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칙적애착궤도와 범우주적살별프로토콜

[아나오비] 변칙적 애착 궤도와 범우주적 살별 프로토콜_06

데바스테이터호 주변 경비는 무척이나 삼엄했다. 출입구는 단 하나만 열려 있었고 함선 주변에는 무장한 스톰트루퍼가 족히 300명은 넘어 보였으며, 보라색 전류가 흐르는 무기를 든 퍼지 트루퍼와 전투 드로이드 또한 도처에 깔려 있었다. 아무리 무법이 판을 치는 아우터림의 타투인이라도 감히 제국 함선에 침입하는 간 큰 무뢰배가 있을 리 없고, 아무리 제다이를 경계한다고 해도 이 모양새는 좀 과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아나킨의 제안대로 두 제국군의 갑옷과 스피더를 빼앗은 건 잘한 일이었다. 제국군 특유의 하얀 갑옷과 제국 마크가 찍혀 있는 스피더는 벤과 아나킨이 출입구에 도달할 때까지는 물론 스피더에서 내려 출입문으로 향할 때까지 제국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두 제다이를 꽁꽁 숨겨주었다. 하지만 지상과 출입문을 이어주는 슬라이드 판에 발을 올리려던 그때, 한 드로이드가 앞을 가로막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베이더 경의 명령에 따라 당분간 함선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벤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적진 한 가운데에선 당황조차 쉬이 할 수 없다. 여기서 당황한 티를 내면 자신들이 말리는 셈이다. 벤은 제국군이라면 무시 못 할, 특히 자신의 옛 마스터를 쫓고 있는 베이더라면 더더욱 무시할 수 없는 제다이의 증표를 내밀었다.

“베이더 경께 보고할 게 있다. 쫓고 있는 제다이에 관한 거야.”

벤은 평이한 어조를 꾸며내며 자신의 광선검을 내밀었다. 최대한 손과 다리의 떨림을 거두고 의연하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속이 덜덜 떨리는 건 막을 방도가 없었다. 얼마나 떨리는 지 손과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스톰트루퍼 갑옷이 온몸을 감싸는 형태라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손에서 줄줄 나오는 땀 때문에 쓸데없이 의심을 샀을 것이다. 제발 저 드로이드가 투시가 가능하다든가 혹은 장갑으로 감싸인 손의 심박수를 체크하는 기능이 달려있지 않도록 빌었다.

오비완 케노비라면 이런 연기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소화해냈을 것이다. 애초에 오비완은 협상에 능했고, 필요하다면 능청스럽게 거짓도 입에 담아냈다. 하지만 벤이 마지막으로 타인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게 바로 5년 전이었고, 5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5년이라는 기간은 기어 다니지도 못하던 갓난아이가 이제는 주변 어른들의 행동을 흉내내는 시기이며. 5년이라는 시간은 어느 지도자의 임기 기간이기도 했고, 5년이라는 시간은 네 개의 계절이 다섯 번씩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즉, 그가 제다이였던 시절 동안 갈고 닦았던 화술이 이지러지고, 그의 연기가 닳고 닳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벤은 극심한 우울에 시달렸으니 일반 속도보다 두 배는 더 빠르게 망가졌다.

드로이드는 벤이 내민 광선검을 스캔하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깜빡깜빡, 드로이드의 눈에서 나오는 붉은 빛이 스무 번째로 점멸할 때쯤 드로이드의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베이더 경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드로이드는 몸을 돌려 선내로 향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나킨이 드로이드를 따랐고, 벤 또한 그를 따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에 뒤를 돌아보자 자신이 살았던 동굴이 시야에 잡혔다. 벤은 멍하니 그 동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두고 온 물건에 미련이 있는 건 아니었다. 검게 그을린 냄비, 낡아빠진 버너, 이가 빠진 컵, 헤진 담요, 먼지 쌓인 베개, 군데군데 실이 뜯겨진 가방, 먼지 냄새가 나는 부츠와 옷. 그 물건들은 벤이 처음 은거할 때 얻은 물건이었다. 말이 얻었다지 누가 쓰다 버린 걸 재활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과 함께 지냈다고 해도 물건에 감정을 가지진 않았다. 가끔 자신을 찾아오는 자와족이 그것들을 다 가져가 누군가에게 팔아먹어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누가 그런 물건을 살진 의문이지만.

다만, 하나. 그저 그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오동나무와 잣나무로 짜인 작은 상자. 쓰레기통을 뒤져 발견한 살림살이와는 달리, 타투인으로 피신했던 벤은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다 써서 두 상자를 샀다. 하나는 광선검을 넣어 사막 한 가운데에 묻어 버렸고, 다른 하나 또한 그렇게 묻어 버리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죄책감인지 애정인지 정체조자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에 사막이 아닌 자신이 머무르는 동굴 한켠에 묻어둔 그 상자가 의식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걸 두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꽉 막혀온다. 벤은 입 안 살점을 깨물어 속으로 사죄했다.

정말 미안하구나….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사죄가 모래처럼 부서졌다. 바람에 실려 괜찮아요, 라며 위로해주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마 환청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다 잡은 벤은 고개를 돌려 함선 내부로 발을 내딛었다.

*     *     *

드로이드가 길을 안내해주는 동안 벤은 곁눈질로 함선 내부를 살폈다. 디스트로이어 내부는 무척이나 크고 넓었으며 그만큼 많은 층수와 엘리베이터, 계단, 방을 자랑했다. 만약 앞에서 길을 안내해주는 드로이드가 없었다면 벤과 아나킨은 필시 이 안에서 길을 잃었을 정도로 방대했다. 과연 제국의 주력함급. 제국의 2인자인 다스 베이더가 타고 다닐 만한 함선이었다.

한참을 살펴보던 벤은 내부에 발을 들인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삼엄한 바깥과는 달리 데바스테이터호에는 당초 예상했던 경비보다 턱없이 적었다. 함선에 들어온 지 10분밖에 안 흘렀지만, 그들이 만난 경비는 스톰트루퍼 두 명과 드로이드 두 대뿐이었다. 심지어 그 드로이드는 밖에서 보았던 전투 드로이드가 아니라 R2-D2나 C-3PO와 같은 비전투 드로이드였다. 바깥에 깔린 삼엄한 경비처럼 내부도 비슷한 상황이라 예상했는데, 빗나가도 너무 빗나갔다.

“경비가 너무 없는 것 아닌가?”

질문은 벤이 아닌 벤과 나란히 걷고 있는 아나킨에게서 나왔다. 아나킨 역시 벤과 마찬가지로 함선 내부를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아나킨과 처음으로 잠입 임무를 했을 때, 가장 신신당부했던 것이 바로 관찰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아마 또 다른 오비완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을 것이다.

“베이더 경의 명령입니다.”

“명령이라고?”

아나킨이 의아하게 되묻자 드로이드가 동작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벤과 아나킨 역시 걸음을 멈췄다. 앞서 나가던 드로이드는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동작을 바라보던 벤은 등 뒤로 서슬 퍼런 긴장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드로이드의 동작이 유난히 느리게 보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머리속에서 경고음이 윙윙 시끄럽게 울려 댔다. 드로이드의 스피커가 울리고 얼마 뒤,

“이상하군요. 모든 스톰트루퍼와 드로이드를 사막에 풀어 제다이들을 잡아오는 게 베이더 경의 명령이라고 K, 당신이 직접….”

그 말 벤의 시야가 새까맣게 어두워졌다.

드로이드의 끝맺지 못한 말이 허공에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사라진 드로이드의 소리 대신 그 빈공간을 채우는 건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였다. 1초 뒤, 새까맣게 어두워진 시야가 서서히 걷혔다. 점점 밝아지는 시야에 잡힌 건 세로로 두 동강 난 채 땅에 널브러져 있는 드로이드였다. 뜨거운 열에 녹은 회로의 잔해가 이리저리 튀어 있었다. 1초 뒤, 벤은 제 숨이 가빠졌다는 걸 느꼈다.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며 폐가 공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1초 뒤, 벤의 시야 끝에 파란색 불빛이 웅웅 거리는 걸 보았다. 낯익은 불빛이 아롱거렸다. 1초 뒤, 벤은 자신의 손에서 차가운 금속 막대가 느껴졌다. 익숙한 차가움과 무게였다. 1초 뒤, 아나킨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말투가 한껏 꼬여 있었다.

“자세가 무척이나 훌륭하네요. 얼마나 검을 안 잡은 거예요? 마스터가 광선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광선검이 마스터를 휘두르는 줄 알았어요.”

총 5초가 지나서야 벤은 자신이 드로이드를 베었다는 걸 깨닫았다. 벤은 제 손에서 웅웅 거리는 광선검을 껐다. 광선검을 쥐고 있는 두 손이 덜덜 떨린다. 혈색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린 손을 보니 조금 전 자신이 얼마나 겁에 질렸고, 또 얼마나 자기 불신에 가득 차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용기가 없는 주제에, 겁쟁이 벤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제에 드로이드를 베겠다는 용기는 어디서 솟아난 건지. 드로이드를 일격에 두 동강 낸 건 벤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비전투 드로이드라는 점과 운이 어느 정도 따라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벤은 아나킨의 비꼬는 말에 가볍게 웃어 보였다.

“어린 네가 자주 들었던 잔소리를 스승에게 되돌려주니 제법 통쾌한 기분이겠구나.”

“어느 정도는요. 이따가 여길 탈출하면 꼭 검술 대련해요.”

“…그렇게 못 봐줄 정도니?”

“솔직하게 말하면 상처받으실 거예요?”

“안 받도록 노력해보마.”

“네. 끔찍했어요.”

단호하게 대답한 아나킨은 두 동강 난 드로이드에게 다가가 쓸 만한 부품을 뜯어내고 있었다. 광선검을 수복할 때 필요한 부품을 모으는 듯했다.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부품은 음식과 세안 도구를 사느라 다 써버렸으니 새로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열에 손상이 덜 간, 비교적 쓸 만한 부품을 제 주머니에 넣으며 아나킨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런 뒷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 녀석들 머리를 좀 헤집어 볼 걸…. 아니면 그냥 제가 입을 다물고 있을 걸 그랬어요.”

“아니. 안내해주는 대로 따라갔다면 베이더를 만나야 했을 거다…. 오히려 잘 됐어.”

“저희가 가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너무 늦어지면, ‘제’가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그전에 탈출해야지.”

“그럼 서둘러야겠어요.”

부품을 어느 정도 챙긴 아나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복잡하게 생긴 미로처럼 함선에서 어디로 가야 격납고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무작정 걸어 보기로 했다.

제발 격납고에 도착하기 전까지 베이더와 마주치지 않길. 포스가 과연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벤은 간절하게 빌었다. 아나킨을 또 다른 그와 싸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싸우기엔 지금의 벤은 베이더의 갑주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할 것이다. 고작 드로이드를 베는 것도 엉망으로 벌벌 떨었는데. 지금의 벤이 베이더에게 흠집 하나 못 낸다는 건 윔프 쥐도 알 것이다.

*     *     *

“이곳도 아니네요.”

아나킨의 목소리에 실망이 가득 담겼다. 아무리 그라도 계속되는 허탕에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듯했다. 이번에 발견한 곳은 식당으로 향긋한 음식 냄새가 투구를 뚫고 들어왔다. 아나킨이 만든 수프보다는 못하지만, 만약 벤이 빈속이었다면 곧바로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는 냄새였다. 항시 균형 잡히고 맛있는 식단을 제공한다는 제국 선전 방송의 내용은 거짓이 아닌 듯 보였다. 물론 그 항시 제공되는 음식은 누군가를 착취하여 얻어낸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벌써 열 번째 허탕이다. 격납고 위치를 알 수가 없어 일단 보이는 대로 문을 열고 있지만 나오는 건 격납고 대신 다른 곳이었다. 제다이 의복은 가벼운 천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비교적 무거운 갑옷을 쓴 채로 돌아다니는 건 좀 고역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드로이드를 베어버리기 전에 격납고가 어딘지 물어볼 걸 그랬구나.”

“근데 생각해보니까 우리 예전에 잠입 임무 하던 때가 떠오르지 않아요? 그때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아나킨이 말했다. 그래, 그의 말처럼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 이곳에 잠입해야 할 수도 있고, 이렇게 얻어낸 정보를 나중에 반란군에게 넘겨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자신들이 제국 와해의 밑거름을 다지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희망찬 생각과는 별개로, 벤은 이곳 어딘 가에 베이더가 있다는 생각에 숨이 막혀왔다.

경비가 적어 돌아다니기엔 쉬웠지만, 그렇다고 감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천장으로 살짝만 시선을 돌리면 CCTV가 복도 곳곳을 감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걸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으면 어쩌지? 불길한 생각에 다리가 무겁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간 피식자가 된 기분이었다.

함선에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지? 물론 이렇게 넓고 거대한 함선에서 격납고의 위치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가 피식자라서 이러는 걸 수도 있었다. 만일 벤의 마음이 그릇이라면 불안이라는 이름의 액체가 그릇을 가득 채우다 못해 줄줄 흘러넘치고 있을 것이다.

“아나킨, 서두르자꾸나.”

“네? 잠깐만요, 마스터!”

아나킨이 붙잡는 소리도 무시한 채 벤은 거의 달리다시피 복도를 나아갔다. 철판 바닥에 부츠 굽이 부딪히며 탕탕, 울렸다. 튀는 행동을 하면 의심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저 멀리 밀어버리고 빠르게 들쑤시다 보면 어쩌다가 얻어걸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하지만 그런 벤의 소망을 무시하듯 여는 문마다 얼굴 모르는 스톰트루퍼의 방이 8할, 식당과 비품 보관고, 훈련장이 나머지 2할을 차지했다. 혹여 격납고 위치를 알 수 있는 정보라도 얻을까 싶어 가볍게 방을 훑어보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건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 벤은 드로이드가 되고 싶었다. 복도에 설치된 스콤프 링크를 통해 격납고의 정보를 얻고 싶은 지경이었다. 정보를 알려주던 R2-D2가 사무치게 그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30분이 의미 없이 지나갔다. 어쩌면 이 작전 자체가 틀린 건 아닐까? 그냥 어느 마을에 가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팔고 낡은 우주선 한 대 얻어 타는 게 낫지 않았을까? 물론 마을에는 제국군이 깔려 있지만 벤과 아나킨은 마인드 트릭을 쓸 줄 아는 제다이였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안 들키고 돌아다닐 자신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마을에 가서 우주선을 찾는 게 나을까? 그렇다면 어디로 나가야 하지? 밖에 세워 둔 스피더 쪽으로 가야 하는데. 아니, 아니야. 운 좋게 누군가를 찾아 타투인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제다이를 도와준 사람을 제국군이 가만둘 리 없어. 다시 격납고를…, 를 고민하며 복도를 뛰어나갈 무렵이었다.

“마스터, 앞! 앞을 보세요!”

뒤따라오던 아나킨의 다급한 외침에 벤이 뒤늦게 앞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복도 한 가운데에 낮은 원기둥 모양의 아스트로맥 드로이드가 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뒤늦게 피하려고 했지만 말 그대로 뒤늦은 회피였다. 쾅! 하며 엄청난 소리와 함께 벤과 드로이드가 부딪혔다. 다행히 뒤로 넘어지기 전에 아나킨이 그를 붙잡아주어 충격은 덜 수 있었다. 물론 드로이드와 세게 부딪힌 명치가 욱신욱신거렸다.

“괜찮아요, 마스터? 너무 서두르니까 그렇죠.”

그의 다부진 손이 벤의 팔을 꼭 잡고, 단단한 팔이 벤의 얄쌍한 허리를 부축하고 있는 감각에 벤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토록 가깝고 밀접한 스킨십이 얼마 만이던가. 하지만 그 스킨십에 충분히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이 아픈 충격으로 차분해진 머리가 바로 몇 분 전, 제자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인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아나킨이 오비완의 파다완이었을 때 항상 달고 다니던 말이 바로 신중이었다. ‘신중하거라, 아나킨.’, ‘급하게 행동하면 우리 약점을 다 보여주는 꼴이란다.’, ‘언제나 차분히 생각하렴.’ 늘 호기롭고 호전적인 제자를 키우느라 입에 붙어버린 말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자신이 보여준 모습에 그 신중과 어울리는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신중보다는 경솔에 가까운 무모한 행동이었다.

“고맙구나….”

벤은 염치없이 아나킨에게 기대고 있는 제 몸을 거두며 말했다. 벤은 쭈뼛거리는 몸으로 자신과 달리 뒤로 넘어져 버둥거리는 아스트로맥 드로이드에게 다가갔다. 일반 아스트로맥 드로이드라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발견한 즉시 광선검으로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스트로맥 드로이드는 보자마자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익숙한 색깔과 익숙한 흠집, 그리고 익숙한 성질머리까지.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음에도 온갖 욕을 내뱉고 있느라 일어나지 못하는 이 작은 아스트로맥 드로이드는 벤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드로이드 중 하나였다. 벤은 넘어져서 귀여운 신호음으로 온갖 험한 말을 내뱉고 있는 드로이드를 일으켰다. 그 뒤, 투구를 벗으며 몸집이 작은 드로이드에게 맞춰 몸을 낮췄다.

“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구나, R2.”

R2-D2는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삐릭, 삐릭 욕하던 걸 멈추고 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삐이, 거리는 소리와 함께 툭, 그의 품에 기댔다.

“오, 그래. 안 본 사이에 어리광이 생겼군.”

벤은 버릇처럼 드로이드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아쉽게도 손에 끼고 있는 장갑 때문에 사람보다 차갑고 쇠의 맨들맨들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 타투인에 있는 동안 제법 그리워했던 감촉인데…. 그래도, 장갑 너머로 그리워했던 감촉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기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벤의 뒤에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나킨이 앞으로 나오며 R2-D2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신기하다는 듯이 투구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와, R2는 저기나 여기나 다른 게 없…. 악!”

그건 순식간이었다. 아나킨의 얼굴을 확인한 R2-D2가 벤의 품에서 벗어나 아나킨에게 돌진해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달려든 드로이드에 아나킨은 속수무책으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럼에도 R2-D2는 화가 안 풀렸는지 두 번은 더 부딪혔다. 퍽! 퍽! 하며 딱딱한 쇳덩이가 제 몸에 부딪힐 때마다 아나킨이 악! 아악! 하고 고통에 젖은 소리를 내질렀다. 손에 들고 있던 아나킨의 투구는 저 멀리 날아갔다. 벤이 그 둘 사이를 다급하게 가로막으면서 상황은 중지되었다. 그 과정에서 벤의 손에 들려 있던 그의 투구 역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R2, 네가 어떤 거에 화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아나킨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 아나킨은, 일단 아나킨이 맞지만 네 주인이 아니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삐릭, 삐리릭 소리가 맹렬하게 복도를 울렸다. 욕설이 가득한 삐릭삐릭 이었다. 뜻을 모르고 듣는다면 마냥 귀엽게 보일 수는 있겠으나 애석하게도 벤은 드로이드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입이 거친 드로이드의 말을 번역해주던 금빛 드로이드와도 오랜 시간 함께 보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R2-D2는 벤에게는 비교적 점잖게 쏘아붙였다. ‘협상가로 이름 날린 당신이 이런 말장난에도 능통할 줄은 몰랐다. 말로 하는 건 다 잘하나 보지?’로 비꼼이 한껏 담겨 있었지만, 평소 자주 쓰는 욕설과 비하는 담겨 있지 않았다. 제일 심한 건 아나킨이었다. R2-D2는 자신의 주인, 은 아니지만 주인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니 싫다고 도망간 스승 잡아 오니까 기분 좋냐, 이 XX XX, XXX….’라며 거친 입담을 자랑했다.

그저 얼굴만 같을 뿐인데 처음 보는 스톰트루퍼에게 오해를 사고, 자신이 한 적이 없는 일로 R2-D2에게 욕을 먹고 있는 아나킨이 불쌍하다 못해 안쓰러웠다. 이러다 사고라도 날까 싶은 벤이 R2-D2의 머리에 다시금 손을 얹으려던 찰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아나킨이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벤과 온몸을 써서 그를 때리고 있던 R2-D2 역시 깜짝 놀라 행동을 중단했다. 아나킨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발소리가, 들려요.”

그 말에 벤의 심장이 쿵 뛰었다. 얼른 투구를 쓰려고 했지만, 아나킨의 투구는 물론이고 벤의 투구까지 저 멀리 굴러간 상태였다. 투구를 줍기 위해 발을 뗐지만 애석하게도 빠른 건 발소리의 주인이었다. 코너를 돌아 이쪽으로 곧장 걸어오는 이는 보랏빛 전류가 흐르는 일렉트로 스태프를 든 퍼지 트루퍼였다.

“혹시나 싶었는데 찾아오길 잘했군. 그 얼굴들…. 그래 현상 수배 홀로그램에서 봤지.”

퍼지 트루퍼는 일렉트로 스태프를 붕붕 휘두르며 바로 벤에게 달려들었다. 벤은 넣어두었던 광선검을 꺼내 그 공격을 받아쳤다. 플라스마 검신이 웅웅 울려 댄다. 두 손으로 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아귀가 빠듯하여 덜덜 떨렸다. 벤은 밀리기 전에 그의 배를 발로 찼다. 주춤하는 퍼지 트루퍼에게 강하게 공격을 날렸다. 퍼지 트루퍼가 피하긴 했지만, 광선검이 스치며 갑옷 한쪽이 열에 의해 찌그러졌다.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제다이들은 아까 그 공격으로 날 끝장냈을 텐데, 실력이 녹슬었나 보군. 제다이 마스터?”

“제국군이 그런 걸 걱정해줄 정도로 아량이 넓을 줄은 몰랐는데.”

벤은 광선검을 꾹 쥔 채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먼저 달려들까? 아니면 기다릴까? 십 년 같은 찰나의 고민이었다. 광선검을 꾹 쥐며 그에게 달려들기로 한 그의 귓가에 집중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그의 스승인 콰이곤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기회를 보던 퍼지 트루퍼는 벤이 주춤하자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거친 움직임에 벤은 발을 틀어 몸을 뒤로 뺐다. 정체 모를 목소리의 조언대로 집중하자 퍼지 트루퍼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인 덕분이었다. 퍼지 트루퍼의 팔이 포물선을 그리며 벤의 얼굴 바로 앞을 스쳤다. 벤은 그 포물선을 그리는 팔이 자신을 놓친 동시에 빠르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적의 빈틈을 파고드는 건 언제나 쉬웠다. 벤은 그대로 광선검을 휘둘러 퍼지 트루퍼의 상반신과 하반신을 두 동강 냈다.

“R2, 우릴 격납고로 안내해줘. 어서!”

R2-D2는 아나킨의 말에 그 특유의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나킨 역시 아직도 후들거리는 벤의 손을 잡고 R2-D2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붉은 등이 깜빡이며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분명 자신들을 쫓으라는 신호임에도 벤과 아나킨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미 그 경고음이 울리리라 예상했다.

CCTV 바로 앞에서 제다이의 광선검이 퍼지 트루퍼의 몸을 두 동강 냈으니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하지. 함선 내에 제다이라는 쥐새끼 두 마리가 숨어든 건 곧 함선을 순찰중인 제국군에게는 물론, 함선 바깥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제국군과 마을과 사막에 퍼져있을 제국군에게도 퍼질 것이다. 어쩌면 이미 퍼져서 함선으로 귀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함선에 모이기 전에 아나킨과 벤은 한시라도 빨리 이 함선을, 타투인을 벗어나야 했다.

격납고까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만일 R2-D2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둘은 영영 격납고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격납고에 도달하기까지 총 열 다섯 개의 복도와, 왼쪽 모퉁이가 세 개, 오른쪽 모퉁이가 일곱 개, 네 개의 계단, 열 일곱 개의 문을 지나쳐야 했다. 게다가 벤은 중간중간 마주친 제국군 일곱 명을 베어야 했기 때문에 아나킨보다 체력 소모가 너무 컸다.

호신용으로 쓰라고 아나킨에게 광선검을 넘겨주긴 했으나 그가 시스의 핏빛 광선검을 드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모습은 언제나 벤의 속을 뒤집어 놨으니까. 아마 그 모습을 본다면 달갑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기껏 아나킨이 만들어준 스튜를 게워 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벤은 아나킨이 검을 들기도 전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제국군을 베어 넘겼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그래도 검술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닌지 그가 검을 휘두를수록 벤의 자세가 점점 오비완과 닮아간다는 점이었다.

“마스터, 괜찮아요?”

“그래, 헉…. 아직, 은 더…. 움직, 흐. 일 수 있, 단다..”

벤이 숨을 할딱이며 말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 폐가 날카로운 무기에 난도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팠고, 평소라면 자각도 못 했을 들숨과 날숨의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목이 너무 말라서 물 한 잔이 간절했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벤을 지켜보던 아나킨은 기꺼이 자신의 어깨를 내주었다. 오비완의 축 처진 몸은 별다른 저항 없이 아나킨에게 기댔다.

“R2, 격납고 문 열 수 있지?”

새침하게 삐빕, 거린 R2-D2는 스콤프 링크 쪽으로 다가가 이리저리 조작했다. 여러 번 돌아가는 소리가 반복할 때쯤, 문 위에 달린 전등에 푸른 불이 들어오며 문이 열렸다. 중간에 R2-D2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이 작은 친구가 없었더라면 벤과 아나킨은 문에 개구멍을 뚫느라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제다이 시절에도 느꼈지만, 이런 잠입 임무에서 절대 없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격납고에 들어선 둘의 시야에 검은색의 무언가가 잡혔다. 그 검은색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아나킨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정체를 알고 있는 벤은 제 온몸의 털이 주뼛 서는 게 감각이 느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숨을 어떻게 쉬고 내뱉어야 하는지조차 까먹을 뻔했다.

“R2가 어디 갔나 했더니, 당신과 함께 있었군요. 아침부터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기계음이 섞인 이질적인 목소리에 벤의 몸이 공포로 떨었다. 저편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솟아오른다. 긴장으로 점철된 심장이 귀 바로 옆에서 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심장박동이 무척 컸다. 사령실에서 오지도 않을 자신을 기다릴 거라 생각했던 그가 예상을 뒤집고 격납고에 있는 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전개였다.

“왜, 네가…. 넌, 너는 사령실에서….”

벤은 너무 놀라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베이더는 굳어 있는 벤을 향해 팔을 벌렸다. 음성 변조된 목소리에 은은한 웃음이 흘렸다. 벤은 베이더가 보여주는 그 여유에 위화감이 들었다.

“기다렸어요, 오비완. 나의 마스터.”


이거 쓸 때는 제다이 오더의 몰락을 플레이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참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서바이버도 해야하는데 게임을 사면 방치해두는 게 취미라 그런지 손이 잘 안 가네요.. 그나저나 웃긴 말을 쓰고 싶기는 한데 딱히 생각 나는 게 없어서 슬푸뮤 한 달에 한 번씩 올려서 언제 완결 내나 하는 생각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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