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인의 수기

도위소병

* 정마대전이 끝나고 수십 년 후

* 모브 시점 도소

 

오시 쯤 객잔을 찾으니 사람들이 한데 뭉쳐 시끌시끌 한 것이 다투기라도 하나 싶었다. 그러나 깨지고 부딪치는 소리 하나 없이 목소리만 우렁우렁하니, 싸움이 아니라 재미있는 화제라도 있겠거니 했다.

 

끼어들어 어울리기에는 막 산길을 넘어온 몸이 곤해 구석 자리를 찾았다. 맨 끝자리에는 소란에 휘말리기 싫었는지 조용히 식사하는 사내 둘이 있었다.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로 보이건만. 소문이나 영웅담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초연해 보이는 분위기가 참으로 묘했다.

 

“소협들께선 이야기엔 흥미가 없나보오?”

 

하고 말을 건 것은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행색은 단촐하나 정갈하고 외양도 번듯한 것이 범부같지는 않았다.

 

짙은 검미를 가진 헌앙한 사내가 해괴한 표정을 지어 의아하던 찰나, 언뜻 요사스러운 느낌을 풍기던 눈물점이 있는 사내가 제법 붙임성 좋은 투로 답했다.

 

“아무리 즐거운 이야기가 있다 한들 일단 주린 배부터 채우고 볼 일 아니겠소.”

 

그렇게 말한 것 치고 그들은 서로 찬을 뺏는 것인지 주는 것인지, 티격대는 것인지 정다운 것인지 모르게 식사를 마치고는 이야기를 듣는 시늉도 않고 떠나버렸다.

 

나는 잠시 객잔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조금이나마 귀동냥을 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이름이 바로 남궁세가의 태상가주와 녹림왕이었다. 그들이 중원을 유람하며 지금은 이 마을에 행차해 있다는 이야기였다.

 

화산검존을 위시한 천우맹의 척마영웅 일원. 명성이 자자한 고수들이지만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도 유명하다.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서 자녀를 셋이나 봤다는 사실로도 말이다.

 

일각에서는 금슬이 아주 좋아 보기 민망할 정도라는 소문이 전해오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매일같이 다투니 원수도 그보다는 정겹겠다는 소문이 전해오니 참으로 기묘한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그런 유명인들이니 관심이 쏟아질 수야 있겠다만. 그 점을 고려해도 열기가 지나치게 뜨거운 감이 있어 결국 본격적으로 호사가들 사이에 끼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글쎄, 이 친구 말이 맞다니까! 우리 형님도 녹림왕을 지척에서 뵈었는데, 품 넓은 남자 복식을 하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 있지만 사실 여인이었다 하더라고!”

 

이미 수차례 들어본 이야기였다. 현 남궁세가의 가주가 태어났을 때부터 돌았던 소문 아니겠는가. 남성의 몸으로 후사를 봤다는 것보다는 사실 남장한 여인이었다더라 하는 것이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지지 않겠나.

 

“자네 형님이라면 제법 실력있는 무인이잖은가. 무인들은 기감이 발달해 변장쯤은 간파할 수 있다더니!”

 

혹자가 흥분해 맞장구를 쳤으나 나는 김이 샜다. 녹림왕이 남성이면 어떻고 또 여성이면 어떻단 말인가? 시간낭비로 여겨져 발을 발을 빼려는데 제법 구미가 당기는 말이 나왔다.

 

“아무튼 그 녹림왕이 지금 후계를 찾기 위해 유람 중이라지 않나. 눈에 잘 들면 혹시 모르는 일이지.”

“녹림왕 자리는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묻자, 노장 하나가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남궁 태상가주도 가주 자리를 내어놓은지 수 년이 지났는데, 녹림왕은 여지껏 세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허나 그렇대도 녹림도들이 있지 않소.”

“녹림왕께서는 천우맹의 군사였잖은가. 그만큼 신중한게지.”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했다.

 

 

*

 

 

아무래도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마을에 머무르며 시전에 나갔다가 녹림왕을 만났다. 과연 절정고수라, 아마 칠순을 넘겼을 텐데 아무리 높게 봐야 지천명 쯤으로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자네가 ○○○인가?”

 

접선을 한들거리며 요요히 웃는 모습이 아무리 남장을 한들 영락없는 여인이었다. 밝힌적 없는 내 이름까지 이미 알던데 도대체 언제부터 나를 눈여겨 보았던 것일까.

 

 

*

 

 

“녹림이 강자존이라 한들 어찌 무위만으로 한 문파를 이끌 수 있겠는가. 나정도 되면 사람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지. 나는 자네의 그릇을 제법 높게 평가하네.”

 

녹림왕에게 불려가 대접받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심장이 벌렁거리고 너무나 황송했다. 녹림왕께서도 내가 긴장한 것을 헤아렸는지 어르듯 말을 덧붙였다.

 

“자네의 무위가 현재로서는 다소 아쉬운 것도 사실이야. 허나 내게 배움을 받으면 대성할 걸세. 내 무학이 자네에게 잘 맞을 것 같군.”

 

그 순간 섬짓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풍채가 좋은 사내가 들어서서는 이리 말하는 것이 아닌가.

 

“녹림왕. 우리 아이들에게도 무학을 전수하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애들이 녹림을 맡기기에는 너무 심약하니 어쩌겠습니까. 그릇도 적절하지 않다고 수차례 말씀드렸지요. 함부로 가르쳤다간 아이들의 앞길을 망칠 것이 뻔한데 어찌 가르치겠습니까.”

 

남궁의 태상가주와 녹림왕은 삭막하기 그지없게 말다툼을 하였으나, 내 보기에 말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거리가 가깝고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으니 사이가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더라.

 

눈앞에서 보고나서야 소문이 어찌된 일인지 알았다.

 

여하튼 이것은 어쩌면 천재일우의 기회일 수 있다. 고심 끝에 녹림왕에게 배움을 전수받기로 결심하니 이리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잘 생각했네. 헌데 증명이 필요해. 시험을 통과해야 하니, 시험 받을 준비부터 해야겠지. 여기 내가 적어준 것들을 구해오게.”

 

목록을 보아하니 하나같이 값비싼 물건들이 아닌가. 참으로 민망하지만 내가 가진 형편에 부담스럽다 솔직히 털어놓으니, 녹림왕께서 다음과 같은 말로 나를 안심시켰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게. 얼마가 들었는지 알려주면 내가 다 셈해줄 테니. 다만 지금은 나도 객지에 나와있는 형편이라 녹채로 오면 주겠네.”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사내대장부로서 이정도 투자에 어찌 겁을 먹냐’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어음까지 써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

 

 

녹림왕께서 명한 물건들을 구하는데 웬 사내가 불쑥 끼어들어 참견했다.

 

“여행자인줄 알았소만 귀물을 쓸어담고 계시군?”

 

가만 보니 구면이라 처음 이 마을에 당도했을 때 객잔에서 식사를 하던 눈물점이 있는 사내였다.

 

“그때 그 소협이구려. 오늘은 그 풍채 좋던 일행이 안 보이오?”

 

녹림왕에 대한 것을 함부로 털어놓을 수 없어 말을 돌리니 사내도 순순히 응했다.

 

“부를 이들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소. 헌데 그걸 그 가격에 사는 건 너무 낭비가 아닌가 싶소만?”

 

그 말을 들은 가게 주인장이 펄쩍 뛰었으나, 사내의 언변이 얼마나 좋고 지식은 또 얼마나 풍부하던지. 덕분에 처음 셈하려던 가격에서 절반이나 깎은 값에 물건을 살 수 있었다.

 

“도움을 받았소. 이건 보답이니 받아주시오.”

 

마침 날이 덥기도 하고 제법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해 접선을 선물하자 사내가 샐쭉 웃었다. 그 얼굴이 은근히 요염해 잠시 얼타는 사이, 부채를 받아간 사내가 이리 말했다.

 

“선물을 받았으니 내 좋은 상회를 추천해드리리다. 보아하니 사야 할 물건이 아직 많아 보이니.”

 

사내가 권한 상회로 가니 과연 품질도 좋고 가격도 양심적이라.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모든 물건을 구하는데 시일이 걸린다하니, 녹림왕께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이틀을 보냈을까. 녹림왕께서 급히 날 찾으며 자칫하다간 시험을 받을 시기를 놓칠 우려가 있으니, 일단 구한 물건부터 전하라 연락해왔다.

그에 물건을 챙겨 녹림왕을 뵈러 가던 도중 또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또 뵙는구려 소협. 부를 사람이 있다더니 일이 해결됐나보오?”

 

굳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니 일행과는 다르게 참으로 과묵한 이였다. 고고하게 구는 듯한 면모가 있으나 얼굴값을 한다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말 없는 이와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민망해 자리를 뜨려는데 사내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의심할 줄 모르면 큰 손해를 보게 될걸세.”

 

그 말이 뜬금없어 의아했으나, 눈물점이 있는 사내에게 내가 상인에게 호구당할 뻔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겠거니 싶었다.

 

 

*

 

 

겨우 사흘만에 다시 뵙는 것이건만, 녹림왕께서는 그간 무슨 우환이라도 있었는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여지껏 겨우 이걸 구했나!”

 

호통을 들으니 억울한 마음이 샘솟아 변명했다.

 

“나머지 물건은 구하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

“그럼 빨리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았어야지!”

 

죄인이라도 된 양 기죽어 있던 때였다. 바깥이 소란한가 싶더니 한무더기의 사람들이 뛰어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혼비백산해 무기를 쥐던 와중, 괴한의 외침을 듣고는 아연해졌다.

 

“이 치졸한 사기꾼 같으니라고! 후계는 무슨 빌어먹을 놈의 후계! 내 돈 내놓지 못해!”

“내 피같은 돈을 떼먹고도 똑같은 짓을 하고 돌아다녀! 꼬리가 기니 잡히지! 내가 있는 곳에도 너희 소문이 파다하더라!”

 

괴한들이 하는 말이 하나같이 같은 내용이라, 설마 싶어 녹림왕을 보니 그 얼굴이 낭패감에 젖어 있었다.

 

“자네들이 자격이 없던걸 어딜 내 탓을 하나!”

 

소리치지만, 목소리에 떨림이 숨겨지지 않으니 내 마음속에도 그제야 의심이 싹텄다.

 

“젠장! 텄군! 대체 어디서 꼬리가 밟힌거지?”

 

남궁의 태상가주, 아니, 그런 연기를 하던 사기꾼이 검을 휘두르니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 와중 녹림왕 행세를 하던 사기꾼이 내가 가져온 재물을 쓸어담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달려들어 막으니 매서운 공격이 날아든다. 마음만 급했던 터라 미처 막을 겨를이 없어 부상을 각오했는데, 어디선가 선기가 날아들어 공격을 파훼했다.

누가 도운 것인지 확인할 정신도 없이 내가 들고온 재물을 필사적으로 사수했다.

 

나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무위는 고만고만하고 사기꾼들은 나름 실력이 있어 난전이 되었는데, 어디선가 절묘하게 도움이 날아드니 다치는 이 없이 사기꾼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

 

 

뒤늦게 상회에 물건 구매를 철회할 수 있는지 문의하니 수수료만 물고 큰 손해 보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자니 상회주가 껄껄 웃으며 귀띔하기를,

 

“그래도 악재 속에서 운이 좋았군요. 내 옛날 사파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 매화도를 이용하며 그분과 연이 닿았었지요. 그분께서 당신을 소개하며 발주를 최대한 늦추라고 하시니, 요 며칠 새 마을에 떠도는 소문과 연관이 있겠다 싶었지요.”

“지금 매화도라고 하셨소?”

“예. 그분이 당시 매화도주셨거든요.”

 

그 시절 매화도주를 맡았던 이라면 분명…….

나는 뒤늦게 객잔에서 식사하던 사내들이 진짜 남궁의 태상가주와 녹림왕인줄을 깨닫고 기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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