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나

무제

류나기

DANE by D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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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재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말이야.”

“나기 군은 어학력이 뛰어나지?”

“다개국어 구사자는 방언도 배울 수 있을까?”

 

나기는 서점에서 사온 책들을 책상 위로 쿵 내려놓았다. 이미 온갖 물건들로 비좁은 책상을 대강 정리하고 제법 두께가 있는 책을 한 권씩 늘어놓는 손길이 얼핏 비장하기까지 하다. 나기는 책을 구입할 때도 이미 꼼꼼히 살펴본 내용을 스탠드 불빛 아래서 다시금 신중하게 훑어보았다. 저자도 출판사도 표지도 모두 달랐지만 단 하나, 제목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단어가 있었다.

 

이어서 그는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빈 노트를 하나 꺼냈다. 매직 뚜껑을 열고 깨끗한 파란색 표지 위로 또박또박 글씨를 적는다. 책 표지를 보고 따라 쓰려다가, 아무래도 복잡하기 짝이 없는 沖縄語를 대신해 그냥 うちなーぐち라고 적기로 했다. 한자가 서툰 나기는 그 획수가 늘어날수록 글자가 한없이 커졌다. 형태가 단순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해당 언어를 사용한 작품 및 매체를 반복적으로 접한다든가. 언어 사용자에게 직접 회화와 표현을 배운다든가. 어학 교실이나 강좌를 등록해서 마련된 커리큘럼을 따라간다든가. 나기는 일단 교본을 사서 글자와 문법, 발음을 착실히 익혀나가는 타입이었다. 어린 시절 처음 어학을 공부할 때 당시 가정교사가 택한 언어 공부법까지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의 선생님은 학구열이 높은 나기에게 다정했지만 약간 고리타분해서 가끔 어린 아이가 좋아할 만한 동화나 영상을 간혹 예시로 들 뿐, 수업의 기본 구성은 강의식으로 필기와 암기, 발음 지도였다.

 

다행히 현재 그는 일본어를 글로 쓰고 읽을 수 있으며 발음-특히 강세는 조금 자신 없다 한들 소통에는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유창한 일본어 구사자다. 오키나와어는 일본어족에 속하고 표기 문자 역시 일본어와 다르지 않으므로, 두 언어의 차이를 중심으로 발음과 어휘, 표현을 익혀나가면 충분할 테다. 노스메이아어와 같은 어족에 속하는 덴마크어를 배울 때와 유사한 감각이다. 나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꽤 자신만만하게 첫 번째 책을 펼쳤다. 표지에 <초급 오키나와어>라고 적힌 교재가 나기의 손길을 따라 부드럽게 접히며 넘어갔다.

 

사실은 이렇게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도무지 발음을 짐작할 수 없는 말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그러다가 오키나와어 동영상 강의를 찾아 듣고, 강사가 중간중간 끼워넣는 사례에 흥미가 생겨 내친김에 오키나와 생활사까지 검색하던 나기는 어느새 빼곡해진 노트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 사람은 나기에게 ‘다중언어 구사자도 방언을 익힐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디까지나 가벼운 흥미로 멀티링구얼의 어학력을 테스트하고 싶었을 뿐이고, 더 나아가-야마토와 야오토메에 의하면 ‘향토애’에 해당하는-자신이 사랑하는 고향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기에게 기본 인삿말이나 소개해 주려던 거겠지. 그것을 흘려듣지 못하고 이토록 매달리는 것은 나기 본인의 고집이다. 왠지 분한 기분이 들어서 나기는 팔짱을 끼고 영상 속 강사를 노려보았다. 그런다고 그가 말을 멈추는 일은 없다. 나기가 몸소 손가락을 들어 스페이스바를 누르지 않는 한.

 

나기도 본인이 세상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제 어학력에 대해서는 높은 자신감이 있으니 만약 그가 100개국어를 목표로 삼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는 걸 안다. 영어와 인접국가의 언어, 한자문화권의 언어를 포함해 8개국어를 습득한 시점에서 나기는 이제 세계 어디를 가도 무리 없이 대화할 수 있고 일부 언어는 동시통역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으므로 더 욕심낼 필요도 없다. 하물며 보다 세부적으로 지역에 따라 분화된 방언은,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울지 몰라도 그가 일반적으로 외국어를 구사해야 하는 자리-즉 각국 정상 앞이나 방송-에서 사용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온전히 개인의 만족을 위한 학습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학습이 궤도에 오른 어느 순간, 나기는 문득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 의심스러워졌다. 그의 모든 행동은 언제나 확신이 바탕되었고 그의 확신이란 본인의 만족, 타인의 만족, 무엇보다 행복에서 온다. 행복을 이정표 삼아 나아가는 나기는 방향을 의심하면 누구나 그렇듯 내심 불안해졌다. 자신이 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감히 저를 소재 삼은 그 사람에 대한 소소한 앙갚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높은 어학력의 증명? 다시는 내 능력을 의심하지 말라는 경고? 물론 새로운 언어를 배웠다는 성취감과 지적 호기심의 만족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순수한 동기만으로 시작한 학습이 아님을 알기에, 동시에 이 시간의 시작이자 끝인 그 사람을 자신이 왜 만족시키고자 하는지는 모르기에, 나기는 지금 턱을 괴고 약간 불만스럽게 펜을 끼적이고 있는 것이다.

 

동기가 어떻든 나기의 목표는 분명했다. 발화와 작문은 수단일 뿐, 결국은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는 단순히 교재 1단원에 나오는 것처럼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밥은 먹었나요?’, ‘여기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따위의 단편적인 대화에서 그치고 싶지 않았다. 나기는 낯선 곳에서 듣는 모국어가 얼마나 애틋한지 아는 사람이었다. 타국에서 온 어머니가 어린 나기가 서툴게 따라한 일본어 한 마디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를 기억했다. 나기의 첫 어학 공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나기는 아마, 지금 자신이 우치나구치를 공부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온갖 이유들 사이에 단지 그 사람이 반가워하는 표정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고는. 아무리 경계하고 냉소적으로 군들, 그 역시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아이돌이므로.

 

저를 향해 웃는 소중한 얼굴들을 생각하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고 의욕이 샘솟았다. 상상력이 풍부한 나기는 벌써부터 미래를 그리며 무심코 웃었다. 그에게 선보이는 것은 언제가 좋을까. 첫 마디로 흔하고 시시한 말을 고르고 싶지는 않다. 이왕이면 남다른 스타트를 끊고 싶고, 이왕이면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장난스럽고 재치있는 농담, 혹은 문학적이고 아름다운 표현, 쇼 비즈니스 정신을 발휘해 조금 극적인 대사도 괜찮을 듯하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라도 나기는 반드시 다정한 말을 건네기로 결심한다. 나기가 노스메이아어로 상처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가 사랑하는 그의 언어로 그에게 다정한 말만 들려줄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를 그 날을 그리며 나기는 노트에 적은 말을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흡족하지 않은 발음에 이를 악물고, 다시, 승부욕에 불타는 새파란 눈동자가 교재와 화면 너머 누군가를 노려본다. 흩어진 책들과 노트를 오가며 펜 소리가 그치지 않는 책상 위를 스탠드 불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2.

나기가 통역을 시작한 것은 아직 십대 중반도 되지 않았을 때로, 막 오개 국어를 소통이 가능한 수준으로 뗀 시점이었다. 나기는 처음 외국인 앞에서 제 어학력을 선보였을 때를 기억했다. 작문과 회화와는 달리 통역은 단순히 해당 국가의 언어를 안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어휘력과 표현력, 배경지식, 기억력은 물론이고 상대의 의도를 왜곡 없이 전하기 위한 이해력, 무엇보다 순발력과 재치가 필요했다. 다음 회담까지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자료를 건네받은 나기는 단번에 이것이 제 수준에 벅찬 일이겠다는 생각을 했고, 막막한 심정에도 의지를 다졌다. 당시의 나기는 형이 맡기는 버거운 일들이 자신을 향한 형의 신뢰와 기대를 증명한다 믿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기는 해냈다. 결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 나이대 아이 수준은 월등히 넘긴 결과였다.

요는 단순히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번역 또는 통역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며, 말을 알아듣는 것 이상의 이해와 지식이 바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설령 나기가 8개 국어를 한대도 당장 눈앞에 외국인을 데려다놓고 동시통역을 부탁한들 반드시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 거란 보장은 없는 셈이고, 일종의 다중언어 구사자에 대한 편견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나기는 그가 익힌 8개 국어 모두 동시통역이 가능한 수준이긴 했다.)

 

몹시 유의미한 주장이었지만 나기는 오늘 한 가지 사실을 더 배웠다. 논쟁도 자리와 사람을 가린다는 것. 최소한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가 마비된 주정뱅이들은 논쟁 상대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잘 왔다, 로쿠야. 이리 와서 앉아, 이리로.”

“어어, 우리 나기는 술 주면 안 돼요. 아이고, 이미 따른 잔은 아까우니까 어쩔 수 없이 이 형님이 마셔야겠네.”

“아저씨는 그냥 술이 마시고 싶은 거겠지! 나-기, 너 근데 왜 그렇게 떨어져 앉았어?”

“야오토메 씨가 여기 앉으라고 했습니다만.”

“트리거가 그렇게 말했으면 어쩔 수 없지. 나기 군, 부러워…….”

 

나기는 떨떠름한 얼굴로 가쿠가 가리킨 소파 위에 엉거주춤 앉았다. 테이블 건너를 흘긋 넘겨다보니 이미 얼굴이 시뻘게진 미츠키와 야마토가 깔깔 웃고 있었다. 소고는 술병을 끌어안고 가쿠 옆에 앉아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가쿠는 분명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소고가 칭얼거릴 때마다 잔에 술을 따르며 아무튼 큰 소리로 기세를 강조하고 있다. 나기는 일단 가쿠가 들고 있는 술병부터 물로 바꾸기로 했다.

 

성인 그룹의 술판은 가게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면 보통 리바레 둘 중 한 명의 집을 빌렸는데, 지금 두 사람 모두 없는 걸 보니 스케줄 문제로 참여하지 못한 듯했다. 오밤중에 야마토의 연락을 받고 나온 나기는 목적지의 주소를 보자마자 입었던 겉옷을 도로 벗을까 고민했다. 잠깐이면 돼, 네가 꼭 필요해.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이미 거나하게 취해서 실제로 들린 발음은 ‘잠깐이면대너꼭피료해’에 가까웠고 그마저도 성인 남성들이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에 묻히기 직전이었지만, 나기는 결국 한숨과 함께 츠나시 류노스케의 집을 향했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집주인이 술판에 끼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 자신이 꼭 필요하다는 말에서 제가 맡게 될 일이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나기는 술자리에 앉은 인원을 가느다란 눈으로 세었다. 아이돌리쉬 세븐에서 파견된 인원이 3명, 원래 이 집에 사는 트리거가 3명인데 그중 1명은 나기가 들어올 때 질린 눈으로 인사만 하고 방에 들어갔다. 가쿠는 나기를 보자마자 대뜸 제 옆에 앉혔고(아마 원래 텐이 앉았던 자리일 것이다) 제일 거대한 존재감을 보여야 할 1명-아마 나기가 호출된 이유일 사람이 보이지 않아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인 순간, 뒤에서 대뜸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와 나기의 어깨를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 돌아본 나기와 마주치자 헤실헤실 벌어지는 입이 보인다. 벌게진 얼굴로 눈썹을 내린 류가 한껏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와아, 나기 군이다! 여긴 어쩐 일이야?”

“지금 제 용건이 온 참입니다. 굿 이브닝, 츠나시 씨.”

“굿 이브닝, 안녕, 나기 군. 어라, 텐은? 텐이 없어지고 나기 군이 생겼어?”

“그런 셈이네요.”

나기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어깨에서 슬쩍 류의 손을 떼어냈다. 류는 소파를 빙 돌아 나기 옆에 털썩 앉더니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여어, 류. 다녀왔냐. 하고 손을 번쩍 들어올려 맞이한 가쿠가 그대로 나기의 반대쪽 어깨에 손을 얹는다. 야오토메 가쿠는 술기운이 돌아도 그 특유의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적절한 거리감을 모르는 그는 나기의 질색에도 아랑곳 않고 얼굴을 바짝 들이대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류, 방금 뭐라고 했냐?”

나기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뒤로 뺐다가 그새 술병을 들고 있던 류와 가볍게 부딪혔다. 180이 넘는 남자 셋을 용케 수용하고 있다지만 결코 넉넉하지는 않은 소파에서 새삼 왜 이러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술을 조금 흘리고 허둥대던 류는 제 젖은 바지보다 나기를 더 걱정했다. 오른쪽에서는 미안, 나기 군! 안 묻었어? 하는 츠나시 류노스케. 왼쪽에서는 나기를 재차 건드리며 류가 뭐래? 로쿠야, 류가 뭐래? 하는 야오토메 가쿠. 또 그 옆에는 좋겠다아, 나기 군, 좋겠다아, 하는 오오사카 소고……. 나기는 아직 한 마디도 제대로 돌려주지 않았는데 벌써 지쳐 있었다. 미츠키는 행주를 가져오겠다며 어딘가로 뛰쳐나갔고 야마토는 연신 실실 웃고만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기를 부른 건 분명 그였던 것 같은데.

“야, 로쿠야, 류가…….”

“그는 그냥 인사만 했습니다. 지금은 술을 흘려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주정뱅이답게 실없는 소리만 할 듯한데, 저는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아, 나왔다 시오대응. 뭐 어때, 이왕 온 김에 놀다 가. 자, 주스 마셔.”

“Oh……. 이건 쿠죠 씨가 마시던 잔 같은데요.”

“그런가? 뭐 어때.”

“그런데 나기 군은 왜 여기 있어?”

 

가쿠가 또 실수로 따른 술잔을 낼름 받아마신 야마토는 끼어든 류가 아니라 가만히 있던 나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기는 상황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팔짱을 단단히 꼈다. 이러다간 기숙사로 돌아갈 때쯤엔 토라진 멤버의 볼이 이따만큼 부어있겠다 싶어, 야마토는 꼬부라진 혀로 둘러대듯 늘어놓았다.

“아니, 중간부터 츠나시 씨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마침 나기 네가 오키나와 방언을 공부했잖아. 그럼 통역 부탁할 겸 불러서 같이 놀까? 한 거지.”

“제가 오키나와어를 공부했다고 해서 통역도 가능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판단력이 저하됐다는 증거입니다, 야마토. 제 뛰어난 어학력으로 표현하자면, 여러분 취했습니다.”

“그러지 말고오. 말이 안 통한다고 츠나시 씨만 빼놓고 얘기할 순 없잖아, 섭섭하게. 안 그래?”

나기는 그 말에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자 기분 탓인지 약간 서운한 빛을 띠던 류가 나기와 눈이 마주치자 즉각 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나기 군. 그새 잊어버린 건지 그저 주정인지 몇 번째 인사를 건네며. 나기는 잠깐 망설였다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가, 각오를 다진 것처럼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몸만 우아하게 틀어 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으나 막상 나기의 입에서 오키나와어가 튀어나오니 그 괴리가 지독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의 대화를 구경했다.

 

“하이, 츠나시 씨. 제가 왜 여기 있는지 알겠습니까?”

“나기 군, 오키나와어 잘하네! 반갑다, 기뻐. 나기 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아니까 지금 이렇게 대화하죠. 애초에 당신 때문에 여기 온 거니까요.”

“나 때문에? 왜? 아, 나 만나러 왔어? 여기 내 집이잖아.”

순간 말문이 막힌 것은 그저 그의 발상에 기가 찼기 때문이지만, 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음대로 기뻐했다. 그런가, 나기 군도 같이 놀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부를 걸 그랬네. 그러고 보니 여기 나기 군이랑 친한 멤버도 다 있지. 외로웠구나? 그런데 나기 군, 새삼 이렇게 보니 얼굴이 정말 예쁘다……. 가만히 내버려 두니 되는 대로 막 뱉는다. 나기는 누가 같은 트리거 멤버 아니랄까봐 리더와 마찬가지로 거리감을 모르고 다가오는 류의 얼굴 앞에 손을 올려 막았다. 그리고 문득 조용해진 주위를 깨닫고 반쯤은 멋쩍고 반쯤은 성가신 표정으로, 일단은 맡은 바를 다하기로 했다.

“별 말 안 했습니다.”

“우리도 아직 아무 말 안 했어.”

“통역해 달라면서요? 오키나와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반갑다고 하네요. 같은 멤버된 도리로 여러분도 좀 배워주면 좋겠답니다.”

“뒷말은 통역이 아니라 나기가 하고 싶은 말이잖아…….”

“그게 다야? 더 길었던 것 같은데.”

“이게 다입니다. 그리고 제 미모를 찬양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냐. 로쿠야, 갑자기 부탁해서 우리도 미안하긴 한데, 이왕 맡았으면 제대로 해라.”

그러자 나기는 불쾌한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번엔 아예 팔짱에 다리까지 꼬고 앉았다. 명백한 거부 자세에 야마토와 미츠키가 나란히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서늘한 푸른빛과 함께 냉랭한 목소리가 가쿠에게 내리꽂혔다.

“제가 말을 지어내고 있다는 겁니까? 저를 믿지 못해서야 통역에도 의미가 없죠. 이런 식이라면 돌아가겠습니다.”

“잠깐, 잠깐! 나기!”

“그런 뜻이 아니야! 아닐 거야! 그렇지?! 야오토메?!”

“뭐야? 그야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방금 건 명백히 이상했잖아. 류가 갑자기 저 녀석 외모를 왜 찬양해?”

“그럴 수도 있지! 우리 나기는 미인이니까! 맞지, 소우?!”

“에헤헤.”

“응, 소우도 그렇다네!”

“그런가……? 류, 정말 그랬냐?”

“질투하는 거야? 귀엽네. 가쿠도 잘생겼어.”

“…….”

“방금 나한테 한 말이지? 뭐래?”

이번에는 당신의 미모를 찬양했습니다……. 라고 하면 믿어줄 건지. 나기는 그냥 고개만 저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러자 내내 싱글싱글 웃으며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류가 몸을 기울이더니 뻔뻔하게도 나기의 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러나, 하고 눈을 감아버리자 아쉬운 소리를 낸다. 캄캄해진 시야 너머에서 아직 얼쩡대고 있는지 술냄새와 체온이 섞인 공기가 나기의 얼굴 근처를 맴돌았다. 그 인기척을 팔랑팔랑 손짓으로 쫓아내던 나기는, 문득 그를 성가시게 하는 철 안 든 어른들에게 앙갚음 비슷한 것이라도 해야 분이 풀리겠다고 생각했다. 멋 모르고 나기 앞에서 서성거리는 이 사람도 포함해서.

나기는 머릿속으로 잠깐 상황을 그려보고는, 속으로 슬쩍 웃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와있던 류와 마주쳤다. 그는 그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웃지도 않고, 안광마저 발할 듯한 눈으로 나기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기는 순간 숨을 삼키며 놀랐지만, 이내 태연을 가장하며 그 얼굴을 조금 우악스럽게 밀어냈다. 금세 허물어진 표정으로 허둥대는 류를 보고서야 내심 안도했다. 나기는 류와 충분한 거리가 생길 때까지 그를 밀어내고는, 주위를 잠깐 곁눈질했다가 보란듯이 입을 열었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 뱉은 말은 의도적으로 주위를 소외시킨 채, 오직 류만을 위한 오키나와어였다.

“츠나시 씨, 아무래도 다들 제 말을 믿을 수 없나 봅니다. 당신이 제 아름다운 미모를 찬양한 건 사실인데 말이에요.”

“응, 응. 그랬지. 나기 군은 정말 예쁘고, 눈동자는 바다처럼 깊고, 머리도 햇살 아래서 반짝반짝 빛나서 마치 여름철 태양 같아.”

“칭찬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감사합니다.”

“나기 군, 오키나와어 잘하네.”

“그건 아까도 들었습니다.”

“어디서 배웠어? 독학? 주변에 오키나와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어?”

“독학했습니다. 주로 교재랑 강의로.”

“그랬구나. 나한테 물어보지. 도와줄 수 있었는데.”

‘당신이 도발해서 시작한 건데 당신한테 물어볼 리가 없잖아요…….’

“있잖아, 나기 군.” 내내 기쁜 듯이 웃으며 대답하던 류의 표정이 문득 진지하게 굳어졌다. 이어진 질문은 마치 나기의 속을 읽은 것처럼 절묘하고도, 나기로서는 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왜 오키나와어를 공부하기로 했어? 이것도 나 때문?”

“…….”

순간, 나기는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의 꼴을 보아하니 그는 잊은 듯하지만 이유는 명백했고 나기가 켕길 만한 것은 일절 없으므로, 그냥 그대로 고하면 될 일이다. ‘당신에게 오키나와어를 할 줄 아는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런데 왜 주저하게 되는 걸까. 좀 더 괜찮은 표현이 있는 것처럼. 더 적당한 이유가, 보다 알맞은 동기가 있는 것처럼. 갑자기 조용해진 나기를 류는 재촉하지도 의아해하지도 않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줄곧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웃었다. 아아, 술이 들어가니까 머리가 안 돌아가……. 그런 변명을 할 수 있는 어른은 역시 치사하다고, 술을 탓할 수도 없는 나기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기 군, 오키나와어를 공부해줘서 고마워. 도쿄에 와서 나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 좀처럼 만날 수 없었으니까……. 뭐랄까, 역시 고향에 온 기분까지는 아닌데. 그렇지만 정말 놀랐고, 기뻤고, 반가웠어. 그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아니 그랬기에 오히려.”

“…그건, 다행이네요.”

“응. 그래서 고맙다고 하고 싶었어. 그것 뿐이야.”

나기는 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령 나기가 이곳에서 모국어를 쓰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야 반갑고 신기하고 기쁠 테지만, 그렇다고 그가 있는 곳이 노스메이아가 될 수는 없다. 그저 이방인이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을 만났을 뿐이다. 그러나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이, 나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는 순간은 분명 있고, 류는 그 순간을 나기가 주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나기는 고개를 들고 미소 지었다. 바로 그것이 나기가 그의 말을 공부하기로 한 이유이자 그를 이해하기로 한 계기였다.

그렇지만 이유를 말할 필요는 역시 없겠지. 아무렴 나기는 지금 저를 술자리에 불러놓고 실컷 곤란하게 만든 어른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은 사람들을 둘러보니 진작 두 사람의 대화에 끼기는 포기한 듯 저들끼리 꾸벅꾸벅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슬쩍슬쩍 이쪽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기는 눈이 마주친 야마토를 향해 일부러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이걸 핑계로 한동안은 그와 미츠키, 아마 소고까지도 나기의 코코나 시청에 정당히 끌어들일 수 있을 듯하다. 저 혼자 웃는 나기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따라 웃던 류는, 나기의 곁에 살짝 다가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나기 군, 결국 오키나와어는 왜 배운 거야?”

“생각 외로 집요하네요……. 비밀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시죠.”

“엥, 안 알려줄 거야? 음……. 그러면 마음대로 생각하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상관은 없지만……. 아니, 역시 들어보겠습니다. 엉뚱한 오해를 사는 것도 곤란하니까요.”

“그 정도는 아닐 걸? 그러니까…….”

류는 잠깐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눈을 접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상하게 익숙한 표정이다 싶었는데, 그 호선을 따라가던 나기는 이내 떠올렸다. 그가 속칭 ‘에로에로 비스트’로 불리며 활약하는 CM 속 미소다. 분명 훌륭한 ‘에로’지만 선보일 때와 장소, 무엇보다 상대를 가리지도 않고 나와서야, 하며 나기는 몰래 고개를 저었다. 앞에서 그런 무례한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째선지 기쁨과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나기 군, 주변에 오키나와어 할 줄 아는 사람은 나 외에 없다고 했지. 독학이었으니까 아마 오키나와어를 선보인 것도, 선보일 사람도 나밖에 없었을 거고. 그렇다면 말이야……. 역시, 나를 위해 배웠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뭐…….”

“아니야? 아니라면 아니라고 해줘. 그렇지만 슬슬 기억이 나는데, 분명 내가 그때 나기 군한테 물었잖아. 나기 군, 방언도 배울 수 있냐고. 그때까지 나기 군은 분명 오키나와어 못 썼어. 내 말이 계기가 된 거구나?”

“…….”

“기뻐, 나기 군!”

저기, 괜찮다면 가끔 만나서 오키나와어로 대화하지 않을래? 아, 나도 노스메이아어 배워볼까. 서로 언어를 교환하는 느낌으로. 어때? 그는 특유의 다정하고도 강직한 미소로 나기를 압박해온다. 나기 군, 나한테 노스메이아어 가르쳐주지 않을래? 나는 너처럼 어학력이 뛰어난 건 아니라, 독학으로 공부할 자신이 없어서. 나기는 대답할 시간을 벌고 싶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가, 어느새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나머지 어른들을 발견했다. 유독 히죽거리는 야마토의 미소가 거슬려서 슬그머니 흘겨보는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예리하게 스쳐갔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가 지나치게 빠르게 돌아온다. 술이 좀 깼는지 류는 어느새 표준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였지?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양, 야마토가 빈 맥주캔을 내려놓으며 보란듯이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나기, 츠나시 씨랑 많이 친해졌나 보네. 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걸로 충분했다. 야마토는 즉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나기를 향해 깔깔 웃으며 새 맥주를 땄다.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 따라 웃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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