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청춘과 벚꽃의 계절

녹사鹿鯊의 사냥 (3)

탈화석, 해리탄생 AU IF로그

CW: 폭력, 상해, 살해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있습니다. 젠더퀴어 캐릭터에 대한 미스젠더링이 있으며 다소 성차별적인 사고가 등장합니다. 타 러너 캐릭터의 성격이나 심리에 대한 의도적으로 잘못된 해석이 있습니다. 독자적 마법 설정이 등장합니다. 레핀 위주. 타 러너 캐릭터 및 모브 캐릭터들에 대한 캐릭터 해석이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수정요청 주세요…) 핀갈이 굉장히 먼치킨화됩니다. 정사가 아닌 썰 정도로 읽어주세요.


두 사람은 그 뒤로도 딱히 아는 척하지 않고 서로를 외면했다. 둘 모두를 친애하는 에스마일이 중간에서 눈치를 보느라 쩔쩔매고는 했지만, 대부분의 기사단원들에게는 이것이 그렇게 큰 관심거리는 아니었다. 사실 레아의 성격과 핀갈 모레이의 사람됨을 놓고 보았을 때는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은 쪽이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윈필드 부녀가 본부에 짐을 푼 날, 밤중에 잠이 깨어 화장실에 다녀오던 코비 채닝은 통행이 드문 측면 계단에서 목소리를 죽여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네 ……들을 지켜준다잖아, 레아.”

드문드문 새들어오는 목소리는, 가까이서 들어보면 확실히 핀갈 모레이였다. 코비는 살짝 문을 열고 틈으로 밖을 보았다. 유들유들하게 팔짱을 끼고 선 핀갈 모레이에게 레아가 무엇인가 화를 내고 있었다. 핀갈 모레이는 짐짓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기뻐해야 하는 거 아냐?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네.”

“필요없어요.”

그 입에서 나올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표독한 목소리로 레아가 쏘아붙였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라고요.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싫어.”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핀갈 모레이가 대꾸했다.

“네가 내 뜻을 어기고 내 어머니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나도 네 뜻을 어기고 네 아버지의 명예를 떨어뜨릴 거야. 그래야 계산이 맞지. 내가 말하지 않았나, 레아? 우리는 원래 은원이 확실하거든.”

짝! 손바닥으로 매섭게 뺨을 후려갈기는 소리에 코비 채닝은 숨을 삼켰다. 핀갈 모레이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핀갈 모레이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변함없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눈을 떴을 때 코비 채닝은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방금의 기척을 들은 듯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구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발소리를 죽여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요정에게 홀린 것이 아닌가 헷갈릴 만치, 두 사람은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못 본 척했다. 다른 단원들은 언제나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하고 지나쳤다. 코비 채닝만이 사무실에 둘만 남았을 때 아이작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그 자식은 당신에게 악의가 있어요.”

“알고 있네.”

아이작이 힘없이 말했다. 그는 몇 년 전의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를 읽고 있었다. 호그와트에 야만스런 인어 혼혈이 숨어들어 사람인 척하고 있다는 요지의 이 다소 과장스러운 기사는, 추측성인 것치고는 상당히 윤곽이 뚜렷하고 설득력 있는 세부적 근거들로 뒷받침되어 있었다. 이를 테면, 꼭 당사자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봐온 누군가가 세심하게 줄거리에 맞추어 사실을 수집해 제보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런 기사가 《예언자일보》의 지면을 탔다면, 당사자는 물론 그 부모에 대해서도 온갖 모욕적인 추측이나 패설이 난무했으리라는 것은 익히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그것이 중상이면 중상인 대로, 사실이라면 사실인 대로. 만약 그 내용이 의혹을 넘어 사실로 밝혀졌더라면, 그 파장은 핀갈 모레이가 마법 세계에서 설 곳을 없애버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가장 편견 없고 온정적인 마법사조차도 인간과 이종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를 고용하거나 곁에 섞여 사는 것은 꺼려할 터이므로.

기억 저편에 희미하게 묻혀 있던, 오래전 홀워스의 어느 생일파티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새로운 빛이 비추이는 것은 필연이었다. 아이작은 여태까지 포스틴 린드버그와 얽힌 유감스러운 사건들과 그 일을 연결지어본 적이 없었다. 그 뒤로는 레아가 같은 식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아는 잘 자라주었다. 나쁜 일도 하지 않고 선생님들도 누구나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착하고 똑똑한 아이로. 어릴 적에 걱정했던 것과 같은 위험한 소질은 더 이상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 그랬을 터다. 아이작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틀렸다면. 그 때 산 위 어디선가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가 실은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었다면, 단지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실은 몇 번이나 되풀이해 몸집을 불리다가 마침내 거대한 눈사태가 되어 아이작 자신을 덮친 거라면. 그 도중 어디선가 핀갈 모레이가 거기에 깔려 엎어졌다면……

아이작은 눈가를 문질렀다. 그렇다면 그 청년에게는 원한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작의 실각에 얽힌 진상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어떤 윈필드도 이 사태에서 핀갈 모레이나 그 모친만큼 무고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누구든 어떤 윈필드의 사과로 그의 원한을 풀 기회가 있었다면, 핀갈 모레이가 대경한 표정으로 그에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느냐고 힐문했던 때가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터였다. 아이작이 바랄 수 있는 것은 핀갈 모레이가 그 때문에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 측면에서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최선을 바랄 만한 정황들이 있었다.

어쨌든 핀갈 모레이는 계속해서 기사단의 일부가 되어갔다. 아이작과 레아가 레베카를 만나러 가는 날은 전처럼 작전에 나가기도 했다. 몇 번은 현장에 긴급하게 사람이 필요해서 아이작이 예정에 없던 가족 여행을 잡게 되는 일도 있었다. (레아는 뭔가를 이해한 듯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핀갈에게 전투 훈련을 도움받는 단원들도 꾸준히 늘어갔다. 가끔씩은 모의 결투가 과열되어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힘조절이 서툰 교관은 예의 물푸레나무 지팡이가 점점 시들시들해지자 새로 마련한 세쿼이아 지팡이를 시험해보다가 그만 불운한 티모시 덱스턴을 보름 넘게 성 뭉고에 입원시키고 말았다. “사과의 선물을 들고 병문안을 가는 게 좋을까요?” 핀갈 모레이가 의외로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면회는 사절하겠다고 합니다.” 자인 말리크가 중립적으로 말했다.

기사단의 코미디언은 자주 핀갈의 얼굴로 변해서 애교를 부리거나, 반대로 과장되게 근엄한 대사를 읊어서 기사단원들을 웃겼다. 한 번은 목소리를 변조하는 물약을 마신 핀갈이 ‘익명을 요구한 기사단원’으로 직접 <군집>에 출연하기도 했다. “간도 크지.” 한 청취자가 말했다. “거의 나 죽여보라고 도발하는 거 아냐?” “나 에스마일이 말 순하게 해달래서 욕 하나도 안 했는데.” 그것을 전해들은 핀갈이 어리둥절하게 말했다. “하는 얘기들이 앞뒤가 안 맞고 들을수록 뭘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게 죽이려고 들 정도로 심한 말이냐? 그들 자신도 모르지는 않을 거 아냐.” 복도 저편에서 레아가 그를 험악하게 노려보고 지나갔다.

막상 정말로 누군가가 죽었을 때 핀갈 모레이는 분노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베서니의 키퍼를 몇 개씩인지도 모르게 족족 받아먹으면서도, 식탁에 모여앉은 기사단원들 사이에 끼어 앉지도 않았다. 단지 밥상머리에서 오고가는 시답잖은 이야기들과 조금씩 활기를 되찾는 단원들의 낯빛을 문간에 서서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생경해하는 듯도 하고, 측은해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그는 활달한 입담으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는 에스마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후에 이렇게 물었다. “너희에게는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작전의 실패나 전력의 공백이 아니라 슬픔이 가장 긴급한 문제냐? 우선 기분이 좋아지지 않으면 전자에는 착수조차 못 하는 거냐?” 그 직후 누군가 그를 불렀기 때문에, 에스마일은 대답할 틈을 얻지 못했다.

늦게라도 짬을 내어 그에게 답을 주지 않은 것을 에스마일은 곧 유감스러워하게 되었다. 핀갈 모레이와 불사조 기사단 사이의 가장 깊고 근본적인 불화가 다름아닌 그를 둘러싸고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작전에 의견을 얹는 일은 있어도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불만스러운 내색을 숨기지 않을지라도 지시가 내려지면 토 다는 법 없이 수행하며,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건 금제를 지키듯이 자기를 접어두고 결정적인 선을 지켜왔던 핀갈 모레이가 마침내 그것을 파기하고 반기를 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두 사람이 죽은 곳에, 작전을 재시도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그 시체를 회수하기 위해서 두 사람을 또 들여보낸다고요?”

에스마일 시프의 등뒤에 서서 층계참을 가로막은 채로, 난데없는 사태에 다소 곤혹스러운 얼굴로 선 댄과 자인을 향해 청년이 언성을 높였다. 6피트가 넘는 그 우락부락한 덩치에서 고성이 나오는 광경은 그것만으로도 주변으로 하여금 위협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모레이는 거기에 더해 격렬하게 팔을 휘둘러대기까지 했다.

“당신들에겐 죽느냐 사느냐보다 죽은 뒤에 장사를 어떻게 지내는가가 더 중요한 문젭니까? 이미 죽은 자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것도 그 도덕적인 모범인가 뭔가 하는 건가요?”

“유가족과 다른 기사단원들을 위한 거잖아요.”

큰소리를 듣고 하나둘씩 모여든 기사단원들에 섞여 한켠에 서 있던 레아가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묵계를 깼다.

“망인에 대한 도리인데 왜 당신은 몰라요?”

핀갈 모레이는 잠시 고개를 돌려 레아를 지그시 쳐다보았다가, 이내 그 말을 깨끗하게 무시했다. 그는 반원을 이루며 주위를 둘러싸는 단원들을 선득한 시선으로 한 바퀴 훑었다. 흡사 ‘질릴 대로 질렸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눈이었다. 에스마일은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조그만 체구의 젊은 마녀는 불행하고 불안한 눈으로 제 상급자들과 제 친우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두 단원 모두 자발적으로 작전에 지원했네. 우리 누구나 서로를 위해서 그럴 거야. 자네 너무 흥분했으니 진정 좀 하고……”

댄 브라이언트가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 가볍게 청년의 팔뚝에 손을 댔다. 핀갈은 보지도 않고 뿌리쳤다.

“당신들의 방식은 이해해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래오래 누르고 있던 말을 마침내 터뜨리듯이, 한 마디 한마디 힘주어 그가 쏟아냈다. 그의 목구멍 깊숙히에서 철필로 칠판을 긁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당신들은 산 자의 목숨보다 생명 없는 몸뚱이를 더 귀히 여기고, 침식을 함께하는 동료의 안전보다 실체도 의심스러운 ‘사회의 평가’ 따위를 더 신경쓰고, 친자식의 생존보다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 따위를 더 걱정합니다. 선후경중이 거꾸로 뒤집혀도 정도가 있지, 당신들을 보고 있으면 지혜나 분별은커녕 도시에 당신들이 하려는 것이 전쟁인지 공연인지, 삶인지 연극인지, 목적이 승리해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죽어나가는 꼴을 보여주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제정신 박힌 자라면 당신들에게 마법 세계의 미래는커녕 동전 한 푼 걸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말에는 꼭 어딘가에 쐐기를 박는 듯한, 돌이킬 수 없는 결기가 있었다. 아무런 지위도 연고도 없는 일개인, 용인할지 내칠지를 오히려 기사단에서 심사받아야 하는 입장의 일개인의 입에서 나왔는데도, 그 말은 어쩐지 마치 재정자가 내리는 폐기의 선고처럼 들렸다. 제각기 반응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런 말을 듣고 그냥 넘길 수 있는 기사단원은 적었다. 호저 클라크가 핀갈 모레이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트러스와 들뢰즈를 비롯한 다른 단원들 몇 명이 그것을 뜯어말렸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말하려고 하는 바람에 모두의 목소리가 누구의 말도 알아듣기 힘든 아수라장으로 겹쳐지고 뒤섞였다. 핀갈 모레이는 그것을 미동도 않고 선 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갈아놓은 날붙이처럼 예기가 형형한 얼굴이었다.

“그럼 그만두면 되겠네요. 나가요.”

그 틈새 어딘가쯤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레아가 쏘아붙였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저, 핀갈…….”

그 때, 핀갈의 옷자락을 잡고 에스마일이 작게 불렀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핀갈이 표정 없이 시선만 돌려 에스마일을 응시했다. 벽감에 놓인 불빛에 그에게서 에스마일에게로 그림자가 드리워 에스마일의 표정을 가렸다. 망토 자락을 쥔 얇은 손만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셔도, 괜찮아요.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당신이 항상 명쾌하고, 강한 존재시라는 걸 알아요. 저희가 자란 세상이 다른 만큼이나 저희도 서로 다르다는 걸, 그리고 어쩌면 제가 정말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에스마일이 더듬거렸다. 옷자락을 쥔 손이 창백하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갔다. 핀갈 모레이는 그늘에 감춰진 에스마일의 얼굴에 시선을 못박은 채 듣고 있었다. 손의 떨림이 목으로 옮겨가기라도 한 듯 가는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떨렸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핀갈…… 그건 우리를 위한 거에요. 우리가 믿어야만 하기 때문이에요. 쉽게 죽어서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그래도 되는 존재들이 아니라고…… 설령 오늘 세상이 우리에게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하더라도, 그걸 잊어버리라고 윽박지르더라도, 그걸 거스르는 게 죽음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처럼 여겨지더라도, 그리고 어쩌면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 우리는, 그럴수록 더욱이…… 아니라고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것도 살려 하는 일인 거에요. 인간이려고 하는 일인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저를 영원히 구해주실 수 없어도,”

저는 괜찮아요. 보내주세요. 모두가 잠깐 숨까지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빽빽한 정적으로 꽉 찬 복도에서 마지막 말은 거의 날숨과도 같은, 꺼질 듯한 속삭임으로 흩어졌다.

핀갈 모레이는 안경을 벗고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몇 번 하다가, 손으로 눈 위를 덮고 한참 동안이나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에스마일 주위로 우르르 위로하려는 기사단원들이 몰려들고, 몇몇 단원들이 그를 힐끔거리며 기색을 살피는데도 주변을 인지하고 있는지 자체가 의심될 정도로 붙박힌 듯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그는 안경을 다시 쓰고는 소란을 듣고 다가와 뒤편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아이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휴가를 좀 쓰겠습니다.”

그가 사납게 말했다.

“저도 이 작전인지 임무인지 뭔지에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사단원이 아니라 에스마일의 연고자로서 가겠습니다. 기사단의 기치가 아니라, 에스마일 시프에게 위해危害 끼치려는 자가 무엇을 각오해야 할지를 알림입니다.”

아리송한 말이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아이작을 본부에 두고 출전하겠다는 뜻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작 윈필드의 호위’를 고집하는 핀갈 모레이의 괴벽이 이런 식으로 깨지는 것에 아이작은 기뻐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은 또한 자신의 원래 지팡이를 쓰겠다는 뜻이었다. 핀갈 모레이는 기회가 있으면 죽일 것이다. 거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작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 역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불살을 관철할 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단지,

“조금 전의 발언은 그냥 넘어갈 수 없네. 그리고 자네의 이 행동이 사실상 항명이라는 것도 잘 알겠지.”

셉티머스 프라이어가 드물게도 단단하고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호저는 여전히 분노와 혐오감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모레이를 보고 있었다. 메이블 린드버그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주위의 분위기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처분은 돌아와서 결정하지. 무사히 다녀오게.”

“저 또한, 여러 가지 일들은 돌아와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핀갈 모레이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마일이 우물거렸다.

“그, 렇지만 저는 핀갈이…… 가능하면 아무도 안 죽였으면 좋겠는데요. 아니, 그러니까, 핀갈에게도 당신의 방식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렇지만 역시 보복이나 경고의 수단으로 누구를 해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려울까요? 에스마일이 핀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핀갈은 허리를 굽히고 그 동그란 머리통 위에 손을 얹었다.

“연고를 참작하지.”

제딴에는 농담인 모양이었다.

결말이 지어지자 단원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레아는 그늘진 구석에 서서 핀갈과 에스마일을 한동안 더 매섭게 응시하다 돌아섰다. 조용해진 복도에 아이작만이 남아, 핀갈 모레이의 말을 몇 번이나 복기했다. 당신들은 친자식의 생존보다 알지도 못하는 다른 아이들의 학교 성적 따위를 더 걱정합니다. 이 몇 달간 익히 알게 된 바, 핀갈 모레이는 죽음을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일’을 과장되게 일컫는 수사 따위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핀갈 모레이가 누군가가 죽는다고 말할 때는 정말로 심장이 멎고 숨이 끊어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가 레아를 가리켜 그렇게 말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을 겨냥하는 말이었음이 명확함에도, 그 진의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기막힌 우연들이 빛나는 기지와 용기를 만난 결과, 문제의 작전은 상상 이상의 대성공으로 끝났다. 제인 머레리아와 에스마일 시프, 그리고 ‘에스마일 시프의 비밀스러운 연고자’로 이루어진 3인조는 유해와 유품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단원들이 구하려던 인질을 발견해 무사히 구출해내기까지 했다. 핀갈 모레이는 단원들을 잡아먹은 퀸타페드를 쇠막대기로 꼬챙이로 만들었을 뿐 기적적으로 사람을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다만 세 명 모두 그 과정에서 크고작은 부상을 입었으며, 특히 핀갈 모레이의 왼팔이 퀸타페드에게 물려 너덜너덜하게 찢어졌다. 그는 기사단에 속한 치유사에게 처치를 받은 후 다친 팔을 움직여보며 의미불명의 코멘트를 남겼다. “뭐, 아슬아슬하게 창은 들겠군.”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기사단은 핀갈 모레이에게 부상이 나을 때까지 근신 처분을 내렸다. 핀갈 모레이는 이의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작의 ‘호위’만큼은 내려놓기를 끝끝내 거부했다. 그는 아이작의 사무실 앞에서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멍하게 허공을 노려보며 하루를 보냈다. 때때로 말을 걸어오는 기사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혼자 있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가만히 놔두었다. 그가 거취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했으나, 그의 불만이나 괴리가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설득이나 조언은 한정적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언뜻 단순명료했지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불가해하고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어디선가 어긋나 있는데 어디서부터 어긋나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명한 전제로 두고 있는 것, 지향해야 할 것과 기피해야 할 것, 합의되어 있는 규칙과 사사로운 욕망의 구별과 관계가 온통 달라서 맞물리지 않았다. 빠르게 아물어가는 상처와 반대로 핀갈 모레이의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몇 명의 기사단원이 진득하게 그를 붙잡고서 애를 써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돌아섰다.

그가 붕대를 풀기로 한 전날 밤에 아이작은 잠깐 사무실을 나섰다가 그가 여전히 복도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간 망설인 끝에, 아이작은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나무 바닥은 싸늘하고 딱딱했고, 복도의 조명은 창문 틈새로 새어드는 바람에 춤추듯 흔들렸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과 천장에 이리저리 이지러졌다. 핀갈 모레이는 그를 돌아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누구든 어떤 윈필드의 사과로 그의 원한을 풀 기회가 있었다면, 핀갈 모레이가 대경한 표정으로 그에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느냐고 힐문했던 때가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가 기사단을 떠나갈지 모르는 지금 아이작이 해야만 할 일이 있었다. 이미 한참 늦었을지라도, 그가 응당 들었어야 하는 말을 어떤 윈필드는 그에게 건네야 했다. 아이작이 바랄 수 있는 것은 핀갈 모레이가 그 때문에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뿐이었고, 아직은 희망을 품을 이유가 있었으므로.

연하의 기사단원도, 자식의 친구도 아닌, 제 잘못의 희생자를 향하듯이 공손하게, 원치 않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이작은 목을 가다듬고 조용조용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한 경험이 그대에게 좋지 못했던 것 같아 유감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사려가 부족해 첫단추를 잘못 꿰었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는군요. 자식이란 참 어렵지요……. 조그마한 어린아이 같은데 어느새 훌쩍 커서 때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다 헤아리기 힘드니 말입니다.”

아이작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옆에서 강렬하게 그를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청년의 눈에 담겨 있을 숱한 질문들에 그는 답을 주지 못할 것이었다.

“레아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못 해준 것이 워낙 많아서, 부모된 마음에 차마 엄하게 꾸짖지를 못했습니다. 틈틈이 가르치노라고 저희들 나름으로는 애썼지만 많이 부족했지요. 매사 이해해주는 속 깊은 아이인 줄만 여겨 돌아보지 못한 부분도 많습니다. 나쁜 뜻이 있는 것은 아닐 터인데…… 그 마음이 때로 그릇된 방식으로 불거져나오는 것은 모자란 부모의 허물입니다. 그것이 혹여 다른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그저 부끄럽고 미안할 뿐입니다.”

핀갈 모레이는 허공을 보며 짧게 헛웃음치고는,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을 보는 듯한 얼굴로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응짜는 완전히 아이작의 예상 외였다.

“요컨대 레아를 더 혼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게 잘못이라는 말씀이군요. 하긴 혼을 내려면 일단 같은 장소에 있기는 해야 하니 그것도 방법은 방법이겠습니다.”

아이작은 한순간 숨을 멈췄다. 핀갈 모레이는 지난 몇 달간 아이작의 하루 24시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 사실이 불현듯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내 그 애를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다.

“이해합니다.”

핀갈 모레이가 말했다. 그는 지난 몇 달간 아이작의 하루 24시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청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망토 소매에 안경을 문질러 닦았다.

“하지만 판 윈필드, 멀리서 심정으로 아끼거나 말거나, 어린 날짐승이 날갯짓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결국에는 떨어져 죽습니다.”

핀갈 모레이와 루드비크 칼리노프스키의 사이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오랜만에 듣는 외국의 경칭은 아이작을 다소 놀라게 했다. 어쩌면 그것이 정말 경의의 표현인지, 아니면 비아냥인지 알 수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핀갈 모레이는 죽음을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일’을 과장되게 일컫는 수사 따위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핀갈 모레이가 누군가가 죽는다고 말할 때는 정말로 심장이 멎고 숨이 끊어진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늘 건조한 사실의 발로였고, 그래서 거기에는 얼음으로 살을 베어내듯이 선득하게 듣는 사람을 몸서리치게 하는 울림이 있었다. 그저 지나가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지듯이 끝내 묻고 만 것은 필경 그런 탓이다. 그 울림은 과한 생각이라고 몇 번이나 떨쳐냈음에도 어느새 목덜미에 서늘하게 와닿는 칼날처럼 마음의 어딘가에 되돌아왔다.

핀갈 모레이는 안경을 도로 쓰며 코웃음쳤다.

“아무 일도요. 그 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무슨 상황이 벌어지더라도요. 그게 문제죠. 아시겠습니까?”

그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작에게 답답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살아있는 것은 먹고, 움직이고, ‘내보내야만’ 합니다. 끊임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고요. 레아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꼼짝 말고 착하게 기다려라’ 같은 말을 들은 어린애처럼 언제까지나 한 자리에서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죠. 좋은 것이 머무르지 않고 나쁜 것이 떠나가지 않고 어느것도 자기 것이 되지 않으니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순간도 살아있어본 적이 없는 채로 수태된 그 자리에서 죽게 되겠죠.”

이 적나라한 포언은 아이작을 약간의 충격에 빠뜨렸다. 완곡한 단어를 사용했다고는 하나, 아이작이 일생 만나본 가장 저속한 불한당들조차도 사람의 감정을, 그것도 두 사람 모두 관계가 있는 젊은 여성의 심리를 배설에 비유하는 경악스러운 발상은 차마 떠올리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핀갈 모레이의 입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심상한 일상어처럼 들렸고…… 그 적나라함으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을 놀라게 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애를…… 미워하지 않는군요.”

판정과 질문 사이의 어딘가에 걸친 애매한 높이에서 말꼬리가 맺혔다. 핀갈 모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가늘게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뜻없이 눈으로 훑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그가 말했다.

“레아에겐 갚을 것도, 받을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를 향한 것이 아닌 악의에 마음을 쓰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순식간에 열이 빠져나가고, 씁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결국은 전부 한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기에, 그 애는 마침 옆에 있는 아무에게나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짓을 대신 합니다. 한 번은 어쩌다가 그게 저였던 거고. 저에게 건넨 말이 아닌데 제가 대답하려고 해봐야 우스울 뿐이죠.”

그리고 그는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려,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모를 희미한 조소를 띄웠다. 아이작은 이 젊은 사내가 방금 자신이 ‘레아 윈필드의 마음을 가지고 싶었는데 그것이 당신에게 있어서 불만이다’라는 말을 소리내서 뱉은 것과 진배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지 궁금했다. 얼굴 표정으로 보기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여러 가지의 생각에 잠겨 그 옆얼굴을 잠시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저보다 그 애를 잘 아는군요.”

아이작이 조그맣게 중얼거린 말에, 이번에는 핀갈 모레이가 시선을 들어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격양도 경멸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거의 순수하게 의아한 얼굴이었다.

“탐구하지 않고 알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까?”

아이작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도 전형적으로 래번클로가 할 법한 면박이라는 점에서, 그 반문은 핀갈 모레이가 이 건물에 처음 발을 들인 이래 그의 입에서 나온 가장 평범한 발언이라고 부를 만했다. 그리고 아이작에게는 부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레아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작과 레베카에게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익숙했다. 그 반대가 아니라. 처음으로, 정말이지 처음으로,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핀갈 모레이는 시선을 돌려 사무실 맞은편의 빈 벽을 응시했다. 맥이 풀린 것 같은 기색이었다.

“저는 당신들을 모르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어둠의 마법사들이 세력을 키워 무리에 큰일이 생겼는데 함께 의논하여 싸움을 준비하기는커녕 싸울 사람들을 뽑지조차 않고 하고 싶은 자는 하고 아니면 말라는 식으로 손 놓고 있어, 결과적으로 잘 싸울 수 있는 순서가 아니라 의욕이나 책임감이 강한 순서대로 싸움에 나서게 되는 것부터가 도무지 어처구니가 없지만, 뭐 그건 당신들도 마음에 들어서 이러는 게 아닐 테니 마법사들의 기풍이 근자에 유독 땅에 떨어져 있다치고 넘어갑시다.

어쨌든 아무도 안 시키는데 순전히 자진해서 싸우러 와 있는 사람들치고, 당신들은 그 역할에 너무 안 맞습니다. 스스로도 알고 있지요? 당신들은 지고 있는 전쟁에서 최전선에 뛰쳐나와서는 여기 있는 한 사람도 죽지 않아야 할 것처럼, 마치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처럼 굽니다. 도덕이니, 이상이니, 인간성이니, 멀리 있는 막연한 것을 들먹이며 손에 잡히는 가까운 현실의 자산과 기회들을 내던지고, 당신들 머릿속 상상이 아닌 이 세상 어딘가에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운 불특정 다수의 양심 따위에 호소하느라 옆에 있는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아니, 동료들까지 갈 것도 없이 자기 자신부터 그렇게 대하고 있죠. 명예나 영광을 구해 여기 있는 건 몇몇 애송이들뿐입니다, 그렇죠? 여기 있는 사람 태반은, 특히 당신 같은 어른들은, 애초에 이 전장을 ‘생겨나지도 말았어야 하는 곳’으로 여기는 견해를 숨기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세해 싸워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다들 이 짓을 그만두고 집에 가서 가족들과 저녁이나 먹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까? 있고 싶지도 않은 곳에 자기 발로 걸어들어와서 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을 거듭하면서, 당신들보다 강대한 적을, 마음으로부터 이 싸움을 원하는 적을 쓰러뜨리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일들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째서 당신들이 나보다 강합니까? 어째서 그 반대가 아닙니까? 이토록 약하고 어리석은 종족에게 어떤 힘이 있어, 세상을 차지하고 나를 내몰 수 있는 것입니까?’ 청년은 격앙된 호흡을 고르며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아이작은 발설되지 않은 그런 질문들이 그의 주변을 흩어진 날숨처럼 떠다니는 것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핀갈 모레이의 원한이 정말로 향하는 곳은 레아는 물론 아이작도, 심지어는 불사조 기사단도 아닌, 인간이라는 종과 인간의 세계 그 자체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분노와, 증오와, 경멸과, 그리고…… 답을 갈구하는 질문들이 향하는 곳은.

아이작은 청년의 옆얼굴을 다시금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건 사랑입니다.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직하고, 희미하고, 조금쯤 서글프고, 어느 때보다도 겸허한 목소리였다.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만…… 사랑하는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는 이해타산을 제쳐놓고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자기 자신 또한 위험하게 하는 일이라 해도…… 처음부터 막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어리석고 무모하다 여기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인간이란 존재니까요.”

아직 지팡이조차 받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말하듯이 쉬운 낱말들, 조곤조곤한 말씨였으나, 그것은 아이작이 익히 해왔던 사제의, 목회자의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해하는 죄인의 말이었고 자기를 해명하는 이방인의 말이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깨우쳐 부르는 말이 아니라 인간 아닌 것의 눈에 인간을 비추어 용서를 구하는 말이었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고자 하고, 서로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오늘의 고통과 두려움을 무릅씁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로 태어났음을 믿고, 누구든지 다른 누군가에게 그리함을 믿고, 그리하여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미루어 알지 못하는 사람들 또한 사랑합니다……. 머글 태생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하면서 우리는 늘 레아를 생각했습니다. 레아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형편없는 부모일지언정 그것만큼은 진실입니다.”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이 목구멍을 콱 틀어막아, 마지막 말은 거의 젖은 속삭임에 가깝게 뭉그러졌다. 핀갈 모레이는 꾹 다문 입술을 열지 않은 채 그것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아이작의 말이 끝난 후에도 그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깊은 생각에 잠긴 낯빛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조차 기울어 어둠 짙은 밤은 깊었고, 새벽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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