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오비] 변칙적 애착 궤도와 범우주적 살별 프로토콜_03
“정말, 정말 아나킨이 맞느냐?”
남자의 볼을 매만지던 벤의 손처럼, 그의 목소리 또한 덜덜 떨렸다. 다급하게 대답을 구하는 그 목소리엔 꾹꾹 쥐어짜 낸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사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벤을 이루고 있는 모든 감각이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옛 제자, 아나킨 스카이워커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벤은 그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감각이 일러주는 대로 이 남자를 아나킨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남자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다. 남자가 직접 자신은 아나킨 스카이워커라고 확신을 주길 바랐다.
벤의 질문에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곧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면 저 말고 누가 당신의 아나킨이겠어요?”
그 능청스러운 대답에 벤의 시야가 한껏 뿌옇게 변했다. 마치 이른 아침에 낀 안개처럼, 하얗게 흐려졌다. 그 탓에 아나킨의 잘생긴 얼굴까지 흔들흔들 일그러졌다. 한껏 달궈진 눈시울에서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무너진 보처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볼을 흥건히 적실 정도로 울고 있는 와중에도 벤은 희열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럽지만, 그와 동시에 무척이나 달가웠다.
벤은 타투인에 발을 내디딘 후로 툭하면 울었다. 돌아갈 사원이 없다는 사실에 울었고, 사원에서 함께 자라온 제다이들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에 울었고, 옛 제자의 황금빛 눈동자를 떠올리며 울었다. 나이를 먹고도 툭하면 울어 대는 자신의 모습이 꼴사나워서 어떻게든 울음을 그치려고 했지만, 눈물은 주인의 뜻에 쉽사리 따라주지 않았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울어 댄 탓에 그는 항상 두통을 달고 살았으며 가슴은 뻥 뚫린 것처럼 언제나 공허했다. 애초에 벤의 눈물은 현실도피적 성향이 강했고, 눈물을 흘려보내도 그 속을 썩이는 감정은 아직도 벤의 마음에 고여 있으니 앓기만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흐르는 이 눈물은 그간 흘린 눈물과는 달랐다. 이 눈물에 불쾌한 감정 따윈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 여전히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파란 눈의 제자와 다시 만났다는 기쁨과 거대한 항성처럼 밝고 따스한 포스를 향한 반가움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이 북받치는 감정이 달가워서 어찌할 수 없었다. 물론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여전히 눈앞에 있는 아나킨을 향한 의문과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옛 스승이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자마자 베이더는 속이 메슥거렸다. 유리구슬보다 더 투명한 눈물이 볼을 적시는 꼴에 화가 치밀었다. ‘감히 그를 울리다니’, 와 같이 로맨틱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그 눈물에 담긴 의미가 베이더의 속을 긁어댔다.
베이더는 유능한 협상가로서 자신의 감정을 능숙하게 통제할 수 있는 오비완의 행동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십여 년을 넘게 사제 관계로 지내왔으며, 제다이 기사가 된 뒤로도 스승과 함께 미션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그가 웃으면서 뒷짐을 지는 건 상대의 행동이 기분 나쁘다는 뜻이고, 입술을 깨물며 엄지손가락으로 지긋이 문지르는 행동은 부끄럽다는 뜻이었다.
협상가로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던 그가, 지금은 어떤 이가 보더라도 그가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을 절제하고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오비완 케노비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썩어 문드러져 형체조차 남지 않은 것 같았다. 한껏 젖은 그의 눈은 희망의 이채가 담아 눈앞의 -자신이 아닌- 자신을 향해 있었고, -자신이 키워낸 제자가 아닌- 제자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 그가 왜 기쁘고 행복해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베이더의 속은 배배 꼬일 수밖에 없었다. 미련한 옛 스승은 여전히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그리고 있었다. 베이더가 살해한, 그 남자를.
지금이라도 둘을 떼어놔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시끄러웠다. 분조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에 휘감기자 본능이 날뛰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죽이라고 종용한다. 베이더는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 달고 있던 광선검을 쥐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베이더는 광선검을 또 다른 자신을 향해 휘두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가 더욱 정확한 표현이리라.
“마스터 왜 울어요? 애들이 또 태동을 심하게 해요?”
아나킨이 내뱉은 말은 베이더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누그러트림과 동시에 흥미를 불러왔지만, 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애들’이나 ‘태동’이나 벤과는 너무나도 먼 단어임과 동시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묻고 싶었지만, 자신의 배에 올라온 따스한 손길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 손길은 자연스러웠고, 또 익숙해 보였다. 타인의 몸에 손을 댄다는 일말의 망설임과 부끄러움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그는 자주 누군가의, 아니 ‘오비완’의 배에 자주 손을 올리곤 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볼록하게 나온, 생명을 담고 있는 배에. 자신이 아닌 다른 오비완을 보는 아나킨. 그건 자신이 그리는 ‘아나킨’과 눈앞의 ‘아나킨’이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느끼자마자 아나킨의 눈이 커졌다. 아나킨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다시금 벤의 배를 더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없는 배가 순식간에 불러오는 일은 없었다. 날카롭게 뻗은 잘생긴 콧잔등에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마, 마스터! 없어요…. 우리, 우리 아이들이 없어요!”
아, 속이 쓰다. 눈앞의 아나킨이 자신의 아나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에 심장이 벌렁거린다. 아니 툭 떨어졌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다. 유난히 따스한 겨울을 봄인 줄 알고 한껏 꽃을 피웠다가 함박눈을 맞게 된 개나리의 심정이 이럴까. 가득 피워낸 꽃망울을 바닥에 떨궈야 하는 심정이 이랬을까.
행복에 눈이 멀어 잠시 제쳐둔 위화감이 이렇게 빨리 치고 올 줄이야.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지친 정신은 거짓과 위화감으로 점철된 기쁨은 아무런 거부 없이 받아들였다. 그게 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눈앞의 아나킨이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아나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벤도 알고 있었다. 그 우여곡절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은 포스본딩 너머에 누가 있는지는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벤은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다른 세계의 오비완 케노비는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를 훌륭하게 키워내지 않았는가. 그에 반해 자신은 존경했던 스승의 유언도, 자신이 맡은 어린아이와 했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실패한 스승은 또 다른 아나킨의 시선 끝에 있을 성공한 스승에게 감히 질투와 시기, 그리고 존경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보냈다.
그 복잡하게 얽힌 감정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무렵, 포스를 타고 누군가의 분노가 느껴졌다. 이 날카로운 감정의 주인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벤에게 그 감정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벤은 시도 때도 없이 그 감정을 느꼈고, 툭하면 그 감정에 휘둘렸으니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벤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꼭 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를 바라보는 황금빛 눈동자에 질투와 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은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지금의 벤과 똑같았다.
아,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저 아이의 질투와 시기는 자신을 보고 학습한 결과다. 그래, 스승이 못났기 때문에 제자가 어둠의 힘에 매료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아나킨은 또 다른 아나킨처럼 훌륭한 제다이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이 보다 훌륭했다면, 그래서 아나킨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었다면 아나킨은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었다. 그 가설을 증명해주는 증거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지 않은가.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무궁한 가능성을 짓밟혔다. 실패한 스승인 오비완 케노비에 의해서. 부족한 스승의 실패는 나비효과처럼 제다이와 공화국을 몰락시키는 결말을 낳고 말았다. 속이 메슥거린다. 그 불쾌한 사실을 깨닫자마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제자를 타락시킨 스승, 공화국 몰락의 원인.
오비완은, 벤은, 자신은, 죄인이다.
벤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아나킨은 그 창백한 얼굴을 보자마자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래도 자신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나킨은 자신의 있지도 않은 실수와 무신경함을 탓했고, 그로 인해 상처받았을 스승에게 사죄했다. 물론 그 사과의 주인이 아닌 벤은 한 음절도 받을 수 없었다. 그 사과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예정일이 두 달이나 남았다고 너무 안일하게 굴었나 봐요. 조기 출산할 기미가 있다고는 했지만 정말 그럴 줄은…. 정말 미안해요. 당신이 고생하고 있을 때 손도 잡아주지 못한 반려라니…. 최악이죠.”
죄책감에 휩싸인 아나킨이 다시금 벤을 끌어안으려던 찰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스산하게 내려앉았다.
“같은 얼굴이라 한 번은 봐주겠지만, 두 번은 없어.”
한껏 날 선 목소리가 익숙했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아나킨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과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막의 건조한 바람에 나부끼는 갈빛 머리카락, 눈가를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와 입고 있는 제다이 의복, 무엇보다 아나킨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를 감싸고 있는 포스의 특징마저 쏙 빼닮았다는 점이었다. 철과 회로로 이루어진 두 다리와 시스를 상징하는 눈 색, 얼굴 아래로 난 넓은 화상 흉터만 빼면 두 사람은 거울 속에 비친 것처럼 똑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확실한 건 이곳은 네가 있던 곳이 아니며, 따라서 네가 안고 있는 오비완은 네 오비완이 아닌 내 오비완이라는 거겠지.”
베이더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남자의 등장과 함께 흘러 들어오는 ‘자신의 포스’에 오비완과의 재회로 한껏 들뜬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기는 기분에 온몸이 불편했다.
그가 포스를 감지한 이래로 자신의 포스는 무척이나 안정감을 주는 무형의 에너지였다. 때문에 또 다른 자신과 만나게 된다면 반감보다는 반가움을 느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상황에 닥치고 나니 그 가설은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파장과 분위기가 똑같은 포스가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느낀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소름 끼칠 정도로 징그럽다. 모든 생명체마다 동등하게 주어지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존귀의 가치가 훼손되었다는 감각에 온몸의 세포가 들끓었다. 또한 자신과는 달리 밝은 포스로 충만한 그에게 반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베이더의 속을 뒤집는 건, 자신은 밀어낸 주제에 또 다른 자신은 거부하지 않는 오비완이었다. 그의 제자로서 그의 옆에 있었던 베이더지 껍데기만 같은 다른 세계의 이방인이 아니다. 떫은 배신감이 오장육부를 뒤틀었다.
그러니 아까부터 붉게 번쩍이며 ‘자신’을 없애라는 본능의 경고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 ‘자신’만 죽으면 끝날 일이다. 그가 죽으면 존귀의 가치는 더 이상 훼손되지 않을뿐더러, 자신을 짓밟은 포스의 밝은 기운 또한 느끼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오비완 또한 또 다른 자신이 사라진다면 좋든 싫든 자신에게 안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멍청하고 쓸데없이 따뜻한 스승은 한번 정을 붙인 제자를 내칠 수 없을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베이더는 붉은 광선검의 불을 밝혔다.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둔 건 순전히 그의 말에 호기심이 들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계속해서 도를 넘는 행동을 한다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네 오비완이 가르쳐주지 않았나? 가르쳐줘도 까먹는 제자를 둬서 그쪽 오비완이 많이 힘들었겠군.”
붉은빛을 내뿜는 시스의 광선검을 확인한 아나킨의 눈빛이 단숨에 날카롭게 변했다. 아나킨은 벤을 자신의 뒤로 보내 놓고 마찬가지로 제 광선검의 불을 밝혔다.
“글쎄, 내 생각엔 네 오비완이 더 힘들어 보이는걸? 설마 다른 차원의 내가 시스로 넘어갔다니, 상상도 해본 적 없어서 말이야. 선택받은 자의 명예에 먹칠하는 기분은 어떻지?”
“그 말, 똑같이 돌려주고 싶군. 아직도 제다이의 간사한 거짓말에 속고 있다니…. 선택 받은 자가 이리 멍청해서야 쓰나.”
상대를 힐난하는 말을 한마디씩 내뱉은 두 사람은 곧 동시에 달려들어 광선검을 맞부딪혔다. 서로 대척점에 있는 세력을 상징하는 광선검이 귀를 찢을 것처럼 꽝꽝 격렬한 소리를 냈다. 공격은 날카롭게 찌르며 급소를 위협했고, 방어는 정교했다. 공격 한 번, 한 번에 공수가 뒤바뀐다. 광선검을 쥐고 있는 아나킨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자 베이더는 정확히 0.3초 뒤, 왼발을 틀었다.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들어 오는 광선검을 비웃듯이 피한 베이더는 가까워진 아나킨을 향해 내려찍으려 했지만, 아나킨은 자신의 공격이 실패하자마자 이미 한 바퀴 굴러 베이더에게서 멀어졌다. 조금 밀린다고 하더라도 바로 상황을 뒤집고 또 다시 뒤집는 기이한 전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피하거나 방어를 예상하고 공격을 휘두른다. 이토록 기이한 전투에 관객마냥 서 있던 스톰트루퍼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실 서로가 서로의 버릇을 꿰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비록 한 명은 제다이, 한 명은 시스이긴 하나, 둘은 타투인 출신에 슈미 스카이워커를 어머니로 두고 있고 그를 위해 C-3PO라는 드로이드를 만들었으며, 오비완 케노비의 첫 번째 제자로 들어가 그의 밑에서 수련을 받은, 영원히 변치 않은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니 비슷한 버릇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또 다른 관객인 벤은 그 기이한 전투를 바라보며 거칠거칠한 모래사장 위에 무릎을 꿇었다. 주변을 감싼 모든 감각이 그날을 연상케 했다.
용암지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덥고 따가운 열기와 숨 막힐 정도로 무거운 공기, 광선검의 거친 마찰음과 시력을 잃게 만들 정도로 번쩍이는 섬광까지. 벤을 찔러오는 모든 자극이 무스타파에서의 그날을 떠올리게 할 만큼 유사했다. 이명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 때문인지 머리 또한 아파졌다. 살면서 느껴본 두통 중 가장 아픈 두통이었다. 머리를 감싸며 꺽꺽거린 벤은 결국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모래사장에 쓰러졌다.
베이더는 점차 숨이 차오름과 동시에 왼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피곤을 느꼈다. 검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몸에 상처가 많은 베이더 쪽이었다. 아직 회복이 덜 된, 일부러 치료하지 않은 몸은 타투인의 뜨거운 뙤약볕에 취약했다. 광선검이 자신에게 기울어질 때마다 느껴지는 열기로 숨쉬기 힘들었다.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점점 버거워졌다. 이대로라면 몸이 성한 또 다른 자신에게 패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을 구겼다.
오비완을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 갑옷과 투구를 벗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무스타파의 뜨거운 열기에 화를 입은 호흡기관과 용암에 녹아버린 피부는 그 까만 갑옷과 투구 없이는 한 시간도 버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베이더의 또 다른 자신을 향한 분노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본디 오비완을 잡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껏해야 30분 정도.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자신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하이퍼 스페이스를 통과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홧홧거리는 속에 베이더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이 빌어먹을 타투인에 다시금 발을 내딛은 이유는 오비완을 데려가기 위해서지 또 다른 자신과 싸우며 쓸데없이 체력을 소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푸른 광선검을 맞대면서 구경꾼처럼 서 있는 사령관을 향해 눈짓했다. 투구를 벗은 베이더와는 처음 대면하는 것이지만, 평소 유능하고 눈치가 빨랐던 사령관은 바로 그 뜻을 알아채고 정신을 잃은 오비완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란 아나킨이 뒤를 돌아보았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비실비실해 보이는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얼굴이 땅에 처박힌 스승을 보자마자 아나킨의 눈빛이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싸우고 있던 또 다른 자신에게 쏟았던 관심을 얼른 거뒀다. 오랜만에 만난 비등비등한 적수라 들떠버린 탓에 스승을 방치한 제 잘못이었다. 스승을 붙잡고 있는 스톰트루퍼에게 손을 뻗은 찰나, 베이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또 다른 자신이 들고 있는 광선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상황은 동시에 일어났다. 벤을 붙잡고 있던 스톰트루퍼 세 명이 단숨에 몸이 높이 들려 저 멀리 모래산 너머로 날아갔고, 아나킨 손에 있던 광선검이 빡 하는 파열음과 함께 부서졌다. 아나킨은 망가진 자신의 광선검을 살펴보지도 않고 대충 허리춤에 걸었다.
“이렇게 비겁한 수를 쓰면 좋나? 아무리 나라도 시스로 넘어가면 비겁해지나 보지?”
“구닥다리 긍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게 우습군. 애초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게 시스의 방법이지. 어서 빨리 깨닫는 게 좋을 거야.”
“아, 그래? 그럼 나도 나의 조언을 받아 그 구닥다리 사고방식을 조금 버리는 게 좋겠군.”
시큰둥한 어조와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인 아나킨이 모래를 발로 찼다. 팍 솟구친 모래는 다시 가라앉기는 커녕 회오리의 모양을 띠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 뒤는 알아서 흘러갔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거대한 태풍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아나킨의 작은 모래 폭풍도 점점 공기와 주변 모래알을 잡아먹으며 점점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사람 한 명을 날려 보낼 위력을 갖기까지 단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앞서 있었던 모래 폭풍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센 바람이었다. 바람에 저항할 수 없었던 스톰트루퍼의 반절 이상이 바람에 휘말리거나 저 멀리 튕겨 나가고 있었다. 아나킨은 미리 자기 몸과 스승의 몸을 땅에 고정했기에 일개 스톰트루퍼보다 비실비실했던 벤은 폭풍에 휘말리지 않았다. 아나킨은 스승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이미 정신을 잃은 몸은 축 늘어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동할 수 없었다. 결국 아나킨은 스승의 비실비실한 몸을 품에 끌어안고 그대로 달렸다. 아나킨이 만들어낸 폭풍은 주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터주듯, 아나킨이 나아가는 길마다 바람이 약해졌고, 그가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강해졌다.
“오비완!!”
분노에 찬 목소리가 사막을 울렸지만, 곧 사나운 바람 소리에 묻혀 사그라질 뿐이었다.
* * *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한참 동안 그 소리를 더듬던 벤은 머리 한편에 잠들어 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나킨이 오비완의 제자가 된 지 딱 8년이 되던 해였다. 그날도 평화의 수호자답게 미드림의 어느 행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나킨은 어렸을 때부터 기계술과 비행술에 능했는데 때문에 그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뒤부터는 조종간은 자연스럽게 그가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아무리 비행술에 능한 파일럿이라 해도 갑작스러운 기상악화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도시 한편에 마련된 착륙장에 안착해야 할 우주선은 강한 돌풍을 이기지 못하고 도시와 멀리 떨어진 정글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떨어질 때 온몸으로 받은 충격 때문인지 오비완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는데, 그런 그를 깨운 게 바로 지금과 같은 장작불 소리였다.
한참 동안 눈을 감으며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무렵 누군가의 손이 이마에 닿았다. 열이 있는지 확인하는 손길은 곧 젖은 수건으로 바뀌어 얼굴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손길이 퍽 조심스럽고 부드러워 무겁게만 느껴지던 눈꺼풀이 점점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그 조심스러운 행동을 느끼자마자 오비완은 단박에 자신의 제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 자신에게 닿아오던 제자의 손길이 그랬으니까. 천천히 눈을 뜬 오비완의 시야에 잡힌 건 모닥불을 등진 채 손에는 젖은 물수건을 들고 있는 아나킨이었다.
그 모습에 오비완은 그간 자신이 제자에게 너무 무관심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허리춤에 간신히 왔던 꼬마는 어느덧 늠름하게 자라 스승을 내려다볼 정도로 자랐지만, 그 특유의 쾌활함과 자만심은 그를 몸만 자란 꼬마로 보이게 했다. 그런 꼬마가 정신을 잃은 스승을 옮기고 손수 간호까지 한다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간 제자가 어리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그를 편협한 시선으로만 바라본 못난 스승이라니. 오비완은 아나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로 옆에서 스승을 돌보던 아나킨은 오비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가에 작은 호선을 그렸다.
“이제 내게서 도망칠 생각 말아요.”
말이 끝나자마자 아나킨의 하늘을 닮은 파란 눈이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붉은 테두리를 띈 노란 눈으로 변했다. 그 모습에 놀란 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눈앞에는 방금 꾼 꿈처럼 모닥불을 등진 채 검은 천을 들고 있는 아나킨이 보였다.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에 눈앞의 아나킨을 자신의 꿈과 겹쳐본 벤은 누운 상태에서도 몸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억지로 움직였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마스터.”
아나킨이 버둥거리는 마스터에 놀라 그의 몸을 막으며 말했다. 아나킨이 몸을 움직이자 모닥불의 역광 탓에 잘 보이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징그러운 시스의 눈이 아니라 이름처럼 하늘을 닮은 파란색 구슬 같은 눈을 인지한 벤은 온몸에서 힘을 뺐다. 아나킨은 벤이 발버둥 치면서 흐트러진 로브를 다시금 덮어주었다. 익숙한 감촉의 로브에선 마찬가지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이제 보니 그가 걸치고 있는 옷도 제다이의 것을 따르고 있었다. 검은색과 가죽을 선호하는 점까지 그의 제자와 똑같았다.
“미안해요. 깨우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니, 네 잘못이 아니란다. 그냥, 악몽 때문에 그래.”
아나킨은 그 꿈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벤은 침묵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네가 시스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또 그 시스를 너와 겹쳐보았다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세계의 자신이 시스가 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심란할 텐데 그런 그에게 쓸데없는 말로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나킨은 벤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도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무언의 재촉을 보냈다. 물론 벤 또한 그 시선에 넘어갈 정도로 허술한 인간은 아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지나고, 먼저 항복을 선언한 건 아나킨이었다. 깊고도 짧은 한숨을 내쉰 아나킨은 제 손에 들고 있던 물수건으로 벤의 얼굴을 마저 닦아주었다. 악몽을 꾸느라 땀을 많이 흘린 몸은 차가운 물수건을 반겼으나 벤은 걱정 어린 손길을 받는 이 상황이 거북했다. 자신은 이 손길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벤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손길을 거절했다.
“그만. 이러니까 내가 무슨 병상에 있는 환자 같구나.”
벤은 아나킨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피곤에 찌든 몸은 아무리 푹 자고 일어나도 물먹은 스펀지 마냥 무거웠다. 온몸을 쑤셔 대는 고통은 간신히 이겨내고 앉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에도 너무 피곤해 도로 눕고 싶었다. 만일 아나킨이 없었다면 도로 누워 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나킨은 그 작은 동작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팔을 주물러주었다.
“마스터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몸 상태만 보면 거의 환자예요. 극심한 영양실조에 면역력도 많이 떨어졌고요. 어쩌자고 몸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요? 제가 기껏 음식을 만든다 한들 정작 마스터의 위장이 못 받쳐주면 아무 소용 없다고요.”
“…잔소리가 늘었구나.”
“당신 몸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없던 잔소리까지 나오는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으세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참을 귀가 따갑게 잔소리하던 아나킨은 아까 전의 벤처럼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는 어두운 낯빛으로 묵묵하게 벤의 혈점을 찾아 주물러주었다. 기세등등하게 잔소리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입을 꾹 다문 모습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뭐, 또 다른 자신이 타락한 모습을 본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의 마사지가 효과가 있었는지 벤은 자신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던 피로가 점점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풀린 목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돌벽이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돌벽을 보자마자 여기가 동굴이라는 걸 깨달았다. 동굴 한편에는 아나킨이 피운 것으로 보이는 모닥불이 있었는데 아무리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이라 해도 불빛이 유난히 밝았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한밤중이라는 걸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점심에서 밤이 된 시간이나 흐물흐물 풀려버린 몸을 보면 족히 8시간에서 10시간은 넘었으리라.
모닥불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시야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짧은 쇠막대와 난잡하게 흐트러진 쇳조각. 자세히 보니 그건 광선검이었다. 그것도 처참하게 망가진. 도대체 저건 언제 부서진 건지. 저 광선검이 어떻게 파괴된 건지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저걸 망가트린 범인이 바로 자신의 옛 제자라는 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나킨의 광선검을 저 정도로 망가뜨릴 수 있는 범인은 이 우주에서 단 한 명뿐일테니까.
자신이 기절한 동안 광선검이 망가진 상태로 자신의 뒤치다꺼리를 한 다른 세계의 아나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촐한 조리기구와 손질이 덜 된 채소, 깍둑깍둑 썰린 고기와 낯선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가 싶어서 궁금하다는 듯이 바라보니 아나킨이 어깨를 으쓱이며 마사지를 이어 나갔다.
“모스 아이슬리에 다녀왔어요.”
맙소사! 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아나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옛 제자가 무모하다는 건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른 세계의 아나킨이라고 해서 그에게 얌전하고 점잖게 행동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듯 사람을 숨기려면 군중 속에 숨기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 말이 맞을지 모르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예측하건대 현재 이 타투인에서 두 사람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이 척박한 사막 말곤 없을지도 몰랐다.
타투인에 제다이 잔당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제국이 이대로 물러서진 않을 터였다. 끄나풀은 제대로 밟아 없애야 제국을 위협할 세력으로 자라나지 않는다. 그 끄나풀이 한때 제다이 마스터였다면 더더욱. 제국은 아나킨과 벤이 도망치자마자 옛 공화국의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져보았으리라. 그렇게 찾아낸 도망친 두 사람의 인상착의를 담아 수배 데이터로 만들어 타투인에 있는 모든 사람의 개인 기기로 뿌렸을 것이고, 그 목에는 상당한 현상금이 걸려있겠지.
이럴 경우 현상금 사냥꾼은 물론이고 일반인조차도 그들을 무시할 리 없었다. 이 척박한 행성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가 눈에 띄기만 해도 바로 제국군에게 신고할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을 비난하는 건 아니다. 벤이 살아온 타투인은 제자가 늘 입에 달고 살었던 것처럼 살기 척박한 행성이다. 입술을 축일 물조차 구하기 어려운데 당연히 뛰쳐나가고 싶겠지. 더구나 제국의 프로파간다에 노출된 그들의 눈에 제다이는 공화국의 수호자가 아닌 반란을 꾸민 범죄자로만 보일테니까.
벤이야 옛날과 많이 달라진 외양 때문에 그럭저럭 숨길 수 있다고 해도, 아나킨의 경우는 달랐다. 그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이가 제국 안에 있으니 그의 수배지는 벤보다 훨씬 정확하고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마을을 다녀왔다니. 아무리 포스를 제 수족처럼 다루는 아나킨이라 해도 수로 밀고 간다면 승산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광선검은 완전히 망가졌으니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벤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태평하게 자신이 모스 아이슬리에서 겪은 일을 나열할 뿐이었다.
“…제가 당황해서 타투인은 현물을 받지 않냐고 했더니 그게 언제 적 이야기냐고 하면서 저를 무슨 골동품 보듯 보더라고요. 결국 제가 가지고 있던 드로이드 볼트를 팔아서 돈을 마련했어요. 제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것보다 타투인이 돈을 받는 게 충격이라니까요.”
아나킨이 말을 끝내자 벤은 잠시 말을 골라야 했다. 무모하게 행동한 아나킨을 다그칠지, 아니면 그의 말에 맞장구쳐줄지. 아마 그가 벤 케노비가 아닌 오비완 케노비였다면 고민도 하지 않고 전자를 선택했을 거다. 그 고귀하고 규율에 얽매인 제다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오로지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사막의 미치광이 노인네는? 그에게서 고귀함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를 얽매고 있는 규율 따위도 없었다. 그러니까 좀 더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쪽 타투인은 아직도 현물을 받나보구나.”
“음 사실 잘 몰라요…. 의회에서 조금씩 압박하고 있다고 얼핏 듣긴 했는데, 그 행성은 안 간 지 오래됐거든요.”
만일 이 아나킨이 자신의 아나킨과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쳤다면 그의 어머니인 슈미 스카이워커 또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슈미 스카이워커.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유일한 혈육인 그를 생각할 때면 벤은 자신의 가슴 한구석이 미어졌다. 만일 그때 아나킨의 꿈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그의 어머니를 구했더라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후회로 인해 잠 못 드는 밤을 이어 나가곤 했다.
벤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쨌든 아나킨에게 이 행성은 나쁜 기억으로 가득한 행성이다. 어쩌면 이 행성에 발붙이고 있는 지금도 매 순간순간이 끔찍하지 않을까? 벤은 이 주제를 더 이어 나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돌렸다.
“여튼 고생이 많았구나. 내가 기절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꼭 그렇지만은 않을걸요? 원래 마스터가 걱정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아시는 게 좋긴 하겠네요. 사실 아까 마을에서 나오기 직전에 그놈들이랑 만났어요.”
“뭐?”
“일단 근처에 있던 스피더를 빌려서 달아나긴 했는데 녀석들도 블라스터를 쏘면서 쫓아오길래 따돌리는 게 힘들었어요. 엔진에서는 과열 때문인지 검은 연기나 뿜어내지, 뒤쪽 녀석들은 계속 쫓아오지. 중간에 크레이트 드래곤이 녀석들을 삼키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동굴이 아니라 아까 그 큰 함선에 있었을걸요?”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하하, 그렇긴 하죠. 하지만 저는 거기에 당신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 그렇다고 당신이 방해라는 말은 아니라는 거 아시죠? 그냥, 그 녀석들이 쏜 블라스터나 크레이트 드래곤 때문에 당신이 다치는 게 싫은 거뿐이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아나킨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은 눈앞에 있는 아나킨의 스승이 아니었다. 그건 아나킨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스승에게 하듯 벤을 배려하며 상처가 되지 않게 말을 고르고, 혹여나 오해할까 봐 최선을 다해 해명하고 있었다. 닮은 얼굴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자신을 스승이라 여기고 있는 걸까?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자신부터가 눈앞의 아나킨을 자신의 제자처럼 여기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아나킨에게 느꼈던 감정을 눈앞의 아나킨에게서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아나킨도 비슷한 상황인 건 아닐까? 약간 들뜨려는 기분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벤은 바로 붕 뜬 기분을 잡아 아래로 내리꽂았다.
눈앞의 아나킨이 스승이라 여겨주는 게 좋다고? 정작 자신의 제자는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한 한심한 스승 주제에. 위안받을 생각 하지 마. 성공한 건 다른 ‘오비완 케노비’니까.
“그래도 광선검이 멀쩡했으면 꼴사납게 도망만 치지 않았을 텐데.”
아나킨은 자신의 망가진 광선검을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제다이에게 광선검이 주는 의미는 무척이나 남달랐다. 자신이 직접 만든 힐트와 자신을 선택해준 카이버 크리스탈의 집합체이니 절대로 떼어놓을 수 없는 분신이라 부를 수 있었다. 벤이 위로의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아나킨이 말했다.
“그나저나 혼날 걸 각오하고 말한 건데, 그렇게 크게 혼내시진 않네요?”
“아, 크게 혼나고 싶었니? 그런 쪽이 취향인 줄은 몰랐구나.”
“에이 그냥 저랑 대화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니까.”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딱 봐도 날 놀리는 어조가 다분했는데. 그래도 벤은 뭐라 더 타박하지 않았다. 마사지에 집중한 아나킨이 제 타박을 들어주지 않으리라 판단한 탓이었다. 제법 가깝게 다가온 아나킨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소 가볍지만 그래도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잠깐, 내가 얼마나 안 씻었더라?’
우울하고 지친 벤 케노비는 자신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곯는 배를 달래는 것에만 급급했고 타인과의 관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오비완 케노비였던 시절, 그가 가장 신경 썼던 요소가 다름 아닌 청결이었다. 협상가로 이름 날리기 시작하면서 그 집착은 더욱 심해졌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요소였다. 머리가 떡지거나, 눈에 눈곱이 끼거나, 입가가 지저분하거나, 걸친 옷에 얼룩과 주름이 있는 협상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만약에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나킨이 아니었다면 벤은 자신의 몰골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미치광이 벤에겐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나킨의 앞에서 사막의 미치광이로 남아 있을 순 없었다. 오래전, 잊었다고 생각한 스승으로서의 의무감이 깨어난 감각은 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쳤다. 벤은 아나킨에게 잡혀 있던 몸을 빼냈다. 갑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진 벤을 아나킨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스터?”
“아, 저기 그게….”
“왜 그래요? 너무 세게 주물렀어요?”
아나킨이 염려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지만, 아나킨이 다가온 만큼 벤은 몸을 뒤로 뺐다. 무릎걸음으로 도망치는지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았지만, 벤은 필사적이었다.
“마스터,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몰라요.”
“그게, 그러니까…. 좀, 씻고 싶구나.”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며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항상 제자에게 앞가림을 철저하게 하라고 가르쳤던 그가 이런 부탁을 하게 될 줄이야.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그의 속앓이를 눈치챈 건지, 아나킨은 따로 트집 잡지 않았다 구겨졌던 미간을 살살 풀면서 말했다.
“에이 뭐야. 그런 거였어요?”
“그런 거라니. 청결은 중요한 문제야.”
“네, 잘 알고 있죠. 처음 쿼터를 배정받자마자 바로 욕실로 들어가서 박박 씻겨 주셨잖아요. 너무 박박 씻겨 주셔서 피부가 까지기도 했고요.”
오비완이 아나킨을 파다완으로 들인 첫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모든 사람은 어린이를 경험하지만, 그때 겪었던 경험을 온전하게 기억하진 않는다. 더구나 콰이곤과 미션을 수행하는 날이 더 많았던 오비완은 아이와 접하는 일이 없어 무지했고, 때문에 9살 사이의 피부가 얼마나 약한지 몰랐다. 어른이 쓸 법한 거칠거칠한 수건으로, 자신이 씻던 대로 힘을 주었으니 여린 살결이 그 자극을 견뎌낼 리 없었다. 결국 새빨갛게 부은 피부에 연고를 발라주는 건 그의 보호자이자 상처 만든 장본인인 오비완의 몫이었다.
“…그쪽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오비완’과 ‘아나킨’의 일이니까요. 조금 다르지만,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건 아닌가 봐요.”
그래서 씁쓸함이 올라오는 걸 억누를 수 없었다. 포스의 밝은 면의 아나킨과 포스의 어두운 면의 아나킨. 그 둘의 성장 배경에 큰 차이점이 없다면 문제는 그에게 영향을 미친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스승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제다이의 경우 부모가 없기 때문에 그 스승이라는 존재가 더욱 크게 다가오리라.
만일 자신이 어진 스승이었다면, 아나킨은 타락하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가정이라는 걸 안다. 늦은 깨달음이라는 것도 안다. 자신이 아무리 후회해도 시간은 되돌아가지 않으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노력해야 한다는 걸 벤이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자꾸만 그쪽으로 튀는 생각을 막기는 어려웠다.
“동굴 안쪽에 물이 있어요. 혹시나 싶어서 세면도구도 사긴 했는데, 잘됐네요.”
아나킨은 모닥불 옆에 있던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벤은 이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에서 호수가 있는 동굴을 발견하질 않나, 갑자기 세면도구를 준비하지 않나. 물론 그는 포스가 직접 이 세상에 내려준 아들이니 이 모든 걸 포스가 이끌어 주고, 만들어주었다고 해도 과한 해석은 아니었다. 제국군에게 쫓기다가 갑자기 나타난 크레이트 드래곤이 제국군을 삼켜버렸다는 것도 역시 그가 포스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겠지.
벤은 고맙다고 인사한 뒤, 아나킨이 가리킨 방향으로 들어갔다. 똑똑, 청아한 물소리가 들려올 무렵, 뒤쪽에 있던 아나킨이 소리쳤다.
“허전하면 같이 씻을까요, 마스터?”
“됐다!”
벤의 소리치자마자 아나킨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나킨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오비완의 날 선 목소리가 동굴 벽을 이리저리 튀어 다녔다. 이런 상황에서도 스승을 놀려 먹고 싶어 하다니. 어쩌면 그 어떤 차원에서도 점잖고 어른스러운 아나킨의 모습은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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