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ERA_CM

루테라 / 파이 데이

햄쮸님 커미션

 

 

간악한 화이트데이를 몰아내고, 우리의 파이데이를 되찾읍시다.

 -파이는 인당 1개씩!- 

풉. 구내식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멘트에 테트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부터 단내가 은은하게 난다 싶다더니, 이런 이벤트 때문이었나? 3월 14일, 일반인들이라면 화이트데이라고 너도나도 사탕을 챙겨주는 오늘. 그러나 이과 연구원들이 가득한 테트라의 직장에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간악한 화이트데이라니, 정작 얘는 잘못한 게 없는데……. 하지만 사탕보다 파이를 더 좋아하는 그녀에겐 이 분노가 더 달콤하게 느껴질 수밖에. 조그마한 파이를 한입 깨물어보니 안에는 신선한 사과 과육이 잔뜩 들어있다. 역시 밥 먹고 난 후에 바로 먹는 디저트라 훨씬 더 달콤한 것이, 하루하루가 파이데이면 좋겠다.

 3.14159265358979…… 아름다운 원주율을 잊지 마세요.

 -파이는 인당 1개씩!-

아니, 또? 

퇴근하려는데 여전히 단내가 폴폴 진동하는 곳을 봤더니, 세상에. 점심시간에 먹었던 파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풍성한 파이 한판이 테트라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얼마나 파이데이에 진심인 거야? 좋으면서도 여태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테트라 말고도 파이를 가져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약간 얼떨떨했다. 그래도 하루에 두 번이나 공짜 파이라니, 이것도 사과 파이려나? 오늘 저녁은 이거로 해결해야겠네.

 원래 가려던 식당의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다. 이 정도 양이라면 두 끼 정도는 가능하니 식비도 굳고, 파이를 먹는 나도 행복하고……. 

 

"그거, 뭡니까?"

  

대뜸 사람의 앞을 가로막더니 제가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는 이 무례함은 안 봐도 딱 알지. 광이 나는 매끈한 구두를 시작으로 시선을 위로 올리자, 삐딱하게 서있는 금발의 남자가 보인다. 설마 화이트데이라고 선물이라도 받은 겁니까? 테트라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루드빅의 손이 먼저 파이가 든 박스를 낚아챘다. 이미 빼앗긴 이상, 저 남자가 돌려주겠다고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되찾을 수 없는 걸 알기에 테트라가 뾰퉁한 얼굴로 대답했다.

  

"화이트데이가 아니라 파이데이예요." 

"어쩐지 사탕 치곤 묵직하다고 생각했는데. 연구원들은 기념일도 독특하게 챙기는군요." 

"네, 그러니 그 독특한 기념품 좀 돌려주시죠? 오늘 제 저녁이거든요."

  

흠. 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전혀 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럼 이렇게 하죠. 오늘 내 의뢰가 실패해서 기분이 별로였으니 이걸 나한테 선물로 주고, 당신은 저녁이나 얻어먹으세요. 네? 이번에도 테트라가 반박하려는 차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은 루드빅이 발길을 돌렸다. 얼마 걷지 않아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레스토랑이 바로 나오는 거 보니, 이쯤 되면 이 모든 게 헌터의 계략이었나 싶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하기엔 너무 뻔뻔하게 테드 파워즈로 예약했습니다, 하고 들어가잖아?

 파이가 아쉽긴 해도 덕분에 근사한 저녁을 얻어먹으니 좋은 게 좋은 건가. 그래도 제 목숨을 노린 적이 있는 헌터에게 이리 유해지면 안 되는데, 능글맞게 다가올 때마다 쉽게 밀어내질 못하니 이것도 헌터의 기본 소양 중 하나인 게 틀림없다.

  

"의뢰는 왜 실패한 거예요?" 

"갔더니 이미 들고 날랐더군요. 아무래도 쥐새끼 한 마리가 중간에 끼어든 모양입니다."

"의외네요. 당신도 실패할 때가 있다니."

"그 실패의 산증인이 지금도 제 앞에 있지 않습니까?"

  

타이밍 좋게 언제 시켰는지 웨이터가 와인을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이 남잔 평소엔 느슨하게 굴다가도 꼭 이렇게 과거의 일을 상기시키는 재주가 있다. 와인을 시작으로 줄줄이 나오는 코스 요리를 묘하 불편한 얼굴로 보고만 있는 테트라를 흘깃, 쳐다본 루드빅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파이를 저녁으로 삼을 정도면 꽤 좋아하시나 본데."

"네, 뭐.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를 꼽자면 파이긴 해요. 사탕보다는 훨씬 포만감도 들잖아요."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지극히 평범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평범하게 대답하면 되건만, 테트라는 그 질문 하나로 순식간에 어릴 적 처음 파이를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이 무슨 날이었더라. 그래, 남몰래 능력을 쓰다가 누군가에게 들키는 바람에 엉망진창으로 넘어졌었지. 욱씬거리는 다리보다도 남들처럼 이렇게 숨어서 능력을 쓰는 제 처지가 더 아팠던 날이었다. 부모님에겐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 미끄러졌다고 얘기하자, 그날 저녁에 테트라가 좋아하는 파이가 디저트로 나왔다. 파이를 한입 입에 넣자마자 눈물을 왈칵 흘리는 바람에 부모님이 많이 당황했었지. 그냥, 이 파이를 먹으면 바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자신의 능력 또한 사람들에게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어서.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녀는 끝까지 다리가 아파서 우는 척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파이같이 달콤한 디저트는…… 먹자마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잖아요. 그래서 제 능력도 그렇게 쓰였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이 있어요."

  

어째서 이 남자 앞에만 서면 부모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한 속내가 술술 나오는 걸까. 딱히 이유를 알고 싶지는 않다. 그저 이런 편안한 분위기가 조금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괜한 소리를 했나 싶을 때쯤에야 잠자코 듣고 있던 루드빅이 엄지로 손가락을 튕겨낸다. 아. 테이블마다 놓인 무드등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테트라는 여태 이게 작동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능력은 자기가 쓰기 나름입니다. 제가 이렇게 빛으로 무드등을 키는 것도, 혹은 빛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 또한 제 선택이죠."

"……." 

"그러니 본인 능력이 그렇게 쓰이길 바라지 말고, 그렇게 생각하고 쓰세요."

  

음식 다 식겠습니다, 먹죠. 제법 감동적인 말을 건네놓고는 무심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써는 루드빅이, 처음으로 얄미워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도 달콤한 파이데이의 분위기 덕분인가? 잘 먹을게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하는 테트라의 목소리에 작게 힘이 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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