지니 시간이 빠듯할 거 같아요. 지훈이도 본 게 없다고 했고.”

브레인 둘이 추론을 마치자 유력한 용의자 두 명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추측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다행히 그들에게는 수색해야 하는 장소가 아직 더 남아있었다.

“그럼 계수상의 방으로 가볼까?”

여느 때처럼 앞장서는 종민을 따라 탈출러들은 2층으로 내려왔다. 204호에 전날 찾은 키를 넣고 돌리자,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들의 방보다 조금 작은 1인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가 더 작고 침대가 하나뿐이라는 사실 외에는 2인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탈출러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동현이 화장실을 기웃거리는 사이, 동이와 지훈은 옷장에 걸려있는 옷 주머니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구석에 놓여있던 계수상의 캐리어를 방 가운데로 끌고 온 맏형은 병재와 함께 짐을 살폈다. 가방에서 나온, 밑줄이 잔뜩 쳐진 이집트에 대한 책과 태양교의 교리와 영생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노트를 발견한 병재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놈을 선생이라고. 내가 지금 당장 세계 지리 선생이 되더라도 계수작보다는 낫겠다.”

“계수상 아니었나?”

“네, 맞아요. 일부러 그런 거예요. 계수작이 찰떡이라.”

빌런을 흉보고 있는 병재 뒤에서는 종민이 한창 수색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침대 쪽을 택한 그는, 침대 옆의 작은 서랍장을 열어보기도 하고, 베개를 뒤집어 까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오는 단서는 없었다. 베개 커버를 내려놓고 침대를 살피려 일단 이불을 한번 크게 팡, 털어보는데.

팔랑팔랑.

노란 종이가 떨어졌다. 구경만의 옆에서 발견된 메모지와 동일했다. 

“어? 여깄다!”

“형, 뭐 찾았어요?”

책을 내려놓은 병재가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종민 옆으로 다가왔다. 형의 어깨너머로 그가 적힌 글자를 소리 내 읽었다.

어서 와 살인산장에. 준비한 환영파티는 어땠어?

낭독한 짧은 문장에 나머지 탈출러들의 시선이 쏠렸다. 

“뭐야 그게?”

“종민이 형이 찾았어요. 같은 범인이 남긴 메시지 같아요.”

동이가 다가오자, 종민은 그와 병재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이전에 발견한 메모지와는 달리 구김도, 번짐도 없는 덕분에 범인의 글씨체를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다만, 한획도 흐트러진 게 없는, 반듯하고 특색 없는 글씨체 때문에 탈출러들은 금세 난처해졌다.

“이거 일부러 이렇게 쓴 건가? 본래 글씨체 감추려고? 거의 프린트한 수준인데?”

“아니면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을 수도 있죠.”

“아, 그렇네….”

브레인 둘이 추측하는 걸 듣고 있던 종민이 본인의 생각을 얹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쓰려다 몇 번 실패하지 않았을까? 한 번에 성공하는 건 어려울 거 같은데. 다른 방 쓰레기통을 뒤져봐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저 사람들이 그걸 허락 안 해줄 거 같다는 거죠….”

나머지 탈출러들이 빌런들을 설득할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 다시 한번 종이를 찬찬히 뜯어보던 신동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 살인 순서대로 메시지를 읽어보면… ‘어서 와, 살인산장에. 준비한 환영파티는 어땠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오랜만의 재회를 위해 열심히 준비했거든.’라는 거잖아.”

소름이 돋았다. 범인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복수가 됐든 뭐가 됐든,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이 산장 전체를 무대로, 그 안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을 무대 위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거… 왠지 보통 일이 아닐 거 같은데.”

“또 살인이 일어나면 어떡하죠?”

막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맏형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긴. 그전에 범인 잡아서 어떻게든 막아야지. 여기서 더 나올 건 없나?”

그 뒤로도 계속해서 계수상의 방을 뒤졌으나, 발견된 단서는 없었다. 탈출러들은 슬슬 아침도 먹을 겸, 다른 투숙객들을 찾아 질문과 협조도 구할 겸 1층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 잠깐만.”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병재가 우뚝 자리에 멈추어 섰다. 탈출러들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 메모를 범인이 남겼다면, 계수상의 방에 들어왔다는 뜻이잖아요? 어제저녁 이후에? 근데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왔을까요? 계수상이 가지고 있던 열쇠는 우리가 챙겼고,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산장 주인뿐일 텐데….”

말을 끝맺지 않아도 시사하는 바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같은 결론에 도달한 탈출러들의 표정이 한결 심각해졌다.

“박강인이 범인이란 말이가?”

낮은 목소리로 묻는 큰형의 질문에, 병재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뒷받침할 물증이 없어서 단정 짓기는 이르지만, 현재로서 발견된 정황 근거만으로는 그럴 확률이 높죠. 와인도 박강인꺼고, 방도 3층에 있어서 구경만을 밀기 비교적 수월하고.”

“어쨌든 증거를 찾아야 한다 이거지?”

벌써 여기저기 쑤시고 돌아다닐 종민의 모습에 생각이 아찔해졌는지, 병재가 서둘러 그를 말렸다.

“근데, 종민이 형, 아직은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의심하는 티 내지 말고.”

“응? 왜?”

“진짜 박강인이 맞았다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고, 혹여나 박강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의심받는 거에 대해 불쾌하다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잖아요.”

“맞아.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보통이 아니잖아요.”

옆에서 막내가 한마디를 보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알았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라는 거지?”

“네.”

“그러니까 제발 조심 좀 해라.”

다시 한번 언행을 조심할 것을 당부한 탈출러들은 1층으로 내려왔다. 그새 방으로 돌아갔는지 장기두와 오연범은 보이지 않았지만, 박강인은 거실을 서성거리며 소파 쿠션을 하나하나 뒤집고 있었다. 평소처럼 행동하기로 약속한 지 불과 1분도 안 지났지만, 특이한 행동에 저절로 시선이 그에게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청소를 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뭐 하는 거지?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들을 발견한 박강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내 마스터키를 본 적 있나?”

“어? 잊어버렸어요? 어제 창고 문 열 때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동이가 되묻는 동안에도 박강인은 여전히 소파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다. 가면 때문에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소파 틈새를 살피는 몸짓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사라졌다. 카운터에 늘 보관해두는 곳이 있는데, 밤사이 누가 가져간 걸지도 모르지.”

탈출러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박강인이 사실을 말한 거라면, 밤중에, 혹은 새벽에 몰래 내려온 범인이 열쇠를 슬쩍해 계수상의 방에 들어가 쪽지를 남겨둔 셈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박강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가정하에 도달한 결론일 뿐, 여전히 박강인 자신이 직접 메시지를 남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혹시 어디 떨어트린 것일 수도 있으니, 발견하면 알려주시오.”

“예, 그럴게요.”

부탁과 함께 열쇠를 찾으러 웰컴 로비로 향하는 박강인의 등에 대고 종민이 대답했다. 그가 사라진 걸 확인한 탈출러들은 간단하게 뭐라도 먹으며 상황정리를 할 겸 부엌으로 향했다. 

“와, 이제 10시가 돼가네.” 

종민의 말대로 아침 일찍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녀서 그런지, 기상한 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음에도 시곗바늘은 이제야 오전 9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왠지 벌써 긴 하루가 될 거 같아요.”

먹을 것을 찾아 냉장고를 열어보며 동현이 동의했다. 어제저녁의 독살사건이 뇌리에 남아있어서 그런지, 그들은 혹시 모르니 밀봉되어 있거나 바로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섭취하기로 했다. 동현이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는 사이, 호동은 찬장에서 커피를 발견했다.

“오늘 머리 쓸 일도 많을 거 같은데 커피 한 잔씩 할까?”

“네, 좋아요.”

“무슨 커피에요?”

“스틱커피인데 종류는 다양하게 있네. 블랙도 있고 믹스커피도 있다. 냉장고에 있는 우유 넣어서 라떼 만들어 먹어도 되고.”

“그럼 전 그냥 블랙, 아메리카노로 먹을래요. 아아가 좋은데 얼음 없나?”

“얼음? 냉동실 열어볼까? 와, 얼음 있어!”

“앗싸! 그럼 난 아아로 먹어야지.”

“난 아이스 믹스커피! 아아도 좋은데 비 오니까 달달한 게 땡겨.”

“와, 아이스 믹스커피 맛있겠다. 저도 종민이 형이랑 똑같은 거로 해주세요.”

“토스트 버터에 구울 건데 싫은 사람 없죠?”

“완전 좋지!”

“형들! 계란 후라이 할까요, 스크램블 할까요?”

“난 둘 다 좋은데, 둘 다 해서 나눠먹으면 안돼?”

“그럼 동이 형이 프라이하실래요? 제가 스크램블 할게요.”

왁자지껄하게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주방에도 활기가 돌았다. 어제저녁을 대충 컵라면 하나로 때운 뒤라 배가 꽤 고파서 그런지 준비과정에도 자연스레 텐션이 높아졌다. 각자 취향 따라 커피 스틱을 골라놓고 커피포트에 물을 한가득 담아 끓인다. 프라이팬을 하나씩 집어 들고 옹기종기 가스레인지에 들러붙어 계란 후라이와 에그 스크램블 하고, 토스트도 굽는다. 티스푼을 휘휘 저어 뜨거운 물에 커피 가루를 녹이고, 냉동실에서 갓 꺼낸 차가운 얼음을 넣는다. 뜨거운 커피를 만난 얼음이 파사삭 금이 가는 소리도 즐겁게만 느껴진다. 향긋한 커피 냄새와 고소한 버터 향에 취할 때쯤이면, 요리가 하나씩 완성된다.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고 딸기잼과 땅콩잼까지 찾아내서 식탁 위에 올리니, 순식간에 간단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아침 식사가 완성되었다.

“이제야 좀 살 거 같다.”

다른 음식에 손을 대기도 전에 차가운 커피부터 쭈욱 들이킨 병재가 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시중에서 흔히 파는 인스턴트커피였지만, 그래도 카페인이 도니 수면 부족과 피로로 둔탁해진 머리가 조금 맑아진 느낌이었다. 

“그니까요.”

토스트에 잼을 쓱쓱 바르며 막내가 동의했다.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은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먹게 된다, 안 그러나? 24시간도 안 돼서 사람 두 명이 죽었는데. 그런데도 먹고 살겠다고.”

허희 섞인 웃음을 내뱉으며 호동이 커피잔을 들었다. 손으로 스며드는 온기가 매서운 폭우 속의 작은 위안이 되었다. 컵에 입을 대자, 잔잔한 커피 향과 미묘한 수영장 소독약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잠깐, 소독약 냄새?

호동은 코를 살짝 찡그렸다. 이미 목구멍을 부드럽게 타고넘어 간 커피를 다시 맛보려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도 맛이 이상한 건지 알 수 없어서,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야들아, 니들 커피에선 무슨 냄새 안 나나? 커피가 오래됐는지, 소독약 냄새 비스무리한게―” 

그러나 호동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쿨럭쿨럭, 거친 기침과 함께 붉은 피를 토해냈다.

“호동이 형!”

놀란 동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이미 늦은 터였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치 전날 저녁이 다시 재생된 것처럼, 호동이 놓친 커피잔이 날카로운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컵이 깨지면서 잔 아래에 숨겨져 있던 쪽지가 바닥에 뒹굴었지만, 이를 신경 쓸 겨를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쓰러진 호동 옆으로 몰려든 동생들은 그를 흔들며 의식을 되찾으려고 애를 썼다.

“호동이 형!”

“형, 정신 차려요!”

“제발 눈 좀 떠봐요, 네?”

미동 없는 호동 주변은 어느새 밤색 액체로 얼룩져있었다. 바닥을 따라 흐르는 커피가 노란 메모지를 갈색으로 적시자, 접혀있던 종이가 서서히 펴지며 범인의 세 번째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혹여나 기대에 못 미쳤더라도 괜찮아. 본게임은 이제부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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