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테라 / 캔디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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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데이 이후의 이야기
점심을 조금 넘긴 오후. 식사를 마친 이라면 나른해지기 좋은 시각. 거기에 날씨까지 따스하니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긴장이 풀리고, 허점이 생긴다. 그것을 파고들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시시하군요. 루드비히 와일드는 주머니 안에 든 쪽지를 매만지다 꺼내서 슬쩍 확인하고, 내용을 외운 뒤 태워버렸다. 고작 이런 자잘한 정보 때문에 움직인 것도 별로건만, 평온하기만 한 거리는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날이 좋아 산책을 나온 이들도, 뛰노는 아이들도 있으며, 새로운 인연이라도 만나고 싶은지 길 가는 이에게 말을 거는 이들도 있었다. 뻔하고, 지루하다. 그런 감상과 함께 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눈에 들어온 광경에 루드비히 와일드는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카페의 한쪽, 바깥에 둔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이 있었다. 각자 들고 있는 것이 어떠한 문서이거나 책, 필기구인 것으로 보아 무언가 공부를 하거나 의견을 나누는 중임이 분명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그 안에서 제법 자연스럽게 섞여 있던 이가 있는지라.
테트라 지오메트릭. 루드빅은 그곳에 앉아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 듯한 그녀를 보자마자, 머릿속에 빠르게 그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나 그 얼굴을 보면 의뢰를 받은 것처럼 또 정리를 하게 된다. 왜 의뢰를 완수하지 못했는가. 그런 의문 역시 지루하고 쓸모없는 것이기에 빠르게 넘기고 나면, 남은 것은 약간의 흥미와 그에 따라오는 즐거움이었다. 하급 능력자. 의뢰 대상. 학생. 연구자, 탐구자, 저와 마주칠 때마다 비슷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색다른 표정이 이따금 얼굴에 스치는. 테트라. 그렇게 보고 있으면 그 주위에 있는 사람은 그 뒤에야 눈에 들어왔다.
연구 때문인지, 친분 때문인지. 어느 쪽이든 간에 그에게 접근한 이들 중 알고 있는 얼굴도 있었다. 멜츠에 밀려난 지 한참 된 제약 회사의 아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능력자 박물관에 관심을 보이던 투자자의 자식, 아예 새로이 능력자를 연구하려 무모한 짓을 한 탓에 의뢰 대상 리스트에 자주 보이곤 하던 이까지. 그 외에는 평범한 이들이라고는 하나, 그 사이에 학술적인 대화 외에도 직접 능력을 보여주거나 설명을 하고 있는 것에, 루드빅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로 어리석은 것에 대한 헛웃음인지, 비웃음인지, 이것을 보고 지나치지 않고 있는 저를 이해할 수 없는 건지.
“그래서, 이 부분에선 이렇게…….”
그래요, 그냥 두 번째로 합시다. 루드빅은 한참 입자를 굳힌 것을 보여주며 설명하던 테트라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에 픽 웃으며 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까는 비웃었으니, 이번엔 인사로써 웃었다. 그렇게 잘만 웃고 편하게 대화도 하는 것 같더니. 저를 보자마자 저런 표정인 것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루드빅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서 정보를 내어주던 건 언제고, 바로 이쪽에 관심을 두고, 다가가는 것엔 얼굴을 감추지도 못하고 질려하는 꼴이라니. 사냥감을 좇을 때의 흥분만큼은 못하더라도, 지루한 오후를 달래주기엔 충분한 반응이었다.
“실례하죠.”
루드빅은 정확히, 테트라가 자신의 차에 각설탕 하나를 넣으려던 순간 그것을 도로 집어 돌려놓고는 대화를 끊었다. 오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고 기어코 끼어든 것도 마음에 안 들건만, 하려던 행동까지 막은 것에 테트라의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아는 사이지만, 좋은 사이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의 등장에 일행들이 굳자 테트라는 일단 따로 얘기를 해서 돌려보내려 했으나, 루드빅은 아예 테트라의 팔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키곤 끌어당겼다.
“잠깐, 지금 뭐 하는…….”
“선약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걸 본 일행 중 한 남자가 막으면, 루드빅은 그의 말을 딱 잘라 끊어내곤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테트라를 한 번 보고, 아까 그들과 대화를 하는 동안 테트라가 보였던 얼굴을 떠올리다, 아무렇지 않게 씩 웃었다.
“능력자의 일에 더 관여하고 싶으신지?”
그렇게 말하면 거짓말같이 주변에 있던 일행들이 입을 다물었다. 하급 능력자는 만만했나? 아니면, 관심도 있고 이용은 하고 싶지만 역시 선을 긋고 싶은 건가? 아니면 너무 겁을 줬나. 딱히 협박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이런 사람들이라고 나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기라도 했나. 루드빅은 테트라를 억지로 데리고 나와선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걷고, 테트라가 팔은 뿌리쳐도 일단 저와 나란히 걷는 것에 능청스레 시선을 테트라에게 두었다.
“그냥 가던 길 가시지, 거짓말은 왜 했어요?”
“거짓말은 아닙니다.”
“어느 부분이요?”
예리도 하셔라. 루드빅은 제가 했던 말에 거짓도 진실도 섞여 있으나,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대충 넘겼다. 그것을 바로 알고 콕 집어 묻는 것에, 루드빅은 그냥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안 알려주겠다는 거군. 테트라의 눈이 한껏 살벌해지면, 루드빅은 결국 입을 열었다.
“능력자의 일에 관여하고 싶은지 물은 것은 진심이었습니다.”
연구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인 만큼, 사소한 것도 의문을 가지고 예리하게 찌르는 게 당연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목적이나 불순한 의도가 있을 가능성까지 말해주진 않았다. 그저, 날은 좋은데, 지루하고, 보이는 게 당신이라 약간의 참견을 했을 뿐이라고.
“직접 키운 것이 아니라, 꽃은 별로라고 했나 싶어서.”
루드빅은 그 모든 말을 삼키고 화제를 돌렸다. 그리곤 최근에 차였던 제 정강이를 한 번 가리키더니, 코트 주머니를 뒤적였다. 뭘 꺼내려는 건지. 그렇게 작은 캔디 박스 하나가 나온 것에 테트라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보면, 그러거나 말거나 루드빅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샀습니다.”
산 것도 나쁘지 않았다고 했잖습니까. 그렇게 덧붙이기까지 하는 것이 그냥 약 올리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테트라의 얼굴이 팍 구겨지면 루드빅은 도리어 그것을 열어 하나를 집으라는 듯 내밀었다.
“뭐 하자는 거죠?”
“그렇게 잘만 웃다가 신경질을 내시는 걸 보니, 단 게 필요해 보여서.”
그런 사람이 설탕 넣는 건 왜 막았는지. 잘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화도, 가장 신경 쓰지 않고 싶었던 부분을 콕 집어 잘라낸 건 왜였는지. 그래도 차라리 이런 편이 상처는 덜 받는다고 생각하는 건 또 왜인지. 이 남자가 배려랍시고 그런 짓을 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캔디를 주려는 건 진짜인 듯해서. 그렇게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굴린 테트라는, 입안에 퍼지는 사탕의 맛과 향에 얼마 안 가 소리를 빽 질렀다.
“하나도 안 달잖아요!”
“달다고는 안 했습니다. 캔디가 있다고만 했지.”
단 것도 있긴 하겠지만, 쿨 캔디는 그 정도면 됐죠. 열이라도 식히시라고. 배로 열을 오르게 하는 말에 테트라는 캔디 박스를 닫아 루드빅의 코트 주머니에 도로 쑤셔 넣곤 먼저 가버렸다. 루드빅은 그 뒷모습을 보다 저도 캔디 하나를 입에 넣곤 여유롭게 그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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