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칙적애착궤도와 범우주적살별프로토콜

[아나오비] 변칙적 애착 궤도와 범우주적 살별 프로토콜_05

H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더러웠다. 어쩌면 제다이를 찾으라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이 빌어먹을 사막 행성에 온 것부터가 이 불행의 전조였을지도 모른다.

이번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 H는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전 제다이 마스터라고는 해도 데바스테이터 호를 끌고 가는 건 너무 인력 낭비 아닌가? 한 행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을 인력과 자원은 너무나도 과분했다. 이번 작전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소대는 딱 한 소대뿐이었고 그마저도 정확하게 결정된 것이 없었다. 즉 랜덤으로 결정하게 될 한 소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이 거대한 데바스테이터호를 지키는 경비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위대하신 다스 베이더 경의 뜻에 어느 누가 반항하겠는가? 그의 손에 목이 꽃대마냥 꺾여 운명을 달리한 선배들 꼴 되고 싶지 않으면 그의 말에 복종해야 했다. H는 그저 자신들은 모르는 뜻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짧은 휴가를 얻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휴가를 떠나는 곳이 물 좋고, 공기 좋은 행성이 아닌 메마르고, 척박하고, 하루 종일 불어대는 바람에 목이 까끌거리는 사막 행성이긴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도 된다는 점에서 휴가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잡기로 했던 제다이가 사실은 두 명이고, 그 두 명이 쥐새끼마냥 도망쳤다는 사실에 화가 난 베이더 경이 함께 제다이 사냥에 나간 3소대를 K, 한 명만 빼고 몰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는 더 이상 단순한 휴가라 생각할 수 없었다.

제국 2인자는 날이 갈수록 심성이 험악해져 갔지만, 그를 유일하게 말릴 수 있는 황제는 베이더 경이 사람의 목을 꺾든, 조르든, 자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살인을 방치하다 못해 은근히 부추기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H는 자신을 제국 사관학교에 입학하도록 유혹한 제국 선전 방송을 원망했다. 군대 내 복지가 좋다고? 제국군 최고의 복지는 다스 베이더경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화가 잔뜩 난 베이더 경이 있는 데바스테이터호를 벗어서 사막을 달리고 있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비록 자신과 평소 껄끄러운 상대이자 베이더 경에 의해 몰살당한 3소대의 유일한 생존자인 K가 이번 작전의 파트너라고 해도, 그건 아주 아주 사소한 점이었다. 너무 사소해서 타투인의 모래와 뒤섞여 날아간다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적어도 K는 자신과 의사 결정이 어긋나면 약간의 말다툼만 좀 할 뿐, 그게 기분 나쁘다며 제 목을 꺾어버리진 않을 테니까.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작열하는 두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타투인의 메마른 사막에는 삽시간 만에 추위가 몰려왔다. 스피더와 맞부딪히는 찬 바람이 갑옷 틈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였다. 빌어먹을 제다이 놈들. 숨을 거면 사막같이 척박한 땅이 아니라 비옥한 땅이 낫지 않은가? 어쭙잖게 농사나 지으며 언제 들킬지 모르는 쥐새끼처럼 벌벌 떨 것이지 이딴 행성에 기어 들어오고 난리다.

하,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가방에 넣어둔 따뜻한 차가 너무나도 간절했다.

“잠깐만. 조금만 쉬었다 가지.”

“아직 순찰 반도 못 끝냈어. 농땡이 피우다가 베이더 경에게 죽고 싶지 않아.”

“아, 5분만! 아니 3분만 너무 추워서 그래.”

“하…. 일에 차질이 생기면 다 네 책임이라고 보고하도록.”

“…그래. 알겠어.”

야멸찬 자식. 그가 베이더 경에 의해 제 부대의 몰살을 목격한 건 안타까운 일이 맞으나, 제국군 내에서 베이더 경에 의해 부대 하나가 멸절하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당장 4주 전에만 해도 제 15중대가 반란군 무리를 토벌하러 갔다가 반란군 일부를 놓쳐버리는 실수로 217명 전원이 몰살당했다. 도망친 인원은 많아 봤자 한 명에서 두 명 정도였고, 이번 여파로 한동안 반란군은 잠잠해질 것이라는 보고 또한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베이더 경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무능한 녀석들.

그때 당시 베이더 경의 호위를 맡았던 H는 그날 들었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했다. 아마 영영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날고기에 지나지 않는 시체를 앞에 두고 읊조린 그의 목소리는 원체 기괴했던 기계음이었지만 거기에 분노가 서리가 더더욱 소름 끼칠 정도로 공포를 안겨주었다.

H는 그때부터 삶에 미련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툭하면 반란군이 기어오르는 지금 은하 제국은 인력 하나라도 이탈하는 걸 원하지 않았고, -그러면서 베이더 경의 학살은 막지 않았다. 역시 계급이 최고다.-, 때문에 자신의 제대를 허가해줄 리 없었다. 설사 된다고 해도 수많은 생명을 죽인 행적은 야밤에 얻어맞아 죽기 딱 좋았다. 즉 자신의 운명은 반란군과 싸우다 죽던가, 무사히 살아남아 연금 받아먹으며 살던가, 아니면 무언가 베이더 경의 심기를 거스르는 실수를 저질러 그에게 목이 졸려 죽는, 그런 미래뿐이었다.

H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자 K 또한 그에 맞춰 속도를 줄였다. 스피더가 완전히 멈추자 H는 바로 스피더에서 내려 출발하기 전에 매달아 두었던 가방을 열어 보온병을 꺼냈다. 평소 차 마시는 걸 즐기는 H는 임무에 나가기 전 보온병에 한가득 우리는 게 버릇이었다. 동료들은 사막에서 뜨거운 차를 마신다고 놀렸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타둔 보람이 있었다.

투구를 벗자 온기를 가득 머금은 향기가 코를 감쌌다. 향기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마시기도 전에 몸을 달궜다. H는 한 잔 가득 따라내 제 목을 적셨다. 오들오들 떨었던 몸에 따스한 액체가 들어오자 금세 훈기가 감돌았다.

“너도 한 잔 어때.”

때문에 평소 탐탁치 않아 했던 K에게 차를 권한 건 따뜻한 온기가 가져온 여유였다. 만일 자신의 권유를 받아준다면 어쩌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녀석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앞으로도 잘 지내볼 의향이 있었다.

“아니.”

물론 그건 H의 바람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말한 3분이 되기 전, 짐을 정리하던 도중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블라스터를 바투 쥐며 몸을 돌렸다. K 역시 인기척을 느낀 건지 스피더에 탄 채로 블라스터를 들고 있었다.

시야에 잡힌 건 한 인영이었다. 키가 큰 인영은 끝이 헤진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몸과 얼굴을 꽁꽁 감춘 게 무척이나 수상해 보였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이유 모를 위압감도 동시에 느껴졌다. 무척이나 익숙한 위압감에 H는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을 사로잡는 공포 때문에 그걸 파고들 여유는 없었다.

“제국군인가? 도움을 좀 요청하고 싶은데….”

그가 비루하게 말했다. 걸음걸이가 투박한 게 딱 봐도 타투인 부랑자 같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했다. 아무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부랑자라 하더라도 하나뿐인 목숨이 아깝다면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밤의 사막을 스피더 없이 거닐 리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토록 깜깜한 밤에 사막을 횡단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무척이나 강하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지 않은가. 즉 현상금 사냥꾼, 아니면 제다이일 확률이 높았다.

“제국군이 무슨 자원봉사 단체인 줄 아나? 도움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신분증부터 꺼내시오.”

K가 블라스터를 고쳐 잡으며 딱딱하게 말했다. 자신의 손에 들린 블라스터를 봤을 텐데 수상한 부랑자는 주춤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흔들….

“내 신분증은 필요 없지.”

“네 신분증은 필요 없다.”

아나킨의 능청스러운 말을 헬멧을 벗고 있던 스톰트루퍼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따라 했다. 곧 아나킨이 두 사람을 마을 쪽으로 돌려보내고 우리는 저 갑옷과 스피더를 탈취하면 끝이다.

“…H?”

잘 먹혀 들어간 마인드 트릭에 안심하던 것도 잠시, 결코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건 비단 벤 뿐만 아니라 아나킨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몸을 굳혔다. 스피더에 타고 있는 스톰트루퍼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동료를 바라보고 있다. 포스에 내성이 있는 종족인가? 하지만 벤이 알기론 제국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 포스에 내성이 없는 인간이었다.

“이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인드 트릭이 통하지 않는 스톰트루퍼가 스피더에서 내려와 제 동료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아나킨의 포스에 단단히 올린 동료는 그 정도의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불러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동료를 바라보던 스톰트루퍼가 아나킨을 바라보며 블라스터를 겨눴다.

“너 제다이군. 그래 포스 기술 중에 이런 게 있다고 들은 거 같아. 아까 베이더 경과 싸운 게 바로 네놈이지?”

“아까 그? 뭐야, 너 그 자리에 있었어? 그럼 우리 구면이네. 굳이 싸울 필요 있나? 나는 제다이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은데, 넌? 내 얼굴도 네 상사랑 똑같은 김에 어느 정도 타협하는 건 어때?”

아나킨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답답한 후드에 갇혀 있던 밤색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밝고 환한 태양 아래에서 화려하게 빛났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은 차분한 달빛에 윤슬이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누구라도 홀릴 법한 미모에 웃음이 더해지자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아…. 으아악!”

하지만 스톰트루퍼는 아름다움에 홀리긴 커녕 오히려 괴물을 봤다는 듯이 비명을 질렀다. 블라스터가 나뒹구는 건 덤이었다. 두 다리로 곧게 서 있던 그는 어느새 엉덩방아를 찧은 채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투구에 가려진 탓에 얼굴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얼굴이 공포와 경각으로 물들었으리라 짐작했다. 아까만 해도 멀쩡한 스톰트루퍼가 이상 반응을 보이자 의문을 가진 아나킨이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봐, 괜찮아?”

“가, 가까이 오지 마!”

스톰트루퍼는 아나킨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기어서라도 도망치겠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그와 거리를 벌렸다. 멍하니 상황을 바라보던 벤의 머리가 그에게 한가지 가정을 내밀었고, 그 가설에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벤은 아나킨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아나킨, 잠깐만. 더 다가가지 말거라.”

“저,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아나킨은 상당히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아나킨이 억울한 입장이긴 했다. 처음엔 그의 포스 기술에 겁먹은 것 같았지만 스톰트루퍼는 다가온 부랑자가 제다이인 것을 알고 호기롭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겁에 질린 채 뒤로 넘어지며 온 몸을 덜덜 떨기 시작한 시점은 아나킨이 후드를 벗었을 때, 그러니까 아나킨의 얼굴을 본 직후였다.

그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저 스톰트루퍼는 아나킨을 두려워한다. 좀 더 정확히는 베이더와 똑같은 그의 얼굴을. 때문에 아나킨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겠지. 벤은 일순 저자가 왜 그렇게 같은 편인 베이더를 두려워하는지 궁금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포스도 통하지 않을 만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걸까? 하지만 그 추측하는 과정마저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 벤은 그 궁금증을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저자는 네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네 얼굴이지만.”

“제 얼굴이 무섭다고요? 제 얼굴은 아까 낮에 한번 본 게 다일…. 아.”

아나킨은 무언가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고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저지른 것도 아닌 일로 누군가에게 배척당하는 느낌은 무척이나 억울할 것이다.

“일단….”

벤은 땅에 떨어진 블라스터를 주워 들고, 아나킨이 무서워 아직도 벌벌 떨고 있는 스톰트루퍼에게 다가갔다. 아나킨을 이렇게나 무서워하면서도 도망치지 않는 걸 보면 공포에 너무 질린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린 걸지도 모른다. 즉, 도망치지 않는 게 아니라 도망치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손에 있던 무기를 제다이가 든 채 다가오자 스톰트루퍼는 으아악,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역시나 도망가지 못하고 그나마 움직이는 팔을 다리 삼아 엉금엉금 뒤쪽으로 몸을 뺐다.

빡,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스톰트루퍼가 쓰러졌다. 블라스터를 쥔 손이 욱신거린다. 시야 끝에 걸린 블라스터의 끝부분에 방금 전 충격으로 깨진 게 보였다. 벤의 손에 힘이 풀리자 블라스터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검은 블라스터에 뿌연 모래 먼지가 앉았다.

“블라스터를 둔기로 쓰는 사람은 마스터밖에 없을 거예요.”

뒤에서 지켜보던 아나킨이 휘파람과 함께 흥미로운 어조로 말했다. 말을 마친 아나킨은 마인드트릭을 걸었던 스톰트루퍼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느새 기절해 있어서 아나킨이 갑옷을 벗겨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벤 역시 그 말에 답하고는 눈앞에 기절한 스톰트루퍼의 헬멧을 벗겨냈다. 그 안에 있는 얼굴은 온통 눈물과 땀으로 푹 젖어 있어서 그가 얼마나 공포에 시달렸는지, 또 그 공포에서 얼마나 벗어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까 접어 두었던 의문이 다시금 고개를 든다. 도대체 자신들이 그곳에서 도망치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토록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걸까?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벤은 자신의 제자가 또 다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는 과연 얼마나 많은 피를 그 손에 묻혀야 직성이 풀릴까? 어둠에 잠식된 제자의 만행을 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쩌다 들린 마을에서는 베이더의 승리를 빙자한 학살 소식이 들려오곤 했으니 모를 수 없었다.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듣기만 했던 그 죄를 이렇게 직접 확인하는 건 처음이었다. 머리가 꽉 막힌 듯이 답답하다.

제자의 죄는 구제받을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을 키워나간다는 걸 안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도 한다. 그렇다면 제국이 와해 되는 날, 아나킨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의 죽음으로 죗값을 치를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은 제자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 역시 어둠에 잠식된 제자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하고 사막의 미치광이로 전락해버렸지만, 제자를 향한 마음은 여전했다.

참으로 멍청한, 케노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 가르쳤던 기술이 되려 사람들을 죽이고 있음에도 제자를 향한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고, 그간 으스러져간 생명들을 보며 죄악을 느낀다. 벤의 기분이 울적해졌다. 벤의 얼굴이 우울한 표정으로 이지러진다.

“마스터.”

어느새 옷을 다 벗긴 아나킨이 벤의 곁으로 다가왔다. 벤은 깜짝 놀라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를 보았다. 아나킨의 품에는 그가 벗긴 스톰트루퍼의 갑옷이 들려 있었다. 아나킨은 자신의 품에 안고 있는 갑옷을 벤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거 마스터한테 딱 맞을 거 같아요. 저한테는 좀 작거든요.”

그가 내민 하얀 갑옷을 받아 들자 아나킨은 쭈그려 앉아서 헬멧만 벗겨진 스톰트루퍼의 갑옷을 마저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곧 적진 한 가운데에 잠입해야 하는 상황을 앞두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나킨을 보며 그의 여유에 속으로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흥얼거림이 귀에 너무 익숙한 탓에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익숙한 음은 귓가를 간질이다가 등을 토닥여주듯 감싸왔다. 그 기시감에 무의식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빛 바란 기억의 편린이 움텄다.

그 노래는 스튜존에서 전해 내려오는 자장가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인지 아버지인지 모를 어른이 어린 자신을 향해 불러주었던 노래. 그 자장가를 들으면 몇 분도 되지 않아 잠에 빠지곤 했던 자신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기분이 어수선하다. 이제와서 고향을 향한 향수가 일깨워진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제다이 사원에서 수십 년을 보낸 탓에 그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제다이 사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스튜존에서의 기억은 무척이나 흐릿했다. 그저 타투인 출신인 아나킨이 스튜존의 자장가를 안다는 것 걸렸다.

“그 노래는, 어디서 들었니?”

그 질문은 도박이었다. 이 아나킨은 자신 말고 또 다른 스튜존인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각 행성의 전통 음악을 소개해주는 라디오나 TV 코너에서 우연히 들었을 수도 있다. 혹은 잡지나 음악 관련 책에서 보았을 수도 있지. 그래 가능성은 많다.

하지만 아나킨은 벤의 질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벤은 제 목과 입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느낌에 손을 꾹 쥐었다. 손에 땀이 찼다.

“제가 잠에 못 들 때, 마스터가 불러 주셨어요.”

자신의 모든 가설이 다 빗나간 대답이었다. 사실 벤은 아나킨의 의아하다는 표정을 본 순간 굳이 그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의 대답을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라 애써 무시해왔던 화살이 심장이 날아와 박힌다. 폐가 뒤틀린다. 이 감각은 벤이 가장 잘 알고, 제다이 오더가 무너진 이후 가장 많이 느낀 죄책감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오마.”

벤은 터벅터벅 자신이 숨고 있던 바위 뒤로 걸어갔다. 투구를 입기 위함도 있었지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갑옷은 품이 컸고, 벤의 옷은 얇았기에 그 위에 덧대어 입을 수 있었다.

…사실 벤도 알고 있었다. 타투인 출신의 아나킨이 스튜존의 오래된 자장가를, 스튜존 출신이자 그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마스터에게 직접 듣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아나킨’ 세계의 ‘오비완’은 ‘아나킨’이 잠이 안 온다며 칭얼거리면 그를 어르고 달래며 자장가를 불러준 모양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몸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가사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노래의 음을 톺아가며 서툰 솜씨로 노래를 불러주었겠지. 아나킨이 무의식중에 떠올리며 흥얼거릴 정도로.

하지만 오비완은, 아나킨에게 노래를 불러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밤이 무섭다며, 잠이 안 온다는 아나킨을 제다이가 이래서는 안 된다며 나무랐다.

그 시절의 오비완은 스승의 유지를 이어받아 아나킨을 훌륭한 제다이로 키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래서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한 잣대를 아이에게 들이밀었지.

이 차이일까? 아나킨에게 제다이로서 잣대를 너무 들이댄 건 아닐까? 애초에 아나킨은 일반적인 케이스가 아니었다. 가족을 향한 애착이 생기기 전 사원에 들어오는 영링들과 달리 아나킨은 어머니와 끈끈한 애착이 형성된 다음에 들어왔다. 자신은 바로 그 차이를 자각했어야 했다. 제다이의 규율이 아나킨을 올바르게 이끌어 줄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빨리 버려야 했다.

멍청한 케노비. 벤은 또 다시 스스로를 나무랐다. 마스터의 유지를 지킬 거라면, 마스터 요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를 맡을 거라면, …아이와 약속을 할 거라면, 아이에 대해 알았어야지. 그의 안일함이 빚어낸 비극은 이제 바로잡기가 힘들었다.

벤은 마지막으로 투구를 썼다. 시야가 좁아지고 숨쉬기가 조금 답답했다. 하지만 엉망이 되었을 제 얼굴을 가리는 게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아나킨은 제 얼굴을 보지 못할 테니까. 벤은 바위 뒤에서 나와 아나킨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깊어진 밤에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자연이 일궈낸 경관을 바라보다가 무언가가 시야에 잡혔다. 굽이치는 모래빛 머리카락을 가진 잘생긴 남성, 아나킨 스카이워커였다. 좀 더 정확히는 벤 케노비가 없는 세상에서 온 아나킨이다. 베이더가 되지 않은 아나킨이다. 스승의 고향인 스튜존의 자장가를 아는 아나킨이다.

벤과 마찬가지로 하얀 갑옷을 입고 있는 아나킨은 스피더에서 짐을 내린 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두 스톰트루퍼 옆에 두었다. 비록 탈취를 목적으로 스피커와 갑옷을 빼앗긴 했지만 그들의 짐까지 탈취할 생각은 없었다.

두 장정과 짐을 옮기는 게 제법 힘들었는지 미간을 좁히며 어깨를 두드리던 아나킨은 곧 이어 벤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 짧은 찰나에 힘들었다는 표정을 지운 아나킨이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만약에, 밤이 무섭다며, 잠이 안 온다며 제 침대로 올라오는 아나킨을 안아 자장가를 불러주었다면, 자신의 아나킨은 ‘저’ 아나킨이 될 수 있었겠지. 아나킨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사이즈가 맞아서 다행이네요.”

“저 자랑 키가 엇비슷해서 다행이었단다. 너는?”

“음, 아래가 좀 끼긴 하는데…. 움직이는 거엔 지장 없어요. 괜찮아요.”

아나킨이 뒷목을 긁적이며 멋쩍게 말했다. 갑자기 수줍어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갸우뚱하고 있자 아나킨이 황급히 투구를 뒤집어썼다. 오로지 세 개의 위성이 뿜어내는 빛에 의지해야 하는 깜깜한 밤이라 자신이 잘못 본 걸수도 있지만, 아나킨의 귀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든 것 같았다. 아나킨의 주뼛거리는 행동에 의문을 가진 벤은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작게 헛숨을 삼켰다.

이, 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말을! 제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올랐는지 화끈거렸다. 그러고 보면 아까도 같이 씻자는 둥 지껄이긴 했지. 물론 포스의 어두운 면에 넘어가 은하계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보다 포스의 밝은 면에 남아 스승에게 섹드립을 치는 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이건, 이건…. 뭔가 자신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얼른 가요, 마스터. 사막의 밤은 춥다고요.”

어느새 뻣뻣한 걸음으로 스피더에 올라탄 아나킨이 말했다. 벤은 한숨을 내쉬다 두 스톰트루퍼를 바라보았다. 냉랭한 눈으로 흘겨본 벤은 남은 스피더에 올라탔다. 시동이 켜진 스피더가 밤의 사막을 가로질렀다.

*     *     *

두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 사이 타투인의 밤을 비추는 세 개의 달이 많이 기울었다. 아침이 오기 전에 타투인을 떠날 생각이었기에 벤은 스피더에서 내려 땅을 팠다. 마땅한 삽이 없어서 손으로 파야 했지만 다행히 스톰트루퍼 갑옷은 손을 보호하는 장갑이 달려있었다. 덕분이 손톱 아래로 모래알이 들어오거나, 손톱이 깨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땅을 파고 있는 벤과 마주 앉은 아나킨 역시 땅을 팠다. 묵묵히. 광선검을 땅에 파묻었다는 말을 듣고 잔소리하던 모습과 달리 지금은 조용했다.

“…제 얼굴이 그렇게 잘 생겼어요?”

“그 밤바람을 맞았으니 괜찮나 보려고 했지. 아무리 잘나도 얼굴이 얼어버리면 소용없으니까.”

“전 얼음 조각상이 되어도 잘 생겼을걸요? 값도 많이 나갈 거고. 아, 하지만 정말로 팔아버리면 안 돼요. 어느 신화에 나오는 미친 조각사처럼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셔야 해요.”

“…생각해보고.”

“………생각해야 할 일이에요, 그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참 동안 땅을 팠다. 적막이 내려앉은 사막에는 두 사람이 땅을 파면서 내는 소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딱딱한 무언가가 손끝에 걸렸다. 아나킨이 좀 더 파내자 이윽고 밤색 나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상자를 꺼낸 아나킨이 벤에게 내밀었다.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 이곳저곳이 문드러져 있었다. 낡은 상자를 받아 든 벤은 멍하니 내려보았다. 

세월에 닳고 닳긴 했으나 모래사장에 묻기 전 벤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똑같았다. 자신이 묻은 상자가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상자에서는 자신의 포스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사막 한 가운데에 묻어야 했기에 미리 포스를 흘려 둔 탓이었다.

버리려고 했던 물건에 자신의 포스를 흘린 변덕은 이날을 위한 예지였을까 아니면 그저 미련이었을까? 벤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뚜껑 안쪽에 엉성하게 새겨진 제다이 문양과 익숙한 천이 주인을 반겼다. 벤이 천을 들치자 천에 감싸인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의 제다이와 두 개의 광선검. 더 이상 제다이가 아닌 사람들의 검이 들어 있었다. 벤은 그 두 광선검을 바라보다가 제자의 광선검을 들어 작동시키자 여전히 맑은 파란 빛의 광선검이 빛났다. 그 모습에 아나킨이 놀랐다는 듯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말했다.

“오, 빨간색을 생각했는데 여전히 파란색이네요? 저는 제가 시스가 되자마자 크리스탈을 타락시킬 거 같았거든요.”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단다. 하지만, 베이더는 제국이 들어서자마자 새로운 광선검을 만들 더구나. 다른 광선검을 만든 이유는 나도 잘 몰라서 그냥 제다이 시절에 쓰던 것들이 역겨워진 게 아닐까, 하고 추측만 할 뿐이지.”

“그건, 아닐 거예요. 정말로 역겨워졌다면 부수거나 더럽혔겠죠.”

오비완은 어깨를 으쓱이며 광선검을 끄고 아나킨에게 내밀었다.

“일단 이건 네가 갖고 있으렴….”

“하지만 저는….”

“일룸에 가는 건 잊지 않았으니 내 기억력을 걱정해줄 필요는 없단다. 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무기 하나 없이 적진에 잠입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냥 빌려주는 것이니 받으렴. 네 광선검이 고쳐지면 다시 돌려받을 거야.”

벤의 말에 결국 아나킨은 그가 내미는 광선검을 받았다.

“받긴 하겠지만 또 다른 나와 대치할 때만 쓸 거예요.”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어차피 나는 네가 검을 들게 놔두진 않을 테니까. 목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킨 벤은 자신의 검을 들었다. 손에 닿아오는 쇠의 감촉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손에 들린 무게 역시 어색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덮어두었다지만, 이 감촉과 무게를 잊는 건 힘들었다.

만일 광선검을 다시 들게 될 날이 오리라는 걸 그날의 자신이 알았다면 그래도 이 검을 모래사장에 묻었을까? 벤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도 묻었으리라 결론 내렸다. 그때의 자신은 모든 걸 주위에서 지우고 싶었다. 무너진 공화국도, 몰락한 제다이도, 타락한 제자도, 무능한 자신도. 전부.

벤은 상자를 다시 땅에 묻었다. 다시 찾지 않을 물건이라 상자에 흘려준 포스도 거뒀다. 내용물을 잃은 상자의 남은 임무는 모래사막에서 썩어가는 것뿐이었다. 벤은 광선검을 제 품에 숨겨두고 스피더에 올랐다.

“자, 어서 가자. 날이 밝기 전에 비행선을 구해야지.”

아나킨이 답하며 스피더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희미한 바람에 모래알이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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