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칙적애착궤도와 범우주적살별프로토콜

[아나오비] 변칙적 애착 궤도와 범우주적 살별 프로토콜_12


베이더의 사랑은 기괴할 정도로 뒤틀린 집착과 욕망으로 점철된 무언가였다. 만일 다른 이가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심연보다 깊고, 미궁보다 어지러운 그 감정을 감히 사랑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베이더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처럼 숭고하긴 커녕 추잡스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감정이었음에도, 베이더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 추잡스러운 감정을 말하는 것이었기에.

그리고 베이더의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랑은 한때 그의 스승이었던 오비완 케노비만을 향해 있었다.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처럼 패배자에게도 배울 점이 있는 법이다. 베이더는 자신이 찢고 나온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대부분을 부정했으나 딱 하나 사랑에 취약한 아나킨의 연정만큼은 그대로 계승했다. 베이더가 생각하기에 패배자에 불과한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값진 것이 바로 그 감정이라 여길 정도로 그 감정을 숭배했다. 생명체의 원초적인 감정. 인류에게는 이 사회라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만든 원인. 무엇보다 베이더라는 존재를 태어나게 만든 감정인데 감히 숭배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아나킨은 오비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오비완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꿈을 꾸고 혼란스러워할 때, 자신에게 내밀어진 펠퍼틴 아니 다스 시디어스의 손을 구원의 동아줄 마냥 부여잡은 것도 다 오비완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을 포스에 흘러 보내는 제다이와는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아마 아나킨의 이런 유약한 성정을 32 BBY의 윈두와 요다가 알아차렸다면 아나킨이 선택 받은 자라고 주장하는 콰이곤의 주장을 묵살하고, 죽은 콰이곤의 유지를 이어받아 아나킨을 파다완으로 들이려는 오비완의 의지에도 강력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제다이 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어머니를 잃으며 첫번째 상실이라는 괴로움을 겪은 아나킨은 두번째 상실마저 겪고 싶지 않았다. 그 잃어야 하는 대상이 오비완이라면 더더욱.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은 그를 유약하게 만들었으며 스스로를 향한 비난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래서 눈 앞의 의장이 제다이는 물론 자신도 찾고 있던 시스 로드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을 잡은 것이다. 오비완만 잃지 않는다면 포스의 밝은 면이던, 어두운 면이던 상관없었다.

그런 아나킨의 헌신적인 연정이 그의 삶을 계승 받은 베이더에게도 똑같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아나킨을 찢고 태어난 다스 베이더는 다스 시디어스의 명에 따라 사원을 습격하고 제다이들을 죽여 나갔다. 발을 내딛는 사원의 모든 곳이 익숙했고, 마주친 제다이와 영링들의 얼굴 또한 눈에 익었음에도 그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사원이 불을 질렀다. 뿐만 아니라 한때 동료라 여긴 제다이들의 살 타는 냄새를 온 몸에 뒤집어쓴 채 고깃덩이로 변한 시체를 어떠한 감흥도 없이 짓밟았다. 뿜어져 나온 핏물이 옷자락을 적시고, 귀를 찢을 것 같은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져도 그는 계속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머리 속에는 더 이상 집이 되어 줄 수 없는 건물이나 몇 번 본 것에 불과한 제다이들이 아닌 오로지 그가 구해야 하는 오비완 케노비로 가득했으니까.

다스 베이더라는 좋은 무기를 손에 넣은 다스 시디어스는 베이더에게 온갖 더러운 일을 시켰다. 그리고 베이더는 제국의 개라 불리우면서도 그의 명에 충실하게 따랐다. 사랑하는 오비완 케노비를 살릴 수 있는데 그깟 멸칭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반란군을 잔혹하게 죽이고, 살아남은 제다이를 숙청하고, 황제의 추잡한 명령을 기꺼이 이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오비완이었다.

비록 자신의 신념과 반대로 걷는 제자의 행보에 질려 자신의 곁을 떠나는 배신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그는 살아있었다. 타투인에서 본 그는 좀 야위긴 했지만 멀쩡히 숨쉬고 있었다. 그런 오비완의 모습을 보며 베이더는 생각했다. 자신이 포스의 어두운 면에 넘어갔기에 그가 살아있는 것이라고!

오비완 케노비는 자신의 희생 덕분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비완 케노비를 향한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그를 구한 것이다!

오비완은 자신의 제자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야 했다. 그걸 알고 제자의 곁을 떠나는 배신은 저지르지 말아야 했다. 평생 제자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사랑을 주어야 했다. 제자는 사방으로 뛰고 구르며 스승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건만, 스승은 그런 제자의 노고를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그를 질린 눈으로 보고, 기어이 자신의 곁을 떠나고야 말았다. 그 과정에서 베이더의 팔 다리를 자르는 건 덤이었다.

오비완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으로 인해 비탄에 빠진 베이더는 지난 5년간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상상 속에서 오비완을 다채로운 방법으로 고문하고 또 고문했다.

어떤 날은 멀쩡하게 붙어있는 그의 사지를 잘랐고, 또 어떤 날은 얇게 포 뜨기도 했다. 그의 매끈한 목을 자르거나 힘껏 졸라 부러트리기도 했고, 새하얀 몸에 칼로 후빈 자상을 남기거나 깊게 패인 창상을 남기기도 했다. 때로는 온 몸에 불을 질러 화상을 입히기도 했고, 뜨겁게 달군 인두로 자신의 노예라는 자국을 남기며 채찍질하기도 했다. 손톱과 발톱을 뽑고, 혀와 손가락을 자르고, 눈알을 파내고, 발목을 찢고, 치아를 부러뜨리고….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폭력을 그에게 가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증오가 조금이나마 해소가 될 때까지. 하지만 상상은 상상에 불과했다. 상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그에게는 여전히 오비완이 없었다. 아무리 분풀이를 한들, 증오가 해소될 리 만무했다.

베이더가 가지고 있는 오비완을 향한 증오는 쉽게 풀리지 않을 만큼 거대했지만, 또 그만큼 미소하기도 했다. 상상 속 오비완이 먼저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고, 자신의 손길을 갈망하며, 어떻게든 화를 풀어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이면 그의 가슴을 태우던 증오는 단숨에 사랑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그 상상에서 깨어날 때까지 오비완의 몸을 끌어안았다. 비록 상상으로 빚어진 몸에서는 싱그러운 편백나무 냄새도, 보드라운 피부도, 따뜻한 체온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제 품에 안겨 있는 게 오비완이라는 사실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베이더는 나름의 규칙을 만들었다. 만일 현실에서 마주한 오비완이 자신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지금처럼 끌어안아주고, 용서조차 구하지 않고 거만하게 나온다면 죽이지는 않되,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안겨주겠다고.

“단호박 타르트가 먹고 싶구나. 생크림 듬뿍 얹어서.”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정말로.

“여기가 무슨 임산부를 위한….”

베이더는 자신의 앞에서 태연하게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는 오비완의 모습에 날 선 목소리로 말했지만 오비완과 눈을 마주하자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비완의 얼굴을 보자마자 모난 감정이 금세 둥글둥글해진 탓이었다.

베이더는 자신의 덧없는 분노와 증오에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거만하게 나온다면 죽이지는 않되,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안겨주겠다고? 그런 다짐과는 달리 5년동안 삭히고 묵힌 분노와 증오는 오비완의 얼굴을 보자마자 맥을 못 췄다. 물론 눈 앞의 오비완은 자신의 오비완이 아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적도 없고, 자신의 팔다리를 자른 적도 없으며, 그 배에 품은 것 또한 자신이 아닌 다른 아나킨의 자식이었다.

어쩌면 화를 내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 분노와 증오가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베이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 자신의 감정은 그렇게 섬세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감정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지 않던가? 오비완의 얼굴, 오비완의 목소리를 가진 그를 보자마자 폭력적이고 난폭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정작 그와는 전혀 닮지 않은 자들도 그저 자신이 오비완의 괘씸함을 곱씹는 도중에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죽이지 않았는가? 당장이라도 오비완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고, 팔 하나라도 베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베이더는 눈 앞의 오비완을 털 끝 하나조차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말랑말랑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리석었다.

아, 원래 분노와 증오라는 감정은 이렇게나 덧없는 감정이었던가?

“그래서 싫으니?”

“오, 설마요. 말씀하시자 마자 바로 주방에 연락했답니다, 오비완 주인님. 120분만 기다려주세요.”

베이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비완의 옆에서 그가 마실 루이보스 차를 따르고 있던 C-3PO가 말했다. 베이더는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고는 푸르게 빛나고 있는 함선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베이더가 데려온 오비완이 임신했다는 것을 안 C-3PO는 당장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을 알아보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온 홀로넷을 뒤져 각종 논문과 기사, 잡지들은 물론 출처가 불분명한 자료까지 수집해 교차 검증까지 거쳤다.

C-3PO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베이더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추린 데이터를 토대로 오비완을 위한 식단표를 짠 뒤, 데바스테이터 호의 메인 주방장 드로이드에게 전달까지 해 둔 참이었다. 다행히 명령대로 움직이는 드로이드라 별다른 의심은 사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마 시간이 되면 오비완 몫의 음식이 베이더의 음식과 함께 방으로 도착할 것이다.

“역시 3PO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유능하구나.”

“오, 그런 칭찬을 듣다니 집사 드로이드로서 너무 영광스러워요.”

지금 C-3PO가 오비완에게 건네고 있는 루이보스 차 또한 ‘차가 마시고 싶다’는 오비완의 말에 열심히 검색한 결과였다.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각종 과일과 간식거리 또한 오비완이 원했고, 그의 요구를 들어준 C-3PO의 작품이었다. 제국에 대항하는 반동분자라면 임신을 했든 말든 그냥 고문실에 가둬버렸을 텐데. 이만큼 참아내고 있는 스스로의 인내심에 감탄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베이더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오비완은 C-3PO가 내어준 루이보스 특유의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마셨다. 퍽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래….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지.”

오비완은 느릿하게 베이더를 바라보았다. 오비완의 맞은 편에 앉아 팔짱을 낀 채 하이퍼 스페이스의 푸른 빛을 바라보고 있던 베이더와 눈을 마주했다. 박타탱크에서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 그의 머리는 푹 젖어 있었고, 갑주를 챙겨 입은 몸에서도 박타 냄새가 풍겼다. 베이더는 기껏 C-3PO가 내려준 차에는 손조차 대지 않은 채 은하계의 모든 고독을 끌어안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바로 고개를 들어 시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눈을 마주했음에도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내비치고 있는 청회색 홍채에 베이더가 톡 쏘듯이 물었다.

“뭘 그렇게 봐요?”

“별거 아니란다. 뭐, 네 말 대로 이곳은 임산부를 위한 센터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를 가져서 힘든 사람에게 단호박 타르트 하나 내어주지 않는 옛 제자가 서운해서 말이다.”

오비완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로 주인의 목으로 돌아간 뒷말을 쉽게 유추한 오비완이 여상한 어투로 말했다. 베이더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인질 주제에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군요. 당신이 일반 인질이었다면 제 방이 아니라 감옥에서 고문이나 당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 눈으로 제 얼굴 바라볼 시간에 제 넓은 아량에 고마워하기나….”

“인질? 그거 혹시 날 지칭하는 말이니?”

오비완은 베이더의 말을 끊고 빈정거리며 말했다. 자신의 말을 끊은 것도 모자라 비웃는 듯한 그의 말투에 베이더는 표정을 단단히 찡그렸는데, 평소와 달리 투구를 벗고 있는 탓에 그의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오비완에게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고작 말이 잘리고 비웃음 당했다는 이유로 한껏 표정을 굳힌 베이더의 모습에 오비완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그런 오비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잡아내지 못한 베이더는 곧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 당신 말고 또 누가 있는데요?”

“그래, 나는 내가 맡은 게 순진한 양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늑대였을 줄은 몰랐구나. 그래서, 스승을 인질로 삼은 늑대의 계획이 뭔지 들어나 볼까?”

“…별거 없어요. 당신이 저에게 있다는 걸 안다면 또 다른 저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 제 오비완에게서 떨어지겠죠.”

“흠, 아나킨이 날 구하기 위해 너의 오비완에게서 떨어질 거라는 근거는 어디서 도출했는지 궁금한데 더 말해보렴.”

오비완이 흥미롭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베이더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굳이 근거를 도출할 필요가 있나요? 저도 한 때 아나킨이었는데.”

“네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바로 네 오비완에게 달려갈 거라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맞니?”

“정확해요.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해도 결국 그의 본질이 아나킨이라는 건 변함없어요. 당신이 제자의 생각을 단숨에 꿰뚫어보는 오비완인 것처럼.”

베이더는 C-3PO가 찻주전자에 씌운 티코지를 벗기고는 어느 새 비어 버린 오비완의 찻잔에 찻물을 따라주었다. 루이보스의 붉은 빛으로 물든 찻잔에서는 폴폴 새하얀 김이 올라왔고, 이를 타고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마지막으로 떨어진 물방울에 일렁이는 붉은 물을 바라보던 오비완은 찻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나랑 내기 하나 할까? 장담하건대 내 아나킨은 너의 오비완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거야.”

“…많이 심심하신 가봐요? 당신 답지 않게 그런 어쭙잖은 내기를 다 하시고.”

“함선 복도도 못 거닐게 하는 누군가 덕분에 좀이 쑤시긴 하지. 그래서 너는 내 아나킨이 너의 오비완에게서 떨어진다는 쪽에 걸 거니?”

“…좋아요. 근데 그냥은 재미없으니까 진 사람은 소원 들어주는 건 어때요?”

“빈털터리 임산부에게 뜯어먹을 게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래, 재미있겠구나.”

웃는 얼굴로 승낙한 오비완은 방금 전 베이더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앞에 놓인 버터 쿠키를 베어 물었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부드럽게 부서지는 쿠키의 식감과 버터의 고소한 향과 맛을 즐기던 오비완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다가 덧붙였다.

“이미 승낙해 놓고 뒤늦게 이런 조건을 붙여서 미안하다만…. 키스나 섹스 같은 소원은 못 들어주니 그건 유의해주렴. 엄연히 ‘바깥양반’이 있는 몸이라서 말이다. 바람을 피웠다간 그 녀석이 길길이 날 뛰거든. 평소라면 몰라도 분노로 날뛰는 아나킨은 말릴 수가 없어.”

그의 말에 새로 따라 김이 폴폴 올라오는 오비완의 차와는 달리 이미 식을 대로 식어버린 자신의 차를 마시던 베이더가 푸읍, 거리며 입안을 채우던 찻물을 내뿜었다. 다행히 입에 머금고 잇던 찻물이 적었고, 바로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인 덕에 앞에 앉아있는 오비완에게 튀진 않았지만 하얀 식탁보는 찻물에 젖어 빨갛게 물들었다.

베이더의 반응에 놀란 C-3PO는 목에 찻물이 걸려 연신 콜록거리는 베이더에게 티슈를 건네준 뒤, 마찬가지로 찻물에 젖어 든 갑주를 꼼꼼하게 닦아냈다. 요즘 나온 기계나 드로이드 같은 경우 방수 기능이 필수적으로 들어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불륜 같은 불장난을 하기엔 너나 나나 나이가 너무 많지. 위험하고 위태로운 장난은 예전에 졸업하고도 남을 나이야.”

콜록이는 베이더를 바라보면서도 오비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연신 기침을 하는 도중에도 베이더는 생각했다. 그럼 젊었다면 해볼 생각이 있었다는 거야? 뱃속에 애도 있으면서!

한참동안 기침하던 베이더는 겨우 진정한 뒤 눈 앞의 오비완을 향해 도끼눈을 떴다. 하지만 오비완은 아무리 노려봐도 움츠러들거나 몸을 사리진 않았다. 애초에 이런 걸로 겁먹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오비완은 눈 앞의 베이더가 자신을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은하계의 악몽이라 불리우며 수많은 생명을 으스러뜨린 전적이 있다고 해도, 검을 들고 휘두르지 못하는 이상 오비완에게 베이더란 그저 이빨 빠진 호랑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은하계의 학살자. 그걸 알고 있기에 샛노란 눈동자를 지닌 베이더를 앞에 두고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도도하게 앉아 차를 홀짝일 수 있는 것이었다.

“뭘 그렇게 매섭게 보니? 머리 뚫리겠구나. 아, 설마…. 정말로 그런 소원을 생각하고 있었니? 그런 거라면 미안하진 않고 안타깝게 됐다고 말해주마.”

“당신 진짜….”

오비완을 타박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베이더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이야기의 주제가 갑자기 그쪽으로 튀어 버리니 그의 머리도 그쪽으로 튀어 버린 탓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불장난을 하기엔 좀 늙었어도, 아직 혈기왕성한 나이인 건 변함없었으니까. 게다가 바로 눈 앞에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꼭 닮다 못해 아예 그가 앉아있는데 오죽하겠는가?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베이더의 눈은 오비완의 몸을 세세하게 훑었다.

풍년이 든 밀밭과 닮은 머리카락과 수염은 관리가 잘되어 있어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였고, 임신을 하면 호르몬이 날뛰어 얼굴 곳곳에 트러블이 올라온다는 것 치고는 그의 피부는 무척이나 뽀얬다. 예전부터 예쁘다고 생각한 손가락 역시 길게 쭉 뻗어 있었으며 손톱은 잘 다듬어져 있었지만, 그 사이에 자라기라도 한 건지 살짝 길었다. 등이나 팔을 긁기라도 하면 그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였다. 검사 답게 다부진 팔뚝은 탐스러워 보여서 한번 주물러 보고 싶었다. 그리고 살짝 부푼 가슴과 볼록하게 부푼 배까지. 속살 하나 내비치지 않았지만 오히려 야한 속옷을 걸치는 것보다 때묻지 않고 고상하고 도도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오비완에게 더 잘 어울렸고, 그건 베이더로 하여금 음심을 자극했다.

즉,

“…당신한테는, 안 서요.”

이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다.

“배불러서 뒤뚱거리는 사람에게 욕정을 느낄 정도로 짐승 새끼는 아니거든요.”

의심할 여지없이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비완은 베이더의 말에 살며시 웃음을 보였다. 오비완은 협상가로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했다. 불쾌함을 감추며 짓는 웃음이나 정말 기뻐서 웃는 웃음과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비완의 웃음은 아무리 오랜 시간 함께 했다 하더라도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지금도 제자가 짐승새끼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서 웃는 건지 아니면 이걸 어떻게 골려줘야 좋을까를 고민하며 짓는 웃음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만일 네가 임산부에게 선다면 의료 드로이드를 불러오려고 했지.”

“하, 그럼 당신 제자에게도 의료 드로이드는 필요 없었겠네요. 당신 제자도 배가 불러 뒤뚱거리는 당신에게는 안 선다고 했나 보죠?”

“오, 그 아이는….”

원래는 그의 속을 긁기 위해 던진 말이었으나, 오비완은 그런 건 공격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말하듯이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물로 목을 축인 그가, 입을 뗐다.

“서더구나.”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베이더는 오비완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할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오비완은 그런 베이더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럼 그 말은 왜 꺼낸 거예요?”

“남의 배우자한테 세우는 게 상식은 아니지.”

그리고 나서 오비완은 배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비완은 습관처럼 배를 자주 쓰다듬곤 했는데 부푼 배의 곡선을 따라 그리는 듯한 모습이 대부분이었지 지금처럼 아랫배를 쓰다듬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 아랫배는 아마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생경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자, 또 상대에게는 적나라하게 보이는 위치였다.

“제가 당신을 해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나 본데, 계속 이러시면 저도 가만히 안 있어요.”

“오, 그래 그것 참 무서운 협박이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가만히 안 있을 거니? 날 묶어 두고 어디 감금이라도 할 작정이라면 기꺼이 응해주마. 아니면 내 팔을 자르거나 포를 뜨는 방법도 있겠구나. 혹은 네 특기인 목 조르기도 있을 거고, 혹은 그냥 목을 잘라버려도 좋겠지. 칼로 베거나 찌르고 온 몸에 불을 지르거나 불에 달군 인두로 내 피부를 지진다 해도 가만히 있어주마. 야만적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게 색다르게 다가올 때도 있는 법이거든. 아니면 손톱과 발톱을 뽑고, 혀와 손가락을 자르고, 발목을 찢고, 눈알을 파내고, 치아를 부러뜨리고….”

오비완의 말에 베이더의 얼굴이 한 순간에 일그러졌다. 그저 상상만으로 떠돌던 생각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리는 것이 과연 유쾌한 일이겠는가? 오비완의 말은 베이더 안에 있던 어떠한 감정을 이끌어냈다. 수치심? 아니면 죄악감?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대한 갈피를 정확하게 잡을 수는 없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떻게든 그의 입을 막아야 한다.

“잠깐, 만요.”

베이더는 오비완을 다급하게 불렀다. 하지만 베이더의 목소리는 어떠한 제지도 되지 못한다는 듯이 그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내 뱃속을 긁어버리는 방법도 있지.”

“잠깐이라고 했잖아요!”

베이더가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있던 식기가 달그락거렸다. 커다란 소리에 C-3PO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오비완은 눈살조차 찌푸리지 않고 베이더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의 맑게 빛나는 눈빛 앞에선 언제나 발가 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당신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전 단 한번도 그걸, 다른 사람한테 말한 적이 없는데….”

설령 말했더라도 오비완이 알 방도는 없었다. 그가 이곳에 온 뒤에 만난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었으니까. 그가 마음을 읽었다고 해도, 자신의 포드 본드는 자신의 오비완과 연결되어 있지 눈 앞의 오비완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몰라야 했다. 그럼에도 알고 있다는 건 눈 앞에 있는 오비완에게 자신은 알지 못하는 무언가 있다고 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눈은 많은 것을 알려주는 법이란다.”

“제 눈을 보고 읽어냈다는 것치곤 비현실적으로 구체적이에요. 당신은 저랑 포스 본딩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안 거죠?”

“협상가의 뛰어난 실력이라고 생각하렴.”

그의 태평한 대답은 열이 솟구치게 만들었다. 베이더는 오비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조절한다고 했건만 의도치 않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오비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베이더는 오비완의 고통에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이 자신의 궁금증을 몰아붙였다.

“계속 그렇게 말 돌릴 겁니까? 당신이 뛰어난 협상가라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나한테 말하지 못할 뭔가가 있는 거죠?”

하지만 오비완은 아나킨의 질문에 대답해줄 생각 없다는 듯이 그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이더의 가슴을 툭툭 쳤다. 그 행동이 묘하게 간질간질했다.

“그게 궁금하면 내기에서 이기면 되겠구나.”

“…대답해주실 의향은 있고요?”

“날 거짓말쟁이로 보면 곤란한데.”

“당신은, 저에게 거짓말을 자주 했잖아요.”

“사노라면 하얀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하지만 이건 진심이란다. 만일 내가 지키지 않는다면 기꺼이 네 망상의 대상이 되어주마. 날 찢고 베고 부러뜨리다가 싫증나면 수명이 다한 장난감처럼 버려도 된단다.”

오비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제 죄책감을 자극하지 마세요. 소용없어요.”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가슴을 툭툭 치던 손이 슬금슬금 올라와 베이더의 턱에 닿았다. 검지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느리게 쓸며 간질였다. 일부러 은근한 의미를 담아 질척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스멀스멀 야릇한 기분이 올라왔다. 베이더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뭐, 내가 미안하다고 아양이라도 부리면서 네 품에 안기면 너는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 날 어떻게 할 수도 없잖니.”

상대를 유혹하기로 작정한 듯한 요염한 몸짓에 베이더는 고개를 돌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의 살내음을 계속 맡다간 이성의 끈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베이더는 침착함을 꾸며내며 비웃음과 함께 말했다.

“저랑 불륜이라도 하시겠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내가 아무리 유혹한들 너는 나랑 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단다. 그리고 베이더, 내기를 협상으로 거는 자들이 있다는 걸 알잖니. 협상가의 명예를 걸고 너에게 거짓말할 생각은 없으니 이 이야기는 이만 끝내자 꾸나.”

오비완은 몸을 뒤로 물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베이더의 통신 장치가 울렸다. 통신장치를 꺼내 버튼을 누르자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말씀하신 제다이가 일룸 사원에서 그랜드 인퀴지터와 접전 중입니다.]

그 말에 베이더는 온 몸의 세포가 활기를 띄는 것을 느꼈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낸 베이더가 말했다.

“그래, 무운을 빌도록 하지.”

[네! 알겠….]

상대의 말은 미처 다 듣지도 않은 채 통신을 끊은 베이더가 오비완을 향해 말했다.

“곧 결과가 나오겠네요.”

“그래. 소원이나 생각해두고 있어야 겠구나.”

“제가 볼 땐 당신 아나킨에게 돌아갈 준비나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오비완은 베이더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태평하게 쿠키를 씹으며 C-3PO와 잡담을 나눴다. 오비완의 단호박 타르트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수십 분 뒤였다.


Q 섹드립이 치고 싶었나요?

A 이 소설은 19금이 아니니 이런 거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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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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