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칙적애착궤도와 범우주적살별프로토콜

[아나오비] 변칙적 애착 궤도와 범우주적 살별 프로토콜_09

뽀독, 뽀득, 뽀독, 뽀득 거리는 마찰음이 왕복선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무척이나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울렸는데 마치 그 소음을 만들어내는 이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나킨은 점점 사납고 거세지는 소리에 침대처럼 개조하고 있던 의자에서 손을 떼고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란 시선에 잡힌 엷은 호두빛 머리의 남성은 바닥에 들러붙은 얼룩을 지워내기 위해 애꿎은 걸레만 반복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남자는 작은 관의 주인들이 그와 타락한 옛 제자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 결국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아나킨은 화물칸으로 내려갔다. 그의 곁에 있던 작은 파란 드로이드는 등을 보인 채 걸레를 문지르고 있는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 탓에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가 아나킨을 따라 화물칸으로 내려갔다.

위층보다 어둑어둑한 화물칸으로 내려온 아나킨은 바로 식료품이 보관되어 있는 선반으로 향했다. 찬찬히 선반을 바라보던 아나킨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땀내 나는 군인들이 주로 쓰는 왕복선 답게 식량이라고는 즉석으로 데우고 먹을 수 있는 전투식량, 하나만 먹어도 한 끼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에너지 캡슐과 에너지바 그리고 물이 전부였고 차나 커피와 같은 기호식품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전투가 벌어지면 인간들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소모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 예로부터 고귀하다 가르치는 생명의 가치가 한순간에 땅바닥으로 처박히다 못해 짓밟히고 쉽게 으스러진다는 뜻이었다. 이를 지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저 전쟁이니 당연하다고 말할 뿐.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보다도 못한 가치를 가진 생명들을 옮기는 데에 쓰인 왕복선이니 사치스러운 기호 식품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다. 어차피 곧 죽을 놈들에게 부가 영양분을 먹여 봤자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죽을 게 뻔할 테니 굳이 챙겨주는 건 돈 낭비였다. 차라리 그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말지.

아나킨은 쯧, 짧게 혀를 차고 바로 아래에 달린 서랍을 열었다. 개인이 가져온 티백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나킨의 바람과는 달리 허탕, 허탕, 허탕, 허탕이었다. 연이은 허탕에 그는 방금 열었던 네번째 서랍을 쾅,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닫았다.

”정말이지, 운치가 없군.”

그는 다소 과한 소망을 작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마지막 서랍을 열었을 때, 아나킨의 손이 우뚝 멈췄다. 안에는 손바닥보다 살짝 큰 정사각형 틴케이스가 들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함부로 손대지 말 것. 허락 맡고 먹어! >:(’

웃기지도 않는 이모티콘까지 그려진 포스트잇을 다 읽은 아나킨은 어떠한 감흥조차 없는 표정으로 그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그리고 작게 구겨버린 뒤,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거리가 제법 있었지만 구겨진 종이가 깔끔하게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자 아나킨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틴케이스를 열었다. 딸칵, 하고 열린 틴케이스 안에는 싸구려 스틱 커피와 각종 티백이 들어있었다.

아나킨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충 티백을 뒤적였다. 얼그레이나 블랙퍼스트처럼 흔히 볼 수 있는 티백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과일차 또한 끼어 있었다. 한참을 뒤적이던 끝에 아나킨의 손에 들린 것은 연 분홍빛 포장지에 싸인 복숭아차 티백이었다. 자신의 탁월한 안목이 꽤 마음이 드는지, 그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컵과 전기 포트를 찾았다.

작은 드로이드가 다가와 삐릭거리자 아나킨은 드로이드의 둥근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는 잠깐 여기에 있는 게 좋겠다. 어쩌면 마스터가 창피해하실지도 몰라.”

*     *     *

잘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복숭아 냄새가 코를 찌른다. 달짝지근한 냄새에 이끌리듯 벤이 고개를 들자 김이 폴폴 나는 스테인리스 컵이 코 앞에 들이밀어졌다. 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의 주인과 눈을 마주하자 아나킨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잠깐 쉴까요?”

다정하게 건네 오는 말에 벤은 고개를 내려 아까부터 자신이 공들여 닦고 있던 바닥을 보았다. 마땅한 세제가 없어 약간의 물과 걸레 그리고 마찰열로 닦는 게 고작이라 얼룩은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았지만, 아까보다 희미 해졌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벤은 아나킨이 내민 컵을 받았다. 뜨거운 찻물이 담긴 스테인리스 컵은 매우 뜨거웠지만, 손잡이를 두텁게 감싼 티슈 덕분에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맙구나.”

“별말씀을요.”

아나킨은 벤의 손을 잡아 자신이 침대처럼 개조한 의자로 이끌었다. 등받이가 뒤로 완전히 젖혀져 있었고, 몇 개의 의자가 붙어 있는 모습은 얼핏 보면 침대와 모양새가 흡사했다. 먼저 자리에 앉은 아나킨이 자신의 옆자리를 토닥이자 벤 또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화물칸에서 가져온 모포로 흉내 낸 매트리스에는 스프링이 없어 탄력이 없었다. 하지만 적당히 푹신하고 부드러웠기에 앉거나 눕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듯했다.

벤이 동굴에서 지냈을 때는 차갑고 딱딱한 돌침대와 낡고 다 헤진 모포 한 장이 전부였다. 누군가에겐 다소 투박해 보일 지언정 이보다 훨씬 열악하고 남루한 환경에서 지냈던 벤에게 만큼은 5성급 호텔의 고급 스위트홈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안락하게 느껴졌다. 간만에 느껴보는 푹신함에 풀리는 몸을 느끼며, 벤은 제 손을 데우는 따스한 컵을 바라보았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붉은 찻물은 이를 즐겼던 때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제다이 마스터 오비완 케노비는 매일 차와 커피를 즐겼다. 그의 쿼터에는 여러 행성에 파견될 때마다 사온 찻잎과 커피콩이 즐비해 있었고, 각종 다구와 에스프레소 머신도 갖춰져 있었다. 그런 그의 쿼터를 본다면 혹자는 검소함의 대명사인 제다이 답지 않게 오비완 케노비는 무척이나 사치스러운 제다이라 멋대로 판단 내릴 것이다.

오비완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미션과 여러 행성에 파견되면서 맞닥뜨리는 복잡한 이해관계, 안면 근육이 뒤틀릴 때까지 자신의 감정과 정반대의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은 오비완의 정신력을 한계까지 몰아 붙이곤 했다. 게다가 몸집이 커지고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자신에게 묘한 감정을 가지게 된 제자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눈만 떼면 사고를 쳤기에 오비완의 근심은 조금씩 얼굴에 생기는 주름과 함께 깊어 졌다. 때문에 오비완에게 있어서 자신의 지친 몸과 정신을 달래주는 다과 시간은 필수불가결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더의 궁에 끌려와 그의 앞에 개처럼 엎드려 모진 성관계를 받아내야 했을 때도, 다과는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차와 커피향에 둘러 싸인 그때만큼은 자신이 처한 지옥 같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마약에 몸을 절이는 것보다 카페인에 몸을 맡기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은가. 비록 그 위안들이 오비완이 도망칠 때 미처 챙기지 못한 바람에 베이더의 궁 어딘가에 처박혀 아깝게 썩 있다는 건 아쉬운 이야기지만.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오비완 케노비와는 달리 사막의 미치광이 벤 케노비는 차와 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메마른 행성 타투인에는 차를 우리고 커피를 내리기는커녕 작물을 키워내지 못할 정도로 물이 여유롭지 않았고, 때문에 작물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기호식품에 해당하는 찻잎과 커피콩은 매우 비싼 편이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벤 케노비의 형편상 구매는 꿈도 못 꿀 정도로 사치품에 속했다.

무엇보다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구 공화국의 산증인이자 이 모든 사건의 원흉에게 다과 시간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벤은 죄가 많은 자신에게 여유라는 달콤한 과실을 줄 정도로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했다. 겁쟁이에게는 검고 텁텁한 맛없는 죽도 아까웠다.

벤은 차를 홀짝였다. 제다이 시절에 즐겼던 차보다 훨씬 못미치는 맛이었다. 복숭아향은 좋았지만 너무 달짝지근한 냄새에 후각이 어질어질했고, 혀에서 느껴지는 맛 또한 깔끔하기보단 혀에 살짝 늘러 붙는 쓴맛이 이질적이었다. 아나킨이 잘못 우린 건 아니었다. 그저, 질이 좋지 않은 찻잎의 한계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한 온기 때문인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 감정이 북받쳐 오르며 안와가 뜨거워졌다. 벤은 갑자기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5년동안 감정을 숨기는 법에 무뎌진 눈시울은 결국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후두둑 떨어지며 다리를 적시는 눈물 방울은 주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그런 여유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타박했지만, 정작 벤의 본심은 이 여유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여유롭게 차 한 잔을 즐길 수 있었던 그 평화로운 나날들을. 자신의 제자와 함께 그 여유를 만끽했던 나날들을 말이다.

아나킨은 소리 죽여 우는 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뜨거운 컵을 쥐고 있어서인지 그의 가죽 손은 무척이나 뜨겁고 부드러웠다. 벤이 유난히 유약한 걸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다정함에 약하다. 손길로 표현되는 위로에 자신을 향한 염려가 느껴지자마자 벤의 눈에서는 미지근한 액체가 더욱 흘러내렸다. 아나킨은 그저 묵묵하게 눈물을 닦아주다가 등을 토닥였다.

“나이가 드니 눈시울이 주체가 안 되는구나.”

벤은 한참을 소리 죽여 울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아나킨의 손에서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물렸다. 그리고 짓무른 눈가를 소매로 벅벅 문질러 눈물을 훔쳐냈다. 부어 오른 눈가는 거친 마찰에 따가움을 호소했지만, 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굴었다. 그런 벤을 바라보던 아나킨은 손끝으로 컵을 문질렀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감정을 너무 억누르며 살지 말라는 포스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어른이라도 가끔은 엉엉 소리내서 울고 싶어 질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나한테 그런 시간은 너무 과분하단다. 나는 죄인이야. 하나뿐인 제자를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고, 공화국과 제다이를 그리고 너를 시스에게 넘겨주고 말았단다. 그런 사람에게 우는 시간 따위….”

“그렇게나 현명했던 당신도 지금처럼 감정이 곪고 썩으면 터무니없는 오판을 내리는 데, 제 말에 더 신빙성이 있지 않아요?”

아나킨은 약간 날 선 말투로 말했다.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말은 아니었지만 벤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뜬 벤은 아나킨의 얼굴을 살폈다. 정확히는 그의 눈치를 봤다는 말이 어울렸다. 아나킨의 부드러웠던 눈매가 치켜 올라갔고, 미간 사이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오비완이라면 표정 풀라며 미간 사이를 문질러 주었겠지만, 벤은 그저 우물쭈물 자신의 잔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나킨은 축 처진 벤의 모습에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당신이 저지른 죄도 아닌 걸로 죄책감을 갖고 스스로를 홀대하는 게 답답해서 그랬어요.”

“아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해.”

“…사실 감정에 솔직해지라는 말은 마스터가 말씀해주신 거예요. 아, 그러니까…. 제 오비완이요. 저도 당신처럼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아나킨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곧 말을 뱉었다.

“…좀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제 이야기 한번 들어 보실래요?”

“마다할 이유가 없지.”

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아나킨은 수줍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사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저는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연고도 없는 낯선 행성에 와서 모든 것이 어색하고, 모든 자극에 예민했죠. 제다이가 된다는 사실에 설레기도 했지만, 낯선 환경에 뚝 떨어지는 것도 무서웠거든요. 게다가 저는 사원에서 자라 영링을 거쳐 파다완이 된 게 아니라 다른 영링이나 파다완과 많이 싸웠어요. 뭐, 13살이 된 영링들은 제다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다른 곳으로 보내지니 그들 입장에서는 영링조차 거치지 않은 제가 바로 파다완이 되는 게 아니꼬웠을 거예요. 지금은 이해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걸 몰라서 시비에 시비로 받아 쳤고, 그래서 사원에서 많이 겉돌았죠.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호의적인 당신이 장기 미션이라도 떠나게 된다면 저는 제 편 하나 없는 사원에 홀로 남아 있어야 했어요. 안 그래도 겉도는 데 당신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으니 더 겉도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당신이 없는 밤이면 매일 울었어요. 소리를 죽이고 외로움을 삭이면서요.”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괴로움은 괴로움이다. 특히나 어린 시절 겪었던 괴로움은 지울 수 없는 흉터와도 같아서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그 기억을 입밖으로 쉽게 꺼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아나킨은 어린 시절 겪었던 탄내 나는 고충을 입밖으로 내뱉고 있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목화솜의 포근함을 닮아 있었다.

벤은 컵을 문질렀다. 그때 당시 아나킨이 사원에서 겉돌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직접 나서지 않았던 것은 그 문제는 아나킨 스스로가 타파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 했던 것이 컸다. 본디 스승이란 존재는 아이가 잘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잡아주는 역할일 뿐, 그 길을 대신 걸어주는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단기 미션에는 그를 데려가되 장기 미션에는 데려가지 않았다. 단기 미션보다 장기 미션이 더 위험한 것도 있었지만, 외부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나킨이 자신이 없는 밤마다 울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마중 나와 웃어주던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장기 미션을 떠나는 스승의 옷자락을 잡고 안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보던 동글동글한 아이를 떠올린다.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스승이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렴. 모르는 것이 있다면 다른 제다이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거란다.’ 사원을 겉도는 아이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요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스승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단호했다.

“그러다가 마스터에게 들켰어요. 하루 일찍 미션을 마친 마스터가 귀환 내내 콤링크를 받지 않는 어린 제자를 살피러 보고도 뒤로 한 채 쿼터로 한달음에 달려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눈물 콧물로 더러워진 얼굴을 망설임 없이 닦아주시고, 울고 싶을 땐 크게 소리 내어 울라고 하셨어요. 숨을 죽여가며 우는 건 감정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괴롭힐 뿐이라고 하시면서요. 사실 전 마스터가 감정을 다스릴 줄 모른다면서 크게 혼내실 줄 알았어요. 균형을 수호하는 제다이가 스스로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만큼 모양 빠지는 것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마스터는 저를 달래주실 뿐만 아니라 제가 감정을 추스리자 같이 목욕하자고 권해주셨어요.”

만약 벤이었다면 아나킨의 예상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눈물은 닦아주되 같이 씻자는 소리 대신 제다이가 갖춰야 할 덕목을 상기시켜주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콤링크를 받지 않는 제자를 걱정하는 대신 제다이 평의회에 자신의 미션 보고를 마치고 쿼터로 향했을 것이다. 침대에 한껏 웅크린 제자를 보며, 울다 지쳐 잠든 게 아닌 훈련에 지쳐 잠들었다 생각하고 자신이 할 일을 마저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랬고.

아나킨의 말을 들어보면 다른 세상의 오비완은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제다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스승의 콰이곤과 같은 회색의 제다이와 결이 같았다. 뭐, 일반적인 제다이가 실패한 제자 육성을 회색의 제다이가 성공한 이상 이런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나킨을 타락시키지 않은 그의 교육 방침이 중요했지.

“따스한 물을 가득 담은 욕소에 마스터랑 함께 들어가 목욕을 하고, 마스터가 꺼내 주신 새 옷으로 갈아 입은 뒤에 마스터가 다녀오신 행성의 특산품을 먹었어요. 팥과 호두가 들어간 빵과 같은 과자인데 제 생각나서 사오셨다고 하더라구요.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맛있었어요. 그리고 마스터가 만들어 주신 밀크티를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어요. 따뜻한 목욕과 달달한 간식 때문인지 저는 제가 가진 모든 불안감을 마스터에게 털어놨어요. 낯선 사원에서 적응하는 게 어렵다고, 앞으로 지낼 시간이 막막하다고, 저를 부정하는 것 같은 어른들과 저를 무시하는 또래들이 두렵다고요. 어쩌면 어린 아이의 투정에 불과할 소리를 마스터는 제가 말을 다 마칠 때까지 들어주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셨죠. 너는 쓸데없는 두려움이 너무 많구나, 라고.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지도 못하면서 사람의 생각을 지레짐작하고 그 허상으로 겁을 먹고 있다고. 뭐, 맞는 말이에요. 저와 마찰을 빚은 건 소수였지 사원 전체와 갈등을 빚은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서 없던 용기가 갑자기 솟진 않더라고요.”

아나킨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도 그걸 극복했기 때문에 지금의 아나킨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게 아니겠는가. 주인공이 주어진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소설처럼, 아나킨이 실체 없는 공포를 이겨내는 순간, 타락하지 않은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벤은 아나킨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반쯤 식어버린 차를 마시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용기가 나지 않아 우물쭈물 거리는 저를 보며 마스터는 겁먹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하나부터 차근차근 자신과 함께 시작해보자고 하셨어요. 그리고 꼭 안아주시면서 자신은 언제나 제 편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등을 돌린다고 해도 자신만큼은 제 곁에 남아있을 거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생각을 바꿨어요. 저에겐 마스터 밖에 없는 게 아니라 마스터를 시작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마스터가 제 곁에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고. 설령 제가 실패하더라도, 마스터는 언제나 제 곁에 있어줄 거라는 믿음에 확신을 갖게 된 거죠. 그러니까….”

아나킨은 쥐고 있던 자신의 컵을 내려 놓고 벤의 손을 감쌌다. 갑작스럽게 닿아오는 포근한 손길에 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나킨을 바라보았다. 아나킨은 그의 청회색 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 역시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마스터가 두려움을 덜어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제가 당신의 옆에 있을게요.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파란 하늘을 닮은 눈이 흔들림 없는 기색으로 자신과 눈을 마주해왔다. 눈 앞의 상대가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한껏 담긴 그의 눈빛에 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스스로도 자신을 탐탁치 않아 하는데 도대체 그는, 자신의 어떤 면을 보고 믿겠다고 말하는 걸까? 지금까지 자신이 그에게 의지가 된 적이 있던가? 장담하건데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짐이라 여기지 않았다면 다행일 정도였다. 벤은 제 고개를 돌리며 아나킨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아나킨의 눈은 그의 눈을 집요하게 따라왔다.

“나의…. 나의, 어떤 면을 믿고 내 옆에 있어주겠다는 거니? 네 생각보다 내가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겁쟁이라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넌,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해주는 거니?”

“…주제 넘는 소리를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본 이 세계는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아요. 공화국은 무너졌고, 제다이 기사단은 몰락했으며 이곳의 저는…, 시스가 되었죠. 아무리 신실하게 포스의 밝은 면을 따랐다고 해도 이렇게 절망적인 사건을 연달아 겪게 된다면 이전의 자신을 잃고 포스의 어두운 면에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어쩌면 그런 이들도 있을거고요.”

아나킨의 말에 인퀴지터들을 떠올린 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다이 학살 당시 수많은 제다이들이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중에서는 시스의 회유에 넘어가 그대로 포스의 어두운 면에 잠식되어 제국에 충성을 바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안 그래도 지속되는 전쟁으로 대부분의 제다이들은 정신적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원이 불타고, 평의회 의원들의 대다수가 죽었음은 물론 바로 자신들의 동료가 으스러져가는 그 절망을 두 눈으로 보게 되는 순간, 공포를 끌어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 절망과 공포가 그들이 제국의 이름 아래에서 거행한 살인의 면죄부는 될 수 없겠지만.

“하지만 마스터, 마스터 역시 그렇게 괴롭고 절망적인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눈은 여전히 제가 좋아하는 색이라는 거예요. 저는 그거면 충분해요.”

벤은 목에 힘이 들어가며 먹먹하게 막혀오는 느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나킨은 벤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힘주어 잡았다고 했지만 벤이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뿌리쳐질 정도로 억압적이지 않았다.

“실수에 잠식될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마스터.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에요.”

그 말이 눈물의 효시를 당겼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잔뜩 부어 오른 눈가가 쓰라렸지만, 벤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스스로도 불신과 불만에 사로 잡혀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돌보지도 않았다. 그게 가장 잘 어울리는 처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눈 앞의 사내는 달랐다. 그는 커다란 대가도, 명확한 증명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오비완 케노비가 오비완 케노비이기 때문에 믿고 지지해준다고 말하고 있었다. 벤은 그 말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아나킨은 홍조로 얼룩덜룩 해진 벤의 얼굴을 쓸었다.

“소리 내어 울어도 괜찮아요.”

아나킨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벤을 가볍게 안아주었다. 벤은 눈물로 핑 도는 머리를 제자의 탄탄한 가슴에 기댔다. 단단하게 받쳐주는 게 내심 안심돼서 그의 옷자락을 꾹 잡고 참았던 울음을 소리와 함께 터트렸다. 벤은 계속 울었다.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에 머리를 가득 채우던 고민과 불안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타투인에서 지내는 동안 벤은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았다. 가만히 있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눈물이 나왔다. 세간에선 눈물이 슬픈 감정을 덜어준다고들 하지만, 벤의 마음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눈물로 이루어진 연못은 무겁고 습한 냄새를 풍기며 벤을 괴롭혔다. 그러니, 이렇게 개운하고 가벼운 기분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꼬르륵,

한참동안 물먹은 감정을 쏟아내던 벤이 눈물을 닦기 위해 몸을 물리던 때였다. 벤의 배에서 허기를 알리는 소리가 났다. 벤은 갑자기 울리는 뱃고동에 기운이 쑥 빠져버렸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은 스프 몇 그릇에 불과 했으며 그 뒤로 스프 몇 그릇이 감당할 수 없는 열량을 소비했으니 극심한 굶주림이 찾아오는 건 당연했다.

밀려오는 창피함에 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그런 벤의 심정을 알아챘는지 아나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제안했다.

“우리 이제 밥 먹을까요? 전투식량 밖에 없지만, 화물칸에 쌓여 있어요.”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근데 마스터는 전투식량 안 물려요? 전 클론 전쟁때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좀 물리더라구요.”

“딱히 맛이 없다고 느낀 적은 없구나.”

“타투인에서 보낸 세월이 당신 입맛을 망쳤네요. 뭐, 좋아요. 일룸에 다녀오면 다른 행성에 가서 식재료라도 사요. 제가 맛있게 요리해 줄게요. 제 솜씨 아시죠?”

“그래, 그러자꾸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아나킨이 벤에게 손을 내밀었다. 벤은 그 손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뒷머리가 잡아당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뉘는, 기묘한 기분. 하지만 벤은 그 기분을 무시했다. 딱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간만에 느껴보는 이 가벼운 기분과 마음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다.


아나킨 말이 너무 길어서 이걸 어떻게 쳐내야 할 지 고민을 많이했던 화예요. 드라마 오비완 케노비 보면서 저렇게도 절망적인데 여전히 눈이 파란 오비완을 보면서 감탄했던 부분이라....

근데 람다 왕복선 화물칸이 비행기 화물칸 같으면 어쩌지... 진짜 자료 찾느라 고생 하긴 햇는데 화물칸 예상도는 못 ㅂ찾아서 천장이 낮은 느낌으로 묘사하긴 햇는데 왠지 아닌 거 같음... 하지만 제대로된 상상도도 안 준 공식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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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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