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사鹿鯊의 사냥 (2)
탈화석, 해리탄생 AU IF로그
CW: 폭력, 상해, 살해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있습니다. 독자적 마법 설정이 등장합니다. 레핀 위주. 타 러너 캐릭터 및 모브 캐릭터들에 대한 캐릭터 해석이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수정요청 주세요…) 핀갈이 굉장히 먼치킨화됩니다. 정사가 아닌 썰 정도로 읽어주세요.
‘베리타’는 기사단의 안전가옥에 머물며 미국으로 망명을 준비하고 있는 오르테 인테그라의 코드네임이었다. 이 차분하고 이지적이며 영감이 풍부한 젊은 마녀는 상대의 눈을 보고 거짓말을 알아차리는 희귀한 능력을 타고나, 그것으로 기사단을 돕다가 죽음을 먹는 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오큘러먼시라고도 불리는 이 능력은 사용하기 위해 별도의 의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타인이 배우거나 승계할 수 없는 일종의 체질이라는 점에서 주문이 아닌 예언 능력으로 분류되었으며, 레질리먼시와 달리 눈을 가리는 것 외에는 방어법이랄 것이 없었다. 약점이 있다면, 상대가 사실과 다른 것을 진심으로 믿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거짓말로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인테그라 양은 기사단과의 ‘마지막’ 협업을 마치고 곧 대륙을 건너기 위해 한창 신변 정리에 바쁜 차였으나, 퇴장 후 앵콜 같은 기사단의 청을 흔쾌히 수락해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왔다. 한 시간 정도 핀갈 모레이와 독대한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단원들에게 확언했다. “그 사람은 믿을 수 있습니다.” “확실한가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숨기고 있는 꿍꿍이 같은 것은 없습니까?” 질문이 쏟아졌으나 인테그라 양은 가볍게 허공에 손을 몇 번 내젓고 말았다. “부탁하신 질문들은 다 했습니다. 언제나처럼 대화록을 정리했으니 확인해보셔요. 좀 특이한 분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녀는 측은함과 즐거움, 약간의 경의가 뒤섞인 희한한 눈으로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여하간, 모든 분들에게 만족스러운 결과가 있길 바라요.” 아이작은 이 의미심장한 인사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인테그라 양이 정리한 핀갈 모레이와의 문답은 다음과 같았다.
○ 진실. 혹은 본인은 진실이라 믿음.
△ 절반의 진실. 거짓말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말하지도 않았으며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음.
× 거짓. 본인도 사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음.
-핀갈 모이레 모레이, 1978년 래번클로 졸업생, 불사조 기사단의 신입 단원이 맞나요?
예, 접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베리타라고 해요. 불사조 기사단의 자문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기사단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아도 괜찮을까요?
어둠의 마법사들에게 원한을 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원한을 풀 수 있다면, 기사단을 나갈 건가요?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뭔가요?
애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렇게 못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어둠의 마법사들의 적이 되기 전부터 어둠의 마법사들은 저의 적이었으니까요. (△)-어둠의 마법을 적대하시나요?
그것은 모든 영혼 있는 존재들이 적대하고 두려워해 마땅한 것입니다. (○)-올바른 목적을 위해 어둠의 마법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둠의 마법이 무섭고 사악한 이유는 나를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목적은 내가 가지는 것이고, 올바름도 내가 판단하는 것인데, ‘나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달성되는 올바른 목적’이라는 것이 어떻게 성립합니까? (○)-그렇다면 죽음을 먹는 자들과의 싸움에서 당신이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아이작 윈필드 씨의 안전입니다. (△)-그것이 왜 당신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가요?
그를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작 윈필드 씨와 기사단 전체 중에서 한쪽만 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요?
아이작 윈필드 씨를 구합니다. (○)-윈필드 씨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요?
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르가나 가민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그는 저의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저는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십 년 가까이를 분투해왔습니다.(○)-모르가나 가민이 목숨을 살려주겠다며 투항을 권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런 질문은 쓸모가 없습니다. 누구나 말로는 굴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게 정말인지는 닥칠 때까지 알 수 없으니까요.(○)-힘과 정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말해주세요.
정의는 힘이 올바르게 사용되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일컫는 이름입니다. (○)…
-살인을 즐기시나요?
그건 ‘퀘이플을 골대에 던져넣는 것을 즐기시나요?’와 비슷하게 멍청한 질문입니다. 그 골대가 자기 편 것인지 상대편 것인지, 시점이 경기 도중인지 경기가 중단된 동안인지, 내가 추격꾼인지 몰이꾼인지에 따라 자랑스러운 업적에서 정신나간 짓거리까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행위니까. (○)-당신의 기준에서 추격꾼이 경기 중에 상대편 골대에 퀘이플을 던져넣는 것에 해당하는 살인은 무엇입니까?
대등하게 죽음의 위험을 지고 전력으로 맞부딪혀 이기는 것입니다. (○)-반칙에 해당하는 살인은요?
싸울 수 없거나 무장하지 않은 상대의 살해, 전투가 금지된 주거 지역에서의 살해, 타인으로부터의 대가나 교사에 의한 살해, 독약이나 숨겨진 저주 등 반격이 불가능한 일방적 방법에 의한 살해…… 그리고 단순한 편의나 쾌락을 위한 살해 역시 어리석고 저열한 짓입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혹시 기사단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나요?
당신들은 없습니까? (○)-조금 더 정확하게 물을게요. 기사단에 해가 될 만한 비밀이나 의도를 숨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배신하거나, 기만하거나, 교란하거나, 기타 전쟁에서 아군인 척 위장하고 안에서 훼방하는 행위들을 염두하시는 거라면 확언컨대 저는 당신들의 아군입니다. 당신들이 저에게 신의를 지켜주신다면 저 역시 목숨과 긍지를 걸고 당신들에게 신의를 지킬 겁니다. (△)-해가 될 만한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기사단에 말할 수 없나요?
당신들이 저를 믿지 않는 것처럼 저도 당신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가 오면 결국엔 당신들에게 고하게 될 겁니다. 저는 머지않아 그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
썩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사단원들은 ‘베리타’의 판단에 동의했다. 핀갈 모레이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은 명백했으나, 그것이 기사단에 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면 비밀을 가지는 것은 그의 권리였다. 비록 우려스러울 정도로 독특한 것이라고는 하나, 살인에 대한 태도 문제에 있어서도 그 나름의 도덕적 기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으니 최소한 무분별하게 사람을 난자하며 즐거워하는 쾌락살인마의 혐의는 벗은 셈이었다.
이 문답을 읽고 종전보다 심란해진 사람은 아이작뿐이었다. 그는 문서 전체를 세 번, 초반부를 여섯 번쯤 되풀이해 읽었으나 핀갈 모레이의 답변에 깔린, 그를 겨냥한 난해한 적의는 조금도 더 명료해지지 않았다. 개인적인 가치관을 존중하나 기사단의 명예를 위해 불필요한 살인은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들은 핀갈 모레이는 마뜩잖은 듯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전력으로 이쪽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어둠의 마법사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면서, 이쪽은 다치지 않을 만한 무해한 주문만으로 상대를 곱게 눕혀놓으라는 건가요? 꼭 학교 선생이 결투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 같군요. 당신들, 그 정도로 여유가 있습니까?”
마지막 말은 거의 발설할 필요도 없었으리만치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흘러넘쳤다. 아이작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사단의 싸움이 죽음을 먹는 자들의 싸움과 어떻게 다른지, 사람들에게 도덕적 전범이 되고 신뢰와 지지를 얻는 것이 그 목적에 얼마나 중심적인지를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설명했다. 핀갈 모레이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을 몇 번 열었다 닫았다 하다, 이내 의욕을 잃은 듯이 탈력한 얼굴로 멍하니 먼데를 쳐다보다가, 아이작의 말이 끝나고서는 한참 동안이나 미간을 짚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고 이렇게 말했을 때, 그 얼굴에는 짜증을 억누르고 타협을 삼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에 쓸 지팡이를 하나 구해주십시오. 가능한한 약한 것으로. 누군가의 손을 탔다면 더욱 좋겠군요.”
핀갈 모레이에게는 요청대로 기사단의 전사자가 남긴 물푸레나무 지팡이가 하나 지급되었다. 그의 원래 지팡이보다 3인치는 길고 본래도 전투보다는 일반 마법이나 치료에 더 강점을 보였던 이 낡은 지팡이는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새 주인의 주문을 거부했으며, 평범한 무장 해제 주문도 명치를 가격하는 공격으로 탈바꿈시키는 핀갈 모레이의 말도 안 되는 호전성을 어느 정도 상쇄해주었다. 그러나 급소를 정확히 노리고 서슴없이 치명적인 일격을 날려대는 행동거지에는 변함이 없어서, 전장에서 핀갈 모레이의 존재는 여전히 마치 연습용 목검을 들었다뿐 전심전력 죽일 작정으로 칼을 휘두르는 검투사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그는 수틀리면 아무도 예상하지 않은 시점에 느닷없이 지팡이를 던지고 물리력으로 달려들어서 적과 아군을 모두 당혹시켰다. 핀갈 모레이는 변장을 빼놓는 법이 없었기에, 이런 일이 반복되자 죽음을 먹는 자들은 점점 모르는 얼굴의 기사단원만 보면 본능적으로 위축되어 경계하는 경향이 생겼다.
모든 염려와 꺼림칙함에도 불구하고, 맡겨진 모든 작전을 사상자 없이 완수하는 준비된 전력에 손 뻗지 않기는 어려웠다. 아이작이 핀갈 모레이를 출전시키기 위해 퇴근을 앞당기는 날들이 많아졌다. 딱히 덜 바빠 보이지도 않으면서 귀가 시간만 빨라진 아버지가 의아한 눈치이기는 했으나 레아는 군소리없이 그를 도왔다.
말 많고 탈 많은 괴상한 신입은 당연히 평단원들 사이에서도 화젯거리였다. 그냥 기사단 일을 덜 맡기 위해 아이작을 구실로 내세우는 거라든가, 불사조 기사단을 경유해 상류 사회에 끈을 대보려는 시도라든가, 사람들의 눈을 아이작에게 돌려놓고 전혀 엉뚱한 일을 꾸미고 있다든가 하는 다양한 추측이 식탁 위나 휴게실의 난로 앞, 발코니의 담배연기 사이를 은밀히 오고갔다.
“그냥 레아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거 아냐?”
임무에서 막 돌아온 기사단원들에게 야참을 차려주던 베서니가 껄껄 웃었다.
“둘이 동갑이라며. 기숙사도 같고.”
“베서니…… 남녀가 같은 기숙사에 다닌다고 꼭 사귀게 되지는 않아요.”
조금 탄 달걀 요리를 앞에 놓고 빵에 잼을 바르던 새라 자일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학을 뗐다. 베서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지. 그냥 쉬운 정답을 코앞에 놓고 다들 돌아가는 것 같아서 말야.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음흉한 인사는 아닌데.”
그리고 베서니는 핀갈 모레이가 다소 오해를 사기 쉬우나 근본이 우직하고 성실한 친구라는 충격적인 평가로 좌중을 기함하게 했다. 사람들이 벗어놓은 더러운 망토를 걷어 모으던 기디언이 중얼거렸다.
“정말 그렇다면 방법을 아주 단단히도 잘못 골랐는데요.”
그 말대로였다. 핀갈 모레이가 하루종일 아이작을 따라다니며 그가 있는 방문 앞에 버티고 서서 그 거대한 몸으로 온 사방에 험상궂은 존재감을 과시함으로써 아이작에게서 얻어들인 감정 중에서 최광의의 호감 비슷한 것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아이작이 그것을 대충 무시하고 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될 만큼은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 것뿐이었다. 신체적으로 비유하자면 참을 만한 수준의 치통이나 편두통과 비슷한 격이니 사실 호감 비슷한 것도 없다는 말이 맞을 터였다. 그렇다고 모레이가 사무실을 드나드는 다른 기사단원들의 통행을 방해하거나 눈치를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지기처럼 복도를 가로막고 서 있는 2m의 거구를 보고 일단 긴장부터 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핀갈 모레이는 가끔씩 그 상태로 맨손운동을 했다. 본래 약간 심약한 데가 있던 비완 수낙은 모레이가 한 손으로 물구나무를 서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사람이란 관성의 생물이라던가, 계속 부대끼다 보면 웬만한 일에는 익숙해지는 법이다. 생사가 걸린 희비보가 교차하고 위험과 음모들이 종횡으로 난무하는 숨가쁜 나날들 속에 복도 한켠에 선 기이한 토템폴에 대한 관심은 곧 자연스럽게 희미해졌다. 핀갈 모레이는 아이작의 사무실 문 앞을 지키는 것 말고는 정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루드비크 칼리노프스키의 안부를 물어본 것 정도를 제외하면 기사단의 정보를 캐거나 염탐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온갖 기상천외한 괴소문의 장본인인 것치고는 막상 말을 섞어보면 의외로 평범하게 주거니받거니 대화가 되기도 했다. 그의 동기들인 세실이나 멜로디는 그의 기행에 대한 입장과는 별개로 일관된 신뢰와 친애의 태도를 가지고 그를 대했고, 핀갈 모레이 역시 평범한 친구처럼 격의없이 그것을 받았다.
한번은 기사단이 작전 중에 위치를 들켜 죽음을 먹는 자들의 습격을 받았다. 핀갈 모레이는 막내 단원 마일스 앞에 끼어들어 저주를 대신 맞고 돌처럼 굳은 오른팔로 지팡이를 드는 대신 왼발을 사용해서 상황 변화에 주춤한 죽음을 먹는 자를 그대로 방 반대편으로 날려버렸다. 그날의 전투에서는 사상자가 나왔지만 모레이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도 다른 기사단원들에 대한 ‘동지애’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도 자기 몸을 던져 지킬 만큼 크고 헌신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증명은 그에 대한 다른 기사단원들의 여태까지의 인식을 뒤바꾸기에 충분히 강력한 반전이 되었다. 호저 클라크와 가까운 사이로 핀갈 모레이를 특히 싫어했던 마일스는 자기가 여태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며 눈물을 한바가지 쏟고는 앞으로 절대 의심하지 않겠다고 그를 붙잡고 몇 번이나 맹세했다.
핀갈 모레이는 곤혹스러워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가 말했다. “아니, 물론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완전히 책임대로 행동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건 못했을 경우에 굉장히 부끄러운……” 그는 그의 ‘겸손함’에 재차 갈채가 쏟아지는 것을 듣고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핀갈 모레이와 기사단원들의 관계를 호전시킨 가장 중대한 계기는 역시 에스마일 시프의 귀환이었다. 기사단 복도에서 핀갈을 본 에스마일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올리며 헤어진 가족이라도 되는것마냥 반갑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맙소사, 핀갈! 언제 돌아왔어요? 기사가 된 거에요? 언제부터요? 귀띔이라도 해주지, 저는 이제 못 보는 줄만 알았는데! 그동안 엄청 많은 일이 있었는데, 당신이 편지도 보내지 말라고 해서……” “사연이 길다. 변장이나 벗고 와. 향수 냄새 나.” 핀갈은 귀찮다는 듯이 그를 밀어냈지만, 방만히 앉아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을 때조차 항시 그 위를 떠나지 않는 팽팽한 긴장이 누그러진 얼굴에는 분명히 인간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허술할 정도의 부드러움이 있었다. 그 순간 핀갈 모레이의 얼굴은 물과 기름을 분리하는 막처럼 그와 기사단원들을 이격하던 어찌할 수 없는 본질적인 이질異質의 감각을 단숨에 허물어뜨렸다.
그 때에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같은 것을 볼 기회는 그 뒤로 숱하게 생겼다. 에스마일이 틈만 나면 핀갈이 앉아있는 복도를 찾아가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핀갈 모레이의 어지러운 평판을 개선할 만한 일화와 논변들을 넘쳐흐르도록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남들에게 재잘거리려는 의지 또한 그 이상으로 충만했다. “핀갈은 저를 세 번이나 구해줬어요.” 에스마일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두 번이야.” 핀갈 모레이가 말했다. “세 번이에요.” 에스마일이 말했다. “언제?” 핀갈 모레이가 물었다. “그런 게 있어요.” 에스마일이 말했다. 핀갈은 대체로 그것을 성가셔하는 듯 굴며 에스마일의 들뜬 재담에 불퉁한 툴툴거림으로 응답했지만, 정말로 에스마일을 쫓아내려 들지는 않았다. 그가 불사조 기사단에 있는 동안 세 번인지 두 번인지 알 수 없는 ‘핀갈이 에스마일의 목숨을 구한 횟수’는 몇 번이나 더 갱신되었다. 사실 에스마일의 ‘목숨의 위험’에 대한 그의 기준은 다소 과보호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는데, 기사단원들의 다수에게는 그것이 에스마일의 결여된 자기보호본능에 대한 딱 알맞은 보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핀갈 모레이는 다른 단원들로부터 다소 터무니없을 만큼의 심정적 찬동을 얻었다.
오르타 인테그라의 감별을 증명할 만한 몇 번의 예화가 쌓이면서, 아이작을 비롯한 기사단의 수뇌부도 핀갈 모레이에 대한 우려를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 비록 적을 살해하고 싶은 의욕은 누가 봐도 여전히 충천했지만, 그는 모든 우려를 깨고 단순한 협력자나 죽음을 먹는 자의 가족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는 서약을 준수했다. 민간인의 안전을 우선한다는 기사단의 수칙 또한 반대하지 않는 것을 넘어 성실하게 따랐다. 전투를 피하라는 지시에도 뜻밖일 정도로 순순히 복종했고, 전투의 승리보다 우선해야 할 목표가 있다면 그 또한 접어둘 줄 알았다. 그 모든 제한을 지키지 않는 죽음을 먹는 자들에게 경멸과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지언정, 그가 폭력과 살상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분명한 원칙과 준거를 가지고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은 확실했다.
강건한 신체 때문인지 모레이는 같은 저주를 맞아도 다른 사람들보다 덜 다치는 재주가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구사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주제에 특히 정신에 침투하는 마법에 대한 저항성이 말도 안 되게 강했다. 한 번은 죽음을 먹는 자들이 기사단 전사자의 유품에 어둠의 마법을 걸어 반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도, 어째서인지 작전을 수행한 단원들은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회의실 문 앞에서 무료하게 기마 자세를 하고 있던 핀갈 모레이는 그것을 소중하게 들고 오는 단원들을 보자마자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그것을 자신 쪽으로 소환하곤 날아오는 도중에 공중에서 폭파시켜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다. “지나치게 마음이 편하고 불안한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요.” 그는 나중에 어떻게 알아보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심지어 전장이 아니라 집이라도, 그렇게까지 기분이 좋으면 그건 대체로 큰일났다는 뜻입니다.” “어떤 인생을 살아오신 건가요?” 아이리스가 말했다.
기사단에 조금씩 자리를 잡으면서 핀갈 모레이의 활동 반경은 자연스럽게 넓어져갔다. 이제 그는 때때로 아이작의 사무실 문 앞을 떠나 본부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면서 구경하거나, 주방의 음식을 거덜내거나, 단원들의 작전 계획에 훈수를 두면서 아이작에게 비교적 평온하게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단비 같은 시간을 허락했다. 때로는 젊은 단원들을 데리고 전투를 가르치기도 했다. 엄폐물이 없는 환경에서의 연습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어서 그 교습들은 늘 성대하게 부수고 넘어뜨리고 터뜨린 잔해로 어수선한 난장판을 뒤에 남겼지만 대부분의 단원들은 기꺼워했다. “프로테고 주문은,” 그가 언젠가 말했다. “전투에서는 대체로 쓸모가 없습니다. 요행히 성공해서 공격을 막아봤자 당신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상대는 공격을 한 번 더 한다고. 그걸 한 두세 번 반복하다 보면 힘이 떨어져 수세에 몰리는 거고. 방어가 주특기거나 지구력에 엄청나게 자신이 있는 게 아니면 그냥 아무거나 던져서 앞을 막거나 어디 숨고 그 시간에 반격해서 빨리 때려눕히는 게 낫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몸놀림이 날쌔야 하잖아요.” 테일러가 이의를 제기했다. 핀갈 모레이는 웃었다.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다리힘을 길러야지. 이 건물을 예로 들자면, 보자. 아침마다 한 200번쯤 돌면 좋겠군요.” “어떤 인생을 살아오신 건가요?” 아이리스가 다시 말했다.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핀갈 모레이는 차차 적응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이작 윈필드가 퇴근하지 않으면 출전하지 않는다’는 괴상한 원칙만은 결코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그대로 계속해서 시간이 흘렀다면 그 역시도 어느 정도는 타협하고, 어느 정도는 적응하고,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선에서 서로의 균형이 찾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느때처럼 저녁때쯤 귀가한 레아가 유리창을 깨고 세간을 온통 부수고 뒤집어놓아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진 집을 발견하고 아이작에게 부엉이를 보냈을 때 이것은 다시 전면적인 문제거리로 떠올랐다.
“사택에서야말로 경호가 가장 필요하셨던 것 아닌가요?” 소식을 들은 핀갈 모레이는 눈썹을 비뚜름하게 치켜올렸다. “농담입니다. 이곳이 윈필드 씨가 아는 가장 안전한 곳이라면, 저로서는 물론 환영입니다.”
“그러면 자네는……”
“윈필드 씨가 어디서도 안전하지 않으니 윈필드 씨를 지키는 데 전념하는 수밖에요. 윈필드 씨의 호위인걸요.” 청년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첫만남에서 그를 향해 지어보였던 것과 똑같은, 가시를 세우는 듯한 웃음이었다. 아이작은 순식간에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탈력감을 느꼈다.
“레아가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놀랍게도 청년의 표정은 그 말에 다소 흐려졌다. 그는 잠시 아이작의 어깨너머로 먼곳을 응시하다 혼잣말처럼 씁쓸하게 말했다.
“뭐, 제가 *이상하다*는 게 그 애한테 별로 새로운 소식은 아닐 겁니다.”
그가 말하는 ‘이상하다’가 과연 아이작이 말한 ‘이상하다’와 같은 말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어쨌든 레아는 며칠 뒤에 짐가방을 들고 그를 따라 기사단 본부에 왔다. 언제나의 고요하고 담담한 얼굴로 좌우를 둘러보던 레아는 싱글거리며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드는 핀갈 모레이를 보고는 고개를 홱 돌려 상황에 비추어보면 좀 부당할 정도의 배신감이 담긴 눈으로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작으로서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레아는 잠깐 더 핀갈 모레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그의 인사를 무시하고 모르는 사이마냥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아이작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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