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나

미츠키와 초상화

아이나나

DANE by D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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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작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단편

* 4부 이후 미래의 어느 시점

두 번째 노스메이아 방문은 명실공히 관광 목적으로 마음의 짐은 한결 가벼웠다. 약속대로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르바르도 씨가 우리를 맞이해 숙소까지 안내해 주기로 했다. 세토 씨가 준비했다던 숙소가 노스메이아 궁전일 줄 알았더라면 부담감에라도 순순히 따라가지 않았을 텐데 친절을 가장한 무언의 압박 속에서 정신을 다잡았을 때는 이미 창문이 새카만 외제차 안에 있었다. 차종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던 반리 씨는 황공해한 것치고 시트에 몸을 묻은 채 태연히 승차감을 즐겼다. 오히려 소고가 이동하는 내내 안전벨트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공중부양이라도 할 기세로 뻣뻣하게 앉아 있어서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세토 전하께서 제일 좋은 손님방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노스메이아의 귀빈이라고. 그렇게 안내받은 방은 하나같이 너무 넓어서 도저히 개인실로 인식되지 않았다. 기숙사 거실만 해. 아니 그냥 기숙사만 해. 제일 먼저 방에 뛰어들어갔다 온 타마키가 터무니없는 말을 진지하게 귀띔해 주었다. 한 방에 몇 명씩 들어가면 되나요? 천진하게 물어본 리쿠는 1인실이라는 대답에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외로우면 형 방에 와도 돼, 이오리.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이오리는 됐어요, 애도 아니고, 하고 고개를 팩 돌리며 쑥스러워했다. 배정받은 방에 현실감 없이 짐을 푸는데 문득 나기의 시어터 룸이 되어버린 기숙사의 내 방이 떠올랐다. 방도 침대도 너무 좁아서 뱀파이어의 관에서 자는 기분이라고 투덜대던 나기도.

한 발 앞서 노스메이아에 와 있던 나기를 보고서야 겨우 긴장이 풀렸다. 우리 모두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여러분, 보고 싶었습니다! 겨우 이틀 못 봤을 뿐인데 잔뜩 울상이 된 나기가 우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뒤따라 걸어오던 세토 씨는 한 덩어리가 되어 요란하게 인사하는 우리를 보고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노스메이아어로 무어라 중얼거리자 나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미츠키, 형님이 또 저를 구박합니다. 세토 씨와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나기는 일본어로 꿍얼거리며 나를 잡은 팔에 재차 힘을 주었다. 뭔진 몰라도 형제 싸움은 그만 두라고 달랬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관광은 내일부터였다. 스케줄도 전부 맡긴 터라 우리는 가이드를 자처한 소르바르도 씨 뒤만 따라다니면 됐다. 첫날 저녁에는 세토 씨의 초대를 받아 우호적인 분위기와 살벌할 정도로 화려한 식탁을 둘러싸고 식사를 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대화를 주도한 것은 나기였지만 세토 씨도 소르바르도 씨와 나기의 통역을 거쳐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했다. 편한 자리에서 마주한 그는 호기심이 많았고 고상한 말투 안에 재치가 있었으며 그런 점들이 묘한 친근감을 주었다. 동생의 생활상과 성과를 집요하게 보고받으려 해서 질린 나기가 통역을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는데, 두 사람의 토라진 눈이 똑같아서 무심코 웃어버렸다. 너무 웃잖아, 하고 야마토 씨가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줬지만 그러는 아저씨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이 실룩거려서 별로 효과는 없었다.

식사 후에는 자유 행동이었지만 이미 시간이 늦은 데다 새벽부터 오랜 이동에 지쳤을 테니 각자 방으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다들 이따 내 방 놀러와, 나 카드 있어, 게임하면서 놀자. 하는 리쿠와 타마키는 이오리와 소고가 끌어내고 달래서 겨우 방에 집어넣었다. 나기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집사 같은 사람과 대화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따금 멤버들을 돌아보는 시선에서 우리에 대해 설명하나 보다, 짐작은 갔다. 생각 없이 쳐다보는데 타이밍 좋게 돌아본 나기와 눈이 마주쳤다. 왕자님 모드가 빠지지 않은 나기는 평소처럼 함박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려 우아한 미소를 보냈다가, 이내 장난스러운 나기로 돌아와서 한쪽 눈을 찡긋 감아보였다. 지긋한 시선 끝에 따라붙은 그 동작은 어떤 신호 같기도 했지만 담긴 메시지까지는 파악할 수 없어서, 나도 그냥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 마주 윙크해 주었다. 내 팬 서비스를 받은 나기는 만족한 듯 웃었다.

두 시간쯤 널찍한 방에 누워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잠자리가 바뀐다고 새삼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예민한 성정도 아닌데 눈이 감기질 않는다. 아마 저녁을 너무 많이 먹은 것이 원인인 듯해서, 더부룩한 배를 소화시킬 겸 가벼운 산책이나 할 요량으로 밖으로 나갔다. 문득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방마다 배정된 집사나 메이드를 부르라던 소르바르도 씨의 말이 떠올랐지만, 시계를 보니 이미 11시를 넘긴 데다 이런 사소한 일로 말 걸기는 미안해서 그만두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 그 사이 무슨 문제가 생길 일은 없겠지, 하며 잠옷 위로 가운을 걸쳤다. 입어보니 생각보다 사이즈가 커서 약간 분한 심정으로 소매를 둘둘 걷어붙였다.

방을 빠져나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궁전의 복도를 걸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귀빈을 맞이하고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세운 마련된 별관 중 하나로, 로열 패밀리의 생활 공간과는 분리되어 있다. 복도를 따라 줄줄이 늘어선 손님방과 그 안의 멤버들을 하나씩 세며, 나는 우리와 다른 건물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 나기를 생각하고 쓸쓸해졌다. 나기는 응석쟁이니까 지금쯤 코코나 인형을 끌어안고 멤버들이 보고 싶다며 외로워하고 있을 텐데, 나는 그의 방까지 가는 길조차 모른다. 이대로 어스름한 복도를 따라 계속 나아가면 될까. 여기는 노스메이아, 그가 십몇 년을 살아온 나라가 이렇게나 가까운데도 기숙사에 함께 있을 때보다 그가 멀었다. 바닥에 깔린 벨벳이 발소리를 집어삼켜서 걷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멋대로 계단을 내려가고 모퉁이를 꺾다 보니 갑자기 시야가 넓어졌다. 어느새 홀까지 나온 모양으로, 중앙 계단 아래쪽에 입구로 짐작되는 큰 문이 보였다. 입을 떡 벌리고 구경했던 화려한 샹들리에도 지금은 빛을 잃었고, 높이 난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만이 홀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불 꺼진 스테이지 같다, 생각하며 나는 경쾌하게 빛 아래로 들어갔다. 중심을 조금 빗겨난 자리에 서자 보이지 않는 멤버들과 함께 익숙한 대형을 이루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문 쪽에는 객석이 있고, 내가 들어온 복도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던 매니저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다. 눈이 마주치면 오케이 신호와 함께 힘찬 미소가 돌아온다. 잠시 뒤 빛이 들어오면서 리쿠가 한 발을 크게 내딛고 이렇게 말하겠지. 안녕하세요, IDOLiSH7입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 자리에서 빙글 돌며 가볍게 춤을 췄다. 잘 닦인 바닥에 슬리퍼가 미끄러지면서 원래도 보폭이 넓은 다리가 마구 벌어진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만 돌려던 것이 적은 마찰 덕분에 반 바퀴 더 돌아간다. 괜히 민망해서 터지려던 웃음을 가까스로 갈무리하고 고개를 든 나는 문득, 중앙 계단 위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발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췄다. 이곳이 무대라면 스크린에 해당할 네모난 것,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정체를 확인하고 놀란다. 어떻게 바로 발견하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그림 앞에 섰다.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장식된 그림을 몇 개 봤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섬세한 액자였다. 자그마한 금속 판에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제목이 적혀 있었지만 그림을 보자마자 언어를 초월한 이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림 속 소년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내가 아는 얼굴들을 떠올리고 조합하고 비교했다. 그 시도를 뒷받침하듯 타이밍 좋게 목소리가 들려온다. 낯선 발음을 친근하게 부르려고 노력하며, 미츠키, 하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내 입에서 나온 이름도 아마 비슷한 톤이었을 것이다.

 

“세토 씨?!”

세토 씨는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곁으로 다가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가 밤에 찾아온다는 말도 못 들었으니 몰래 나온 걸지도 모른다. 무심코 커진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억누르며 나는 뻣뻣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헬로, 일본어와 영어를 마구 섞어 말하자 한창 공부 중이라던 그도 나를 따라 일본어로 안녕하세요, 했다. 그러나 “여긴 어쩐 일로…….” 하고 말을 이은 순간 그는 곧장 미간을 좁히며 언어의 장벽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말문이 물리적으로 막혀버리자 나도 진땀이 났지만, 내 당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물론 나는 영어도 노스메이아어도 할 줄 모르지만 내 손꼽히는 장점은 커뮤니케이션이며, 나는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아이돌 MC 이즈미 미츠키였다. 조명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소통이 서툰 사람에게도 공평히 마이크를 들려주는 것이 나의 역할. 그리고 이것은 인사치레도 사정 설명도 필요하지 않은 오프 더 레코드다. 나는 금세 웃으며 그림을 가리키고 심플하게 물었다.

“이거, 세토 씨? 그리고 나기?”

“예스.”

 

세토 씨도 어느새 1왕자다운 태연한 얼굴로 돌아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마치 동생에게 일러주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림 속 소년들을 차례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번에는 일본어였다.

 

“나기, 나.”

“아하하.”

“왜?”

“닮았어. 그러니까……. 형제. 브라더? 가족 같아.”

“가족이니까.”

당연하게 내뱉은 당연한 말인데도 나는 왠지 놀랐다. 나기를 따뜻하게 올려다 보는 세토 씨의 눈이 그림 속 소년처럼 느슨해서 마음이 놓이면서도 낯설었다. 이 다정한 가족의 그림에는 분명 노스메이아 왕실의 화목을 믿는 화가의 애정 어린 시선과 해석이 반영되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순간도 있구나, 싶어서 오히려 부정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림에는 두 왕자 말고도 그들을 닮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묻지 않아도 나기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었다. 전해들은 얘기를 통해 멋대로 상상한 그는 세토 씨처럼 차갑고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북유럽의 미남이었는데, 우아하게 올라간 입꼬리에서 신기하게도 나기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세토 씨의 미소도 나기와 닮은 데가 있다. 왕자들은 웃는 얼굴도 교육받는 걸까, 나는 궁금해졌다. 아이돌이 애교와 팬 서비스를 공부하듯이. 세토 씨는 내가 한 말들을 몇 번 따라해 보다가 물었다. 단어의 원형을 모르는 그가 내 말투로 활용된 말을 그대로 따라해서 약간 위화감이 들었다.

 

“‘닮았어’, 는 무슨 뜻이지? 패밀리?”

“좀 다른데. 그래, 예를 들면……. 나랑 이오리? 아니지, 우리는 별로 안 닮았구나.”

“‘이오리’라면 미츠키의 동생이지.”

“오, 맞아. 기억하네!”

“나기의 친구는 다 알아.”

그러더니 세토 씨는 의기양양하게 IDOLiSH7 멤버들의 이름을 천천히 또박또박 늘어놓았다. 이름만 알아도 고맙겠다 했는데 다짜고짜 이즈미 이오리, 하고 동생의 풀네임으로 시작해서 웃었다. 그는 우리의 프로필 순서가 우리 이름에 들어간 숫자순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이곳에서 나기의 이름은 ‘로쿠야 나기’가 아니라 ‘나기 발하르트 폰 노스메이아’인데, 어째서 제 동생이 여섯 번째인지 알까? 그의 일본어 발음은 나기와 마찬가지로 서툴지만 정성스러웠다. IDOLiSH7의 나기를 그냥 나기가 아니라 로쿠야 나기라고 세었다. 

나는 다시 노스메이아 로열 패밀리의 초상화를 올려보았다. 이제야 판에 새겨진 로마자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구성원의 이름인 줄 알았던 제목은 아마 ‘노스메이아 □대 왕실 가족’ 정도일 것이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노스메이아의 왕실. 대대로 음악과 겨울과 오로라를 지켜온 사람들. 궁전 어딘가에는 왕들의 초상화가 초대부터 현대까지 줄줄이 걸린 회랑이 있을 테고, 내 옆에 반듯하게 선 미남이 다음 액자에 걸릴 얼굴이라고 생각하니 또다시 우리 사이로 찬 공기가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무대를 내려간 아이돌은 언젠가 잊히지만 그들의 이름과 얼굴은 역사로 남아 오래도록 기억된다. 나기를 기어코 이 액자 밖으로 데려간 우리를, 지금의 세토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름답게 조형된 미남의 표정은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먼 북유럽 노스메이아의 왕자인 한 입을 열어도 마찬가지다.

 

“<이 초상화는 나기가 열 살 때 그렸어. 지금 나기는 왕자 직위를 반납했으니 사실은 새로운 초상화를 걸어야 하지. 실제로 본관에는 나와 아버님만 그려진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렇다고 이 그림을 처분할 이유는 없으니 장소를 옮긴 것이다.>”

“……?”

“<네가 이 그림을 봐줘서 기쁘구나. 너는 나기를 위해 가장 크게 화내주던 친구였지. 나기가 너를 가장 친근히 여긴다는 것도 방송을 봐서 알아. 이런 말은 뻔뻔하겠지만 네가 부러웠다. 동시에 고맙기도 했다.>”

“…….”

“<하하,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군……. 이런 나를 나기가 봤다면 비겁하다며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어. 더는 동생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 감사 인사는 반드시 네 언어로 하마.>”

“…….”

“<흠, 언젠가는 이 자리에 IDOLiSH7의 화보를 걸어도 좋겠군. 그때는 나기가 센터였으면 좋겠는데, 이런 것은 사무소에 얘기하라고 했던가? …아. 이제 알 것 같다.>”

몇 단어-IDOLiSH7이나 나기의 이름-을 빼면 하나도 알 수 없는 말을 줄줄 늘어놓던 세토 씨가 문득 웃더니, 내 구겨진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오리의 얼굴. ‘닮았다’, 고. 나는 서툰 어학력으로 변변히 알려주지도 못했는데 스스로 뜻을 깨닫고 응용까지 하는 그는 역시 나기만큼 똑똑한 사람이다. 나는 허탈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왕이면 웃는 얼굴을 보며 동생과 닮았다고 해주길 바랐는데. 그가 우리 집 가족 앨범을 봤더라면 감상이 달라졌을까. 한편으로 신중하고 새침한 이오리가 얼마나 세토 씨를 경계하고 노려봤으면, 싶어서 웃음이 났다.

 

세토 씨는 왕자님답게 나를 에스코트해서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실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던 차라 고마웠다. 감사 인사를 하자 그는 오히려 일본어로, 무엇에 대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고맙다’를 힘주어 전했다.

그와 복도에서 헤어지고 손잡이를 잡은 순간, 분명 꽉 닫고 나간 문이 살짝 벌어진 모습이 보였다. 누가 들어온 건가? 내가 없다는 걸 알고 집사 또는 메이드가 보고 갔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부주의하게 문을 열어놓지 않을 것이다. 긴장감에 사로잡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세토 씨가 이오리와 닮았다고 평하던 얼굴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인기척이 느껴지는 침대로 다가간 나는, 다음 순간 ‘이오리가 귀여운 걸 보면 무심코 나오는 허물어진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나는 피식 웃으며 남의 침대 위에서 잘도 자고 있는 두 소년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불을 고쳐주었다. 혼자 누웠을 때 그토록 넓었던 침대가 건장한 십대 소년 둘을 양쪽에 끼우니 내가 누울 틈은 있는지 의심스러울만큼 비좁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가운을 벗고 어떻게든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소매를 걷을 때만 해도 불만스러웠던 작은 체구는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나는 먼저 살짝 벌어진 입으로 들어갈락 말락한 이오리의 남색 머리를 살살 넘기고 쓰다듬었다. 내내 방 밖을 돌아다니며 냉기를 품은 몸에 닿아 놀란 이오리가 작게 웅얼거리며 뒤척였다. 얌전히 엎드려 자던 나기가 그 기척에 몸을 뒤집더니, 졸린 눈을 살짝 떴다. 마주친 시선을 향해 웃자 나기가 따라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아까 초상화로 본 얼굴과도 우아한 왕자님의 미소와도 다른,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어리광쟁이 나기의 미소다. 미츠키, 어디 갔었나요. 약속했으면서. 무슨 약속? 나는 어리둥절하게 속삭이며 나기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나기는 살짝 토라진 목소리로, 아까 윙크했잖아요, 미츠키도 알아들은 줄 알았는데, 했다. 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이오리는?”

“리쿠가 방에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미츠키 방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제가 체포해 왔습니다.”

“아하하, 개인실인데 쫓겨난 거야?”

“리쿠는 소고랑 같이 있습니다. 타마키도 아마 거기에.”

“야마토 씨만 혼자네. 불러올까.”

“그렇다면 야마토는 소파에서 자게 되겠군요.”

 

그건 그래. 나는 웃으며 나기를 재촉해 이불을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 끝자락을 덮으며 나기가 물었다. 미츠키, 어땠습니까? 어딜 다녀왔냐는 게 아니라 어땠냐고 묻는 그는 기분 탓인지 약간 긴장한 것 같았다.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나기는 지금 처음으로 사쿠라 씨 외의 친구가 집에 놀러온 것이다. 그때 나는 어째선지 드넓은 홀과 화려한 샹들리에, 발소리도 둔해지는 카펫보다 훨씬 생생한 거리감을 조성하던 세토 씨의 목소리와 얼굴, 그리고 왕실의 액자들을 떠올렸다. 동시에 그가 띄엄띄엄 자랑스레 얘기하던 우리와 나기의 이름도. 그에 대한 감상은 복잡했지만, 일본어든 노스메이아어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장난스러운 눈으로 속삭인다. 있잖아, 나기. 세토 씨한테 말이야.

 

“다음에는 우리 화보를 가져가서 걸어달라고 할까.”

 

나기는 새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왔는지, 누구를 만나 무슨 대화를 했는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또 오겠다는 나의 다짐까지 단번에 깨달은 것처럼. 기숙사에도 액자를 좀 더 늘려야 합니다. 저번에 찍은 단체 사진부터 크게 프린트해서 걸어요. 속삭이는 나기를 향해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럴 자리 없어, 바보. 우리는 소박하게 사각 액자에 작은 사진을 끼워서 티비 앞에 놓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사진을 더 많이 찍자는 말은 찬성이었다. 우리의 대화 소리에 이오리가 몸을 뒤집어 찌푸린 얼굴로 내 쪽을 보고 누웠다. 나는 그 미간을 일부러 꾹 눌렀다. 놀라서 한껏 인상을 쓰는 동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협조해줘, 웃는 얼굴이 닮은 형제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그 말을 들은 나기가 웃어서 괜히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프다며 원망스럽게 올라가는 눈초리도, 잠이 덜 깬 눈으로 허둥지둥 내 이름을 부르는 입도. 액자 밖으로 끌어낸 이 얼굴들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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