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오비] 변칙적 애착 궤도와 범우주적 살별 프로토콜_10
척박한 모래 사막은 아이가 가장 싫어하는 곳이기도 했고, 그와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기도 했다. 개발이 되지 않은 타투인은 날 것 그대로의 자연으로 아이의 공포를 키웠다. 이를테면 자신의 배가 고프다고 밤낮 가리지 않고 습격하는 사나운 토착 생물이나, 거센 바람과 모래를 이끌고 다니며 자신이 지나간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모래 폭풍이 그랬다.
때문에 모래 알갱이가 창문을 두드리거나 땅이 조금만 흔들려도 아이는 벌벌 떨어야 했고, 이는 잠이 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한번 그렇게 일어나면 아이는 다시 잠들기 힘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벌벌 떨리는 몸, 나쁜 상상만 반복하는 머리가 그가 다시 잠드는 걸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아이는 졸업했다고 생각한 어머니의 품에 기어 들어갔다. 단잠을 깨우는 손님에도 어머니는 아이를 기쁘게 안아주며 다독여주었다. 어머니의 손길에 심장이 진정했고, 따뜻한 체온에 몸이 안정을 찾았으며 정겨운 냄새에 나쁜 상상이 수그러들었다. 그제서야 아이는 조금이나마 불안감을 벗어 던지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아이의 예민한 잠귀는 타투인을 벗어나 코러산트에 둥지를 틀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타투인과는 다르게 거대한 발전을 이룬 코러산트에도 위험도가 높은 생물들이 살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아이의 잠귀를 건드린 적은 없었다. 애초에 제다이 사원은 코러산트 상층부에 있었으며, 하층부에 사는 생물들이 상층부까지 올라온 적이 드물었다. 가끔가다가 올라온다고 해도 대부분 제다이 사원을 지키는 가드의 손에 처리됐기 때문에 어린 파다완이나 그보다 어린 영링들은 그 괴생물체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래 폭풍이 없어도, 괴생물체들이 사원에 침입할 수 없음에도 아이는 언제나 작은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의 잠귀를 건드리는 것은 코러산트의 상공을 날아다니는 스피더였다. 은하 경제의 중심지인 코러산트의 하루는 그 어떤 행성보다 바쁘게 흘러갔다. 시간이 크레딧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듯, 코러산트는 밤늦은 시간에도 네온 사인으로 번쩍였고, 셀 수 없이 많은 스피더들은 밤낮 가지리 않고 코러산트의 하늘을 채웠다.
제다이 사원 상공을 날아다니는 스피더의 엔진음이나 스피더가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공기의 흐름이 창문을 두드리면 어김없이 아이는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제다이 사원은 방음이 좋은 편이라 다른 제다이들은 못 느끼는 것 같았지만, 타투인의 거친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는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저 소리는 괴물이 내는 소리도 아니고, 제다이 사원은 안전하다는 걸 알아도 9년동안 몸에 베인 본능은 고작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만일 이곳이 코러산트가 아니라 타투인이라면 어머니가 해주는 팔베개를 베고 잠에 들겠지만, 애석하게도 사원에는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는 어머니가 없었다.
그렇게 잠 못 드는 밤이 3일째 되던 날, 결국 아이는 자신의 베개를 끌어안고 스승의 침대에 다가갔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성인, 그것도 본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어른에게 잠투정을 부리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다. 하지만 잠을 못 자서 내일 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싫었다. 침대에 다가가 조용히 숨을 내뱉는 스승의 몸을 살짝 흔들었다. 그의 눈이 나른하게 떠진다. 두어 번 깜빡이자 청회색 홍채에 빛이 깃들었다.
“…………아나킨?”
잠에서 막 깬 듯한 피로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느리게 불렀다. 그는 책을 낭독하는 목소리도 듣기 좋았지만 이처럼 늘어지는 목소리도 나름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저, 잠이 안 오는데 재워 주실 수 있나요?”
“오, 아이야.”
어머니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바로 이불을 들춰서 자신이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주곤 했다. 하지만 스승은 달랐다. 스승은 아이의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찌푸린 이마를 짚고 눈을 꾹 감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자 차오르는 불안감에 속이 울렁거린다. 아이는 자신이 끌어안고 있던 베개를 좀 거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어떡하지? 실망하셨을 지도 몰라. 어리광이 너무 많아서 제다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 어쩌면 나를 다시 타투인으로 돌려보낼 지도 몰라!
아이는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지만 그렇다고 타투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타투인을 벗어나 다른 세상을 보았을 때, 그의 세상은 그가 알던 것에서 수만 배는 더 넓어졌고, 자신이 가보지 못한 곳을 향한 열망이 피어났다. 이대로 사원에서 자라나 스승의 밑에서 배우고 익힌다면 언젠가 제다이가 되어 그 열망을 피워낼 수 있겠지만, 다시 타투인으로 가게 된다면 작열하는 두 태양의 열기에 기껏 피워낸 열망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그라진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자명했다.
아이는 스승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내칠까 두려워하며 살짝 뒷걸음질 쳤다.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이미 버려질까 두려운 아이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마, 마스터…. 저, 그게 잘못….”
“그래. 갑자기 환경이 바뀌었으니 불안하겠구나. 잠이 안 오는 건 당연해.”
스승의 입에서 나온 건 뜻밖의 말이었다. 당장 파다완 자격을 박탈당하고 타투인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무색할 정도였다. 스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슴이 깊게 파인 잠옷용 튜닉 셔츠와 부드러운 천으로 짜인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의 움직임에 따라 천이 부드럽게 사륵거렸다. 스승은 아이를 침대에 눕혀주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빤지 얼마 안 된 이불에서는 포근하지만 차가운 냄새가 났다.
“환경이 바뀌면, 많은 게 불안하고 불편하기 마련이란다. 하지만 불안은 제다이가 기피해야 하는 감정 중 하나란다.”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아이는 살짝 기대 섞인 눈빛으로 스승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 단호한 목소리처럼 스승은 어머니처럼 아이의 옆에 눕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처럼 가슴을 토닥여주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우직하게 걸터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그게 내심 서러웠다. 온기를 빌려주면 좋을 텐데. 있는 힘껏 끌어안아주면 좋을 텐데. 어머니의 따스한 품에 익숙해진 아이는 제다이 답지 않은 생각을 떠올렸다.
“내일은 불안을 포스에 흘러버리는 법을 알려주마. 그러면 환경이 바뀌어도 잠드는 게 쉬울 거야.”
“저한테 재능이 없으면요? 제가 포스를 잘 다루지 못하면….”
저를 내쫓으실 건가요?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입 안에 맴돈다. 정확히는 스승의 대답이 무서웠다. 이토록 단호한 그가 단호하게 자신을 내치는 건 아닐까? 스승은 아이의 질문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퍽 인자해 보이는 미소였기에 자신에게 재능이 없더라도 그가 자신을 내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승이 있는 거 아니겠니. 그리고 재능이 없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권리가 박탈당하는 건 아니란다. 누구나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하지. 그건 지성을 가진 생물의 숙명이란다. 자, 너무 늦었어. 옆을 지켜줄 테니 안심하고 푹 자렴.”
“…안녕히 주무세요, 마스터”
아이는 스승의 말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옆을 지켜준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가 잠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온기를 느껴야만 했다. 결국 아이는 살짝 실눈을 뜨고 스승을 바라보았다.
코러산트의 밤에는 네 개의 달이 뜬다. 하지만 지상에 뜬 전기로 이루어진 별 때문에 달들이 내뿜는 빛은 어두운 밤하늘에서도 흐릿하게 반짝일 뿐이었다. 옅은 달빛이 스승의 얼굴을 말갛게 비췄다. 아이의 옆을 지키고 있던 그는 어느 새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었다. 청회색 홍채가 사라지자 기다랗고 촘촘한 속눈썹이 도드라졌다. 찬찬히 그의 얼굴을 관찰하던 아이는 가지런히 무릎에 올려진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와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눴을 때가 떠올랐다. 그의 손은 검을 쥐는 사람 답게 거친 굳은 살이 박혀 있었으나 피부는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였고 손가락 또한 길고 예뻤다.
묘한 열망이 피어오른다. 저 커다란 손이 자신을 끌어안아 주길 바랐다.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따스한 온기를 나눠 주길 바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손을 잡고 제 머리 위에 얹고 싶었다. 그러면 마지 못해 쓰담아 주시지 않을까?
아이는 점점 열기를 더해가는 열망이 행동으로 바뀌기 전에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물론 이미 피어난 열망이 사그라지진 않았다.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 행동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이는 스승의 포스를 자신의 포스로 은근하게 감았다. 온기를 느낄 수 없다면 그의 포스라도 붙잡아 두고 싶었다.
이후 스승의 지도 덕분에 아이는 자다가 깨어나도 다시 잠들 수는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던 것처럼 안온한 수면이 아니었다. 현실과 꿈. 그 어중간한 의식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아침을 알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기 일쑤였다. 온기가 그리웠지만, 제다이 규율에 얽매인 스승은 품을 내어주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바로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스승의 포스를 동아줄 삼는 것밖에 없었다.
그가 사원에서 가장 평안하게 보냈던 밤이 바로 스승의 포스를 붙잡았던 그 날 밤 밖에 없었기에.
* * *
텅! 데구륵.
무의식의 수면 속에 가라앉았던 베이더의 정신을 깨운 것은 귓가를 흐릿하게 때리는 소음이었다. 베이더처럼 잠귀가 여간 밝지 않으면 잡아채지 못할 정도로 무척이나 작은 소리였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혹은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연유로 나는 소리이던 간에 그의 단잠을 방해한 이상 불쾌한 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밝았던 잠귀는 그가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무뎌 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정신을 갉아먹을 속셈인지 옛날보다 더욱 밝아진 느낌이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곤두세워지는 청각은 정신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정신이 점점 맑아지자 베이더는 서서히 눈을 떴다. 몸은 피곤했지만 어차피 잠을 청해 봤자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는 미적거리지 않았다. 그의 노란 홍채에 뿌연 박타 용액이 담겼다. 박타탱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잠든 그를 C-3PO가 박타 탱크로 옮겨다 주는 일은 꽤 빈번했기에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거라 생각했다.
박타 탱크에서 눈을 뜨는 것은 이제 일상이다. 박타 특유의 냄새는 그의 체취가 되었고, 부드럽고 차가운 액체에 익숙해진 지금 포근하고 사늘한 이불의 감촉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의 살갗이 녹아버리고 식도와 기관지에 화상을 입은 뒤로 그는 이제 박타 탱크가 없으면 목숨을 영위할 수 없는 비루한 몸뚱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더는 박타 탱크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싫었다. 자신의 목숨을 영위해주는 기계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팔다리가 잘린 채 기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 베이더가 지금 느끼고 있는 무거운 무력감과 마주하리라.
기계 팔과 다리는 이전과는 다른 힘을 주었고, 베이더 역시 아나킨 스카이워커보다 강해진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다면 그는 다스 베이더가 아니라 도축된 가죽처럼 천장에 매달린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 얼마나 비참한가! 은하계의 악몽이라 불리우는 그가 방에서는 고깃덩이처럼 박타 탱크에 목숨을 연명하는 꼴이라니! 우습지도 않았다.
베이더는 포스를 이용해 신경질적으로 박타 탱크를 조작했다. 그러자 탱크에 있던 용액이 쑤욱 빠져나가며 일렁거렸던 앞이 또렷해졌다. 탱크 너머로 창백한 푸른 빛을 내뿜고 있는 물건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자마자 괜히 마음이 술렁거렸다. 탱크에 있던 용액이 쑤욱 빠져나가자 절전상태fh 있었던 C-3PO가 눈을 반짝이며 베이더에게 다가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
“옮겨줘서 고마워, 3PO”
“오, 그게 바로 제가 할 일인걸요.”
C-3PO는 지지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베이더의 몸에 남아있는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낸다. C-3PO의 시중을 받던 베이더는 미간을 찌푸렸다. 박타 탱크에 나온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화상을 입은 피부가 따끔거린다. 아무래도 고작 천 옷만 걸치고 사막으로 나간 탓에 상태가 더욱 악화된 것 같았다.
무스타파 만큼은 아니지만 타투인 또한 두 항성이 내뿜는 열에 뜨겁게 달궈지는 행성이다. 모래는 뜨겁고 공기는 후덥지근하다. 그런 곳에 옷만 대충 걸치고 나갔으니 한껏 달궈진 공기가 약해진 피부를 자극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베이더는 더욱 심각해진 자신의 상태에도 어떠한 감흥조차 일지 않았다. 어차피 화상은 오비완이 만든 흔적이자 오비완을 향한 애정과 증오의 증거다. 고통이 강할 수록 그를 향한 감정을 곱씹을 수 있었고 이는 자신을 매료한 포스의 어두운 면에 밑거름이 되어줄 터였다. 그저, 자신을 이렇게까지 내던졌음에도 그를 잡지 못한 무력함에 허덕일 뿐이었다. 그가 싫어하는 갑주까지 내던지고 만나러 갔건만, 그는 아직도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텅! 데구륵.
기계 팔과 다리를 달고 갑주를 걸치기 바로 직전이었다. 다시금 흐릿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베이더는 C-3PO의 행동을 멈췄다. 팔과 다리가 있으니 움직이는 것에는 제약이 없었기에 지지대에서 내려온 그는 바로 함선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만일 이 근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와 관련된 내용이 네트워크에 올라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트워크에 올라온 보고 내용은 단 두 건이었다. 하나는 제다이 둘에게 습격을 당한 K와 H가 동사했다는 보고였고, 다른 하나는 제다이들이 습격한 격납고를 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확인한 베이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비완과 또 다른 자신이 습격한 격납고는 자신의 방과 매우 떨어져 있었고, 그 말은 그곳에서 울리는 소음이 여기까지 들릴 리 없다는 뜻이기도 했가.
무엇보다 자신이 들은 소음은 일반적으로 수리할 때 나는 소음보다 얌전했다. 그저 무언가를 두드리거나 떨어지는 듯한 소리. 모스부호처럼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 생각은 바로 접었다. 소리는 그저,
텅! 데구륵.
거릴 뿐, 특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변화 또한 없었다.
결국 베이더는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걸로 결론 내렸다. 방 안에서 미적거려봤자 저 거슬리는 소음이 사라지는 보장도 없었고, 이 호기심의 해답도 찾을 수 없었다. 부하를 불러 대충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스스로가 움직이고 싶었다. 상념에 너무 젖어 있어서 머리가 멍하고 은은한 통증까지 밀려왔다. 부하를 불러 처리한다면 몸은 편하겠지만 머리는 계속 상념에 붙잡혀 생각과 감정을 소모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구석에 내팽개쳐 둔 제다이 로브를 걸쳤다. 예전에는 부드럽다 생각한 천이 예민하고 약해진 피부에 닿자 거칠게 느껴졌다. 허리춤에 광선검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베이더가 방문 앞에 서자 그를 바라보던 C-3PO가 화들짝 놀라며 제지했다.
“어디 가실 거라면 갑주를 착용하셔야 합니다, 주인님. 사막 열기 때문에 주인님의 피부가 많이 상했어요. 이대로 방치하시면….”
“잠깐 이 근처만 둘러보고 올게. 10분도 안 걸릴 거야.”
“하, 하지만….”
금빛 드로이드는 뭐라 더 말할 것이 있는 건지 덜그럭거렸지만 거기까지였다. 애초에 프로그램 상 드로이드는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드로이드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방문을 나서는 주인의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허둥지둥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박타 탱크를 세팅하는 것뿐이었다.
복도로 나온 베이더는 로브를 단단히 여몄다. 그가 방에서 나올 때면 항상 갑주를 착용했기 때문에 함선 복도가 이리도 서늘하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더구나 로브 하나만 걸쳤으니, 그 차가운 기운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이 정도라면 10분이 아니라 1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텅! 데구륵.
마치 그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복도로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음이 울렸다. 베이더는 지체없이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사이로 그의 발소리가 울린다. 텅텅, 기계 다리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바닥이 맞부딪히며 거친 소리가 울린다. 평소에도 울렸던 작은 소음조차 들리지 않아서 제 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베이더의 방이 있는 이 구역은 베이더의 전용 구역으로, 이 함선 내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었다. 그의 예민한 청각 때문에 보초나 경비를 세우지 않았기에 인기척조차 없었다. 보고를 올리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아닌 이상, 이 복도에 소리라는 것이 울려 퍼지는 상황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텅! 데구륵.
그래서 이 소음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구역에서 소음을 낼 수 있는 존재는 지금 자신과 C-3PO밖에 없었다. 설령 일반 병사가 이곳에 들어왔다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지 않으리라. 이건 당신의 심기를 거스를 테니 제발 저를 죽이러 와 달라고 소리치는 꼴 아닌가.
베이더가 소음의 근원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0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근원지와 베이더의 방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소음이 간헐적으로 울리는 바람에 근원지까지 도착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C-3PO와 약속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지만 그는 발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아까보다 확연히 커진 소리가 이곳이 바로 근원지라고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표가 바로 목전인데 이를 두고 돌아갈 수 있는 이가 과연 몇명이나 되겠는가? 설령 과반수가 발을 돌린다고 해도 그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선택하고 말 것이다.
베이더는 눈을 감으며 리빙 포스를 더듬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과 방대한 포스는 바로 근처에 있는 리빙 포스를 잡아 챘다. 커다란 것 하나와 작은 것 두 개. 생물인 것은 맞으나 정확히 어떤 개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리빙 포스들이 서로 겹쳐져 있는 모양새로 볼 때, 어쩌면 임신한 개체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뿐이었다.
베이더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리빙 포스를 향해 멍하니 걸었다. 무심코 떠올린 임신이라는 단어에 오비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슴이 싱숭생숭하다. 눈 앞의 상황과 호기심은 뒤로 밀려버리고 오비완으로 생각이 튀어 버렸다. 오비완은, 자신이 제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
억지로 여성의 생식기를 달아준 것도 모자라 이젠 임신까지 시킨 옛 제자를 혐오했을까, 아니면 끔찍한 운명에 내던져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까, 아니면 기어코 제자의 자식을 밴 몸을 징그러워 했을까?
예전에는 그의 얼굴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의 멸망, 제다이의 몰락, 그리고 자신이 직접 길러낸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살해한 베이더에게 겁탈당하자 그는 시들어가는 꽃처럼 점점 말라갔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잿빛으로 죽어갔으며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지고 행동 또한 눈에 띄게 줄었다. 언제나 마음의 창이 되어주던 눈빛과 표정, 행동이 죽어버렸으니 그의 생각을 읽어내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오비완이 그때 당시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그에게 묻지 않는 이상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죽이지 않고, 일부러 유산시키지도 않고 그 몸으로 도망 쳤다는 것은 아이들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걸까?
아아 오비완, 당신이 그 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우리는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 거예요. 당신의 부푼 배에 입을 맞추고, 말을 걸며 아이들과 만날 날을 고대라며 하루하루를 보냈을텐데.
베이더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생각도 없었는데 막상 그가 임신한 모습을 상상하니 그 모습을 정말로 보고싶었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었던 선택지를 버린 당신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텅! 데구륵.
소음의 잔음이 복도를 울릴 때, 베이더의 발도 문 앞에서 멈췄다. 베이더의 발이 멈춘 곳은 자제 창고였다. 이곳이라면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음이 날 법도 했다. 문 안쪽에서는 세 리빙 포스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방에서 나올 때만해도 그는 소음의 근원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없애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하지만 막상 근원을 눈 앞에 두게 되니, 선뜻 행동을 옮길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이 문을 열고 임신한 것으로 추정되는 저 개체와 만난다면, 자신은 저 개체를 그냥 풀어주게 될까, 아니면…. 베이더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광선검을 고쳐 쥐었다.
쾅! 하는 거대한 소음이 복도 전체를 울렸다. 포스에 잡아 뜯긴 문의 잔해가 복도 바닥에 나뒹굴며 자잘한 소음을 만들었다. 베이더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저 자잘한 소음이 잦아들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 소음의 원인을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베이더는 자잘한 소음이 사그라들다가 이윽고 들리지 않을 때가 됐음에도, 문 안쪽으로 발을 내딛지 못했다. 결연한 다짐을 한 것 치고는 다소 맥빠지는 행동이었다. 대신 그의 시선은 문 안쪽에 있는 인영에 못 박힌 듯 박혀 있었다.
창고의 조명은 어둑어둑했지만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후드를 뒤집어쓴 그 ‘개체’는 인간 남성이었는데 그의 배는 베이더의 예측대로 산처럼 부풀어 있었고, 후드의 소매 사이로 드라이버가 언뜻언뜻 보였다. 아무래도 저 드라이버가 바로 소음의 원인인 듯했다. 하지만 베이더는 드라이버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개체’에만 꽂혀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갈망한 나머지 꿈을 꾸고 있나? 자신은 아직도 박타 탱크 속에서 자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존재에게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베이더를 감싼 모든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했고, ‘개체’의 모습 또한 너무나도 정밀했기에 그는 이게 현실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후드가 만들어낸 그늘 속에서도 ‘개체’의 청회색 홍채가 여전히 반짝인다. 그는 맑게 빛나는 눈을 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건 상대의 행동이 상당히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넓은 아량을 베풀어 참작해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눈과 마주치는 순간, 베이더는 그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란한 인사구나. 분명 이쪽의 나도 상대에게 괜한 위압감을 주지 말라고 누누이 일러주었을 텐데.”
눈 앞의 오비완은 ‘이쪽의 나’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이곳이 자신이 있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애초부터 눈치챈 모양이었다. 베이더는 눈 앞의 오비완이 자신의 오비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의 뱃속에 있는 아이 또한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다. 허나 눈 앞에 있는 그가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를 보면서 느껴지는 애틋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오비완….”
“그래, 비록 시스가 되었어도 스승의 존함은 까먹지 않아서 다행이군. 포스의 어두운 면에 사로잡혔어도 눈에 뵈는 건 있나 보지?”
베이더가 ‘개체’의 이름을 부르자 오비완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익숙한 아마빛의 짧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흐트러지고, 깔끔한 피부와 정성스럽게 손질된 수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막에서 보았던 꾀죄죄한 오비완 케노비와는 다르게 좀 더 생기 있고, 성격 또한 주눅들어 있지 않았으며, 그의 신랄한 입담 역시 살아있었기에 제다이 시절의 오비완 케노비를 연상케 만들었다.
아,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는 빼고.
오비완은 손에 들고 있던 드라이버를 바닥에 던졌다. 텅! 데구륵. 아까부터 자신을 괴롭힌, 익숙하고도 요란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베이더는 데굴데굴 두르다가 벽면에 부딪히는 드라이버를 바라보았다.
“청승 맞게 드라이버나 굴리면서 충성스러운 개가 올 때까지 기다렸나 보죠?”
“그렇게 말하면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하는 꼴이란다. 뭐 내 입장에선 굳이 사실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없어서 편하지만.”
“당신 진짜,”
“큭….”
자신을 조롱하는 말에 베이더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위압감을 조성하려고 했지만, 오비완의 작은 웃음 소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오비완은 최고의 협상가라는 이명에 맞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능글맞은 성격과 유연한 사고 방식으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었다. 그건 시스로 변해버린 제자 아닌 제자와 함께 있는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팔짱까지 끼며 큭큭 거리는 오비완은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정말이지, 덜 자란 어른을 골려 주는 건 재미 있단 말이야. 요즘 아나킨이 제법 의젓해져서 재미없었는데 여기는 아직도 덜 자란 어른이라 기쁘구나.”
“…죽고 싶지 않다면, 그 입 다무는 게 나을 거예요.”
“글쎄, 네 성격상 정말로 날 죽이고 싶다면 으름장만 놓는 게 아니라 벌써 죽이고도 남았을 거라 생각되는구나.”
오비완은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받아 쳤다. 베이더는 그 여상한 모습을 보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빌어먹게도 그 말이 맞았다. 상대가 그 누구든 자신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든 죄로 마주치는 즉시 찢어버리겠다는 생각은, 오비완을 보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분노란, 이렇게나 허무한 감정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쉽게 사라진 감정에 회의감마저 들었다.
더구나 비꼬려 다가 되려 공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불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과거의 일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황에 시스 답지 않는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내면의 자신을 짓밟으며 베이더는 마른 세수를 했다.
“포스의 농간이 짓궂네요. 또 다른 나로 모자라 이제는 또 다른 오비완이라니.”
“살다 살다 시스와 의견이 맞을 날이 올 줄은 몰랐구나. 평의회 의원들이 알게 된다면 또 뒤로 넘어가겠어.”
“또?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단 말인가요?”
“그럼 당연하지.”
그 말과 함께 오비완은 자신의 배를 쓸어 보였다. 어쩌면 자신의 오비완도 저런 모습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베이더는 자신의 배를 부드럽게 다독이는 오비완을 보면서 주먹을 꾹 쥐었다.
“…아이는, 어떻게 가지신 거예요?”
당신의 아나킨이, 억지로 여성기를 달아줬나요? 차마 문장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을 치아로 짓씹었다. 부서진 문장의 틈새 사이로 쓴 맛이 느껴진다. 이 말을 내뱉지 못한 이유는, 자신의 행동이 무척이나 끔찍하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나킨’이 ‘오비완’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있었고. 아, 부서진 문장에서 흘러나온 쓴맛의 정체는 죄악감이구나.
“살별이 물어다 줬단다.”
베이더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곱씹고 있는 반면, 오비완의 입에서는 황당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베이더는 생각을 멈추고 오비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비완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마치 1+1은 2다, 라고 대답한 사람처럼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 큰 성인에게 우습지도 않은 대답을 한 걸 부끄럽다 여기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은, 이 사람은 날 성인으로 보고 있긴 한가? 아직도 날 9살짜리 꼬맹이로 보고 있는 거 아니야?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내가 지금 심적으로 너무 힘드니 이해해 주렴. 난 그저 사원에서 아나킨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데 이 칙칙한 함선에 떨어지지를 않나, 눈앞에는 포스의 어두운 면에 빠진 제자 아닌 제자와 마주치기까지 하고….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뒤숭숭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구나.”
오비완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자신을 놀려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껏 고양된 감정이 느껴졌다. 이를 트집 잡고 싶었지만 되려 자신이 상처받을 거 같아서 그만 두었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이 함선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다스?”
“Good bye, Darth.”
갑자기 비집고 나온 기억에 베이더의 몸이 굳었다. 그 기억만 아니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호칭이 불쾌했다. 그와 똑같은 목소리와 똑같은 억양이 그의 뇌를 마구 때리며 괴롭혔다. 이 오비완에게 다스라는 호칭으로 불릴 바에야 차라리 버렸던 이름을 주워 삼키는 게 나을 정도였다.
“일룸이요. 제가 당신 아나킨의 광선섬을 망가트렸거든요."
“음, 광선검이 망가진 제다이가 갈 곳은 그곳 밖에 없긴 하지.”
“그런데, 다른 이름으로 불러요. 다스 말고.”
“예를 들면? 뭐 불리고 싶은 이름이라도 있느냐?”
“베이더라고 부르세요.”
“흠. 다스 베이더라….”
“왜요? 너무 잘 어울려서 놀랐어요?”
“아니. 이 함선만큼이나 센스가 없다고 생각했단다. 도대체 누가 지어 줬는지 얼굴이 궁금하군. 분명 번데기마냥 주름으로 얼굴이 자글자글 일그러진 노인네 일거야.”
베이더는 오비완의 말에 구태여 반박하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의 스승인 다스 시디어스는 그의 표현대로 번데기마냥 주름으로 얼굴이 자글자글 일그러진 노인네가 맞았으니까. 구태여 그를 변호할 의무도 의지도 없었다.
게다가 베이더에겐 시디어스를 향한 존경심이 쌀알만큼도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지식을 전달해주는 역할이 맞긴 했지만 스승보다는 백과사전이 더욱 맞는 말이었다. 언젠가 그의 지식을 다 흡수하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되는 날이 오면 망설임없이 처리해버릴 예정이기도 했다.
“…그러는 당신이 아이들 이름을 얼마나 센스 있게 지을 지 궁금하군요.”
“그건 나와 ‘아나킨’이 고민할 일이니 네가 걱정해줄 필요는 없단다.”
그건 명백히 선을 긋는 말이었다. 오비완과 같은 얼굴만 아니었다면 이런 아픔 따위 느끼지 않았을 텐데. 앞으로 그와 지내면서 오비완과 똑같은 얼굴로 자신을 깎아내릴 그를 생각하니 앞이 막막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
“자, 그럼 호칭도 정했으니 이제 앉을 곳을 안내해주지 않겠나, 베이더. 몸이 무거워서 오래 서있기가 벅차구나.”
오비완은 베이더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입을 열었다. 걸치고 있던 로브는 언제 벗은 건지 그의 팔에 걸쳐져 있었는데, 그 탓에 볼록한 배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헐렁한 원피스로도 다 가려지지 않을 만큼 커진 배가 그려내는 부드러운 곡선에 손을 가져가 쓸어보고 싶었다.
크게 부푼 배 때문에 그는 살짝 허리를 뒤로 젖히고, 뒤뚱거리며 베이더에게 다가왔다. 커다란 배로 인해 갖은 고생하고 있는 임산부를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기 뭐하지만, 그 모습이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베이더의 앞에 선 오비완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관찰했다. 도륵도륵, 굴러가는 청회색 눈이 투명한 유리구슬 같았다. 토끼 같은 눈매를 최대한 가늘게 만들어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차마 무얼하고 있냐고 묻기 어려웠다. 그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빤히 베이더를 바라본 그는 자신의 로브로 베이더의 앞 가슴을 덮어주었다.
그 행동에 담긴 오비완의 저의를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비완의 몸을 감싸고 있던 로브에는 그의 몸내음이 깊게 배어 있었다. 그 상쾌한 편백나무 향은 베이더의 경계를 잘게 부숴버렸다. 시원하면서도 무척이나 포근한 느낌에 눈을 감으려던 찰나, 이어지는 오비완의 말에 베이더는 눈을 크게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 네 것이 실하다는 걸 자랑하고픈 마음은 알겠다만, 그래도 속옷에 로브만 걸치고 입고 돌아다니는 건 자제해주면 좋겠구나. 뭐, 감상하는 나에겐 좋은 구경이지만, 그래도 내 제자와 똑 같은 얼굴의 네가 변태로 오해받는 건 싫으니 말이다.”
큼큼, 헛기침으로 말을 마무리한 오비완은 뒤뚱뒤뚱 복도로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함선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그는 감이 이끄는 대로 발을 내딛었다. 물론 칙칙한 함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지만.
천천히 오비완의 몸내음을 느끼려던 베이더는 자신이 들은 말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해석하는 것에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오비완이 베이더의 방과 다른 복도로 나아갈 때쯤, 붉으락 푸르락 해진 얼굴로 그의 뒤를 쫓았다.
“오비완!!”
“귀 안 먹었으니 조용히 불러도 된다.”
“절 무슨 노출증 환자처럼 말하지 마세요! 여긴 아무도 안 오니까 대충 입은 거라고요!”
“‘만에 하나’를 늘 생각해두라고 이쪽의 내가 일러주지 않았니? 아, 말해줬는데 또 안 들었구나. 넌 그 버릇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어. 다 네 피가 되고 살이 되라고 해주는 조언인데 대충 흘러 넘기기만 하지. 내 진심 어린 조언을 강물처럼 여기면 좀 곤란하단다. 아, 여기인가?”
“……거기 아니에요. 이쪽으로 오세요!”
베이더는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는 오비완의 팔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오비완이 베이더의 팔을 뿌리치고 다른 길로 들어섰고, 베이더는 뒤를 쫓았다. 칙칙한 함선이라 비난한 주제에 호기심은 억누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빠르게 걸으면 5분도 걸리지 않을 길을 30분이나 헤매야 했다.
이걸 쓸 때 제법 즐거웠어요. 근데 즐거웠다는 기억만 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남...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