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루시] 시선이 닿는 곳

9,639.

* IF 아스루시, 아슷 승천 루트.


첫날 밤, 쾌락에 정신줄을 몇 번이고 놓았던 그날 밤, 흐려지는 시야에서 루시안은 아스타리온의 눈동자를 보았다. 적안은 한계를 넘어서까지 치솟는 쾌락에 허덕이는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었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었다. 저 눈은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루시안은 그가 자신과의 섹스를 즐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는 괜찮았다.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애정 어린 관심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물음표였다. 일단 자신은 그의 애무를 즐기고 있었다. 어차피 가볍게 즐기러 온 거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자신은 즐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루시안은 손목을 비틀며 그의 목을 안을 뻔한 걸 참았다. 그래, 자존심이 많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어디를 보고 있는 거야?"

그의 섹스 스킬이 줄었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루시안의 녹안이 드디어 아스타리온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아스타리온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명령조로 물었다.

"아무 것도 안 보고 있었어."

"명령으로 해주길 바라?"

"명령으로 해보든가."

"똑바로 대답해, 배우자."

이건 명령이다. 루시안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입술에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아무 것도 안 보고 있었어."

"...대체 뭐가 문제야, 내 보물? 내가 해주는 거 좋아하잖아?"

"그건 널 사랑할 때나 그런 거지."

"지금 날 안 사랑한다고?"

"아니. 사랑해.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사랑하지, 아스타리온."

루시안의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굳은 얼굴로 인상만 쓰고 있던 아스타리온은 다시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자기도 참, 거짓말은. 울 정도로 좋아하면서." 거짓말일 거 같으면 명령으로 물어보지 그래? 내가 정말로 네가 해주는 걸 좋아하는지. 루시안은 입술을 씰룩였다. 진실을 대면하기 싫어서 외면하는 거야? 힘이 그렇게 넘치는데도 겁쟁이네, 넌. 루시안은 그의 겁먹은 눈동자를 기억한다. 카자도르가 오면 죽여주겠다는 말에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그게 그렇게 쉬울 거 같냐며 역정을 내던 겁쟁이를, 그는 기억한다. 그리고 그 겁쟁이를 자신이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도, 그는 기억한다. 아스타리온의 손끝이 그의 둔부를 어루만졌다. 다시금 초점이 없어진 녹안이 허공을 향한다. 아무 것도 담지 않은 녹안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탁한 색으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내뱉는 신음 소리는 가냘프지만 달콤하지는 않았고 넘치는 자극을 주체하지 못하고 움찔거리는 손가락과 발가락은 아무 것도 움켜잡지 않았다. 녹안과 똑같이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던 적안에 진한 색깔이 돌아왔다.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밑에서 몸을 달싹이며 흐느끼고 있는 루시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장난스럽게 시선을 맞춰오던 그의 녹안이 그리워졌다. "날 봐."라고 그가 속삭였다. 그의 속삭임에 온기라고는 한 방울도 느낄 수 없는 녹안이 차갑게 적안을 응시했다.

자신의 배우자로서, 아스타리온은 그에게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해줬다고 생각했다. 달콤한 타락부터 시작해서 퇴색한 권력의 맛까지, 그런데 제 배우자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건지, 그는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스폰들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의 시중을 들라고 보낸 스폰들이 다 목만 잘려서 바닥 위에 나뒹굴고 있었을 때 아스타리온은 그저 그의 변덕이겠거니 하고 용서해주었다. 하지만 그건 변덕이 아니었다. 그는 아스타리온이 그에게 시종을 그만 보낼 때까지 그 짓을 반복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교성을 지르다가 지쳐 쓰러진 루시안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며 아스타리온은 대체 어떻게 해야 그의 불만이 잦아들까 고민했다.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전부 그에게 줘봐야 할까? 그럼 그중 하나쯤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면 지금까지 만들었던 스폰들을 다 죽여야 할까? 그러면 그가 만족할까? 아스타리온은 무표정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사랑해." 아무런 울림도 느껴지지 않는 문장이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고 사라진다. 그래,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아스타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폰이야 다시 만들면 되니까.

스폰들은 그의 손에 저항 한번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모든 스폰들을 죽이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다시 방에 찾아온 아스타리온은 미소와 함께 제 배우자를 불렀다. "내 보물, 우리 군대는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걸로 하자. 이번에는 네 취향도 섞어서." 영광인 줄 알아, 라고 말하려던 아스타리온의 입술이 멈췄다. 그의 시선은 천천히 방 전체를 훑었다. 침대에 널부러져 있을 줄 알았던 루시안은 방 안에 없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거냐고 물으며 아스타리온은 복도로 걸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복도에도 없었고 응접실에도 없었고 부엌에도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지친 얼굴로 그에게 당장 내 앞으로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루시안?"

하지만 그는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야 그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아차린 아스타리온은 처음에는 인정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머리에 그 빌어먹을 올챙이가 또 박힌 건 아닐 거 아냐? 똑같은 명령을 몇 번을 내렸지만 결과는 같았다. 궁전 안을 돌아다니며 5번 정도 더 명령을 내리고 나서야 아스타리온은 인정했다. 어떤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예전의 아스타리온이 카자도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처럼. 사실을 인정하자 아스타리온의 속이 차갑게 불타올랐다. 난 네게 최상의 것들만 품에 안겨주려고 노력했는데 네가 내게 준 건 고작 이거라니, 아무래도 그에게는 교육이 필요한 거 같다. 아스타리온은 창백한 시체들만이 남은 궁전을 돌아보며 다시 돌아왔 때는 그를 자신의 품안에 가두겠다고 다짐했다. 내 반려자가 영원히 내 품에 안겨서 나만 볼 수 있도록, 영원히, 그러면 언젠가는 내 사랑도 그것을 영광으로 알겠지.

"숨바꼭질이라니. 자기가 하고 싶다면 어울려줘야겠지, 내 사랑스러운 반려자의 귀여운 앙탈이니."


"어디를 보고 있어?"

"아무 것도 안 보고 있었어."

할신의 도움으로 아스타리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후, 루시안은 언더다크를 떠돌면서 살고 있었다. 할신은 갈 곳이 없다면 자신의 거처로 와서 지내도 된다고 말해줬지만 루시안은 부드럽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할신에게는 그가 지켜야 할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루시안은 약점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여유로워진다면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그의 볼에 짧은 입맞춤을 맞춘 후 루시안은 그 누구한테도 행적을 알리지 않고 언더다크로 떠났다. 그는 쭉 혼자서 지낼 생각이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골목에서 사냥감의 피를 쪽쪽 빨아마시며 가끔씩은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런 삶, 그는 나름 이런 생활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아이가 생긴 건 계획 외의 일이었다. 그는 그저 아이를 공격하던 범죄자의 목을 물어뜯은 것뿐이었고 죽을 뻔했던 아이는 비척비척 일어나 말없이 떠나는 그의 뒤를 쫓아왔다. 널 지켜주려고 그놈을 공격한 게 아니라는 말에 아이는 알고 있다고 말했다. 루시안은 자신을 따라오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그는 곱슬거리는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은발이네." "염색할까?" "아니. 그냥 내버려둬." 아이는 곱슬거리는 은발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후로 루시안은 그 아이와 함께 지냈다. 아이는 루시안이 자신을 버리고 갈까봐 두려웠던 건지 가끔씩 그에게 자신의 하얀 목을 들이밀며 자신의 피를 마셔도 좋다고 말했지만 루시안은 그의 피에 손을 대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자란 아이라서 그런지 아이는 습득력이 빨랐다. 그는 루시안의 옆에서 그림자에 숨어드는 법을 익혔으며 루시안이 자신의 희생양을 처리하면 그 희생양의 몸에서 먹을 것을 털어냈다. 물론 시체에 먹을 것이 없는 날에는 불평 하나 없이 굶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루시안은 시체에 먹을 것이 없는 날이면 아이를 위해 따로 먹을 것을 구해오고는 했다. 루시안의 대가 없는 호의에 아이는 천천히 경계심을 풀었다. 그리고 아이는 언젠가부터는 루시안이 자고 있지 않아도 눈을 붙이고는 했다.

"아무 것도 안 보고 있었다고?"

아이는 루시안의 시선의 끝을 자신의 시선으로 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시안은 아이의 곱슬거리는 은발을 멍하니 응시했다. 나는 아직도 아스타리온을 사랑하는가? 여전히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보니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건 맞는 거 같다. 그리고 아이의 은발을 바라보며 이렇게 쓸데없는 감정에 젖는 모습도 그렇고. 루시안은 아이의 은발에 손을 뻗었다. 검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자신의 머리에 느껴지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루시안을 돌아보았다.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아이도 아무 말없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좋네."

"뭐가?"

"누군가 이렇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거."

다른 건 모르겠지만 자신의 손을 맞잡으며 이것만큼은 좋다고 고백하던 아스타리온이 머릿속에 떠올라버렸다. 루시안은 아이의 머리카락을 계속 매만졌다. 손가락 사이로 헝클어지는 은색 머리카락은 부드럽지 않았다. 처음으로 루시안은 아이에 대해 물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는 물음에 아이는 어물쩡거리다가도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혼자였다고 말했다. 아이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왜 여기에 있냐고.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당신이라면 언더다크에서 떠나 살 수도 있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언더다크가 싫냐는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좋아. 좋아서 여기에 있는 거야."

"...."

"하지만 네가 여기가 싫다면 널 다른 곳에 보내줄 수는 있지."

"당신은 안 오고?"

"난 여기가 좋다니까."

"그럼 나도 안 가."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는데? 내게 이런 변덕이 찾아오는 건 흔치 않아. 루시안의 말에도 아이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이는 주먹을 꽉 쥔 채 당신이 있는 곳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본 지 몇 달이나 됐다고, 기가 차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루시안은 아이에게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았다. 아이는 루시안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그럼 당신은 나도 좋아하냐고 물었다. 계속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아이의 눈동자에서 루시안은 누군가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글쎄."

"...."

"뭐, 더 같이 있다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지도 모르지. 네가 변하지만 않는다면."

지금 좋아하냐고요, 날. 아이는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대답에도 아이는 '아니'라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안의 옆에 더 붙어 앉았다. 루시안은 자신의 몸에 기대오는 아이를 가만히 받으며, 지금 자기가 그 일을 후회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난 지금 후회하고 있나? 몇 번을 봐온 애원하는 눈동자, 루시안은 그 눈동자 속에 두려움과 허기가 맴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길 바랐다. 그는 그가 더 이상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좋아하는 햇빛을 마음껏 즐기며 살길 바랐다. 마음 속에 움찔거리고 있던 위화감은 잦아들지 않고 잔물결처럼 계속 그의 마음을 쳐댔다. 한순간의 선택이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납득할 수 있는, 그렇기에 마음이 찢어질 거 같은 선택이었다. 루시안은 고개를 숙였다. '아- 난 후회하고 있구나'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절대로 이 선택을 하지 않겠구나.

"우, 울어?"

"누가."

아이는 당황한 듯 몸을 뒤로 빼더니 주섬주섬 자신의 소매를 뒤졌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낡은 헝겊이 어색하게 루시안의 눈가 밑을 닦았다. "나 위로해본 적 없어." 아이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루시안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안은 아이에게 자신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 너한테 바라는 거 없어. 누구한테 위로받고 싶은 것도 아니고." "정말로?"

'자기, 진심이야?'

진심이야. 그렇지만 사실 죽고 싶지도 않아. 루시안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처음 흘려본 눈물은 어색하기만 했다.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루시안은 아이가 말없이 자신의 눈물을 헝겊으로 훔쳐줄 때까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정말이야. 하지만 사실 위로받고 싶기도 해. 황제가 했던 말대로, 자신은 구제불능의 모순덩어리다. 눈물은 딱 몇 방울이었다. 루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의 표정도 밝아졌다. 루시안은 그 아이를 보면서 가끔은 아스타리온의 생각을 했고 가끔은 예나의 생각을 했다. 어느날 그는 아이의 은발을 쓰다듬으며 "염색할래?"라고 물었고 아이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염색약을 가져왔다. 그건 머리를 염색하는 약이 아니라 옷을 염색하는 약이라고 알려주자 아이는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도 알고 있었다고 우겼다. 거짓말. 아이의 뻔한 거짓말에 루시안은 피식 웃었다. 그는 아이를 데리고 염색약을 사러갔다. 어떤 색으로 염색하고 싶냐고 묻자 아이는 은발만 아니면 다 괜찮다고 말했다.

"왜?"

"내가 은발이면 네가 더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아이의 눈은 순진하면서도 예리하다. 그렇게 티났냐고 묻는 루시안 대신 아이는 선반에서 검은색 염색약을 꺼내들었다. 검은색이 좋냐니까 당신의 머리색이라서 좋단다. "누가 보면 가족인 줄 알겠네." 루시안의 말에 아이는 잠깐 정적했다가 미적거리며 말한다. "난 좋은데, 가족."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아이는 손가락을 꼬며 시선을 회피한다.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고...." 싫은 건 아니라는 말에 아이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밝아진다. "내가 가족은 잘 몰라서."

"왜? 너도 고아였어?"

"아니. 근데 우리 가족은 서로 죽이려고 들었었거든."

그가 바알스폰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아이는 언뜻 들었던 드로우 엘프들의 삶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색 염색약을 한손에 달랑달랑 들고 나온 아이는 염색할 생각에 신이 났는지 발걸음이 가볍다. 나랑 같은 흑발로 염색하는 게 그렇게 좋나, 아이의 마음은 이해가 잘 안 가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루시안은 먼저 나간 아이의 뒤를 쫓았다. 아이의 그림자가 골목의 그림자로 사라진다. 일렁거리는 그림자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예나!" 루시안은 아이의 팔을 잡으려고 했었다.

"예나?"

하지만 그가 더 빨랐다.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은 루시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예나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자신의 옛 애인은 그날 밤처럼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어, 자기? 잠깐의 일탈도 기분이 좋지?" 차가운 시선으로 루시안의 얼굴을 훑어보던 그는 금새 혀를 찼다. "푸석푸석한 몰골을 보니 잘 지낸 건 아닌가 보네? 역시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니까." 겁먹은 아이의 턱을 한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쥐며 그는 그의 귀에 아직까지는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속삭였다. "아직까지는." 그는 '아직까지는'을 한번 더 강조하며 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가 다시 루시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렇지만 자기는 내게 순순히 오지는 않을 생각이겠지? 아쉬워. 나 지금 자기한테 묻고 싶은 게 한두가지가 아닌데."

전류가 흐르고 있는 루시안의 손에 그는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이의 은발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매만지다가 고개를 틀게 했다. 아이의 목선에서 쿵쿵쿵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발견하다니, 역시 내 반려자는 보는 눈도 다르다니까. 이 아이 정도면 자기 마음에 들까?" "아니." "가차없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뭐." 아스타리온의 눈빛이 번뜩인 순간, 루시안은 그의 앞에 있었다. 그가 자기 앞으로 안개 걸음을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아스타리온의 반응이 조금 느려졌다. 루시안은 아스타리온의 손아귀에서 아이를 빼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격에 시야가 붉어졌다. 루시안은 한쪽 눈으로 아이의 상태를 대충 살핀 후 차원 이동으로 아스타리온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금방 거리가 좁혀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아이를 제 뒤로 민 후 가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네 눈, 눈이...!"

"그래서? 방금이 마지막이었어. 앞으로는 네가 내 앞에서 개죽음당한다고 해도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니까 알아서 해."

"아이가 도망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기야?"

감이 많이 떨어졌네, 내 보물. 루시안은 더 이상 아이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자기를 쳐다보지도 않는 루시안의 모습에 아이는 입술을 꽉 악물더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대로 달음박질했다. 아스타리온은 기가 찼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오만함을 산산조각내고 싶어졌다. 아이를 이렇게나 아낄 줄은 몰랐는데, 자기답지 않게 말이야, 어쨌든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자기한테는 벌이 필요했으니 말이야. 루시안이 반응하기도 전에 아스타리온은 아이의 목을 낚아챘다. 목이 잡힌 아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발버둥을 쳤다.

"...하! 하하하하! 그래! 이래야 내가 아는 자기지!"

그리고 루시안의 얼음 칼날은 아스타리온의 몸과 아이의 몸을 동시에 꿰뚫었다. 아이는 충격먹은 얼굴로 루시안을 돌아보다가 기침을 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진한 피냄새에 아스타리온이 입맛을 다신다. "그런데 자기, 죽일 생각은 없었나봐?" 심장에서 살짝 엇나간 구멍을 손으로 짚으며 아스타리온은 미소를 지었다. 바닥에 엎어진 아이는 아직 살아있다.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며 발버둥치고 있긴 하지만 어중간한 치료라도 받는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은발을 곁눈질하며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은발이 훨씬 아름답지 않냐고 물었다. 루시안은 대답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올 때까지도 가만히. 아스타리온은 부드럽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쟤는 그냥 내버려둬."

"아이 때문에 저항을 포기한 거야?이건 자기답지 않은걸."

"설마 쟤 때문이겠어, 아스타리온?"

루시안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는다. 저항없이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루시안을 내려다보며 아스타리온은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는 언제나 아름다웠지, 저항할 때나 저항하지 않을 때나, 항상.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내가 정말 싫어."

"...최고의 칭찬인걸."

위험해 보이는 미소, 귀까지 내려온 곱슬거리는 은색 머리카락, 웃을 때마다 섹시하게 접히는 눈가, 루시안은 아스타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는 다 죽어버린 거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에게 지쳤으면서도 그가 여전히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니 그건 또 아닌가 보다. 녹색의 시선이 천천히 사랑했었던 부분들을 훑는다. 카자도르보다 강해졌으면서도 아직도 카자도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의 처절한 알맹이가, 그리고 자신을 이 세상의 유일한 것으로 여기는 그의 외로운 알맹이가, 또 더 큰 권력과 부를 갈망하는 그의 탐욕스러운 알맹이가, 서늘한 녹안에 맺혔다.

"이제 돌아갈까, 자기야."

루시안은 지금 그의 품에 안겨 돌아가면 다시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예 궁전밖으로 나가지 못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끈적끈적한 변명 하나로 벌거벗은 채로 그의 무릎에 앉아 행복을 강요받고 있게 될지도 모른다. 루시안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래."

그는 스스로 족쇄에 발을 내미는 자기 자신이 가장 미웠다. 아스타리온은 루시안의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웃더니 그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했다. 마지막일 수도 있는 하늘이 그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춘다. 내 시선은 이제 어디를 보고 있을까. 뛰지 않는 심장에 뺨을 기대며 루시안은 자기도 모르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답은 역시 모르겠다. 아마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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