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키키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여름의
* 설명 : 다함께 떠난 바캉스. 거기서 고양이 모가 사라집니다. 레드썬과 메이는 모를 찾으러 함께 숲으로 들어가는데...
여름 바캉스. 이 단어를 들으면 순서가 다를지언정 떠올리는 게 비슷할 것이다. 시원한 바다, 작열하는 태양, 자글자글 익는 바비큐 그리고...
"남자는 눈을 의심했어. 아무도 없는 복도에 사람의 그림자가 깔려있었거든."
무서운 이야기.
졸음과 짜증이 공존할 수 있음을 오늘 레드썬은 깨달았다. 모닥불 너머 탕의 형체가 일렁거렸다. 졸음이 빚어낸 시야 번짐인지 아니면 모닥불이 자아낸 아지랑이 탓인지. 하품을 하니 시야가 조금 더 뚜렷해졌다. 졸음이었나보다.
보다 말끔해진 시야 덕에 주위가 눈에 잘 들어왔다. 시선을 왼쪽으로 흘깃 돌렸다. 메이 드래곤. 캠프파이어라는 귀찮은 모임에 그를 끌어들인 장본인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자신의 단짝 친구를 꼭 껴안고서. 찰싹 달라붙은 걸 보고 있으니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무서워서 듣지도 못할 거, 그런 말은 왜 꺼냈대?'
처음부터 무서운 이야기가 나온 건 아니었다. 시작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반추하며 자기 생각을 꺼내는 가벼운 분위기였다. 시간이 흐르며 할 말이 줄어들 즈음, 돌아가며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자는 제안을 꺼낸 사람이 메이였다.
레드썬은 눈만 움직여 주위를 확인했다. 듬성듬성 빈 자리가 눈에 띄었다. 마카크는 일찌감치 자리를 떴고, 손오공은 피곤하다며 자러 들어갔다. 그의 부모님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어디서 둘만의 오붓한 밤 산책을 즐기는 중이리라.
"세상에, 아직도 안 끝났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먼저 자리를 뜬 픽시가 레드썬 뒤에서 나타났다. 이마 위로 몇 가닥 돋아난 털에 맺힌 물방울은 픽시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반짝거렸다. 얼굴 주변과 상의의 네크라인이 젖은 걸로 보아 막 씻고 온 모양이었다.
"탕, 지금 몇 시인지 알아?"
"너무 그러지 마, 픽시. 애들도 다 컸잖아. 한 번쯤은 눈치 안 보고 실컷 놀게 해줘. 자네도 그럴 생각으로 내일까지 국수 가게 휴업한 거 아냐."
"맞아요, 사장님! 내일도 휴가잖아요."
"이따가 불꽃놀이도 해야 한다구요."
"그래, 그래. 그나저나 샌디는?"
샌디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함께 있던 고양이 모도 보이지 않았다. 탕은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무서운 이야기를 막 시작할 때만 해도 여기 있었다.
"어,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는데."
부스럭.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로 쏠렸다. 탕의 등 뒤였다. 언제 일어났는지 탕은 저보다 작은 픽시 뒤로 몸을 최대한 숨겼다.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덤불이 바르르 떨다 말고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우오오오오!!!!"
그것은 덤불과 한 몸이 된 거인이었다. 알 수 없는 괴성과 함께 뛰쳐나온 거인이라니. 혼비백산한 이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오직 거인의 정체를 제대로 꿰뚫어 본 픽시만 무덤덤하였다.
"샌디. 자네 어디 갔었어?"
그제야 사람들은 거인의 생김새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파란색 피부, 수북한 주황색 턱수염. 틀림없이 샌디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덩굴과 나뭇잎들을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픽시가 샌디 곁으로 다가갔다. 북슬북슬한 턱수염과 나뭇잎들 사이로 빼꼼 내민 눈이 젖어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턱수염 사이로 스며들었다.
"모가, 모가 어디로 갔는지 안 보여...!"
수풀 속에서 뛰쳐나올 때 내지른 괴성은 고양이를 찾는 집사의 간절한 외침이었다. 모가 사라졌다는 말에 메이가 펄쩍 뛰었다.
"우리 귀염둥이 야옹이가?!"
"캠핑카 아래부터 캐리어 안이랑 바위 바닥까지 찾아봤는데 수염 한 올 없어! 도대체, 어디로 갔지...?!"
레드썬의 붉은 눈썹이 가운데로 몰렸다.
'고양이가 따개비야? 바위 바닥에 붙어있게.'
픽시는 샌디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긍정적인 면을 보려 노력하는 친구였다. 그가 자신을 위로해준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샌디를 위로할 차례다.
"샌디, 너무 걱정 마. 자네처럼 용맹한 고양이이니 분명 어딘가에 잘 있을 거야. 내가 같이 찾아줄게."
엠케이가 픽시를 거들었다.
"맞아요. 흩어져서 찾으면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픽시... 얘들아... 정말 고마워...!"
다들 파이팅 넘치는 가운데 레드썬만이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그의 직감이 고했다. 여기 있으면 십중팔구 귀찮은 일에 휘말린다. 다행히 각자 탐색 구역을 하나씩 정하느라 누구도 레드썬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나와 레드보이는 저 안쪽을 살펴볼게."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메이가 레드썬의 손을 낚아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송아지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버텨보려 했으나 소용 없었다.
"아니, 난...!"
"찾으면 연락해!"
사람 아니, 요괴가 말하면 좀 들어! 그렇게 레드썬은 고삐 잡힌 송아지 같이 메이가 가자는 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모, 어디 있니?"
가로등과 네온사인 간판이 없는 숲은 몹시 어두웠다. 두 사람은 스마트폰의 손전등 기능에 의지하며 모를 찾아다녔다. 모가 사라졌다는 말에 제일 먼저 반응했던 메이가 특히 부지런히 찾았는데, 문제는 꼼꼼히 찾는답시고 엉뚱한 곳까지 살펴본다는 점이다. 풀숲을 헤쳐보거나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바위 하나까지 뒤집어가며 찾기 시작하자 레드썬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이 바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고양이가 그런 곳에 숨어있겠냐."
도리어 메이는 혀를 쯧쯧 차며 레드썬의 말에 반박했다.
"너야말로 뭘 모르는구나.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 숨을 수 있는 생물이 고양이라고. 머리만 집어넣을 수 있으면 일단 들어가고 보는 게 고양이란다."
레드썬 머리 위로 뻗어난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바람 때문이라기엔 흔들림이 꽤 컸다. 메이는 눈을 빛내며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방금 저거 봤어?"
"저게 왜?“
새카만 덩어리가 가지 위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빛을 비춰보았으나 보이는 건 흔들리는 나뭇잎 뿐이었다. 하지만 메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모가 나무 위로 올라갔는지도 몰라."
레드썬과 메이의 시선이 부딪혔다. 메이가 자신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목말 태워줄 테니 올라가라는 의미다. 레드썬은 떨떠름해 했지만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천계에서 불멸의 복숭아를 함께 서리한 경험이 떠올랐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한번 겪으면 그다음은 쉬워지는 법이다.
"어때?"
"잠깐만."
레드썬을 기다리는데 어쩐지 다리 아래가 간질거렸다. 바지 자락이라도 올라갔나. 메이는 다리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뱀 한 마리가 메이의 다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나무로 인식한 걸까. 시선을 느낀 뱀이 머리를 쳐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메이는 여기서 또 한 번 굳어버렸다.
용의 후손이 뱀을 두려워하는 게 말이 되느냐. 이리 되묻고 싶은 자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사람 역시 저보다 한참이나 작고 작은 벌레를 두려워하며 비명을 지르잖는가.
"우와아아아악!!!!"
"어, 어?! 가만히 있...!"
메이는 반사적으로 있는 힘껏 다리를 털었다. 효과는 무척 좋았다. 화들짝 놀란 뱀이 후다닥 도망갔다. 그러나 효과가 좋은 만큼 역효과도 상당했다.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던 메이의 다리가 균형을 잃고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악!"
"으풉!"
설상가상이라고 엎어진 곳은 진흙탕이었다. 얼마 전에 비가 온데다 원체 습한 지역이라 두 사람은 흙이 품은 습기를 온몸으로 만끽했다.
"지금 장난해!?"
레드썬은 벌컥 화를 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흙 투성이였다. 정성 들여 올려세운 앞머리는 축 처져서 그의 시야를 가렸다. 마찬가지로 진흙 범벅이 된 메이가 레드썬의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멋쩍게 사과했다. 덕분에 레드썬의 얼굴 위로 멋진 전투 화장이 그려졌다.
"미안. 다리에 뱀이 붙어있어서."
“그깟 뱀이 뭐가 무섭다고.”
레드썬은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몸 여기저기 붙은 진흙에 옷이 물까지 흡수했기 때문이다. 일단 눈에 보이는 대로 진흙을 대충 털어냈다.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겠어.”
“안 돼, 모부터 찾아야지!”
메이의 상상 속에서 모는 언제 올 지 모를 구조를 기다리며 SOS를 치고 있었다. 불쌍한 우리 모!
“이 꼴로 무슨 고양이를 찾겠단 거야. 우릴 보고 놀라서 도망이나 안 가면 다행이겠다.”
“으으…”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다. 거울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영락없는 진흙 괴물이리라.
“옹달샘이라도 좋으니 어디 씻을 만한 곳 없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은 온통 풀 아니면 머리 꼭대기까지 우뚝 솟아오른 나무들 뿐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달라붙는 게 기분 나빴다. 레드썬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돌아갈까?’
하지만 이 선택지는 메이를 보자마자 기각되었다. 그가 아는 메이라면 고양이를 찾기 전까지 절대 숲에서 나가지 않을 게 뻔했다. 레드썬은 다른 곳에서 고양이를 찾고 있을 엠케이를 속으로 닥달했다.
‘국수집 꼬마 녀석, 고양이를 찾고 있긴 하는 거야?!’
물론이다. 열심히 찾고 있다.
“레드보이!”
별안간 메이가 레드썬을 불렀다. 언제 움직였는지 메이는 저만치에서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서 물소리가 들려!”
"엄청 시원하다! 엠케이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기분 나쁘게 달라붙던 옷과 진흙이 물에 씻겨지자 메이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무인도에 이처럼 멋진 호수가 있다니! 그야말로 자연이 만들어낸 천연 수영장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밤이 깊어지면 물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데 여긴 기분 좋으리만치 시원했다. 시간이 된다면 여기서 더 놀고 싶었으나 그들에겐 고양이를 찾아야 한다는 중대 사명이 있었다.
옷에 묻은 진흙은 다 털어냈으니 이제 머리 감을 차례였다. 머리 고무줄을 쭉 잡아당겼지만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머리카락과 한데 엉겨붙은 진흙이 고무줄을 붙잡고 있었다. 짜증이 나서 휙 잡아당겼다. 빠지라는 건 빠지지 않고 두피만 아팠다.
“아야야, 아파라… 왜 안 빠지는 거야.”
옆에서 그녀의 난리를 지켜보던 레드썬이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있어봐. 내가 빼줄게."
“아, 진짜?”
“진짜지, 가짜겠냐.”
엉킨 머리카락을 살살 풀어가며 조심스럽게 고무줄을 당겼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무줄은 너무도 쉽게 머리카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고무줄이 사라지자 새까만 머리카락이 잔잔히 내려와 메이의 어깨 즈음에 닿았다. 레드썬은 기시감을 받았다.
‘아, 그 날.’
기억력이 좋은 그는 단숨에 이유를 알았다.
삼매진화의 봉인이 막 풀린 직후. 그녀의 몸은 재가 되지 않도록 어찌저찌 통제하고 있었지만 헤어 밴드나 옷은 예외였다. 누가 보면 화재 현장에서 목숨만 건져 빠져나온 사람이었다. 그녀가 바싹 말라버린 호수 한가운데에 있지 않았다면 누구든 그렇게 믿을 정도였다.
당시 메이에겐 통제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호기롭게 나섰다만. 솔직히 레드썬도 반신반의했다. 우마왕과 아이언 팬 공주조차 제어하지 못한 삼매진화. 과연 필멸자가 통제할 수 있을까. 제아무리 용왕의 피를 이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하지만 그녀는 해냈다. 현재가 그 증거다.
“여기, 고무줄.”
“고마워.”
혹자는 레드썬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삼매진화는 본래 네 힘인데 돌려받고 싶지 않느냐, 같은. 레드썬의 대답은 “글쎄, 이제 와서 굳이?” 에 가까웠다. 만약 우마왕이 아직 봉인된 상태였거나, 세계 정복을 꿈꾸던 때였다면 돌려받고 싶어 했겠지.
하지만 우마왕은 가족의 곁으로 돌아왔고, 세계 정복은 이제 상관 없는 일이 됐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데 이제 와서 굳이.
무엇보다 여의봉을 훔치려 했던 때처럼 또 같은 짓을 반복하기 싫었다.
“아, 개운하다.”
그새 씻었는지 메이의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축 가라앉았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길어보였다.
“전보다 길어진 거 같아.”
“뭐가?”
“머리카락.”
당시 목 절반을 덮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길이였다. 메이는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머리카락 자를 시간이 없었거든. 화이트 본 프린세스를 물리치고 세상이 좀 평화로워지나 싶더니 이번엔 사타왕이 나타나서 한참 정신 없었잖아.”
“뭐, 그건 그랬지.”
아무 생각 없이 향한 시선이 문득 메이의 앞머리에 머물렀다. 착 가라앉은 머리카락에서 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머리를 시작으로 둥그런 뺨을 지나 턱으로… 저도 모르게 턱보다 약간 위, 그러니까 도톰하게 튀어나온 입술에 시선이 멈췄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 촉촉하게 젖은 뺨과 입술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레드썬은 그녀가 예쁘단 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곧 철회됐다.
‘내가 눈이 삐었나? 잠시나마 예쁘다고 생각하다니.’
생각은 찰나였지만 그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혹여 이상한 말을 할까 싶어 레드썬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다, 다 씻었으니 이제 나가자.”
“어, 잠깐만.”
“왜?”
“너 머리카락에 진흙 남아있어.”
레드썬은 머리카락을 앞으로 그러모았다. 꼼꼼히 살펴봤지만 진흙은 커녕 흙먼지 하나 없었다. 메이가 다시 지적했다.
“거기가 아니라 뒤통수 쪽이야.”
“여기?”
“가만히 있어봐. 내가 도와줄게.”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으나 레드썬은 군말 없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 말려 올라간 메이의 입꼬리를 봤다면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리라. 무방비해진 틈을 타, 메이는 이때다 레드썬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간지럽혔다.
“거짓말이지롱!”
“으하하하학! 그, 그만…! 하하하하, 하지…푸흐흐흐흐!!!”
간지럼 태우기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 레드썬은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어, 어?!”
물과 가까워진다 싶더니 눈 깜짝할 새에 상체가 물에 빠져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 좋지 못한 곳에 튀어나온 바위에 이마가 부딪혔다. 시야가 새하얘졌다가 까맣게 번지길 반복했다. 황급히 자신을 부르는 메이의 외침을 뒤로 하고 레드썬은 정신을 놓았다.
따뜻함과 아늑함. 그리고 보호 받는다는 든든함. 아버지의 널따란 등에 업히면 이처럼 편안할까. 우마왕 등에 업힌 기억은 없다시피하지만 어머니 아이언 팬 공주 말에 따르면 기회가 될 때마다 안아주셨다고 했다.
레드썬은 무의식적으로 업힌 등에 얼굴을 부볐다. 아버지의 등이라기엔 좀… 좁았다.
“가, 간지러워.”
이건 절대 아버지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눈이 자동으로 번쩍 뜨였다.
“여긴…?”
“깼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조금 전까지 호수에 있었는데… 아으으.”
기억을 반추하다말고 머리가 아파 이마를 짚었다. 이마를 짚자 뭔가 둥글둥글한 게 만져졌다. 메이가 진실을 알려주었다.
“기억 안 나? 너 미끄러져서 호수 바닥에 이마를 찧었어.”
“그래, 네가 갑자기 간지럼 태우는 바람에 이렇게 됐지.”
“윽, 미안해. 어쨌든 널 호수 밖으로 끌고 나왔는데 못 일어나는 거야.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널 업고 바깥으로 나가는 중이었어. 그러다 네가 깼고.”
“전화는?”
“쓰려고 봤더니 여기 통화권 이탈 지역이더라.”
“고양이는 어쩌고?”
“모는 다른 사람들도 찾고 있으니까 괜찮아. 그보다 머리는 어때? 울렁거리거나 어지러움 증세는 없어?”
“내려줘.”
“뭐?”
“내려달라고.”
내려오는 동안에도 레드썬은 이마에서 손을 떼지 못 했다. 그걸 알아본 메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래? 토할 거 같아?”
“텐트까지 나 혼자 갈 수 있어.”
“무슨 소리야?”
“고양이 걱정 되잖아. 찾으러 가.”
“혼자 갈 수 있겠어? 서있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지만 레드썬은 부득불 혼자 돌아갈 수 있다고 우겼다.
너 이대로 혼자 가다 쓰러진다, 내가 코흘리개 어린애인 줄 아냐… 한 치 양보도 없는 대립이 이어졌다. 먼저 폭발한 쪽은 이성줄이 짧은 레드썬이었다.
“고양이 찾으러 가라니까. 왜 날 혼자 두지 않는 거야!”
“그야 네가 걱정되니까 그렇지.”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네. 너 내가 누군지 잊었나본데. 난 우마왕의…!”
별안간 눈앞이 핑 도는 감각에 레드썬은 반사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카메라 플래시에 둘러싸인 사람처럼 시야가 연신 번쩍였다.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했다.
“봐, 내 말 맞지?”
이대로 쓰러지려는 걸 메이의 팔이 단단히 붙잡았다. 컨디션만 멀쩡했더라면 당장 반박할텐데 머리가 어지러우니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메이의 말이 이어졌다.
“가만 보면 넌 자신을 추켜세울 때나, 방어할 때 네가 우마왕 아들임을 내세우더라.”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어디론가 도망쳐 숨어버리고 싶다든가, 상대방의 말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본인도 미처 몰랐던 사실을 타인이 짚어냈다는 점에서 레드썬은 벌거벗은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널 걱정하는 거랑 상관 없잖아.”
“왜 상관이 없어. 아까도 말했잖아. 난 우마왕의 아들이라고. 넌 몰라.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그럼, ‘우마왕 아들 레드썬’ 말고 ‘메이의 친구 레드썬’ 하면 되겠네.”
“뭐어?”
레드썬은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반대로 메이는 본인의 답변이 흡족했는지 고개까지 끄덕였다.
“오늘 내가 업고 가는 사람은 내 친구인 거야. 우마왕 아들이 아니라.”
결론은 다시 업히라는 소리였다. 더이상 대꾸할 힘도, 마음도 안 들었다. 모든 걸 내려놓은 그는 순순히 메이의 등에 업혔다.
텐트에 도착한 두 사람을 맞이한 건 방금 막 모를 찾았다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샌디였다. 여기가 통화권 이탈 지역임을 뒤늦게 안 엠케이는 때마침 친구들이 돌아와 안심하는 한편, 어쩌다 레드썬이 메이에게 업혀왔는지 궁금해 하였다.
모를 찾느라 뒤로 밀려난 불꽃놀이는 예정 시각보다 조금 늦게 시작됐다.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우마왕과 아이언 팬 공주는 왕방울만 한 혹을 달고 온 아들을 보고 칠칠맞다며 놀렸다. 예전이라면 시선 하나, 말 한 마디에 실망이 묻어있을까 전전긍긍했었다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메이는 엠케이를 비롯한 동료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타들어가는 불꽃을 구경하던 그녀와 눈이 부딪혔다. 레드썬은 못 이기는 척 일어나 메이 곁에 앉았다.
엠케이가 중얼거렸다.
“내년에도 이렇게 모여서 놀면 좋겠다.”
메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거 좋지. 너도 괜찮지, 레드보이?”
“뭐, 그토록 이 몸을 원한다면야. 못 어울려 줄 것도 없지.”
내년 여름이 오려면 아직 멀었건만. 엠케이와 메이는 내년 바캉스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는 준비해 온 불꽃놀이 화약이 모두 재가 될 때까지 쭉 이어졌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