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오비] Drabble 01-04
01 아나킨의 사랑을 거절하는 오비완.
나는 너를 기억한다.
무어가 그리 서러운지 애달프게 울던 울음은 아주 오랜만에 봐, 생경한 장면에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 옛 파다완에게 모든 걸 줄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결국 온 힘을 다해 쏟아부은 애정은 언제나 흘러넘쳤다. 자각했다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물쩍 받아들이고 말아 이 사달을 내고 말았다.
"또 그렇게 피하잖아요."
"아나킨."
"당신 알고 있잖아. 그런데 왜 자꾸 피해요. 왜."
"..."
마음만큼 행동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나이를 먹어 두려운 게 많아져서인지, 아니면 이 기꺼운 감정이 저를 제어하는 게 무서운지 알 수 없어 오비완은 제 턱을 틀어쥐는 손을 허용했다. 이상할 정도로 의수로 저를 잡는 걸 꺼리던 아이의 눈동자는 이제 오비완이 가져서는 안되는 수많은 감정으로 뒤엉켰다.
너를 사랑한단다. 하지만 내 감정이 너의 마음을 온전히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해.
상처를 주는 것도, 그래서 수많은 미련을 만들어낸다는 것도 알면서도 오비완은 결국 입술에 내려앉는 온기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찢어진 마음은 심장을 감싸 안고 그대로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든다.
그럼에도 사랑은 아니어야 한다.
02 아나오비라기보다는 베이더밴이 맞는듯. 무스타파에서 아나킨 썰지 못하고 두고 온 오비완이 결국 붙잡혀서 그만… 인데 뭐 이런게 나왔지.
이제는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남자에 아나킨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결국 남자의 미련은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됐고, 아나킨은 남자를 가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 족쇄가 남자를 괴롭게 만들 거라는 걸 알았지만 아나킨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족쇄를 잡아당겼다.
"오비완."
낮게 이름을 부르자 고통 어린 신음성과 함께 파르르 떨리던 긴 속눈썹이 다시 감긴다. 어쩔 수 없지. 평소라면 뺨을 내리쳐서라도 깨웠겠지만, 아나킨에게는 오비완 한정으로 일말의 동정심 정도는 남아 있었다. 물론 당사자가 이 말을 듣는다면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거부했겠지만.
"일어난 거 다 알아요."
그러게 왜 자꾸 도망쳐요. 그러니까 당신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다치잖아.
귓가에 가라앉는 음성에 아나킨이 드문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떠졌다. 물기를 머금고 이지러진 눈동자는 이내 개암 빛이 됐다, 녹빛으로 흐트러졌다, 짙은 어둠이 깔린 새벽녘의 눈동자로 변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둥근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아나킨은 기다렸다는 듯이 좌절과 슬픔으로 얼룩져 흐트러진 뒷머리께를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이끌려온 신체는 언제나처럼 가벼웠다. 이 방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의족은 이미 저만치 침대 밖에 던져진 지 오래였고, 허벅지 아래로 비어버린 그 위를 긴 옷자락이 내리덮었다.
"따라 해봐요. 다시는 혼자 나가지 않겠다고."
"...."
"역시 행성 하나로 부족한가?"
"아나킨!!"
"거 봐, 대답할 수 있으면서 이 말은 왜 못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네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아나킨, 제발. 모든 건 내 잘못이야. 그걸 부디 타인에게 전가해서는....
고작 입술을 달싹이며 항의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제 탓만 하는 가련한 모습에 아나킨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왤까? 당신의 학습 능력은 왜 이런 데서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 극에 치달으면 제 안위를 챙기기 급급한 이들 속에서 유일하게 제 잘못을 탓하는 어리석은 남자에 아나킨은 여전히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 했어. 제 무릎 위로 툭툭 떨어지는 둥근 눈물 자국에 아나킨은 좀 더 부드러운 손길로 둥글게 말린 상체를 끌어당겨 올렸다. 힘없이 딸려온 신체는 조금 더 낮지만 아나킨과 정면으로 마주했고, 다시 또 일렁이는 눈동자에 아나킨은 눈두덩이 위로 깃털 같은 키스를 남겼다.
"다음은 정말 없어요. 알잖아요. 내가 이렇게까지 관대하게 참는 건 당신뿐이라는 걸."
"제발..."
"당신이 애원하는 건 마음에 드네."
"...아나킨."
긁힌 음성 아래로 다시 푸른 빛이 떠오른다. 파도처럼 밀려들어 오는 감정을 끝내 갈무리하고 다시 맑게 퍼지는 눈동자는 여전히 처음 만났던 어린 날의 기억과도 같다. 이제 음성이라고는 제 이름 말고 부를 수 없는 남자의 목덜미에 깊게 남은 붉은 자국을 어루만지며 아나킨은 열이 오른 한숨을 내쉬었다.
03 루프한 오비완이 콰이곤과 아나킨을 살리기 위해 제다이의 길을 버렸다는 설정이었는데 ....
이제 제다이를 그리워할 자격은 오비완에게 없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붙잡고 간신히 기회를 얻었을 때 밀려들어 온 지난 시간선의 기억은 오비완을 압도했고 며칠을 꼬박 앓아누웠다. 걱정하는 저의 커다란 마스터에게 목구멍으로 자꾸 넘어오는 쓰디쓴 위액을 삼키며 오비완은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 비전이었어요. 그건, 불안정한... 선택된 미래를 위해 어릴 적부터 오비완의 꿈을 차지한 비젼을 들먹였고, 그건 태어나서 한번도 비전을 가져본 적이 없는 콰이곤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시선을 감추지 못하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지 말아야지, 내 작은 파다완아. 커다란 손의 온기가 뺨에 닿았고 아직 열에 들뜬 오비완은 실없이 웃으며 눈꼬리를 가늘게 접었다. 오비완 괜찮아요? 가물거리는 시야로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난 괜찮아, 아나킨. 하지만... 점점 감기는 시야와 함께 소리도 희미해진다. 그 애가 뭐라 했더라.... 분명.....
"오비완."
들어오다 말고 멈칫하는 인기척에 오비완은 어깨를 으쓱이며 한 손에 들고 있던 헬멧을 다시 썼다. 이미 공개된 얼굴이지만 상대는 와치의 아이들 소속이었다. 그들의 신앙을 믿지는 않고 이제는 어느 것도 믿지 않는다지만, 굳이 타인의 믿음을 부정하며 존중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벌써 다음 임무가 정해진 건가?"
"가기 전에 인사는 해야지."
헬멧 아래로 퍼지는 웃음기 어린 음성에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동시에 잠시 정신을 흐트리던 기억은 이미 저편으로 사라진다. 오비완은 갑작스런 남자의 방문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임무가 끝나고 칼레발라 공작을 찾아가면 자네를 만날 수 있는 건가?"
"농이 지나치군."
"자네가 칼레발라 공작의 두 번째 그림자 중 하나라는 사실은 다 알고 있는데 새삼스레."
"실없는 소리야."
습관처럼 팔짱을 꼈다 어색하지 않게 천천히 팔을 푼 오비완은 자꾸 젖어드는 추억을 지우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와 친우를 배웅했다. 남자를 태운 레이저 크레스트가 허공으로 떠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오는 연락에 오비완은 헬멧을 벗었다. 자꾸 묻어둔 시간을 떠올리는 건 오늘 만나는 상대가 자신이 버려두고 온 기억이어서겠지.
"Elek, Ni slanar Hall."
망설임 없이 홀로 방향을 돌린 오비완은 저 멀리 보이는, 이제는 낯선 진갈색의 옷자락에 어쩔 수 없이 우겨 넣었던 기억을 다시 끄집어냈다. 우습게도 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코러산트의 억양이 낯설기 짝이 없다. 걱정스러운 새틴의 시선을 모르는 척 받아내며 오비완은 생각보다 덤덤한 자신에 살짝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만달로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Jetiise."
어설프게 남은 미련은 전부 자신이 끌어안아야 할 몫이다. 흔들리는 감정이 포스에 실려 홀에 가득 퍼진다. 오비완은 제 옛 스승과 제자를 향해 현실을 못 박듯 환영 인사를 내뱉었다. Ba'gedet'ye. 이제 자신은 제다이가 아니라 만달로리안이었다.
04 데굴데굴 구르는 사제지간이 보고 싶었는데 구르는건 오비완뿐
으득하고 뼈가 일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숨 먹은 비명이 제어실의 적막을 가로질렀다. 아니 이제 제어실이 아니라 고문실로 변해버린 현장에서 아나킨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제 마스터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실핏줄이 터진 눈가는 붉게 짓물렀고, 헐떡이는 숨 위로 질린다는 듯 비웃음이 쏟아졌다. 언제나 단정하게 빗어 넘긴 붉은 빛 머리는 힘없이 우악스러운 손에 이끌려 들어 올려졌다.
"이렇게 보니 제다이도 별거 없잖아?"
목덜미에 채운 포스 구속구 아래로 다시 또 핏줄기가 흘러내렸고, 아나킨은 으르렁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저 역시 포스가 제한된 채로 묶인 상태라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오비완보다는 멀쩡했다. 제 마스터의 납치를 사주한 자는 오비완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방식은 비열하고 가학적이었다.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망가뜨려 데려가야 한다며 낄낄거리던 무뢰배들은 유일하게 손대지 말라 한 오비완의 얼굴을 보며 아쉬워했다. 잔인하게 짓밟힌 신체와 달리 말끔하기 그지없는 얼굴은 평온했다. 하지만 그 아래로 잘게 떨리는 신체는 예민한 옛 파다완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고 그의 고통을 쉬이 읽어낸 아나킨은 고인 눈물을 털어내며 오비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비완!!!"
"아...나킨....."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오비완에 흥이 식었는지 마치 쓰레기를 던지듯 오비완을 툭 떨구고 나갔고, 굳게 닫힌 문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발걸음 소리가 완벽하게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저를 옭아맨 구속구를 종잇장처럼 짓이겼다.
"마스터... 오비완... 정신 차려요. 저예요, 아나킨. 나라구요, 오비완...."
둘이 온전히 탈출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오비완은 당연하게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았다. 저들을 잡으려 드는 사냥꾼의 목적에 부합한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로. 저를 붙잡은 이가 아나킨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대로 기절한 스승을 끌어안은 제자는 포스 제어기가 달린 목덜미를 어루만지다 그대로 안아 올렸다. 힘없이 추욱 늘어진 무게는 아나킨이 움직이는 데 있어 결코 방해될 요소가 되지 못했다. 이 쓸모없는 미련한 희생이 오로지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지키기 위한 오비완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아나킨의 소리 없는 분노를 더욱더 강화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왜 그렇게까지 나를...
"괜찮아요, 오비완. 내가 잘하면 되니까...."
앞으로는 어느 누구도 당신을 괴롭힐 수 없어요, 마스터.
안정적인 호흡을 확인하고 의수로 오비완의 허리께를 붙잡아 자신의 어깨에 업어올린 푸른 눈동자 위로 용암처럼 붉은 금빛이 찬란하게 떠올랐다. 끼이익 기묘한 소리와 함께 단단한 문은 펑 하고 터져나갔고 어둠 속에 떠오른 건 희미하게 남은 푸르름마저 살라 먹은 차가운 금빛의 태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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