穩緣

찾아온 감기와 느긋함

온연

영원의 덫 by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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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이 났다. 혼자 살면서 제일 서러운 순간 1위는 아플 때인데…… 최악이다. 아픈 와중에도 과제 제출 기한 생각하고 있는 나도 미친 새끼 같고……. 그래도 어떡해, 졸업은 해야지. 아이고, 두야.

한 걸음 뗄 때마다 온 몸이 비명 지르고 열까지 올라 골 울리면서도 겨우 혼자 병원 진료 받고 집으로 돌아온 성온이 거의 모든 힘을 다 소진한 듯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오는 길에 죽도 사 왔으니까 일단 이거 먹고…… 약 먹고 조금만 자자……. 으아악…….

죽을 한 숟갈씩 입에 겨우 넣고, 입맛 없어도 알아서 그릇에 담아온 죽을 전부 싹 비운 성온이 약 봉지를 뜯어 입에 알약을 털어 넣고, 미리 담아 온 물을 꿀떡꿀떡 삼키며 알약을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 맛 없다. 손이며 발이며 감각이 없는 것 같기도,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펴보고는 이불을 덮으며 자리에 누웠다. 얼음팩을 돌돌 감은 수건이 이불 안에 있어 자세 잡고 눕기가 영 불편했지만, 그래도 아픈 것보다야 얼른 낫는 게 낫지…….

벨소리를 꺼두어 무음으로 화면만 몇 번씩 빛났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핸드폰을 모른 채, 성온이 약 기운에 취해 잠에 빠져 들었다.

“다녀왔습니다!”

오후 5시 오픈을 위해 자고 있거나 방에서 책 읽고 있을 형에게 건네는 짧은 인사 뒤로 방으로 뛰어 들어간 연해가 가방을 침대 위로 대충 던져놓고는 거울 앞에 서서 옷 냄새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담배 냄새가 배여 있었다. 성온은 담배 냄새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연해의 동기들이 담배 피는 자리에서 우뚝 서서 다음 수업 조별 과제 일정 얘기를 나누다 온 게 아무래도 실수였지 싶다. 옷을 훌렁 벗어 바닥에 던져 놓고는 옷장을 뒤져 생일 선물로 성온에게서 받았던 니트를 꺼내 입었다. 바지도 갈아 입고, 향수도 살짝 뿌린 연해가 벗은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주워다 빨래통 안에 던져 넣고 현관에서 급하게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활짝 열며 소리쳤다. 다녀오겠습니다! 연해의 인사 소리와 엇비슷하게 방에서 나온 인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주방으로 들어선다. 들어온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나가……?

“선배……!”

감기 걸려서 수업에 못 나갔어, 라는 문자를 확인한 건 제 수업이 전부 끝난 오전 10시 30분. 그때 이미 집으로 돌아가 주성온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연달아 11시부터 1시까지 있는 수업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상태로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감기 좀 걸린 것 가지고 뭐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는데, 주성온은 고등학교 3학년 입시 준비 막바지 때를 제외하고는 제가 본 시간 동안은 한 번도 아픈 적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프다는데 어떻게 호들갑을 안 떨 수가 있느냐고. 늘 건강하던 사람이 아프다는데…….

물론 전부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결국 저라는 사람이 그에 대해 조금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걱정하게 된 데 감정의 부분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오래 보아 온 선배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 이상, 감정에서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지만.) 마음을 전하는 건 어렵겠지만, 지금의 감정을 외면할 생각도 없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 수업은 다 하고 왔어?”

느리게 뜨고 감는 눈, 반쯤 잠긴 목소리, 한 눈에 보기에도 무거워보이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대충 허공을 휘저으며 손 인사를 건넨 그는 도로 침대 위에 팔을 툭- 내려놓고는 첫 마디가 이랬다. 누구는 걱정에 여기까지 한달음에 뛰어 올라왔는데, 수업 안 빼먹고 다 듣고 왔는지를 제일 먼저 묻다니. 그래도 졸업은 해야지~ 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누구 씨다운 질문이라 무어라 하지도 못하고 한숨을 삼키며 침대 옆 바닥에 조심히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듣고 왔어요.

“선배는 내가 수업 빼먹고 올 사람으로 보여요?”

“그건 아닌데, 혹시 모르잖아…….”

병원은요? 갔다 왔어. 약도 먹었어요? 아침에 다녀와서 죽 먹고 약 먹고 자다 이제 일어난 거야, 타이밍 좋네, 연해…….

무거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여전히 누워 있는 것을 바라보다 시간이 1시는 애진작 훌쩍 넘었음을 기억한 연해가 자리에서 도로 일어났다. 냉장고에 죽 남아 있어요? 응, 왜? 데워서 가져다 드릴게요, 누워 계세요. 성온의 대답이 무어라 떨어지기도 전에 방에서 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들어간 연해가 익숙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새 것인 죽 통 옆으로 3분의 1 정도 남아 보이는 죽이 있었다. 아침에 덜어 먹고 남은 양인 모양이었다. 이것과 새 것을 같이 꺼내고, 3분의 1 정도 남은 죽을 먼저 그릇에 옮겨 담은 후에 새 것의 통을 열어 죽을 옮겨 담았다. 살짝 깊게 들어간 국 그릇 정도 사이즈의 그릇에 절반 정도 채운 연해는 남은 죽의 통을 잘 닫아 냉장고에 넣고, 싱크대 상부장에 있는 랩을 익숙하게 꺼내어 그릇 위에 덮은 후 전자레인지를 돌렸다. 싱크대 한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약 봉투에서 점심 약이라 쓰여진 약 봉투를 뜯어 쟁반 위에 올려두고, 물도 미지근한 온수가 되게 뜨거운 물을 살짝 받아 섞어 쟁반 위에 올려두었다. 숟가락을 챙겨 들고, 전자레인지가 다 돌기를 기다렸다.

몇 년 전까지 이 싱크대의 맞은편에는 식탁이 있었다. 4인용으로, 성온의 조부모님과 성온이 썼고, 가끔 제가 그 자리에 끼기도 했고, 단영이 자리하는 날도 간혹 있었다. 조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성온은 더 이상 식탁이 있을 필요가 없다며 식탁을 버리려고 했으나…… 결국 버리지 못해 그 식탁은 제 집에 내려왔다. 마침 다리가 흔들거리기 시작한 식탁을 바꿔야 할 것 같다던 부모님이 성온이 버리겠다는 식탁을 받아왔었다. 네게도 소중할 추억이 있는 식탁을 버리면 네 마음도 아플 테니, 연해를 자신들의 손자처럼 아껴준 어르신들을 생각해 우리가 가지고 있게 해달라고. 식탁 바꿀 때가 됐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던 터라, 차라리 그게 나을 거라 생각했던 성온은 기꺼이 그러라 했다. 그렇게 저희 집 주방에 자리하게 된 식탁이 불현듯 떠오른 사이, 전자레인지에서 삐- 하는 소리가 났다. 뜨거운 그릇을 만지다 깨먹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장갑을 끼고 조심히 꺼낸 연해가 쟁반 위에 그릇을 올리고, 랩을 벗겨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에게는 버릴 수 없음에도 버려야 할 것들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망설이면 버리지 못할 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버리면 제 속이 텅 비어버릴 것만 같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그 안에서 저는, 그리고 저의 가족들은 그에게 작은 선택지를 하나 더 쥐어준 셈이었는데, 그는 여전히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홀로 우두커니 서서 해결을 보려고만 했다.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고 부모님과 형이 이야기를 했기에 연해 역시 그가 홀로 서서 감당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언젠가는 할 수 있을까. 그가 저와 저의 가족에게 감당할 것을 나누고, 함께 생각할 수 있게 기회를 줄 날이 올까.

물론 오늘의 감기는 단순히 그가 몸 상태 관리도 못할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생긴 일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의 상태에 대해서는 주성온 자신만이 아는 것이라, 심연해는 그저 짐작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선배, 이거 좀 먹어요.”

침대 옆의 협탁에 쟁반을 올려둔 연해가 성온을 붙잡았다. 일어나는 게 힘들 테니, 같이 일으켜주겠다는 의미인 듯 했다. 성온은 그 손길을 한 번 훑고는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눈꺼풀이 무거웠고,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아팠다.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기분이었다. 그의 앞으로 쟁반이 내려왔다. 물과 약은 협탁 위로 치워둔 채였다.

“너 고생 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고생은― 그냥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했는데요, 뭘.”

“지금 몇 시쯤 됐어?”

두 시 반 됐어요. 수업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구나. 작게 웃으며 죽을 한 술 떠서 입에 넣는 그의 느릿한 움직임을 바라보며 연해가 존재 의미를 모르겠는, 그러나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바퀴 달린 동그란 의자를 당겨 와 앉았다. 몇 달 전에 물었을 때 베란다 창고 정리하다 찾은 건데, 침실에는 마땅히 의자가 없으니까 침대에 앉기는 그렇고 바닥에 앉는 것도 불편한 사람을 위해 두면 어떨까 싶어서 꺼내놨다고 하긴 했지만……. 이 집에 제일 많이 드나드는 것은 다름아닌 저인데, 저는 이 집 침대는 제 집 침대 쓰듯이 쓰는 사람이라 껄끄러울 것도 딱히 없었다. 그 다음은 단영인데, 단영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착석하거나 거실 소파에서 주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나 싶다. 그래도 이렇게 쓰이게 됐으니 나쁠 건 없지만.

“그거 다 먹고, 약 먹고 앉아 있다가 좀 더 자요.”

“나 자면 너는 뭐 할 거야?”

“…… 거실에 앉아서 과제 하고 있을게요.”

아파서 둔해진 건지, 혼자 아픈 게 서러운 와중에 제가 옆에 있어준다니 그냥 기쁜 건지, 헤실 웃어보이는 성온의 얼굴에 한숨을 삼킨 연해가 따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심장께가 간질거렸다. 무엇인지 해석도 하지 못하는 웃음 하나에도 설렘이 따라 붙다니, 중증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아팠으면 인해 형이라도 불러서 병원 같이 갔어도 됐는데요.”

“너희 형은 밤 늦게 퇴근하시는데 피곤하시게 내가 어떻게 불러. 밤샘 작업 밥 먹듯이 하고, 새벽 3시에 자면 기적인 삶을 사는 건 내가 충분히 알아서 너희 형 힘드실 것도 느낄 수 있는데.”

“…… 선배, 아래 층에 저희 식구들이 있어요. 선배는 절대 혼자 아픈 사람이 아니라고요. 지금이라도 선배 아프다고 한 마디만 해도 저희 부모님이랑 인해 형이 걱정해서 부리나케 뛰어 올 걸요, 저처럼.”

“알지, 무척 잘 알지. 그래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 안 하려고 하는 중.”

다 먹었다, 약 줘. 무어라 더 말하지 못하게 차단한 채 말을 이어버린 성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삼켜버리고 만 연해가 한숨을 내뱉으며 약 봉투를 찢어 알약을 그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고는 쟁반을 치운 후, 물이 든 잔을 그의 반대쪽 손에 쥐어주었다.

선배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기대기를 어려워하고, 저는 그런 선배에게 버팀목이 되어 줄 수는 없어도 안식처 정도는 되어주고 싶었다. 선배가 기댈 수 있게 되기까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는 걸 앎에도, 제 부모님과 형이 이야기를 하기도 했기에 저는 오로지 그의 뒤에 서서 그를 기다리기만 했지만, 가끔은 마음이 초조해지곤 했다. 이러다 훌쩍 떠나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심연해, 나 아무데도 안 갈 거니까 그런 표정 넣어.”

“…… 에?”

“얼굴에 무슨 생각 하는 중인지 다 읽혀. 걱정하지 마, 연해야. 그냥…… 습관처럼 남을 안 찾을 뿐인 거지, 언제나 너를 제일 먼저 생각하고 있긴 하니까. 그리고 널 두고 내가 어딜 가겠어. 우리 연해 성공하는 것도 봐야 하고, 성공한 연해한테 밥도 얻어먹어야 하는데.”

“좀 살 만 하나봐요? 쓸데없이 농담이나 하고.”

“응. 네 걱정 받으니까 아침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그건 선배가 잘 자서 그런 거예요, 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왜인지 오늘은 그에게 반박하는 대신에 저 역시 그의 말처럼, 제 덕분이라 생각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는 성온에게 무어라 한 마디 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고, 자그맣게 숨을 내뱉은 후에 늦게 웃음 뒤로 말을 덧붙였다. 조금 이따 누워요, 좀 소화 시키고. 그럼 오늘 학교에서 재밌는 일 있었는지 공유나 좀 해 줘. 음,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럼 평범한 일상 공유라도. 어, 인해 형네 바에서 일하는 바텐더가 여자 손님들한테 엄청 인기가 많아져서 매출이 껑충 뛰고 있다는 이야기 같은 거라도 괜찮으시다면요. 아, 그 여자 분 말이구나, 오픈 초기 때는 남자 손님이 조금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느릿하게 이어지는 대화, 들뜬 것 같기도 감각 이상인 것 같기도 한 일상.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지지 않을 엇갈림은 다음에 다시 생각하고, 오늘은 이 순간의 따스함과 느긋함을 즐기자고, 둘이 생각했다. 누군가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르고, 누군가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으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상태를 오늘만큼은 신경 쓰지 말자고. 단지 이 순간의 감각을 기억하기로 하자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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