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바쿠온] 약속
#17_다른_세계_다른_재회
트친분들과 ‘장기간 떨어져 있다가 재회한’을 주제로 잡고 각자 이오리쿠/카바쿠온/단장화가로 연성하는 쁘띠 합작을 하게 됐습니다. 주최(?)해 주신 유진 님 감사드립니다!
다른 분들의 작품은 트위터에서 #17_다른_세계_다른_재회 태그로 검색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카바네 님이 지나치게 말랑하게 느껴진다면 쿠온의 눈에 비친 카바네라 그렇다고 생각해 주세요.
기억력 문제로 원작과 조금...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부디 너그러이 봐 주시기를...
당연히 단마카 중대 스포 포함. 본편보다 한참 과거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 있는 탁 트인 창문 너머로 구름 한 점 없이 마냥 파란 하늘이 보였다. 오늘은 구름이라도 구경할까 했던 쿠온은 아주 조금 실망했다. 그런 소소한 기대에 실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이 새하얀 방에서 홀로 누릴 수 있는 사치 중 하나였다.
하루를 대신 무얼 하며 지내면 좋을까. 쿠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얼마 되지 않는 면적의 방을 서성거렸다. 책을 읽을까, 하다가 얼마 전 받은 책을 어젯밤 다 읽어 버렸단 사실을 기억해 냈다. 새로운 책을 들여 달라고 할까. 하지만 이런저런 ‘검증’을 거친 뒤 쿠온에게 책이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가 결국 침대에 풀썩 몸을 눕혔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창문을 빤히 응시했다. 얼른 조금이라도 재미있는 모양의 구름이 나타나지는 않으려나. 혹은 이대로 밤이 되기를 기다려 별자리라도 찾아 볼까.
하지만 역시, 손님이 찾아와 주면 좋을 텐데.
요즘 들어 부쩍 더 얼굴을 보기 어려워진 손님을 떠올린다. 쿠온은 그 사람에 관해 생각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 * *
이마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어렴풋이 눈이 떠졌다. 짐작 반, 기대 반으로 쿠온은 어물어물 입을 열어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야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닿을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니까.
“카바네……?”
대답 대신, 머리칼을 정돈해 주는 듯하던 손이 쿠온의 뺨을 따스하게 감싸 줬다. 쿠온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만나러 와 준 거야?”
“미안하군. 최근 여러모로 바빠진 탓에.”
쿠온은 고개를 저으며 카바네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그러자 카바네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왕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카바네는 표정 변화가 적고 담담한 태도를 지키려 했다. 그 탓에 무뚝뚝한 성격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는 생각보다 잘 웃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쿠온에게는 그랬다.
몸을 일으키려는 쿠온을 카바네가 만류했다. 더 쉬라면서. 하지만 대낮에 잠들어 버린 만큼, 오히려 정신이 말똥해진 쿠온은 굳이 고집을 부려 카바네와 마주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심코 웃음이 터졌다.
“진짜 카바네다…….”
“그럼 내가 교회에서 보낼 가짜이기라도 할까.”
“아니, 당연히 그럴 리는 없지만……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니까, 왠지 반가워서.”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입에 담았을 뿐인데, 카바네는 조금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다.
“자주 보러 오겠다는 약조는…… 하기 어려워.”
“응, 나도 알아.”
잘 안다. 그는 지금 적대 관계에 있는 국가의 왕이라는 사실도, 그런 그가 이렇게 자신을 만나러 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많은 수고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도. 그러나 왠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고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오는 이 감각을 ‘쓸쓸함’이라 부르는 거겠지. 이 또한 카바네를 만나고서야 제대로 명명할 수 있게 된 감정이었다.
카바네가 다시 손을 뻗어 쿠온의 앞머리를 살짝 걷어 냈다. 쿠온은 이끌리듯, 어느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카바네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고 보니 늘 이랬다. 직접 턱이나 뺨을 만져 고개를 들게 하는 쪽이, 혹은 그리 하라고 소리 내어 말하는 쪽이 훨씬 편할 텐데도 카바네는 이렇게 자신이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카바네를 마주하게 해 줬다.
“대신 증표라면 줄 수 있어.”
“증표……?”
의아해하는 쿠온의 손을 잡은 카바네가, 매듭을 엮어 만든 듯한 팔찌를 쿠온의 손목에 둘러 주었다.
“두 팔찌가 쌍이 되는 물건이다. 주술이 걸려 있어 웬만해서는 끊어지지 않을 거야. 대신, 내 쪽에서 끊으면 네 팔찌도 끊어지지.”
“그런 걸 왜 나한테…….”
팔지가 잘 매어졌나 확인한 뒤, 카바네가 쿠온과 똑바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준비를 대부분 마쳤다.”
훅,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준비’라고 하면, 설마…….
“이 끈이 끊어지면 어떤 상황이든, 어디에 있든, 무조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이상하지. 대체 뭘 믿고, 그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을 줄 알고, 카바네에게 무슨 위험이 일어날 줄 알고, 그런 대책없는 소릴 한단 말인가. 하지만, 하지만…….
“그때 너를 데리러 올게.”
이어진 말에 속절없이 가슴이 뛰었다. 긴장인지, 놀람인지, 기대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소란스러운 감정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카바네는 몇 번이고 분명히 말했다. 언젠가 여기서 자신을 데리고 나가 주겠다고. 하지만 그건 좀 더 먼 미래의 일이 될 줄로만 알았다.
“……그건, 언제야?”
“아직 정확한 날은 말해 줄 수 없어. 그래도 기필코…… 이 팔지가 끊어질 때는, 너를 데리러 온다고 약속하지.”
쿠온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같기도 하고, 남색 같기도 한 그 팔찌의 생각은 어째서인지 자연히 카바네가 연상되었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여전히 모른다. 기약은 없다. 무엇 하나 확고한 것도, 확실한 것도, 없다. 하지만.
“꼭, 데리러 와 줄 거지?”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쿠온에게, 카바네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그래. 반드시.”
아, 나는 또 이 말에 기대어 얼마든지 당신을 기다릴 수 있겠구나.
시끄럽게 속을 어지럽히던 모든 수런거림이 가라앉고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족감이 가슴을 빠듯하게 채웠다. 쿠온은 저도 모르게 간절하게 물었다.
“카바네, 한 번만…….”
“그래.”
“안아 봐 주면 안 될까?”
드물게 카바네가 조금 놀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쿠온은 아차 싶어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거랑……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저기…… 그러니까, 책에서, 헤어질 때는 포옹을 하는 이야기를 읽어서…….”
아, 안 되겠다. 마지막 말은 완전히 지어낸 게 티가 나지 않나.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짧게 웃음을 흘린 카바네가 횡설수설하는 쿠온의 뺨을 한 번 더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쿠온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 정도로 네 불안이 사라진다면야, 못 할 것도없지.”
심장이 쿵쿵거렸다. 카바네의 품 안은 생각보다도 더 넓고, 단단하고, 또 따뜻해서……. 안심된다는 기분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은 자꾸 술렁였다. 이 기분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이름 모를 술렁임은, 카바네의 손목에 걸린 붉은 매듭을 보고 더 세차졌다.
* * *
시간은 무료하게 흘러갔다. 매일매일 같은 일과의 반복, 변함없는 하루. 쿠온은 그저 소매 안쪽에 감춰 둔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그런 마음을 달랬다. 신기하게도 그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덜 지루했다. 자주 볼 수 없는 카바네를 기다리는 것이 조금은 덜 외로웠다.
“천자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금방 나갈게.”
오늘은 해가 평소보다 일찍 져서,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창밖이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쿠온은 늘 그랬듯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려 했다.
그리고, 툭.
카바네가 준 끈이 끊어졌다.
순간적으로 아쉬움이 들었다. 카바네가 준 건데……. 하지만 바로 이 매듭을 주며 카바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끈이 끊어지면 어떤 상황이든, 어디에 있든…….
쿠온은 태어난 이래 가장 빠른 걸음으로 창가로 향했다. 무심코 내려다본 아래에 검은 인영이 보였다. 어둡고 먼 탓에 그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쿠온은 확신했다. 카바네였다.
쿠온은 망설임 없이 창틀을 딛고 섰다. 이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건데, 어떻게 받아 주겠다거나 빼내 줄지 얘기해 주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야, 카바네잖아.
천자님, 식사 시간이……. 하고 다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온은 뒤돌아 보지 않고 바로 뛰어내렸다. 약속을 지키러 온 카바네에게로.
드디어, 이 하얀 방에서 자신을 꺼내 주러 온 카바네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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