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九 減 一
운복고 AU
* 헥터랑 이멜다의 동아리를 알 수가 없읍니다 흐윽 아시는 분 댓글이나 멘션 주세요... 수정하겠습니다...
열일곱의 소년은, 사랑을 현재 하고 있다. 물론 그가 사랑을 매번 해 본 탓에 아, 이게 사랑이지! 하고 느낀 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소녀에게 무한한 존경과 경의를 가졌고 항상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욕심이 생겼다. 본래 소년은 안 그래 보이는 듯, 딴에 욕망은 강해서 차츰 멋대로 소녀를 사랑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는 그저 아, 이런 게 사랑일까? 하는 의문을 때때로 던지며 스스로 확신하고, 확신을 굳혀갔다.
열여덟의 소녀는 육상부였다. 소녀는 무척 빠르고 빨라서 어느 지경까지 빠르냐면 한 번도 계주에서 빠진 적이 없으며 1등은 더욱이 놓친 적이 없었다. 한 마디로 승부욕이 강했다. 소녀는 또한 성정이 화끈했고, 어떤 때는 사뭇 침착해서 누군가의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그런 소녀가 볼 적에 도리어 홧홧해지는 소년의 얼굴은, 그렇기에 이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외려 그것을 즐겼다. 소녀는 짓궂었다.
열일곱의 소년은 그녀에 비하면, 조금은 하찮지 않나, 그리 생각하며 자조했다. 소년은 기악부였다. 접점이라고는 ‘예체능’이라는 것뿐, 도무지 소년은 제 사랑을 표현할 방도가 없어 늘 애가 탔다. 동시에 소년은 겁이 났다. 원체 소년이 용기가 충만하질 않았고, 그래서 소년은 소녀에게 다가갈수록 더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신이 두렵고 소녀의 거절이 두려운 나머지 계속 다가갔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소년은 처음에 소녀에게 연주를 들려줬다. 소년의 실력이 어떻느냐 하는 것이 보통은 문제가 되겠으나 소년은 제법 천재적이었다. 그러하니만큼 소녀의 첫 거부는 분명 소년의 연주의 형편 없음이 자아낸 결과는 아니었으리라. 실은 소녀는 창피했다. 길거리 세레나데가 창피했다. 그래서 소녀는 흘러가는 어조로 소년에게 한 번 말하고 떠나갔다. “잘하네.”
소년은 두 번째로 자신의 온 감성을 다해 시 두 편을 지었다. 한 편에 담긴 것은 소녀가 소년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하여, 또 한 편에 담긴 것은 소년이 본 소녀의 대단함…. 허나 이번은 전번보다 비참했다. 고뇌 끝에 소년이, 결국 시를 주지도 못한 탓이었다. 그것도 소년은 변명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소녀로 인해 소년이 미칠 것 같다고 이야기해 봤자 소녀는 필경 비웃을 터였다. “너 혼자 미친 게 왜 내 탓이니?” 하고 말이다.
소년은 세 번째로 소녀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실로 신데렐라의 환생이 아닐 수 없어, 소녀는 소년을 위한 유리 구두를 준비해야 할지조차 고민했다. 다행히도 소녀보다 머리가 하나만치 큰 소년이 족히 큰 유리 구두를 신고 더 높아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소년은 거의 매 쉬는 시간을 소녀를 찾아왔다. 제 반은 어찌 알았냐고 물으면 소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소녀는 소년의 반에 소녀의 쌍둥이 동생들이 있는 것을 익히 알았다. 소년은 대개 소녀의 책상, 사물함 정리를 해 주거나 소녀의 허기를 달랠 간식거리를 사 오거나 소녀의 푸념을 들으며 맞장구나 쳐 주거나 했다. 또 어떻게 아는 것인지, 소녀는 매 이벤트(주로 대회라든지)가 있을 때마다 소녀에게 선물을 줬다. 간단하고 작은 아기자기한 무언가들이었다. 소녀의 방 안이나 책상이나 가방 어딘가에 그것들이 점점 쌓여갔다.
열여덟의 소녀는, 소년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초코 우유를 싫어한다고 농담하면 다음 시간에 소심하게 딸기 우유를 사 온다든지, “대회 오늘 아닌데.” 하고 시치미 떼면 소녀의 동생들에게 달려가 “아니라잖아!” 하고 낑낑대고 있는다든지, 자신이 자고 있을 때면 옆에 앉아 깨어 있을 때는 말하지 않는 혼잣말을 퍼부어 놓는 탓에 갑자기 눈을 뜨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라든지. 소녀는 그래서 소년의 우유부단함을 꺼렸다. 누가 봐도 소년은 소녀를 좋아했고 쉴 새 없이 감정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절정에 다다르면 목을 넣었다. 소녀가 보다 못해 찔러 보면 꿈틀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든가! 소녀는 마침내 저 겁 많은 토끼를 사로잡고 말리라 생각하며 그의 반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이는 둘의 암묵적인 룰(소년이 찾아가는)을 부순 이례적인 일이었다.
열일곱의 소년은 엎드린 채 “선배 보고 싶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 ‘선배’가 제 머리맡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한숨 쉬는 소년. 소녀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콩콩 쳤다. 소년이 하품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년은 “어!” 하고 벌떡 일어섰다. 단박에 밝아지는 얼굴에 소녀는 혀를 찼다.
“내가 그렇게 좋아?”
“네! …어, 그러니까 제 말은…….”
소년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주먹을 쥐었다. 안달이 날 때면 으레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너무 빠르고 솔직하게 대답해 버린 것, 소년은 틀림없이 소녀가 깨달았으리라 생각했다(소년의 추측은 엄밀히 말해 반 정도는 맞긴 했다). 소녀는 소년을 보다가 눈을 가렸다. 맙소사, 귀엽잖아! 하지만 이 자리에서 대놓고 귀엽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녀는 낮은 음성으로 “얘기 좀 해. 나와.” 했다. 그리고 소년은 그것에 그만 겁을 집어먹었다. 오늘 드디어 나한테 무언가 화를 내려고 그러나 보다. 그동안 잘 넘겨 왔는데 생각해 보니 귀찮았던 건가. 그런 상념이 마구 떠올라서 소년은 소녀를 따라가는 내내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 되었다.
열여덟의 소녀는 최대한 조용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학교라는 밀집된 공간 내에 그런 곳이 얼마나 있겠는가. 소녀는 소년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가령 좋아하는 게 뭐라든지, 싫어하는 건 뭐라든지, 가족 관계는 어떻다든지, 음악은 어쩌다 시작하게 됐는지 등등에 대하여. 소년이 그 자체로 궁금했다. 그러나 첫 번째는 역시 이거다. 소녀는 별안간 몸을 돌려 소년에게 물었다.
“저번에 복도에서 들려 준 노래는 제목이 뭐야?”
소년은 깜짝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가 어물어물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 그건 왜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자신한테 관심을 가지는가. 소년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다 써서 뭔가를 더 꾸미거나 속이거나 할 수도 없었다.
“야. 그만 떨어!”
보다 못한 소녀가 일갈했다. 귀여운 것도 정도껏 해야 귀여운 거다. 소년은 곧장 손을 등 뒤로 감추고 허리를 폈다. 여기서 더 미움 받는 것은 사양인지라. 소녀는 한숨을 지었다.
“한 번 더 들려 줘. 저번에 제대로 못 들었는데 좋았거든.”
다시 말해 이것은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소녀가 판을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소녀가 소년에게.
소년소녀는 음악실에 들어왔다. 그곳은 기악부가 사용하는 곳이었으므로 소년의 기타가 있는 게 당연했고, 물론 조용하기도 했다. 소녀는 아무 자리에나 앉아 소년을 봤다. 소년은 기타를 조율하면서 제 손이 떨지 않도록 주시하느라 여간 바쁜 게 아니었다. 소년이 기타를 잡은 폼이 꽤나 테가 살기에 소녀는 그를 보았고, 또 신기하기까지 해서 그를 보았다. 소녀가 이때껏 생각하기에 그녀는 ‘음악하는 남자가 멋있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년이 성숙해 보인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년이 조율을 마치고 마침내 목을 가다듬었다. 소녀는 손으로 턱을 괴었다. 소년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망설이다가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소녀가 전에 들었던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이 즐거운 노래였다면 이건 좀 더…… 잔잔하고 감미로우며 가사가 다르다. 소녀는 말을 잃었다. 소년도 눈을 한 곳에 박아 두지 못하고 헤매였다. 고요했다. 소년이 기타를 내려놓자 나무끼리 부딪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어때요…?”
소년이 물었다. 붉게 달아올라서는 어쩔 줄 모르는 손짓이다. 소녀는 “어… 좋네. …좋네.” 하고 간신히 대꾸했다. 소년의 노래는 그대로가 고백이었다.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식상한 멘트는 없었다. 그저 소녀를 묘사했을 뿐이다. 절절하게 감상적으로 그러했을 뿐이었다. 머리카락, 눈, 코, 입, 피부, 손, 발. 소녀는 입술을 꾹 물었고 소년은 천천히 미소지었다.
“다행이다.”
“헥터.”
소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돌연 소년의 손을 잡았다. 소년은 움찔했다. 소녀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깊은 숨을 내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어쩌면 좋니.”
소년은 영문을 몰라 반문했다.
“어찌 할 필요 없는데요…?”
소녀가 그 소리에 맑게 웃었다. 소녀가 웃어서 소년도 웃었다. 그러면서도 이해가 안 되어 여전히 의문 띤 표정이었다. 소녀가 갑자기 소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쪽쪽쪽. 소년은 화들짝 놀라 “멜다 선배?” 하며 손을 빼려 들었으나 소녀가 놓아 주지 않았다.
“사귀자.”
“좋아! 요! …아니, 뭐…? …진짜요? 정말?”
소년은 혼란스러웠다. ‘아, 인간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냐.’ 소녀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나오는 소년의 간헐적인 질문에 모두 응, 어, 그래, 정말. 대답했다. 소년은 또 멍하게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대답했어, 아. 왜 반말했지.’ 그 무렵 소년의 머릿속은 그랬다.
한참을 그러고, 결국 소녀의 온기를 납득한 소년은 신기하다는 어투에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사실 선배한테 고백하는 꿈을 꿨단 말이죠? 그런데 차여서, 어, 개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와, 진짜? 역시 꿈은 현실과 반대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와…, 와아! 이거 꿈은 아니죠!”
소녀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다가 장난기가 돋아 “꿈이라고 할래?” 하고 물었다. 단박에 소년의 표정이 굳어졌다.
“싫어요.”
“너 날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저도 이럴 줄 몰랐는데, 누나가 너무 좋아서…!!”
소년이 씨익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자신감 넘치는 표정. 소녀도 “어, 장하다.” 하며 따라 키득였다.
4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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