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오비] 변칙적 애착 궤도와 범우주적 살별 프로토콜_02
벤은 뛰었다. 미친 듯이 뛰었다. 폐가 터지도록 뛰었고, 심장이 아릴 정도로 뛰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뛰어도 훈련을 게을리한 그의 다리는 정기적으로 훈련하는 군인의 다리를 이길 수 없었다. 설령 그가 매일 훈련했다고 해도 사람의 다리가 스타파이터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허허벌판인 모래사장엔 벤이 몸을 숨길 장소도 없었다. 크고 작은 바위도 벤의 몸을 거뜬히 숨길 수 있는 바위도 있었지만, 그 구조가 단순해 들키기 쉬웠다.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벤이 지쳤다는 건 그를 뒤쫓는 제국군의 눈에도 훤히 보일 정도였다. 엉망인 걸음걸이와 마찬가지로 엉망인 호흡, 뛰는 속도 또한 형편없었다. 아마 옆에서 가볍게 툭 치지만 해도 금방 고꾸라질 것이다. 지금껏 잡아 온 제다이보다 형편없는 체력은 둘째 치고 그는 제다이의 상징인 광선검도 쓰지 않았다. 포스 역시 아까 이오피에서 떨어지기 전 다치지 않기 위해 쓴 포스 점프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자신이 의도해서 쓴 게 아닌 생존 본능에 따라 사용한 것 같았다. 지금껏 잡아 온 제다이보다 훨씬 쉽게 잡을 수 있는 표적인데도, 그 누구도 그를 적극적으로 잡으려 하지 않고 몰아세우기만 할 뿐이었다.
‘지금 쫓고 있는 제다이는 베이더 경이 생포하실 예정이다.’
만일 그 명령만 없었다면 저런 형편없는 제다이는 함선에서 내리자마자 잡았을 수 있었다. 그랬다면 이 빌어먹을 사막에서 시답지 않은 술래잡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그들은 지금 당장 타투인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눈앞이 아른거렸고,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신기루인지 구분되지 않았으며, 당장이라도 내리쬐는 열기에 열사병에 걸려 이 사막에 몸을 묻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짜증 나도 이 임무에 베이더가 참가하는 이상, 그들에게 반항권은 없었다. 짜증 난다고 함부로 저 제다이를 잡는다면 목 안쪽부터 조여오는 괴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제다이를 놓치지 않는 것과 베이더가 1초라도 빨리 나타나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타투인의 청명한 하늘에서 붉은빛으로 빛나는 스타파이터 한 대가 나타났다. 얼핏 보면 제국군이 애용하는 타이 시리즈 중 하나처럼 보였으나, 지금까지 봐온 타이 시리즈와는 디자인부터 달랐다. 타이 시리즈의 고질적인 약점을 커버한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섬세함과 꼼꼼함 그리고 전문성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이상한 스타파이터는 경이로운 비행술을 뽐냈는데 그 화려하고도 익숙한 비행을 보자마자 벤은 그 안에 타고 있는 조종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저렇게 화려한 비행술은 자신의 정체를 알아봐 달라고 안달하는 꼴이었다. 벤은 다리를 멈췄다. 왠지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애초에 타투인 상공에 데바스테이터호가 나타난 이상 벤은 옛 제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막에 부드럽게 착륙한 이상한 스타파이터의 문이 열렸다. 조종석에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람이 앉아있었다. 남자가 뒤집어쓴 투박하지만 수수한 후드는 벤의 눈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옷이지만 그를 제외한 사람들에겐 낯설기만 했다. 당연히 다스 베이더가 앉아 계시리라 생각한 조종석에 괴한이 앉아있다니. 스톰트루퍼들이 일제히 술렁거렸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그가 다스 베이더라고 증명해주는 증거가 너무 많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화려하고 깔끔한 비행술 자체가 다스 베이더의 신분증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국 내에서, 아니 은하계 내에서 가장 실력 있는 조종사가 누구인지 묻는다면 아마 열에 열하나는 입을 모아 다스 베이더라고 칭할 정도로 뛰어난 조종사였다. 무엇보다 다스 베이더의 전용기는 다스 베이더의 생체 데이터가 입력되어 있었기에 그가 아닌 조종사가 탑승하면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다스 베이더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조종석에서 일어났다. 베이더는 눈 앞에 펼쳐진 뜨거운 모래사장과 작열하는 두 태양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베이더 특유의 -아마 그의 스승인 황제에게 배웠으리라 추측되는- 고상한 걸음걸이로 스타파이터에서 내려왔다. 따가운 모래바람에 펄럭이는 로브를 갈무리한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그곳에 그토록 그리워한 얼굴을 가진 꾀죄죄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자 허겁지겁 후드를 젖혔다.
다스 베이더는 그 모습을 드러낸 뒤, 그 딱정벌레 같은 갑주를 단 한 번도 벗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제국군 내에서 그를 두고 숱한 소문이 난무했다. 대체로 ‘맨얼굴에 자신이 없다.’, ‘제다이에게 입은 상처와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다’, ‘공포 정치를 위해서다.’처럼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이지만, 제국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곤 했다. 어쩌면 너무 퍼진 나머지 반란군의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비행선 없는 말이 하이퍼 스페이스 통과한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닐 테니까.
그렇게 근거 없는 소문이 살을 불려 가는 동안에도 소문 한 가운데에 있는 다스 베이더는 그 소문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분명 그의 귀에도 들어갔을 텐데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직접 묻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산 채로 묻힐 게 뻔했기에 호기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끼리 입방아를 찧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스톰프루퍼들은 소문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후드가 뒤로 넘어가자 따스한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조한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은 마치 저물어가는 가을 석양 아래, 황금빛 파도가 굽이치는 갈대밭을 연상케 했다. 화려한 금빛 윤슬이 내려앉은 머리카락 아래로 마치 포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조각상 같은 얼굴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먹이사슬 꼭대기 위에서 군림하는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남자가 시스임을 증명하는 금빛 눈동자가 서슬 퍼런빛을 품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지금까지 검은 투구를 쓰고 있어 준 베이더에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검은 투구 또한 매우 두렵고 무서웠지만 저 금빛 눈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그 아래로 뻗은 오똑한 콧날은 남자의 날카로운 인상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고,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붉고 또렷한 입술은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었다.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린 듯한 미인. 그건 베이더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눈가에 있는 흉터와 목 아래로 넓게 퍼진 화상 흉터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운 미모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눈가에 난 작은 흉터는 잘생긴 얼굴과 조화롭기까지 했다. 스톰 트루퍼들은 당장 저 찬란한 미모에 대해 떠들어 대고 싶었다. 당장 뒤에 있는 데바스테이터에 올라 그의 미모를 선내 방송으로 극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호들갑을 떨며 떠들어도 이 자리에 없는 동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저 찬란한 미모를 직접 보고 있는 자신들도 현실감이 없는데, 그저 듣기만 하는 이들은 어떻겠는가? 아마 ‘아~ 정말 그렇게 잘 생기셨다면 투구 좀 벗으셨으면 좋겠다. 그럼 전 은하계가 다스 베이더님께 경의를 표할 텐데.’라며 비아냥거릴 수도 있었다. 그 비꼼이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는 것도 모른 채.
베이더는 남자를 보고는 밝은 미소를 띠었다가 곧 어두운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서슬 퍼런 금빛 눈동자가 시리게 번뜩였다. 그의 얼굴이 다채롭게 변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갑옷을 두르고 있으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알아서 몸을 사려야 했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밤이 되면 기진맥진했고, 지치고 몽롱한 정신으로 제발 다른 곳으로 발령 나게 해달라며 빌었다. 그곳이 뜨거운 용암이 들끓는 행성이든 뼛속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추위를 자랑하는 행성이든, 빌어먹게 건조한 사막 행성이든 상관없다고 덧붙일 정도였다. 물론 아무리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포스가 제 아들을 기피하는 기도를 들어줄 리 없지만.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베이더는 날 선 표정과는 다르게 사근사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성 변조가 섞이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다. 사무적이고 딱딱하다 못해 분노 섞인 말투만 내뱉던 그가 이토록 친근하게 말을 할 수 있다니. 무척이나 놀라웠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베이더가 분노를 꾹꾹 누르고 있느라 말끝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로지 벤만이 그 미세한 흔들림에서 피어난 음습한 감정을 눈치챘다. 그 감정에서 위협을 느낀 건지 벤의 몸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주 조금, 오른발을 뒤로 보내던 그때,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옭아맸다.
“당신을 찾기 위해 제가 5년 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모른다. 그걸 벤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벤은 무형의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의 기억처럼 그리 간단히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제 몸을 들어 올려 눈앞의 사내 앞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점점 좁혀오는 거리에 벤은 삶의 비통함에 한탄했다. 뭔가 희망을 품어보려고 동아줄에 매달렸건만, 매정한 삶은 그 동아줄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아, 포스이시여.
지금만큼 포스가 원망스러운 적이 또 있을까. 벤은 그저 쥐 죽은 듯이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고 싶었다. 자신이 머무는 동굴은 그의 집이기도 했지만, 무덤이기도 했다. 하지만 포스는 그런 벤의 안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벤의 안식보다 제 아들의 갈증에만 관심이 있었다. 포스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 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믿고 섬겨왔던 포스의 선택에 비참함을 느꼈다.
베이더의 앞까지 끌려온 벤은 포스의 힘에 의해 무릎까지 꿇게 되었다. 베이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들지 않는 벤을 바라보곤 손을 뻗어 그의 목에 난 상처를 쓸었다. 조금 굳긴 했지만, 피가 살짝 묻어났다. 고운 살결에 생긴 상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손길은 조금이라도 험하게 다루면 깨지는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웠고, 희귀한 보물을 원하는 듯이 소유욕이 진득했다. 물론 일반인에겐 그저 한없이 다정한 손길로만 보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당신은 참 손이 많이 가네요. 뭐 싫은 건 아니지만.”
“정말 손이 많이 가네요. 이번에도 저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 뻔했어요. 알긴 아세요?”
베이더의 상냥한 목소리와 손길은 벤의 오래된 기억을 마치 마중물처럼 퍼 올렸다. 콸콸 흘러나오는 기억이 벤의 마음을 축축하고 눅눅하게 만들었다. 제자의 눈이 그의 이름처럼 파랗게 빛나던 시절,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울렸다. 제자는 그 따스한 목소리로 포스의 가호를 빌어줄 때도 있었고, 사랑을 속삭일 때도 있었다. 벤은 자신의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를 사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목소리뿐만 아니라 금빛 윤슬이 내려앉은 갈색 머리카락, 바다와 같은 눈, 오똑한 코, 붉은 입술, 그의 검술과 같이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걸 사랑했다. 하지만 제자가 포스의 어두운 면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벤은 더 이상 그에게 사랑을 속삭일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과거를 흉내 낸다고 해도 둘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설령 벤이 제자를 이전처럼 대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마스터?”
‘마스터.’
벤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앙다물며 힘을 주었다. 그런 반항에 베이더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그를 꾹 붙들고 있는 포스에 힘이 실렸다. 거대한 압력에 신음이 튀어나오지 않게 안간힘을 써야 했다.
“…오비완.”
삐익, 이명이 울렸다. 지금껏 겪지 못한 거센 이명이었다. 이명은 귀청을 떨굴 정도로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와 맞물려 벤을 괴롭혔다. 입술과 턱에 아무리 힘을 주고 있어도 달달 떨렸다. 뺨과 목을 피가 나도록 긁고 싶었지만, 손이 자유롭지 않아 그럴 수 없었다. 오비완, 오비완 케노비. 그건 벤의 진짜 이름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버렸던 그의 진짜 이름.
“불러주는 이가 없다고는 해도 이름을 잊어버리진 않았잖아요. 오비완.”
그 말이 맞았다. 잊을 수 없었기에 괴로웠다. 지워낼 수 없었기에 비참했다. 그는 일평생 ‘오비완 케노비’로 살아왔다. 아무리 용암에 던져 죽였다고 해도 ‘오비완 케노비’는 완벽하게 죽지 않았다. 자신을 벤이라고 칭할 때마다 ‘오비완 케노비’라는 이름이 입 안에 가시처럼 박혔고, 그의 꿈속은 ‘오비완 케노비’의 주마등이다. 그 이름은 ‘아나킨’의 환상과 함께 벤을 괴롭혔다.
벤은 벤이고 싶었다. 과거의 잔재가 아무리 따라다녀도 벤은 벤으로 남고 싶었다. 눈앞의 사내가 아무리 자신의 옛 이름을 불러도, 벤은 ‘오비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오비완’은 몰락한 제다이, 제자를 시스로 키워낸 실패한 스승이었지만 벤은 사막의 미치광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막의 미치광이에겐 마주해야 할 현실도, 잃어버린 것도, 잃어버릴 것도, 저지른 실수도 없었다. 그저 내일은 배를 곯지 않을까를 걱정하며 맛없는 죽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오비완은 아니었다. 그 이름이 지고 있는 무게는 몹시 무겁고 버거워서, 무서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다. 벤은 그 중압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만약 지금의 벤을 옛 동료들이 본다면 당신이 제다이가 맞냐며 힐난하겠지만 그래야 벤이 살았다. 그 이름에서 도망쳐야만 벤이 살 수 있었다. 벤은 살고 싶었다.
그에게는 제자의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기가 무서웠다. 그와 무기를 맞대는 것도 겁이 났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광선검을 휘두르던 제다이 마스터는 없다. 용기를 잃고 자신조차 돌보지 않는 사막의 미치광이만 남았을 뿐이다.
벤은 겁쟁이다.
베이더는 스승의 거칠어진 숨소리에 욕정이 끓어올랐다. 지금 당장 스승의 목을 틀어쥐고 침대로 이끌고 싶었다. 그 몸 깊게 베인 메마른 모래 냄새를 지우고 그 시절 자신이 좋아했던 오비완의 향기로 덮어씌우고 싶었다. 베이더는 그를 옭아맨 포스를 풀었다. 벤은 자신을 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져도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쳐봤자 또 붙잡힐 게 뻔했다. 베이더가 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익숙한 장갑이 벤의 시야에 흔들렸다.
“자, 이제 술래잡기는 충분히 어울려줬죠? 이제 그만 돌아가요.”
“그냥 죽이렴.”
“그건 못 들어주겠는데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죽이겠어요?”
“그냥 죽이라니까!”
벤의 절박한 외침과 쾅,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벤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사막을 가득히 채운 모래뿐이었다. 하지만 벤은 그 깨끗한 사막을 바라보며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건 비단 벤뿐만 아니라 스톰트루퍼 역시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사막을 바라보던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새끼손톱 크기의 돌멩이였다. 그 돌멩이를 시작으로 하늘에서 크고 작은 돌조각이 비처럼 내렸다. 평소라면 타투인의 사막이 드디어 미쳐서 돌을 비처럼 쏟아낸다고 생각하겠지만, 벤의 감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주변에 있던 크고 작은 바위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하늘에서 쏟아지는 이 돌조각은 한 때 이 주변을 채우고 있던 바위임이 틀림없었다. 그 쾅 하는 소리는 바위가 깨어지고 부서지면서 생긴 소리였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렇게 죽음이 보고 싶어요?”
뼈가 아릴 정도로 살벌한 목소리가 울렸다. 두 태양이 하늘에 떠 있건만, 두 항성이 내뿜는 뜨거운 더위를 무찌를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벤이 고개를 들었다. 베이더는 섬뜩한 눈빛으로 벤을 노려보고 있었다. 베이더는 주변에 있던 모든 바위를 터트린 그 순간에도 오로지 벤만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영리한 사람이지만 간혹 어리석게 굴 때면 가슴이 답답해요.”
애초에 베이더는 눈앞의 남자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그 꼬질꼬질한 모습마저 좋다는 듯,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눈앞의 미치광이 영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기개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투정으로 그의 기개를 꺾을 수 없다는 건 베이더가 가장 잘 알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숨결 아래에 지어진 미소는 눈부셨고, 눈에는 흥미로움이 가득 담겼다. 마치 뮤지컬의 클라이맥스를 보는 관객처럼.
“뭐, 좋아요.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죠. 당신을 숨겨둔 타투인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 두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해요.”
베이더의 냉랭한 말에 벤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느새 벤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둔 베이더는 뒤쪽에 있는 대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아챈 벤은 베이더가 수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그 손을 잡아챘다.
“미,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내가, 내가 잘못 했어. 내가 너에게 못 할 말을 했다.”
벤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처럼 목소리 또한 달달 떨렸다. 베이더는 그런 스승의 모습에 희열을 느꼈다. 역시 이 제다이는 미련하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생명 따윈 그냥 버려버리면 그만일 텐데. 물론 그의 박애주의적 성향에 베이더가 이끌렸고, 베이더는 여전히 그런 옛 스승을 사랑했다.
“제발, 제발 사람들은 건들지 말아다오….”
“그러길래 처음부터 잘했으면 좋았잖아요. 마스터.”
‘그래도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죄는 받아야 하는데. 도시 하나는 없애는 게 나을까?’라며 다소 끔찍한 생각을 하던 베이더는 한껏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베이더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벤은 그 미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미소는, 옛 제자를 너무 닮아 있었다.
베이더가 벤을 끌어안기 위해 팔을 벌린 그 순간, 어마어마한 모래폭풍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폭풍에 벤은 베이더의 손을 놓치고, 거센 바람 한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썼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바람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풍이었다. 이미 하늘에는 갑작스러운 폭풍에 대비하지 못한 스톰트루퍼 몇 명이 날아가고 있었다.
쇠약해진 몸은 벤의 바람과는 달리 점점 바람에 밀리고 있었다. 오비완이 점점 바람에 밀려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모습에 베이더의 화가 들끓었다. 이래서 사막이 싫었다. 변덕스럽게 널뛰기하는 일교차도, 무릎까지 오는 긴 부츠를 신고 있어도 들어오는 모래 알갱이도 다 지긋지긋했다. 빌어먹을 모래폭풍은 하루에도 몇 번씩 불어 닥쳤고, 심하면 수일 동안 몰아치는 탓의 집에 거의 갇혀 있다시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오비완을 되찾는 것마저 방해하려 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서 오비완을 앗아갈 수 없었다. 베이더는 바로 어마어마한 포스를 방출했다. 베이더에게서 뿜어져 나온 포스는 폭풍을 거스르며 기세를 잠재우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게 몰아쳐도 폭풍은 잠잠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거세질 뿐이었다. 마치 베이더의 포스를 조금씩 먹어 치우며 몸집을 키우는 느낌이었다. 포스를 인지하고 제 수족처럼 다룬 뒤로 처음 겪어보는 일에 베이더는 당황했다.
베이더는 제다이가 된 뒤로 자신을 무능하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다른 제다이와 다르게 영링을 거치지 않은 그는 그 9년의 공백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무섭게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져왔던 힘을 향한 갈망은 그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 제다이 그랜드 마스터 요다마저 능가하는 미디클로리언 수치는 그를 뒷받침해주었고, 포스를 능숙하게 다룰 뿐만 아니라 광선검을 익히는 센스 뛰어났다. 콰이곤의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포스가 내린 선택 받은 자다.’라는 주장에 반신반의했던 제다이 평의회 의원들도 점차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재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고작 이런 모래폭풍 따위를 못 막는다고? 베이더는 창백한 표정으로 쓰게 웃었다. 그의 꽉 쥔 주먹에서는 우드득 뼈 꺾이는 소리가 났다. 베이더는 오비완을 향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포스가 안 된다면 힘을 써서라도 끌어와야 했다. 손만, 손만 잡으면 그를 잡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오비완, 이쪽으로 와요!”
여유가 없어진 목소리에 벤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표정 대신 오로지 조급한 표정만이 남은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벤은 요동치는 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스승이 위험해지면 바로 달려와 구해주던, 정 많고 다정한 자신의 제자와 겹쳐 보였다. 벤은 절망했다. 몹시 불길한 징조가 하나씩 터져 나온다.
마음이 끌린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다. 그를 끌어안으며 토닥여주고 싶다. 괜찮다며 달래 주고 싶다. 제자의 눈은 여전히 징그러운 황금빛으로 빛났고, 수많은 이가 피가 제자의 손에 묻어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욕구의 기저에는 제다이가 가져선 안 되는 감정이 깔려 있다는 걸 벤도 알고 있었다. 벤은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손바닥에 파묻었다. 험한 꼴을 보고, 험한 꼴을 당했지만,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없을 뿐 그는 여전히 제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시스가 된 제자에게도 마음을 줘버릴 정도로 그는 제자를 사랑했다.
그렇게 절망스러운 와중에도 비실비실한 몸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바람에 밀려나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이런 발악은 벤의 본능이 아닌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벤은 정말 죽고 싶었다. 자신의 미련한 마음이 시스와 같다면, 그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제다이로 살아온 벤은 그 끝도 제다이로 맺고 싶었다. 지금 몸에 힘을 뺀다면, 바람에 날려가지 않을까?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중력에 이끌려 바닥에 처박히고 싶었다.
베이더는 오비완의 비실비실한 몸이 거센 폭풍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 버릴까 걱정하며 그의 옷자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토록 간절한 마음을 담은 행동임에도 그의 손은 끝끝내 오비완에게 닿지 못했다. 오비완의 뒤에서 달려온 인영이 오비완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갑자기 나타난 그는 후드를 깊게 쓰고 있었기에 얼굴까지 확인하는 건 어려웠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인영이 오비완을 끌어안자마자 그 순간을 기다린 듯, 거세게 불던 폭풍이 잠잠해졌다는 사실이었다.
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제 얼굴을 사납게 때리던 모래폭풍이 그런 적 없다는 듯 가라앉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은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강하게! 처음엔 결국 제자에게 붙잡혔다고 낙담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과 마주 보고 있었기에 벤을 등부터 끌어안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자신을 안은 즉시 데바스테이터호로 끌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안은 사람은 그저 거친 숨을 고르고 있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자신의 옛 제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지? 사실 타투인에는 벤을 도와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벤은 누구와도 연을 맺지 않았고, 타투인 사람들도 사막의 미치광이와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타투인에 인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 행성에는 아나킨의 의붓형제인 오웬 라스와 그의 아내인 베루 라스가 살고 있었다. 다만 벤이 타투인에 처음 왔을 때를 제외하곤 그들과 왕래하지 않았다. 벤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한때 제다이였고, 지금은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자신이 누군가와 가까이 지내봤자 상대에겐 불이익만 가득했다. 제다이를 숨겨줬다며 노역장에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무엇보다 오웬 라스는 제다이를 싫어했다. 그가 비록 동생과의 만남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그는 아나킨을 동생으로 여겼고 동생을 사랑했다. 그러니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제다이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 아나킨의 부고를 전했을 때, 스승 된 자가 아나킨을 지키지 못했다며 울분을 토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벤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하며 쓰게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임페리얼급 스타 디스트로이어, 제국군의 것으로 보이는 스타파이터 여러 대와 수십 명의 스톰트루퍼 군단까지. 더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엔 모래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고작 사막의 미치광이 영감에게 영웅 취급을 받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난입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선다고? 미치광이 벤을 위해서? 그렇다면 그 사람은 미치광이라 소문난 벤보다 더 미치광이일 게 분명했다. 벤을 강하게 끌어안고 있던 남자는 벤을 놓아주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융통성 없다고는 해도 움직이기도 힘든 사람을 임무에 보낼 평의회가 아닐 텐데…. 사원에 있어야 할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자신이 제다이였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둘째치더라도, 현시점에서 제다이에게 제다이의 집이자 안식처인 ‘사원’을 언급하는 건 제다이를 향한 능멸이 아닐 수 없었다. 제다이의 역사를 간직한 코러산트의 사원은 제다이 학살이 끝나자마자 시스 군주이자 현 은하 제국 황제의 궁으로 전락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쌓아온 제다이의 방대한 유산이 시스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단 소식에 얼마나 가슴을 찢고 싶었던가. 그런데 왜 사원에 안 있고 여기에 있냐고? 이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여긴 어디죠? 제가 있던 곳은 늪이었는데…. 마스터 윈두에게 보고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모래바람이 불어 닥치질 않나, 정신 차려보니 사막 한가운데에 서 있질 않나.”
…정말 미치광이가 맞구나! 이 광인이 어떻게 윈두에 대해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죽었다. 그것도 시스로 변절한 아나킨이 배신한 탓에 죽었다. 보라색 광선검을 든 손을 베어버린 것이 바로 자신의 옛 제자이지 않았는가! 몇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허탈함과 죄악감에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벤은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찌 됐든 이 미치광이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차라리 자신을 베이더에게 바치면 바쳤지,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을 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비록 제다이는 몰락했더라도, 그는 제다이다. 그에게는 버리지 못한 제다이의 긍지가 있었다. 제다이는 누구보다 헌신적이어야 한다. 누구보다 진지해야 한다. 누구에게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부당한 죽음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지만 벤의 음울한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담기는 순간, 벤은 머릿속으로 생각해둔 말-지금 당장 도망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니, 일단은…. 몸은 좀 괜찮아요, 마스터?”
벤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늘진 상태라 해도 그 얼굴을 몰라볼 리 없었다. 벤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로브를 뒤로 넘겼다. 설마, 정말로? 끝없이 의심이 솟아나며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마치 저물어가는 가을 석양 아래, 황금빛 파도가 굽이치는 갈대밭을 연상케 하는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사그라졌다.
그 아래로 포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미모는 베이더와 너무 똑같아서 순간 그에게 쌍둥이 형제라도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도장으로 찍어낸 듯한 외모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부분이 벤의 눈에 못 박히듯 들어왔다. 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눈가를 쓸다가 볼로 내려왔다. 따스하고 보드라웠다. 오로지 살아있는 사람만 줄 수 있는 그 감각이었다.
“간지러워요, 마스터.”
남자는 벤을 바라보며 살풋, 하늘빛 눈웃음을 쳤다. 이건, 지금껏 자신을 괴롭히던 환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아나킨을 흉내 내는 것도 아니었다. 손가락 아래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은 진짜였고, 그 눈웃음도 오로지 아나킨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무엇보다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그가 듣는다면 질색할 표현이지만- 타투인의 시원하고 맑은 하늘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옛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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