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크 몬&원] 파랑새

자캐로그

연성창고 by 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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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원은 *** 우주에서 배달 업무를 한 가지 맡았었다. 의뢰자는 헤르메스라는 초록 빛깔의 머리카락을 지닌 남성. 이 우주를 떠돌던 무렵 조우했던 우주를 나는 파란 새 한 마리, 그 아이의 주인이었다. 대뜸 그 파란 새는 자신의 이름이 메테이온이라고 말하며 원에게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왜 사는지, 라. 원에게 그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은혜?”

“절 도와줬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죽으면서 그 사람이 떠안고 있던 문제를 제가 갚고 있으니까. 그래서 사는 거예요.”

메테이온은 순수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원은 어딘가 이 새가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것 같다는 생각에 불편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대답은 들려주었으니 이제 자리를 뜨자고 생각했을 무렵, 메테이온이 다시 질문하였다.

“그럼 그 은혜를 다 갚고 나면, 어떻게 되는데?”

원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지만, 눈앞의 파란 아이는 원의 마음을 이미 알아버린 듯했다.

어쩐지 그 눈앞의 아이가 순간 푸른 빛을 잃고 새까맣게 보였던 건 착각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썼다간 무엇이든 배달하는 배달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는 애써 무시하고 자리를 떴다.

업무를 맡게 된 것은 그 이후,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메테이온의 주인인 헤르메스가 원의 직장에 의뢰한 내용은 “새 한 마리를 그 누구도 찾지 못할 먼 우주로 배달해달라”는 것. 여러 우주를 넘나들 수 있는 원에게 한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 물건을 옮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대가는 아이테리스의 식생에 관한 모든 정보. 이 정보는 이미 정리된 채로 회사에 발송되어 있었다. 언젠가 아이테리스에서만 존재하는 물건을 배달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그러한 정보는 분명 돈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쉬운 일이기에 원은 그를 받아들였고 우주를 떠돌다 메테이온을 만났다.

그 때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파랑새는 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괴로워 보인다. 새까맣게 물든 아이를 보고 원은 소름 돋는 감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 아이가 무서워서? 아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훔쳐본 저 아이에게서 느껴졌던 그 검은 기운이 저 아이의 몸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점. 그것이 이유였다. 마치 이 아이가 그렇게 된 것은 당신의 탓도 있다는 것처럼 책망하는 것 같았다. 그때 원이 눈치챘을 때 뭔가 조치를 했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네, 당신.”

“….”

“그래, 당신은 아직 빚을 다 갚지 못했구나. 아직은 살아갈 이유가 남아있네.”

“….”

“끝내줄까? 삶은 고통뿐이야. 당신도 잘 알지? 그 사람의 가족들이 걱정된다면, 함께 끝내줄게. 그럼 빚이고 뭐고 없으니까.”

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멀리, 아이테리스에서 최대한 멀리 날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이 새까만 곳에, 멀디먼 곳에 그 아이를 남겨두고 도망쳤다. 자신이 부탁받은 업무는 어디까지나 배달이니까, 라는 방어기재를 내세우며.


“이봐, 들었어? 그 *** 우주. 종언을 노래하는 자가 사라졌다던데?”

“뭐라고? 수많은 우주처럼 자멸할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모든 생명이 사그라지면 그 우주를 인지하는 자가 없어져서 사라지고 마는데, 남아있는 생명이 발버둥친 거야.”

“생명의 반짝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정말 극소수의 생명이 살아남았다던가?”

“고작 그 정도로 그 녀석을 물리쳤다고? 농담이 심한데.”

“하지만, 정말 없어졌는걸?”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 우주라는 이름은 원의 발걸음을 멈추고 직장 동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였다. 원이 두고 온 메테이온이 종언을 노래하는 자로 변모하여 우주를 종말로 이끌게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 사실에서 눈을 돌렸다. 나는 필요한 일을 한 거야. 무엇이든 배달하는 것이 나의 임무니까. 빚을 갚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갖은 핑계를 대면서 무시해왔다. 어차피 그 우주는 메테이온이 손을 쓰기 전부터 생명의 반짝임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던 곳이었으니, 굳이 자신이 배달하지 않았어도 자멸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우주에 남은 마지막 반짝임이 무언가 해낸 거겠지? 원은 그 사실에 홀린 듯 다시 *** 우주로 향했다. 대체 어떤 자가 그것을 해낼 수 있었는지, 그에 대한 답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왜인지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으나, 그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생명의 반짝임이 있는 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야, 딱 이 하나만 남아있었으니까. 우주에서 내려다봤을 때 땅의 모든 곳에 생명의 반짝임이 존재하였다. 눈이 부셨다.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생명의 열기 속으로 원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이 아이테리스라는 행성에 발을 딛은 첫 순간이었다.

최대한 생명이 없는 곳을 찾아 착륙하려 했으나, 어디에나 넘치는 생명을 피할 수는 없어 눈으로 보기에 식물이라는 생명이 많은 곳으로 착륙했다. 짹짹, 하고 새소리가 울린다. 자신이 만났던 파랑새의 울음과는 사뭇 다른 경쾌함이 귓가를 때린다. 우주선에서 내린 원은 주위를 그저 둘러보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고 오지 않았기에 그저 그러한 행동밖에 하지 못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이 답답함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발을 움직여야 하나 고민할 때쯤이었다. 이것은 기묘한 첫 만남이었다.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해야 할지, 그저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만남. 정신을 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우주를 닮은 남색의 뿔과 비늘 꼬리를 지닌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었다. 강인한 생명의 빛을 품고서.

“….”

“….”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원의 처지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눈앞의 여성은 잘 모르겠다. 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뒤의 우주선 때문인지 경계는 하는 모양새다. 원은 자신의 상황이 어찌 되었든 이 상황에 대한 오해는 풀어야 할 것 같았기에 입을 열었다.

“그, 혹시나 해서 말인데, 뭐, 우주에서 외계인이 습격? 이런 걸 하러 온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

눈앞의 여성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자신이 늘 착용하고 있는 번역기는 잘 작동하고 있을 테니 여성에게도 명확히 뜻이 전달되었을 텐데, 역시 이 정도의 말로는 경계심을 풀 수 없나? 뭐, 원의 생각에도 저 정도의 말은 실제 습격할 사람이라도 그렇게 말하겠지 싶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담.

“먼 곳에서 온 자여,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온 것인가.”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 이것은, 눈앞의 여성에게서? 목소리의 이미지와 생김새의 이미지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었다. 일단 인간이 낼 만한 소리로 느껴지지도 않았으니까. 그럼 누구지? 하고 살펴본 원은 그 목소리의 출처가 눈앞의 여성의 어깨 위, 작은 드래곤 한 마리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딱 보기에도 강인한 힘을 가진 존재다. 굉장히 작은 새끼용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저것이 본체일 리 없다. 만질 수 있는 파란 새는 가까우려나. 그렇게 연달아 보니 눈앞의 여성이 뿔과 비늘 꼬리를 가진 것도 드래곤의 특징을 품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깐, 드래곤이라고?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이 우주에서의 기억. 분명 메테이온을 우주 끝까지 배달할 때 잠시 들렀던 행성 중 하나가 드래곤이 사는 별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 별은 이미 생명의 반짝임이라곤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새로 태어난 새끼마저 오염된 채로 태어나 희망이라곤 없었다. 메테이온이 건드리지 않았을 때부터 생명이라는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종말을 맞은 별이었고 종말을 맞은 종족일 테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 자들은 뭐지? 원의 심장이 쿵-쿵-아프게 무거운 왕복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왜,”

“응?”

“살아남은 드래곤이 있었나? 아니, 분명 드래곤들의 별은 멸망했을 텐데.”

눈앞의 여성과 작은 드래곤의 사념체는 서로 마주 보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원은 그 표정들을 보고 혹시 이 섬에 자생하는 드래곤이 별도로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행성마다 무조건 다르게 생긴 생명체가 서식할 거라는 것 역시 편견이다. 사람이라는 종족이 온갖 행성에 사는 것처럼, 이 우주에 드래곤이 ##별에만 사는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그런 거라면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원은 진심으로 그들이 이 별에서 나고 자란 드래곤이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바랐다. 죄악감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일지도, 혹은.

“나의 시조 미드가르드오름께서 겪은 별의 종말인가. 그 별은 실제로도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조께서는 7개의 알을 품고 이 아이테리스로 정착하셨지. 그렇게 우리는 줄곧 이 별에 살았다.”

도망칠 길이 끊어진다. 이것이 업보가 아니면 무엇인가. 생명의 반짝임이 적은 곳으로 일부러 찾아왔는데, 그 별의 후예를 만나다니.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얄궂다. 어쩌면 그 넓은 우주에서 자신이 메테이온을 조우했을 때부터 꼬여버린 걸지도 모른다. 메테이온의 슬픔을 모른 척한 죄를 지금에 와서 달게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뒤의 그 기계와 그 종말을 알고 있다는 건, 우주에서 온 생명체임은 확실한 것 같구나.”

“… 그렇죠. 저는.”

저는, 당신의 시조가 머물었던 별의 종말을 모른 척한 사람. 저는, 종말을 부를 것이 명확하던 그 새를 누구도 찾지 못할 곳으로 배달해준 사람. 그런 사람이 고개를 들 수 있을까. 고개를 떨군 원에게 눈앞의 여성이 천천히 다가와 눈앞에서 인간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푸른 손을 흔들었다. 여길 보라는 듯한 손짓에 천천히 원이 고개를 들었다.

여성은 평범하게 무표정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분노, 슬픔, 기쁨, 그 무엇도. 그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두려웠다. 자신에게 아무런 기척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강자인 그녀가 휘두를 복수의 칼날이 두려웠다. 무섭다. 괴롭다. 차마 입이 열리지 않는다. 차마.

“그게 뭐 어땠다고 그렇게 떠는 거야?”

깊은 심해 속에서 피어오른 물방울 하나, 그 하나가 구슬이 되어 물길을 타고 흐르며 연주하듯 깊고도 청아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바다 안에 가라앉고 있다고 느낄 정도의 떨림. 원은 이 목소리가 눈으로, 귀로 들리지 않지만, 눈앞의 어딘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그녀에게서 나오는 목소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걸맞은 고혹적인 목소리. 다만, 그 말의 내용은 한없이 덤덤했다. 상대에 대한 배려도, 스스로에 대한 배려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함에서 오는 악의와도 같은 감각.

원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인지 두 생명에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저것이 악의라고 느껴질 정도로 자신이 압박을 받은 것은 그 오묘한 눈빛이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르시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겠죠.”

그래서 허세를 부려본다. 아니, 방어한 것일까? 하지만 말한 것처럼 그녀는 자신도 상대도 배려하지 않는 순수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내 말이 들려?”

“? 들립니다만.”

“신기하네. 내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어머니와 초월하는 힘을 가진 몇몇 사람뿐이었는데….”

“초월하는 힘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제게는 자동 번역 장치가 있거든요. 그 기계의 덕분인지도 모르겠네요.”

눈앞의 여성은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더니 한 발자국 원에게 다가왔다. 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아주 약간 좁아진다.

“초월하는 힘. 말 그대로 벽을 뛰어넘는 힘이야. 그러니까, 마음의 장벽도 언어의 장벽도 넘을 수 있어.”

“이 기계의 작동 원리는 저도 잘 모르지만, 소통이 안 된 적은 없었으니까요. 구어가 아닌 소통을 하는 종족과도 소통됐던 걸 보면, 그런 힘도 감지하는 능력이 있을지 모르죠.”

“그래, 아무튼 나는 언어의 장벽도 마음의 장벽도 쉽게 넘을 수 있는… 넘고 싶지 않아도 그 너머를 보게 되는 사람이라서. 다 보인단 말이야. 네가 지금 뭘 생각하는지.”

“!”

원이 느꼈던 이질감은 생존본능과도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의 그녀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네가 우리를 보고 어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지 알고 있어. 그 죄책감의 원인도 알아. 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뭐 어땠다는 거야?”라고 물었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눈앞에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가 있는 것이다. 복수하고 싶다거나, 그런 감정은 들지 않나? 혹은 개인적인 복수심이 드는 것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혐오감이 들지 않나?

나부터도, 그러한데. 원은 스스로 생각했다.

눈가를 찌푸리고 욕지거리를 내뱉는 원을 무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또다시 한 발자국 다가갔다. 이번에 원은 한 발자국 뒤로 움직이고 싶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또다시 좁혀진다.

“알고 싶어.”

“뭘, 말인가요.”

“네 기분을 그대로 느껴.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읽었어. 하지만 그 기억에서 왜 그러한 기분을 느끼는지 모르겠어.”

“?”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이번에는 원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생명이란 참으로 감정적이라, 피해를 당한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상처 입기 마련이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라면 더욱 그렇다. 원은 메테이온을 우주 끝으로 배달했을 때 이 새가 이 우주에 불러올 종말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배달했다.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의뢰인 헤르메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일이기 때문이라고 치부하며 옳은 길에서 눈을 돌렸다. 보통 상대가 이러한 행동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면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상대에 대한 혐오감, 두 번째는 상대에 대한 동질감. 선한 이나 자신은 악인이 아니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이는 첫 번째의 반응일 테고 자신이 악인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자는 두 번째 반응을 보일 테다. 그런데 그녀는 둘 중 그 어떤 반응도 아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원은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

“지금 절 놀리시는 겁니까?”

“? 아니, 왜?”

“그야, 보통 그런 걸 알면 절 싫어하거나… 그런 반응이 정상 아닙니까?”

“그런 거야?”

그런 거야, 라니? 정말 처음 알았다는 듯한 반응에 원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겉보기로는 확실한 성인의 외형으로 보인다. 말을 구사할 때 문장이 짧긴 하지만, 성인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모를 수도 있는 건가? 이렇게까지 감정이 요동치는 일이 없는 사람도 있는 건가?

자신은, 전혀 할 수 없었는데.

초월하는 힘은 과거 헤르메스가 보내준 아이테리스의 생명 정보를 훑어본 기억에서 추측해보건대 단순히 기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 느낀 감정과 경험을 그대로 느끼는 힘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원이 느낀 감정을 실제로 느끼고도 왜인지 모르겠다, 라는 반응이라는 말인가. 그 슬픔을, 그 괴로움을 직접 느끼고 드는 생각이 ‘왜?’라고? 혼란스럽다는 단어는 이런 때 쓰는 단어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윤리관과 살아오던 가치관이 부정당하는 듯한 기분.

원은 이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사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따라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처음보다는 가까웠으나, 방금 보다는 멀어졌다.

“왜?”

“왜, 라니…. 놀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군요.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모르니까 물어본 것뿐인데?”

“그러니까, 대체 왜 모른다는 거죠? 저는 당신의 가족을 죽게 내버려뒀습니다. 그 별에서 생명이 죽어가는 모습도 봤습니다. 이 별에 불러올 종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는 괴로움을 모르겠다고요?”

그녀는 원의 말을 조용히 듣고 눈을 한 번 깜빡였다. 표정의 변화는 없다. 숨소리에 변화도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래 산 원에게조차 이다지도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는 처음인 것 같았다.

“난, 몰라.”

“….”

“모르니까 나온 거야. 집에서. 알고 싶어서.”

“알고, 싶었다고요?”

“알아야 할 것 같았어.”

알아야 할 것 같았어, 라고 그녀는 재차 이야기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속눈썹 위를 굴렀다. 똑바로 원을 응시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원에게서 눈을 뗀 순간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나, 원은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에 뭔가 감정이 동요될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모르더라도.

“하…. 그러니까, 정말 모른다는 거군요.”

“응, 몰라.”

“그걸 가르쳐준다고 제게 무슨 득이 있죠? 전 바쁘고 심지어 제가 왜 이런 기분을 느꼈는지 당신이 정말 알아버리면, 절 그때 가서 죽이려 들지도 모르는데.”

“음.”

그녀는 한참 뜸을 들였다. 주머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서 들었다가 집어넣고, 뭔가 사냥을 통해 얻은 것 같은 이상한 물건을 꺼냈다가 집어넣고를 반복했다. 원에게 줄 ‘득’을 찾고 있는 걸까. 뭐, 세상 어딘가는 저런 보상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단 배달해야 할 품목에 들어있는 것은 한 개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원에게 전혀 득이 될 수 없다. 팔짱을 끼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한참을 뒤지다 다시 원을 바라보았다. 뭘 주기로 한 것인지.

“모르겠어.”

“… 당신은 모르겠다는 말 말고 할 줄 모릅니까?”

“당신이 누군지 모르는데 뭐가 네게 득일지 어떻게 알아.”

“하지만, 제가 그걸 알려줄 의리도 없는 것 같은데요. 말했듯이 정말 알아버리면 죽이려고 들지 모르니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나도 이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누구한테 이걸 가르치겠다고.”

그녀는 가만히 원을 보고 있다가 두 발자국 원에게 다가왔다. 눈앞까지 가까워진 거리. 원은 그녀를 피하지 않았고 그녀도 원을 피하지 않았다.

“같이 알아가면?”

“… 내가 왜?”

“이유는 없는데. 내가 집을 나온 데에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그냥,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 너도 모른다면 너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비약이 심했다. 이것이 정녕 성인 대 성인으로 하는 말이 맞는지. 원은 기가 차 한숨을 내뱉었다.

“어깨 위의 당신. 어머니라면서요? 뭐라고 말 좀 해보시죠?”

“글쎄, 굳이 끼어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이럴 때 부모가 끼어들어야지 그럼 언제 끼어듭니까?”

“아니, 이런 때이기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지. 어미 된 자로서.”

이런 때이기에, 인가. 분명 그녀에게 있어서 나쁜 제안은 아닐 터였다. 어떤 성장 과정을 지녔는지는 모르더라도 저 둘이 피가 이어진 모녀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인간이 평범한 구어가 아닌 타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몰라도 그다지 성장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제라도 배울 수 있도록 끼어들지 않겠다는 태도이신가. 참으로 좋은 부모시군. 결국, 원은 눈앞의 두 생명과 이 이상 이야기하는 것에 득은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등을 돌렸다. 한 번 확인했으니 되었다. 이 별은 멀쩡하고, 실제로 메테이온은 사라진 것 같다. 그럼 된 것이 아닌가. 굳이 이 별에 다시 올 이유는 없을 테다.

“내 이름, 에스크 몬. 에스크라고 불러.”

“이 원입니다. 이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너는 알아야 해.”

“… 싫다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원이 뒤를 돌아 한 발자국 나아갈 때마다 에스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가 한 발자국을 더 큰 보폭으로 따라붙었다. 체구는 훨씬 작은데 어떻게든 쫓아오려는 것인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복잡미묘한 감정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은데, 계속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니 원은 순간 파도치는 감정의 요동을 내뱉고 말았다.

“그럼 좀 내버려두세요.”

“싫어.”

“대체 왜! 그렇게 사람을 우롱하고 싶습니까?! 짜증 난단 말입니다!”

“그야, 당신.”

당신은, 나와 같이 여러 일에 휘말리며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어져서 떠나온 사람이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아, 그래, 그렇다. 본질이다. 그녀는 역시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저 멍해 보이면서도 차가워 보이는 눈은 잔혹하게도 순수하고 맑았다. 원은 죄악감에 시달릴 여러 일에 휘말리며 스스로 감정을 못 본 척, 없는 척 늘 자리를 떠나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그녀는, 글쎄. 모르겠지만, 집을 나왔다고 했지. 그녀도 비슷한 사정을 가진 것일까. 아니면 의외로 전혀 다를까. 때로 순수한 시각에서의 관점은 일반적인 사고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는 법이니, 의외로 꽤 다를지도 모르겠다.

원은 우주선에 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 에스크와 마주 보았다. 심해와 같은 눈이 원을 꿰뚫는다. 마치 메테이온을 데리고 우주의 끝까지 날아가며 보던 우주의 풍경과도 닮았다. 어쩌면, 종언을 노래하는 자는 사라졌지만, 감정의 소용돌이를 움직이는 파랑새는 여전히 눈앞에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원은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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