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지 수록 원고들

공룡의 멸종방식

베리드 스타즈 아포칼립스 앤솔로지 수록 원고(ncp)

2024년 2월 발간한 베리드 스타즈 아포칼립스 앤솔로지 수록 원고입니다.

CAST: 한도윤, 허우석, 오인하, 이규혁, ???

 

 

 

 

공룡의 멸종방식

 

 

 

공룡은 운석의 충돌로 멸종했다.

 

현생 인류는 이미 길고 긴 시간의 멸종 속을 살아가고 있었고, 이미 그것은 아주 아득히 먼 일이 아닌 생각보다 구체적인 미래의 일이라는 것이 자명했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이야기했다. 기후 위기를 이야기했다. 허나 당장 제 앞날이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은 제법 스쳐가는 이야기였을 뿐이다. 정말로 그것이 멸종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막연하게, 멀게, 당장 내 눈앞의 일은 아니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것이 서서히 멸종을 향해 나아가는 길일지라도, 여태껏 걸어오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기 마련이니까.

 

올해의 오로라는 정말 아름답다고 했다. 태양의 흑점 운동이 활발해서, 그 이외에도 여러 이유와 가설이 오갔던 것 같은데, 그저 요약되어 우주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만이 남았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그저 아름다웠을 뿐이었다. 인생은 짧고 아름다운 것은 많지 않으니,

별빛이 약해졌다. 정확히는 밤이 아주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는 말이 맞을 듯 했다. 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체 별을 보고 살지 않으니 이를 알아챈 한도윤은 꽤 드문 축에 속했다.

인류의 멸종방식은 생각보다 단순하게 정해졌다. 거대 운석의 충돌. 인류의 여러 멸종 시나리오를 계산하던 차에, 이에서 벗어나려던 여러 노력들이 참 무색하게도, 참으로 단순한 이유가 덮쳐와 그 모든 것을 의미없게 만들었다.

인간과 공룡이 다른 점은 이 예견된 멸종을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많은 사람이 인류의 멸종을 입에 담으면서도 막상 그것이 눈앞에 닥치는 것은 가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막을 방법을 찾았다.

보통 사람들에겐 그러한 노력 또한 별세상의 일일 뿐인 채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님들은 만약 내일 인류가 멸종한다면 뭘 할 거임?”

└ RE: 페이터 하면서 남들 뭐 하는지 볼 듯

└ RE: 페청하고 계폭하기

└ RE: 사과나무 심어야지

└ RE: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을까

└ RE: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 돌려야지

└ RE: 친구들 모아서 마작 쳐야지

└ QUOTE: MBTI와 함께 반응 알려줘♥

└ RE: 얜 뭐임

 

한도윤은 어릴 적, 수많은 어린이들이 그러하였듯이 공룡을 좋아했을까,

그들의 멸종을 제 불행마냥 아쉬워했을까,

 

멸종마저 걱정할 수 없을 정도로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음악은 어디로 가야 하나. 락이 자본주의의 첨병같은 음악이던 시대는 지나고 그나마 의의로써 내세우던 저항 정신도 물건너간 시대에 이미 락은 과거의 것으로 멸종하고 있는데, 인류의 멸종이 그보다는 늦지 않을지.

그런 생각은 했었다. 다행히 락은 인류가 멸종하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2023년 12월 22일

D-10, 인류 멸종 확률 50%

 

50%면 거의 확정가챠 아님? 설마 망하겠어

재게시 235 인용 93 마음에 들어요 175

└ QUOTE: 님 뒤질 확률도 50%란 소리임;

재게시 1557 인용 382 마음에 들어요 773

 

‘여전히 절박함이 없네,’

 

그러는 본인도 페이터나 챙겨보고 있지 않은지. 허우석은 휴대폰 화면을 껐다.

 

“뭐 해.”

“게임.”

“태평하네.”

“딱히 할 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비교적 낙관적이었던 전망이 D-14라는 디데이로 바뀌었을 즈음,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 어쩌면 이 멘트 자체가 불길한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 ― 기조의 말들은 조금씩 힘을 잃던 끝에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출근을 했다. 가게를 열었다. 평소와 아주 다르진 않았다. 멸망을 앞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은 굴러가야 했고, 사실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여전히 실감은 잘 나지 않았다.

 

“저건 못 보던 베이스다?”

“빌렸어. 기왕 하는 거 좋은 걸로 해 보고 싶어서.”

“한도윤답지 않은 발상인데, 사람이 좀 변했나.”

“그래서 만져 보다 저기 냅뒀지. 의미랑 안 맞는 것도 같고.”

“솔직히 돌려주는 의미도 없잖아.”

“그러니까 빌려 준 거 아니겠어.”

 

여전히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인 허우석이 영양가 없이 딴지를 걸어댔다.

 

“페이터가 아닌 게 의외다.”

“헛소리밖에 없어. 재미없더라.”

“게임은.”

“제법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정신 수양에 좋다고. 라고 덧붙인 것 치고는 제법 짜증을 내고 있는 것 같지만 ― 론냐! ― 오랜만에 본 허우석이 온라인 마작 게임에 빠져 있는 이유는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일상을 유지하는 방법이려니 했다.

 

내일 인류가 멸종한다면 무엇을 할까, 한도윤은 늘 그런 생각을 해 왔다는 듯이 마스커레이드의 재결성을 하자는 의견을 냈다. 합을 맞춰 본 지도 오래 되었고 진작에 음악을 그만둔 이도 있으니 마지막 공연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은 애초에 현실성이 없었고, 차라리 그것은 화해의 장,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었던 경험에 대한 리스펙의 장이라는 어쩌면 제법 이기적인 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소망에 가까웠다.

김이 빠지게도 그것 또한 싱겁게 기각되었다. 지역을 오가는 차편은 연일 만석이었고 고속도로는 끝없는 정체가 계속되었다. 대전에서 서울 정도면 괜찮지 않아? 허나 한도윤은 핑계일지도 모르는 이유에 비교적 쉽게 납득했다.

완전체 재결성이 무산되었음에도 허우석은 한도윤의 요청에 응했다. 서울에 있는 놈이 이 마당에 할 것도 없고 못 갈 게 뭐냐. 그 말을 증명하듯 허우석은 어차피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던 중이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2인조 재결성. 그것도 가장 마지막으로 남을 것 같지 않았던 두 명의.

 

“그 재결성이라는 말 계속 쓸 거냐. 어차피 보컬과 베이스 둘만 있어서 뭘 할 수 있는데.”

“어차피 그냥, 의미 두자고 하는 건데 뭐.”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제법 진심이잖아.”

“뭐…”

“그런데 기억이나 나겠냐. 악보 챙겨둔 거 있어?”

“여기. 보면 생각날 거야.”

“야, 이거면 볼 필요 없다. 하필 갖고 와도 이런 사골을 꺼내 오냐. 우려도 삼다수 나오게.”

“5년 안 우린 사골이면 괜찮지 않아?”

 

한도윤은 작은 삼각대에 휴대폰 카메라를 세팅했다.

 

“근데 폰으로 찍기엔 좀 가오 빠지지 않냐.”

“더 좋은 거 빌릴까도 생각했는데, 이게 제일 우리다울 것 같아서.”

“니 쓰던 구닥다리 갤럭시 S3라도 구해 오지 그랬냐.”

“그럴 걸 그랬나.”

“농담이지?”

“어.”

“진짜 오만 거에 다 의미부여 한다.”

이게 다 뭔 의미냐, 라고 어이없어하던 것치고는 사운드가 너무 비지 않겠냐며 기타를 챙겨 온 허우석이었다. 거창한 재결성, 거창한 연주, 거창한 의미를 부여한 합주는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인류의 멸종을 앞두고도 음악을 놓지 않았다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 정도는 되었다.

한 때 가족이었던 이들의 재회는 되지 못했을지언정. 이젠 그렇게 말하기엔 우선순위가 서로 너무 달라진 탓에 차라리 다른 의미를 갖는 편이 나았다.

마스커레이드라는 공동체는 그렇게 멸종했다.

 

“에어드랍으로 보내 줄까?”

“한도윤이 그런 것도 할 줄 아네. 이건 좀 놀랍다.”

“보내 줘, 말아,”

“애초에 다 의미 없는 거 아닌가. 백업을 해 놓는다 쳐도 재생할 방법조차 없어질 텐데.”

“보내 줘, 말아,”

“보내 줘.”

 

아마 허우석은 의미 없는 행동일지라도 그 영상을 백업해둘 것이다. 한도윤이 아는 허우석은 그러했다.

 

 

2023년 12월 23일

D-9, 인류 멸종 확률 60%

 

대형 운석의 낙하 장소가 일본 본섬과 태평양에 걸친 위치로 확실시되었다. 완전히 바다로 유도해 버리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초대형 쓰나미에 지구 전체가 쓸리는 결말일 것 또한 자명했고, 이에 대한 대책을 아주 짧은 기간 내에 세우는 것 또한 현실적으로 아주 불가능했기 때문에 곧바로 기각되었다.

재력가 및 고위층들이 지구 반대편, 어디, 아이슬란드 같은 곳으로라도 대피한다는 말이 종종 들려왔다. 물론 해당 항공 노선의 티켓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마저도 구하기 하늘의 별 따기였으며, 그 또한 아마도 부질없다는 것은 그쯤 되면 외면한 것에 가까웠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삿된 신앙. 비행 시간만으로도 멸망을 목전에 둔 하루를 내버려야 한다는 것쯤은 신앙이 해결해 줄 문제인 모양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회 시스템은 최대한, 아니 적어도 형태와 형식은 갖춘 정도로라도 평상시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끝까지 인류 문명을 지키기 위한 희생인가? 허나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비행기가 운행하는 데에도, 공항을 유지하는 데에도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굳이 장거리 노선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항공편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고향을 찾아, 가족을 찾아, 친지들을 찾아…

재난은 자본 앞에 공평하지 않다, 사실 굳이 그런 거창한 표현이 아니더라도, 인력도 평소보다 부족하고 수요는 넘쳐 흐르는 상황에서 돈 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평소 이상으로 쉽지 않았다.

한도윤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마 사정이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 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023년 12월 24일

D-8, 인류 멸종 확률 70%

 

아이슬란드로 향하던 비행기 두어 대가 급격한 우주 환경 변화의 영향으로 비행 중 운항 능력을 손실, 추락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신앙은 그렇게 멸종했다.

 

 

2023년 12월 25일

D-7, 인류 멸종 확률 80%

 

곳곳에서 사건 사고의 소식이 들려왔다. 대체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사적 복수의 소식이었다. 물론 이를 일일히 보도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곧 다 죽을 텐데.”

“스스로 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니까.”

“복수하고 싶은 상대라도 있어?”

“왜, 너한테 복수하고 싶다는 대답이라도 듣고 싶냐.”

“그럴 생각 없잖아. 언제적 일인데.”

“그 때 당시라고 해도 터무니없는 소리야.”

 

한도윤은 참으로 오랜만에 오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살라고 말했던 이를 떠올렸다. 허나 속죄하고 벌을 온전히 받기에도 충분치 않은 시간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그는 지금 어떤 심경으로 지내고 있을까. 상황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기는 했을까.

 

“너는 할 거 많지 않아? 소중한 사람들을 만난다거나, 연락을 돌린다거나… 왜 또 왔어?”

“내 인간관계 생각보다 넓지 않아서. 왜, 싫냐?”

“여자친구 있지 않았어?”

“어제 헤어졌다. 이렇게 된 마당에 연애가 중요하냐던데.”

“동의해?”

“뭐, 그럭저럭. 애초에 그렇게까지 진지하지 않았어.”

“나도 연락을 좀 돌려 볼까 해.”

“니 인간관계는 생각보다도 아니고 대놓고 넓지 않잖아.”

“그러니까 더 해야지. 마작은 더 안 해?”

“질렸어. 그리고 서버 상태도 별로 안 좋아. 아마 이 마당에 다들 일하기 싫겠지.”

“그래도 서버를 열어 놓기는 하는구나.”

“마지막까지 일상을 보내고 싶어하는 모두의 바람 아닐까.”

“서비스 종료 절차를 받는 절차도 이 상황에서는 사치지.”

 

공공기관들은 이제 의미가 없어져 버린 일부 업무를 중단했다. 멸망을 며칠 앞두고 태어난 아이들은 영원히 기록되지 못 할 것이고, 멸망을 며칠 앞두고 생을 마감한 이들은 그 죽음이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존재를 서류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삶. 서류상으로 영생을 사는 삶. 기록이란 것이 이토록 의미가 없었던가,

한도윤은 휴대폰을 켰다. 베스타 출연 당시에 어영부영 최신으로 맞추게 된 휴대전화는 5년 새에 제법 구형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한도윤 본인은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될 만한 건 다 되었고 ― 예를 들어 에어드랍 같은 것도 ― 어차피 그렇게 많은 기능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주소록을 보았다. 이 또한 기록이다. 이제 더 이상 찾을 일이 없어진 기록들이 많았고, 이 시점에서 찾을 만큼 의미있는 기록들은 정말 몇 되지 않았다. 관계의 기록이 개인의 인간관계에 대한 표상이라면, 한도윤은 여러모로 실격인 셈이다.

전화로 오고 가는 말들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간 잘 지냈냐는 인사를 나누고 나면 으레 어떻게 지냈냐는 것을 물을 차례일 텐데, 그러한 말들이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대화를 끝마치는 말 또한 서로가 어색할 따름이었다. 으레 실없이 건네는 다음에 만나서 밥 한 번 먹자, 는 말 또한 이제는 이상하게 들릴 터였다. 만약에 다음이 있다면, 이라는 전제를 붙이기엔,

만약 다음이 있다면. 지금의 말들은 실없이 건네는 말이 아니게 될 터였다. 정말로 만나서 서로의 생존을, 세상의 생존을 축하해야지. 그래야 할 터이다.

모든 대화의 과정들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열 명쯤과 대화를 마치고 한도윤은 기록을 찾는 것을 그만두었다.

“너는 연락 안 돌려?”

“너도 이제 이해했을 거 아냐, 큰 의미 없다는 거.”

“그래.”

“난 간다. 집에서 오래. 동생도 와 있다고.”

 

허나 무언가 잊은 것이 있을 터인데, 분명히 있는 듯한데,

몇 분인가의 침묵이 지난 후 한도윤의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에 표시된 이름을 보았다.

 

- 인하야,

 

지금까지의 한도윤의 행동이 증명하듯 사실 이제 와서는 제일 먼저 연락을 보낼 만큼 각별한 관계는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잊을 수는 없는 관계,

같이 살아남은, 끝내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조금 늦었지만 결국에는 같이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너진 세상에서 오 년의 유예만이 있었던 셈이다.

 

- 잘 지냈어?

- 그렇게 시작하는 전화만 한 30통 했더니 질린다 야.

- 그럼 뭐라고 시작해야 해…

- 여전하네. 너라도 맥 안 빠지는 소리 좀 해 봐.

- 그…

- 응.

- 그래도 다행이다. 다같이 끝을 볼 수 있어서.

- 살아남아서 지금을 볼 수 있다는 게.

 

이제야, 오 년이나 늦어버렸지만, 서로의 생존에 대한 축하를 주고받았다. 그 때는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 년의 유예가 끝나고야 오 년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를 표했다. 각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서로 다른 길을 향하게 될 만큼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축하했다. 그 시간은 의미없지 않았다. 서로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고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 잘 지내.

- 얼마 안 남았잖아.

- 그래도.

- 정말 혹시라도 다음이 있다면…

- 응.

- 그 땐 꼭 밥 한 번 먹자.

- 그래.

- 메리 크리스마스.

인하는 남은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낸다고 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라도 아버지의 면회를 함께 가길 바랐으나 거절했다고 했다. 대신 지역을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니 그 앞까지는 같이 갈 것이라고, 그것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위함이라고 했다.

한도윤은 다음으로 연락할 사람을 정했다. 전화를 받기를 바랐다. …없는 번호라는 알림이 들려왔다.

 

 

2023년 12월 26일

D-6, 인류 멸종 확률 90%

 

아이클라우드 서버의 이상으로 전 세계 아이폰 이용자들의 주소록을 포함한 연동 데이터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다수 서버의 치명적인 물리적 손상으로 완전한 복구에는 시간이 제법 소요될 것이기 때문에 애플은 이를 복구하는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기록은 그렇게 멸종했다. 한도윤은 꺼내지 않은 지 오래인 수첩을 찾았다.

 

 

2023년 12월 27일

D-5, 인류 멸종 확률 95%

 

5%면 픽업급인데? 해볼 만 하지 않음?

재게시 96 인용 224 마음에 들어요 98

└ QUOTE: 이게 게임뇌구나 님은 지금까지 범죄 안 저지르

고 산 거에 감사하세요

재게시 502 인용 103 마음에 들어요 386

 

문득 생각이 나 오랜만에 켜 본 페이터는 아마도 며칠 전 허우석이 보았을 화면보다는 활동량이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창을 닫으려고 하던 찰나 공유된 뉴스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인도적 차원에서 모범수들이 조기 석방된다고 했다. 개중에는 살인 사건으로 수감된 범죄자도 있어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나 전 지구를 뒤엎은 중대 이슈에, 그리고 이미 통제하지 못하는 범죄가 횡행한 상황에서 이를 제지할 시간도 동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도윤은 잠시 고민하다 행선지를 정했다. 미처 속죄를 마치지 못한 이를 위해 마지막 사과라도 할 수 있어야 했다. 한도윤의 요청과 바람은 반쯤 의미가 바래 버렸고, 그저 오 년의 유예만을 만들어주었을 뿐인 결과가 되었다. 스스로의 끝맺음이길 원치 않는다는 것이, 한도윤의 이기적인 바람이었을 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 사과해야 한다. 그 또한 이기적인 선택일지라도.

 

GPS를 포함한 위성 통신이 대부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도윤은 오로지 기억과 표지판에 의존해 행선지로 이동해야 했다. 아버지의 차 조수석에서 지도를 펼치고 길을 찾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얼굴이 곧바로 기억나지 않는다. 한도윤은 지도 없이 홀로 길 위에 남았다.

볼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연락을 할 수단이 없으니 기다리라는 말을 전할 수 없고, 애초에 이규혁이 나온다는 보장 또한 없다. 그라면 그 곳에 남는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도윤은 기다렸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오만하다면 오만한 생각을 품고,

 

“형,”

 

한참을 기다려 마주친 이규혁은 예상 외의 것을 만났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분명히, 한도윤이 보았던 것과 다른 미소였다. 그제야 한도윤은 자신의 바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안심했다.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간 잘 지냈냐는 의례적인 인사는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고, 이규혁의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한도윤은 이규혁을 만나길 기대했음에도 한편으로는 이규혁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선택을 한 것이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기에, 인사 대신에 질문을 던졌다.

 

“밖에서 하고 싶은 것이 있었구나.”

“응,”

 

이규혁은 긍정했다. 한도윤은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어머니, 어머니를 보러 가고 싶었어. 사실 오랫동안 못 뵈었거든. 오 년 전에도, 뵐 용기가 없어서,”

“지금도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다면 외로우실 거야.”

“늘 의지하며… 살아왔으니까.”

 

우습지.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이제야. 의지할 어머니가 사라지자 바로 다른 곳에 의지하려 했던 불효 자식이었으니까. 마주할 용기가 없다는 것을 핑계로 회피하려 했다는 게.

이규혁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오 년의 시간 동안 그는 많은 것을 털어낸 것 같았다.

택시는 있을 리 없었고, 버스도 이제 아주 드문드문 다녔으니 여의치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계산에 없었다는 듯 이동 수단은 바이크 뿐이다 ― 어쩌면 만나지 못할 것이라 은연중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규혁이 바이크 뒷자리에 타자 제법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도소에 있는 오 년 동안 근육이 제법 빠진 것 같아 보이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도윤은 조금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사모님은?”

“아버지 곁에 묻혀 계셔. 지금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야.”

 

이규혁이 선생님, 이 아닌 아버지라는 표현을 썼음에 한도윤은 제법 놀랐다.

 

“외롭진 않으실까?”

“찾는 사람들이 많아.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으니까. 많은 것들이 알려졌음에도 찾아오는 팬들이 있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까지 찾아갈 사람은 없을지도,”

 

“외롭겠다.”

그것은 이병희의 실질적 죽음이었다.

공포이자 우상이었던 것은 그렇게 멸종했다.

 

지도는 없으나 이제 안내할 사람이 있다. 한도윤은 이규혁의 안내대로, 다행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목적지로 향했다.

 

“꽃을 사 가기는 힘들겠지.”

“아마도.”

 

한도윤은 내일의 일정을 정하려 했으나 사실 향할 장소조차 정확히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흐릿해진 얼굴에 선명한 이름 석 자, 어렴풋한 표지판의 기억만으로는 알 수 없다. 염치없지만 안내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허나 길을 아는 사람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2023년 12월 28일

D-4, 인류 멸종 확률 98%

 

한도윤은 절반 정도 남은 담배갑을 보았다. 이것은 마지막 담배일 것이다. 거의 피우지 않은 지 제법 오래 되었지만 허우석이 영 맥아리 없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떠나며 담배를 두고 간 탓에 그 이후로 조금씩 태우고 있었다. 나름 괜찮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문을 닫은 편의점들을 향한 절도 사건 소식이 간간히 들려왔다. 그대로 묻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소진되는 것이 낫지 않나 싶었던 탓인지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진 않았다. 제일 먼저 도둑질의 대상이 된 것이 담배와 소주였다고 한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보다 기호 식품이 우선된 것이 끝을 실감하게 했다.

한도윤은 그런 행위까지는 내키지 않았다. 술은 좀 필요할까? 냉장고에 아직 소주 한 병이 남아 있었다. 술 또한 자주 마시지 않게 된 지 오래 되었으나 그대로 남겨 두는 것보다는 소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에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담배를 영원히 남기게 될 지도 모른다.

 

기호 식품, 커피. 문득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찬장을 뒤져 마지막 남은 믹스 커피를 꺼냈다. 기호 식품이란 것이 원체 생존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대다수라지만 믹스 커피는 생존 식품으로써 제법 기능한다고 했다. …이제 의미 없는 이야기다.

기호 식품이야말로 문명의 상징 같은 것이라고 했다. 믹스 커피조차도 음료로서 마시기 위해서는 물과 에너지를 동시에 소비해야 한다.

원두를 갈며 드립 커피를 내리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3년 전쯤에 들른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커피의 향과 함께 퍼지는 온기가 좋았다. 오직 기호 식품으로서 기능하는 음료를 위해 많은 수고와 에너지를 들이고, 그렇게 완성된 음료를 마시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도 되었다. 그야말로 문명의 산물 같은 곳이었다.

아마 그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있지 않을까. 문명의 산물을 소진하며. 그것은 그저 커피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2023년 12월 29일

D-3, 인류 멸종 확률 99%

 

희박한 희망의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전 세계의 연구용 슈퍼 컴퓨터들이 동원되었다. 이들의 가동과 막대한 계산량을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고, 예정일로부터 3일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전 세계의 에너지 비축량이 명확히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난방이나 의료기기 등 생존에 필수적인 용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에너지 사용이 차단되었다.

이제 밤은 더 이상 밝지 않았다. 화려한 불빛들은 모두 사라졌다. 0과 1로 구성된 전기 신호에 많은 것들을 의존하고 있던 세상은 작동을 멈추었다.

문명은 그렇게 멸종했다. 한도윤은 믹스 커피를 이미 소진하였음에 안도했다.

 

이제 더 이상 충전할 수 없게 된, 어차피 대부분의 기능을 이제 사용할 수 없게 된 휴대폰의 잔여 배터리가 10퍼센트에 가깝게 떨어졌을 즈음, 한도윤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2023년 12월 30일

D-2, 인류 멸종 확률 99.97%

 

이제 형광등을 켤 수 없다. 지구로 향하는 운석이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육안으로도 아주 크고 밝게 보일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지구를 밝히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디지털 시대 인간으로의 업데이트가 되다 말아 보조배터리 같은 것을 구비해두지 않은 탓에 한도윤의 휴대폰은 몇 시간 전에 마지막 작동을 멈추고 전원이 꺼졌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고 그저 누워만 있는 것은 가성비가 나빴다. 아직 36시간 가량이 더 남아 있었다. 여전히 도로에는 차들이 급하게 돌아다녔으나 더 이상의 주유는 어려웠기에 저것은 마지막 이동을 위함일 것이다. 한도윤의 바이크도 아직 기름이 남아 있었으나 달리 갈 곳은 없다.

 

외로웠다. 좀 더 거창한 말로 하면 고독, 좀 더 있어보이는 말로 하면 재료가 될 것, 혹은 승화시킬 것. 한도윤은 이러한 감정들을 음악으로 해소해 왔다고, 본인에게는 너무 당연하기에 입 밖으로 뱉기에는 오히려 낯부끄러운 말로 표현하곤 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테다. 허나 인류 멸망 전 마지막 창작이라니,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로맨틱한 행위라고, 한도윤은 생각했다.

멸망은 로맨틱하다고 누가 말했는지는 몰라도, 멸망을 목전에 둘 일이 없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누군가가 한 말이라고.

한날 한시에 모두가 같이 죽는다면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누가 했더라.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로 잘못 생각했다.

 

그럼에도 마지막 인사와 그에 수반하는 마무리를 미리 해 둔 것은 잘 한 일이었다. 그 인사의 반절은 공허했을지언정 의미없지 않았다. 절차란 그런 것이다.

구석에 놓아 둔 베이스 기타를 보았다. 앰프에 전원을 연결할 수 없으니 이제 쓸 수 없다. 허나 전자악기가 없던 시절에도 진심전력으로 락을 구현하려 했던 사람도 있었으니 락의 멸종을 선언하기엔 아직 이르다.

명백히, 락의 멸종보다 인류의 멸종이 빨랐다. 락 윌 네버 다이! 락은 사탄의 음악이라더니 원숭이 손도 사탄의 소관인가, 그런 영양가 없는 잡생각이 떠다녔다. 카운트다운을 세기 시작한 지도 일주일은 족히 넘었으니 오히려 멸망의 목전에 사용해야 할 긴장감을 이미 다 소진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도피거나. 도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락의 멸종을 선언하지 않으려면 음악의 멸종도 선언할 수 없다. 창작의 멸종 또한 선언할 수 없다.

 

한도윤은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작곡 노트를 꺼냈다. 노트북은 아직 전력이 남아 있으나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전자기기에 사망선고를 내렸으니 본의 아니게 이미 멸종을 선언한 마스커레이드 시절로 회귀한 셈이다.

24시간 동안 완성할 수 있는 것. 기록은 이미 멸종했으니 완성물보다는 과정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행동 그 자체가 의지의 표명이니 끊임없이 행동으로 말해야 한다. 신앙 또한 이미 멸종했으니 이 행위로 다른 무언가를 바랄 수 없다.

마지막 작품이라는 거창한 의미부여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무엇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이것은 한도윤이라는 이름 석 자를 남기는 작업이었다. 기록으로서가 아닌, 그저…

한도윤은 썼다. 쓰고 또 쓰고, 쓰고 또 지웠다. 고치고 또 썼다. 골몰하는 동안의 공백은 손가락으로 펜을 굴리는 소리가 채웠다.

마지막 12시간은 비워 놓아야 했다.

 

 

2023년 12월 31일

D-1, 운석 충돌 12시간 전

 

한도윤이 펜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초인종이 울렸다.

마지막으로 완성한 것을, 지금의 한도윤을, 당신이 모르는 한도윤을 보여 줄 시간이 되었다. 서로가 모르는 빈 부분을 채운 채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 되길 바랐다.

한도윤은 문을 열었다.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뒤로 한 하늘에서는 빛이 쏟아졌다.

한도윤은 입을 열었다.

 

“아빠,”

 

 

2024년 1월 1일

 

사실, 공룡은 한순간에 멸종하지 않았다.

운석의 충돌로 한날 한시에 모두가 죽어 멸종했다는 그런 로맨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운석의 충돌에서 살아남은 공룡들은 지구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그것이 기후 변화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지구가 그들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해 가는 동안에, 생각보다 길고 힘든 시간에 걸쳐 한 생물종은 멸종에 다다랐으리라.

현 세대의 남은 인류도 그러할 것이다.

 

 

잘자요, 좋은 꿈,

안녕.

 

 

 

* 규환님의 트윗에서 일부 차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래에 원문을 붙입니다.

[그리고 이병희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후에야 (그 아재를 왜 저한테서 찾으세요ㅋㅋ) 이병희를 불쌍해할 수 있게 된 이규혁을 생각해 그건 그러니까... 부관참시 같은 거라고 생각해

한도윤한테 선생님 벌초해드리고 싶은데 같이 가달라고 하는 이규혁 생각하고 도파민 MAX 됨]

* 마지막 문장은 너드커넥션의 <좋은 밤 좋은 꿈> 가사를 일부 차용했습니다. 한도윤과 나란히 놓기엔 영 메이저한 감성인 것은 알지만 그냥… 계속 머리에 맴돌았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캐릭터
#한도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