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사鹿鯊의 사냥 (4)
탈화석, 해리탄생 AU IF로그
CW: 폭력, 상해, 살해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있습니다. 젠더퀴어 캐릭터에 대한 미스젠더링이 있으며 다소 성차별적인 사고가 등장합니다. 타 러너 캐릭터의 성격이나 심리에 대한 의도적으로 잘못된 해석이 있습니다. 독자적 마법 설정이 등장합니다. 레핀 위주. 타 러너 캐릭터 및 모브 캐릭터들에 대한 캐릭터 해석이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수정요청 주세요…) 핀갈이 원작(오리지널 세계선) 파괴 수준으로 먼치킨화됩니다. 정사가 아닌 썰 정도로 읽어주세요.
땡――!!!
아이작은 귀청이 떨어질 듯한 큰소리에 깨어났다. 설핏 선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그는 몸을 곧추세우며 다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안은 아이작뿐 온통 적막했다. 그러나 문 밖에서는 머리가 울릴 정도로 큰소리가 간격도 없이 연신 되풀이되며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마솥을 쇠주걱으로 두드리는 듯한 소음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이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아이작이 막 일어서서 지팡이를 들어올린 순간 문이 열리고 가마솥과 쇠주걱을 든 핀갈 모레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적습입니다.”
움푹 패여 찌그러진 가마솥과 쇠주걱을 바닥에 던지며 그가 말했다. 팽팽하게 날이 선 창백한 낯이지만 태도는 여느 때처럼 차분하고 명철했다.
“현재 본부에 잔류한 인원으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정예를 뽑아 후미를 지키게 하고 건물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장이 천 길 아래로 내려앉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 먼동도 트지 않은 밤중이었다. 반대편 동에 레아가 자고 있다. 여기저기서 문을 열어젖히고 튀어나온 사람들이 뭐라 소리치며 뛰어다녔다. 머리속이 아득했다.
‘어떻게 아느냐’ 같은 기본적인 확인을 할 정신조차 들지 않았다. 아이작은 허둥대며 목발을 챙겼다. 핀갈 모레이가 문간에 서서 그를 빤히 응시했다.
“고맙네. 아래에… 내려가서, 단원들에게 가세하게.”
뒤엣말은 한 번의 얕은 들숨을 사이에 두고 나왔다. 핀갈 모레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지도 않고 아이작이 읽을 수 없는 기묘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었다.
“핀갈 모레이.”
아이작이 불렀다. 권위적이고 단호하기를 희망했지만, 실제로 그의 목소리는 약하고 절박하게 들렸다. 설마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괴상한 시위를 계속할 셈인가? 불과 몇 시간 전, 희미하게나마 이해나 소통 같은 무언가가 깃들었던 것처럼 느껴졌던 그 순간이, 마치 잠결의 짧은 꿈이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보면 아이작 역시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핀갈 모레이를 아래층으로 내려보낼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반대편 동에 레아가 자고 있다. 아래층에서 고함소리와 폭발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아이작은 애타는 눈으로 청년의 시선을 맞받았다. 핀갈 모레이가 입을 열었다.
“동료들을 구해드릴까요?”
아이작은 귀를 의심했다. 핀갈 모레이는 아주 이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떤 인간의 얼굴에서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제 소매 안에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단 세 번 쓸 수 있는 패가 있습니다. 윈필드 씨가 원하신다면 그 중에 한 번을 지금 쓰겠습니다.”
샛노란 눈동자 안에서 쩍 벌린 짐승 아가리처럼 터질 듯 팽창한 동공을 본 순간, 아이작은 오한과도 같은 지각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핀갈 모레이의 보복에 있어서의 매개물, 혹은 연대 책임을 추궁받는 원한의 대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냥하는 바닷것의 눈을 마침내 맨것으로 마주했을 때 그는 깨달았다. 목표는 처음부터 자신이었다고. 그 빈루한 선술집 뒷방에서 넋을 놓고 하염없이 아이작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그 때부터 줄곧, 핀갈 모레이는 지금과 같은 순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경우에는 윈필드 씨도 제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사냥꾼들은 점찍어둔 사냥감이 나타날 때까지, 그것이 가장 무방비한 모습을 보일 때까지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소리를 죽이고 뜬눈으로 기다린다고 한다. 핀갈 모레이도 기다린 것이다. 아이작 윈필드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 그가 내미는 줄을 잡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는 순간을. 저항조차 못할 만큼 깊숙히 목을 물어 사냥감을 제 굴로 날라갈 기회를. 그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 그는 예정을 바꾸어,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의 편에서 목숨을 내놓고 지팡이를 들었다. 방식과 신념을 거스르는 규칙에 굽혀 스스로 전투에서 불리함을 떠안았다. 관찰하고 저울질하려 했던 집단에 일원으로서 관여되었다. 그것이 핀갈 모레이의 인내, 농부가 아닌 사냥꾼의 인내였다. 언제일지 모르는 수확을 기다리며 씨를 뿌리는 묵묵함이 아니라, 바라는 순간이 눈앞에 지나갈 때 낚아채기 위해 밤을 새워 매복하는 날카로운 목표의식이었다. 아이작은 함정에 꽁꽁 묶인 다음에야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셈이었다.
“내게서 뭘 원합니까.”
대답이 무엇일지 이미 알면서도 아이작은 속삭였다. 핀갈 모레이는 주머니를 뒤적여 아이작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둥글고 단단한 돌 같은 것이 들어있는 조그만 천 주머니였다.
“식구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마십시오.”
목을 물린 동물처럼 무력하게 아이작은 끄덕였다. 사냥꾼은 웃었다. 훤하게 드러난 삐죽삐죽한 치열은 너무 명백하게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그의 출생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거의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기사단의 명예와 생명을 걸고 그 약속,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안경과 망토를 벗어던지며 몸을 돌려 복도로 뛰쳐나갔다.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내려가면서, 어디선가 꺼낸 큼직한 소라 껍데기 같은 것을 손에 들고 힘껏 불었다. 뱃고동 소리 같은 것이 길게 울렸다.
그리고 건물 안에 파도가 쳤다.
아래층에서는 막 기사단이 급조한 바리케이트를 무너뜨리고 죽음을 먹는 자들이 진입한 참이었다. 전투에 나설 수 없는 인원까지 포함해도 본부에 있는 단원들의 두 배는 족히 되는 숫자였다. 기사단은 루이 린드버그나 세실 브라이언트 같은 젊은 실력자들을 중심으로 1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응전하고 있었다. 주문의 불빛이 날아다니고 여기저기서 벽과 장식물 따위가 깨지면서 파편들이 주변으로 튀는 접전의 와중 난데없이 밀어닥친 물살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당황한 기사단원들이 복도나 벽감 위로 물러나는 동안, 로비 한가운데로 막 들어오던 죽음을 먹는 자들은 피할 곳이 없어 대부분 그대로 얼음장 같은 짠물에 삼켜졌다. 계단 한가운데 서 있던 드류 채닝은 붙잡을 곳도 없어 속절없이 로비로 쓸려내려갔다가 방금 그를 죽이려던 죽음을 먹는 자와 부딪혔다. 그는 죽음을 먹는 자를 완력으로 물 아래로 처넣고 그 등을 발판처럼 사용해 물 위로 올라와서 마른 곳으로 대피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이 건물에 더 이상 마른 곳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저기로 물이 빠져나간 뒤에도 바닥은 흥건한 물바다였고 벽은 물론 심지어 천장까지도 군데군데 거뭇하게 물이 튀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곳에 쓸 신경이 남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도가 잦아든 자리에는 계단 층층이 낯선 손님들이 들어서, 왼쪽으로는 붉은 피부의, 오른쪽으로는 푸른 피부의 인어들이 작살통과 창을 들고 흉흉한 형세로 도열했다. 두 무리의 선두에는 광석이나 조개, 자갈과 물고기 뼈 따위로 치장하고 거대한 삼지창을 든 대장 인어가 하나씩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중앙의 층계참에는 생전 처음 보는 집채만한 해양 생물이 배후에 솟은 산처럼 자리잡고서 이리저리 목을 틀며 인어들의 어깨너머로 난장판이 된 지상층을 내려다보았다. 그 양편으로는 북과 나패를 들고 화려한 목걸이를 겹겹이 건 서넛의 인어들이 꼬리를 둥그렇게 말고 앉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핀갈 모레이가 있었다. 물풀처럼 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셔츠까지 벗어던진 반라의 상태였다. 곧 죽어도 벗지 않던 장갑도 어디 던져버리곤 푸르스름한 물갈퀴가 돋은 맨손으로 지팡이와 창을 양쪽에 들고 있었다. 그의 턱 아래로 목선을 따라 너울너울 움직이는 아가미를 모두가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참아왔던 쾌락을 마침내 해방하듯, 숫제 전율까지 느껴지는 얼굴로 그가 이를 드러냈다. ‘미소’나 ‘웃음’ 따위로 형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살기가 충천한 표정이었다.
“죽음을 먹는 자들이라. 인간 세상에서는 그렇게 귀하신 몸들이라지.”
처음 들어보는 또렷한 진성으로 인어 혼혈이 이죽거렸다. 그의 목구멍에서는 철필로 칠판을 긁는 듯이 흉하게 끽끽거리는 소리가 목소리에 섞여 울렸다.
“우리는 제가 먹을 죽음을 스스로 벌어왔을 때야 비로소 태어난 것으로 인정한다. 차려진 밥상을 앉아서 즐기는 것 말고 너희가 할 줄 아는 것이 뭐 얼마나 있는가 한 번 보자.”
삼지창을 높이 들어올리며 대장 인어들이 날카롭게 울었다. 건물 전체에 귀를 찢을 듯이 크고 끔찍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치 녹슨 톱날로 유리를 자르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죽음을 먹는 자들과 불사조 기사단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귀를 막았다. 수십 명의 인어들이 입을 벌리고 같은 소리로 그 외침에 화답했을 때는 재빨리 방음 마법을 썼던 소수의 사람들조차 귀를 막고 웅크렸다. 두세 명 정도는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비처럼 작살이 쏟아졌다. 명확하고 강력하며 망설임없는 살의를 담아서 내던져진 작살은 여러 점에서 살인 저주와 비슷했다. 그것이 명중시킨 대상은 절명했고, 사이를 가로막는 엄폐물은 박살났다. 살인 저주와 달리 주문으로 막을 수는 있었으나 작살이 날아오는 속도보다 빠르게 상쇄할 주문을 결정하고 시전하는 것은 거의 살인 저주를 방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마법사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젖은 몸을 끌고 우왕좌왕 도망다니는 정도가 생존을 위한 최선이었다.
북과 피리 소리, 조개껍질 부딪히는 소리가 박자를 맞추어 이어졌다. 대장 인어들은 삼지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을 쏘거나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씌워 인어들을 보호했다. 띄엄띄엄 날아오는 반격이 공중에서 궤적이 틀려 빗나가거나 허공에서 사그라졌다. 인어들이 데리고 온 수수께끼의 거대 짐승은 온갖 희한한 모습으로 쉴새없이 둔갑하며 죽음을 먹는 자들을 밖으로 내던지고 재정비하려는 전열을 무너뜨렸다.
핀갈 모레이는 한 손에 창,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마법과 물리력을 마음대로 바꿔가며 물 만난 고기처럼 그 사이를 누볐다. 그를 공격하려는 적을 창대로 날려버리고 창을 묶으려는 적의 발밑을 터뜨렸다. 불가능했어야 마땅할 높이로 뛰어올라 날아오는 저주를 피하고 그대로 누군가의 머리통을 차 부쉈다. 기합인지, 노성인지, 환성인지 모를 찌르는 듯 새된 고함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쇠와 쇠를 비비는 듯 비린내가 진동하는 소리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세실 브라이언트였다. 그는 언제 오나 기다리다 잊고 있었던 것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진 것마냥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다음 순간 얼굴 가득 희열에 찬 웃음이 번지며 복도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불사조 기사단, 전열 정비! 가세한다!”
그가 소리쳤다. 젊은 용사의 청명한 목소리는 증폭 주문 없이도 쩌렁쩌렁하게 사방에 메아리쳤다. 퍼뜩 요연에서 깨어난 기사단원들이 여기저기서 지팡이를 들었다. 로비 안쪽으로 주문이 쇄도했다. 영락없는 포위 공격의 형세였다.
죽음을 먹는 자들은 몰이사냥 당하듯이 쫓겨갔다. 그들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동안 불사조 기사단의 피해는 경미했다. 본부를 기습한 것치고는 어처구니없이 뒤바뀐 결과였다. 인간에게 밀려나 깊은 물 속으로 숨어든 지 오래인 종족 때문에 벌어졌다기에는 기막힌 역전이었다.
그러나 옛 현인들의 시대부터 이르기를, 전쟁은 발상의 싸움이라 하지 않는가? 그들은 만찬을 기대하고 도래했으나 누가 식탁에 오를 것인지를 겨루게 될 줄은 예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맞닥뜨린 적은 그들이 알고 대비하기는커녕 애초에 존재조차도 제대로 인지해본 적 없는 자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 바깥의 미지로부터 찾아온 자들이었다. 그들이 양떼들을 보고 그리하듯이 그들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육식어를 즐겨먹는 사냥꾼의 족속이었다. 죽음과 살해를 거리끼지 않음을 가장 큰 무기 삼는 무리에게는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핀갈 모레이는 소라고둥을 한 번 더 불어 인어들을 전별했다. 심해의 주민들은 도착했던 때만큼이나 홀연하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미리엄은 푸른 대장 인어가 사라지기 전 한 손으로 잠시 그의 어깨를 짚는 것을 보았다. 아직도 바닷물에 젖은 로비에는 죽고 다친 죽음을 먹는 자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핏물이 흘러 퍼져 여기저기 고인 웅덩이가 온통 반투명한 선홍색이었다. 찰박찰박 잘게 물소리를 내며 그가 기사단원들을 돌아보았다.
“고쳐 인사드립니다.”
그가 말했다. 여전히 듣기 싫게 끽끽거리는 소리지만 가만히 있어도 어딘가 삐딱하고 불만스러워 보이는 평소의 태도는 간데없이 극공하고 무게가 있어, 숫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형형하게 빛나는 한 쌍의 노란 눈동자만이 그들이 아는 그 청년을 앞에 두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을 잠시 눈꺼풀로 닫아 가리고, 핀갈 모레이는 정중하게 절을 했다.
“검은 절벽의 바다에서 온 푸른 삼지창 든 이의 불초 소생 핀갈 모이레 모레이라고 합니다. 북해의 다섯 부족은 빼앗긴 바다를 걸고 귀하들과 동맹하기를 희망합니다.”
구체적인 협상에 들어가자 핀갈 모레이는 빠르게 본래의 불량함을 되찾았다. 그는 인어들을 전투에 투입하는 것은 앞으로 두 번이 최대라고 시작하자마자 선을 그었다.
“전성기의 바다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지금에 와서는 육지에 올라와 있는 것 자체가 심대한 무리입니다.”
핀갈 모레이가 맞은편에 앉은 다몬 아울러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 친구들이 반 시간만 버텼으면 사실 이번에도 위험했습니다.”
그 ‘전성기’라는 것이 풀어 말하면 인어들이 뭍에 올라와 민가를 약탈하고 인간을 납치해가던 시대라는 점에서 핀갈 모레이가 내비치는 피해의식에는 사실 좀 황당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너무나도 당당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건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쟁이란 게 날붙이가 부딪히는 순간으로만 구성되는 것도 아니죠.”
핀갈 모레이는 말했다. 그는 지팡이 마법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주문과 도구, 심해에서 채취되는 진기한 재료, 천 길 바다 밑의 은닉처를 위시해 다종다양한 방식의 협조협력을 솔깃한 사례를 들어가며 제안했다. 협상 대상이 되는 해역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이며 어떤 권리를 포괄하는지, 해역 주변의 근해에 대한 접근권은 누가 얼마나 갖는지, 반환의 방식은 어떠하며 만일 머글들이 유입될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하는지 등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한 입장과 논거를 준비해왔다. 젊은 단원들 몇몇과 함께 문가에서 기웃대던 에스마일 시프는 핀갈이 말도 안 되게 길고 유창한 논변을 술술 매끄럽게 늘어놓는 것을 어안이 벙벙해져서 듣고 있다가 중간에 무언가를 깨달았지만 입을 다물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모레이가 협상에 임하는 태도는 다소간 인어들의 ‘전성기’를 연상시켰으나, 눈앞에서 그 스펙터클을 보고도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는 자는 적었다. 전황은 누가 보기에도 정부와 기사단 측에 불리하게 기울어가고 있었고 상대가 모르는 패를 쥐고서 상대의 정보를 들여다보는 것은 거의 매번 죽음을 먹는 자들 쪽이었다. 누구를 어떻게 고문하거나 정신을 파헤쳐봐도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배후에 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막대한 이점이었다. 게다가 인어들은 그들의 출정만큼이나 결정적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진귀한 재보들을 몇이나 내어주었다.
다몬 아울러가 마법부와 기사단을 오가고 몇 사람과 더 회동이 이루어진 끝에 강력한 마법적인 계약을 걸고 마침내 양측이 조약에 서명했다. 핀갈 모레이는 기사단을 탈퇴하고 동맹으로서 움직이겠노라고 선언했다.
“그간에 감사했습니다만, 역시 여기는 제가 앉을 식탁이 아니니까요.”
왜인지 씁쓸한 표정으로 베서니가 있는 쪽을 보며 그가 말했다.
“그리고 생사결을 봐주면서 대충 하자니 본새 없어서 도저히 못 해먹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느 기사단원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사리는 법 없이 선봉에 나서서 싸웠다. 가장 위험하고 승산 없는 싸움마다 기쁜 듯이 불려나와 전장을 누볐다. 인간의 피를 뒤집어쓰고 히죽 웃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등줄기에 소름이 돋게 했으나, 맹수들의 소굴에서 그의 존재감은 그만큼 확실하게 힘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힘이나 기술에 대한 신뢰가 아니었다. 핀갈 모레이는 죽음을 미지의 어둠 속에서 일상의 빛 아래로 끌어들였다. 기피하고 물리치되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을 한가지로 덤덤하게 받아넘겼다. 죽음을 위한 여분의 의자를 언제나 비워놓고 삶을 꾸렸고 죽음이 거기에 앉았다 갈 때에는 가까운 이웃처럼 맞아들였다 배웅했다. 자주 그 자신이 누군가의 죽음이 되어 다른 삶의 식탁에 쳐들어갔다. 그는 죽음이라는 공포와 금단의 영토를 옆동네마냥 여상하게 드나드는 현지 출신의 안내자와 같았다. 핀갈 모레이와 함께 싸운 기사단원들은 모두 크든 작든, 좋든 나쁘든 삶과 죽음에 관한 관점이 어딘가 변화한 채로 전장에서 돌아왔다.
핀갈 모레이가 아이작에게 건넨 주머니는 예상 가능하게도 포트키였다. 그것은 검은 바위 절벽에 역시나 검푸른 바닷물이 되풀이해 파도치는 외딴 해안 언덕의 이층집으로 통했다. 앞뒤의 뜨락에는 색색의 꽃들이 가지런하고 창문마다 하얀 새 무늬를 넣은 푸른색 커튼이 나부끼는, 동화적이리만치 아기자기한 집이었다. 핀갈의 어머니, 리델 모레이는 윈필드 일가와의 첫만남에서 레아를 다짜고짜 끌어안고 한참을 놓지 않아서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레아는 마주 끌어안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가만히 안겨 있었는데, 이 광경은 어째서인지 레베카를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곧 아이작에 대한 그녀의 노골적인 무례함이 불러일으킨 경악에 묻혀버렸다. 리델은 본인은 자연스럽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한 태도로 눈에 다 보이게 아이작의 존재를 무시했고, 학창 시절 유독 무리에서 동떨어져 있던 후배를 기억해낸 아이작이 인사를 시도하자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씩씩하게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다며 자신은 아이작을 생전 본 적도 없다고 대답하고는 쌩하니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빵과 치즈, 채소와 달걀, 소시지와 훈제한 생선 따위가 줄지어 춤을 추며 그 뒤를 따랐다. 아이작은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자주 저평가되고는 하지만, 집안일 마법은 정교하고 다양한 주문들을 요구하는 가장 어려운 분야에 들었다. 리델이 초록색 교복을 입은 조그만 호그와트 학생이었던 시절, 슬리데린 동급생들은 그녀를 두고 ‘간단한 주문조차 못 하는 반편이’라며 키득거렸다.
‘간단한 주문조차 못 하는 반편이’는 매주 두 번씩 찾아와 식료품과 생필품을 채워넣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빗자루와 걸레가 왈츠를 추게 만들었다. 일요일에는 목욕탕만한 물통에 물을 받아놓고 옷과 수건들이 하나씩 비누를 문질렀다가 물통에 담가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종달새 같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하늘에 가득 낀 잿빛 구름을 한 조각만 걷어내 마당에 쏟아지는 햇볕에 빨래를 널었다. 신선한 과일과 벌꿀을 넣어 오븐에 큼직한 파이를 구웠다. 이따금 정말로 무언가 착오가 있고, 아이작이 알던 소심한 하급생과 이 여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지 정말로 헷갈릴 지경이었다.
한 번은 아이작이 핀갈 모레이의 경고를 어기고 밖으로 나가 기사단원과 접촉한 적이 있었다. 그는 순간이동으로 돌아가기는커녕 그곳을 다시 찾을 수도 없다는 데 당황하며 근처를 한나절이나 방황하다가 찾으러 온 레아와 리델에게 발견되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새겨질 만큼 창피한 경험이었다. “파수꾼에게 직접 듣지 않았잖니. 들어와본 적이 있어도 그건 ‘모르는’ 거야.” 나중에 레아가 이에 대해 물어보자 리델은 아리송하게 설명했다. “여기에 올 때 그 애가 건네준 게 있지? 그걸 잃어버리면 돌아올 수 없어. 잘 간수하도록 하렴.” “파수꾼은 누군데요? 리델이 아니에요?” 레아가 물었다. “나도 몰라.” 리델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핀이 잘 숨겨둔댔어.” “그러면 리델은 어떻게 들어오시는 거에요?” 레아가 다시 물었다. “뒷문 같은 거야.” 리델은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내 마법이니까.”
아이작은 핀갈 모레이와의 약속을 완전히 지키지 못했다. 그의 몸은 스코틀랜드의 해변으로 떠나왔으나 그의 마음은 피바람이 부는 전장에서 분투하는 선인들과 함께 있었다. 눈꺼풀 안에 맺히는 그들의 그림자는 잠 못 이루는 새벽마다 그의 영혼을 안에서 갉아먹었다. 그러나 레아와 레베카의 목숨을 손에 들고서 위험이 휘몰아치는 바깥으로 향할 만큼은 아이작도 차마 모질어질 수 없었다. 인간에게 사랑도 믿음도 없고 단지 그의 아이를 그보다 잘 아는 한 젊은이가 기사단의 명예를 담보로 잡고 제 목숨을 판돈으로 걸어 그의 것을 사들인 바에야 더욱 그랬다. 아이작이 그러하듯 핀갈 모레이 또한 레아가 무사하기를 원했고, 아이작과 달리 핀갈 모레이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안전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레아의 마음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한데 묶어 제 둥지로 빼돌린 것이다. 단순하고 난폭할지언정 감히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외딴 바닷가의 작은 집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마땅히 없었으므로 부부는 주로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바다 위를 떠나지 않는 먹구름이 걷히고 이따금 햇빛이 드는 날이면 레아가 위층 방에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는 동안 검게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갈투성이 해변을 천천히 걸었다. 핀갈 모레이의 영혼의 절반을 이루는 풍경이 이것이고, 나머지 절반이 리델 모레이가 살림을 꾸린 집이라고 한다면 괴이하게만 느껴지는 많은 돌출들이 자연하게 수긍될 듯하기도 했다. 레베카로서는 정말로 언짢게도, 레아는 리델 모레이를 잘 따라서 틈만 나면 같은 해안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의 집에 따라가서 시간을 보냈다. 핀갈 모레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집이었다. 아이작과 레베카도 한두 번쯤 그곳에 발을 들일 기회가 있었는데, 크랜베리 소스와 갓 구운 롤빵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차 있었다. 집안의 배색은 진한 노란색과 복숭아색으로, 벽지며, 커튼이며, 식탁보며, 쿠션마다 자잘한 꽃과 나비 자수와 리본 장식이 달려 있어 전체적으로 집주인의 연배와 다소 곤혹스러울 만큼의 격차가 느껴졌다. 리델 모레이라는 사람 역시 집만큼이나 나이를 먹지 않는 듯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핀갈은 어떤 아이였나요.” 소파에 앉아 자수를 놓는 리델의 옆에서 레아가 물었다. 리델은 잠깐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핀은 핀인데.” 그리고 그녀는 자수를 계속했다. 레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저를 뭐라고 얘기했어요? 온다는 언질은 들으셨을 거잖아요.”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데 어둠의 마법사들 때문에 위험하니까 부모님이랑 같이 여기 숨겨줄 수 있냐고 했어.” 리델이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레아가 할 말을 잃고 쳐다보는 것은 느끼지도 못한 듯한 태도였다. “그래서 저한테 잘해주시는 건가요.”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레아가 툭 던졌다. 리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작게 끄덕였다. “그렇지만 못된 애였으면 안 갔을 거야. 그런 사람들은 무섭거든.” “제가 못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레아가 말했다. 리델은 갑자기 수틀을 내려놓고 레아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의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응. 하나도 못된 애 아니야.”
핀갈 모레이는 본인이 ‘가마솥 밑바닥까지 닥닥 긁어모은 끌어치기’라고 부르는 것을 전쟁이 끝나기 전에 약속대로 두 번 더 보여주었다. 죽음을 먹는 자들은 종전보다 준비되어 있었으나, 인어들은 약간의 사상을 안고 호그와트와 마법부를 한 번씩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성기’가 지나가고 주변으로 밀려난 지 오래된 바다 사람들의 참전은 뭍 위에서 전성기의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의 승패를 뒤바꾸지 못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침묵으로 모르가나 가민을 지지했고 정의의 집행을 내부에서부터 방해했다. 용기를 내 나서는 사람보다 두려워 피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불사조 기사단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고 자주 누군가가 죽었다.
핀갈 모레이는 팔뚝이 반쯤 잘려나가는 큰 부상을 입은 뒤로 오른팔로 창을 들 수 없게 되었다. 팔뚝에는 빙 둘러 절단선 같은 흉터가 남았다. (“어둠의 마법 후과치고는 준수하군요.” 핀갈 모레이가 말했다.) 그는 독약이나 저주에 의한 다섯 번의 암살 시도를 겪었으며 두 번 정도는 실제로 죽을 뻔했다. (“졸렬한 놈들…….” 핀갈 모레이가 말했다.) 길거리나 심지어 집 안에서의 기습 공격은 암살로 간주하지도 않는 핀갈 모레이의 셈법에 따른 횟수였다.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고 저 친구들과 나는 동족이 아니니까.” 핀갈 모레이가 말했다. “반대로 저치들이 나를 죽일 작정으로 바다 밑바닥에서 어슬렁거린다면 바다 사람들이 사정을 봐줄 이유와 여유는 없겠죠.”)
그 해 말 ‘살아남은 소녀’가 신비한 힘으로 모르가나 가민을 쓰러뜨리면서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때이르게 전쟁이 끝났을 때 핀갈 모레이는 기뻐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돌연하게 나타난 행운은 돌연하게 사라질 수도 있는 겁니다.” 그가 근심스럽게 논평했다.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그는 셉티머스 프라이어를 비롯한 몇몇 기사단원들과 함께 가민이 사라졌다는 집 주변과 죽음을 먹는 자들이 패배해 끌려갔거나 버리고 도망친 거점들을 편집증적으로 돌아다니며 가민을 찾다가 더 이상의 수색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논공행상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냉큼 돌아가버렸다. “첫 번째 해역의 소개를 마치면 부르십시오. 그럼 근시일내 다시 뵙길 바라겠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해안으로 장거리 순간이동해 사라지기 전에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레아 윈필드에게 귀를 붙잡혀 도로 끌려왔다. 어쨌든, 비유적인 의미에서는.
“민폐였어요. 필요없었다고요. 곤란하기만 했어요.”
식탁을 기웃거리며 그릇에 담긴 과일 조각을 집어먹는 핀갈에게 레아가 말했다. 핀갈이 뚱하게 대꾸했다.
“그것 참 듣던 중에 반가운 소리네.”
“당신이 뭔데 이런 짓을 해요? 그런 거 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잖아요. 나는 원했던 적도 없단 말이에요.”
“너는 나한테 하지 않기로 약속한 단 한 가지를 거하게 저질러놓고, 나는 그럼 네가 원하는 일을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줄 알았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양심없― 아!”
깡! 이것은 레아 윈필드가 핀갈 모레이의 머리를 쟁반으로 내리치면서 나는 소리였다. 핀갈은 짜증을 내면서 옆으로 조금 비켜섰다. 맞은편에 앉아 한가롭게 과자를 반죽하던 리델이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여자애를 울리면 안 된단다.”
“팔팔하기만 한 거 안 보이세요?”
깡! 깡! 깡! 깡! 깡! 쟁반이 머리통을 연신 가격하는 가운데 핀갈이 툴툴거렸다. 씨근거리는 레아의 손에서 리델이 부드럽게 쟁반을 소환했다. 반죽을 평평하게 펴놓고 나비 모양 쿠키틀로 자르기 시작하자, 그릇에 쌓인 과일 조각들이 날개에 무늬처럼 내려앉았다.
“어쨌든, 마법부에서 당신을 찾고 있어요. 조약에 대해서 재검토를 하자는데요.”
“뭔 재검토야. 언제 어디부터 어떻게 반환할 건지 다 정해놓고 사인했는데.”
그제야 핀갈이 레아를 돌아보았다. 얼굴에서 느슨한 기운이 싹 가셔 있었다.
“조건이 ‘전쟁에 승리하면’이었다면서요. 이것을 ‘승리’라고 볼 수 있는가 의문하는 사람들이 많대요.”
레아가 침착하게 말했다.
“보고 있는 것 같은데.”
핀갈이 “마법 세계의 정의의 승리”를 요란하게 축하하는 《예언자 일보》 1면 기사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자기들끼리 의문을 하려면 하든가. 아니면 뭐, 설마 아직 전쟁 중이라는 건가? 인원 총동원해서 가민을 찾아야 한다고 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언론에서 쓰는 수사와 조약의 항목은 다르다, 라는 거죠. 싸워서 이긴 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서 전쟁이 그냥 ‘끝난’ 거니까. 이건 당신들이 아니었어도 일어날 일이니까, 처음부터 필요없었다는 거에요.”
“장난해?”
청년이 격앙되어 테이블을 쾅 쳤다. 레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리델이 핀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핀갈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이놈이나 저놈이나. 이것들하고 엮이자고 나서서 설득을 하고 다닌 내가 미친놈이지.”
그가 중얼거렸다.
“기사단 쪽 사람들은 당신과 약속한 대로 해야 한다고 열심히 방어해주고 있어요. 그렇지만 자리에 참석하지도 않는 사람의 입장을 호소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요. 자기 몫을 똑바로 주장하지 않으면 금방 이렇게 되는 거에요.”
어딘가 욱한 듯이 레아가 목소리를 돋웠다. 핀갈은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끔찍한 소리를 흘리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저 좀 다녀올게요.”
이윽고 그가 말했다. 리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과자를 굽고 있는데?”
“제가 대신 말벗을 해드릴게요.”
리델의 옆에 자연스럽게 착석하며 레아가 말했다. 핀갈이 입을 쩍 벌리고 그것을 보았다. 레아는 의미상으로 얼추 혀를 내미는 것과 대당되는 눈빛으로 핀갈을 흘겨보고 리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리델은 쿠키에 잼을 바르며 망토를 두르는 핀갈에게 물었다.
“저녁 먹기 전에는 올 거지?”
“그럴게요.”
핀갈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법부에서 핀갈은 불사조 기사단보다 더 이색적이었다. 그는 일단 바닷물에 들어갔다 갓 나온 듯한 냄새를 풍기며 순간이동으로 마법부에 나타나 험악하게 다몬 아울러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회의실에 들어가서는 대체로 별 말을 하지 않고 아울러와 린드버그 사이에 조용히 앉아서는 전쟁에서 인어들의 역할에 부정적인 의견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으며 그 샛노란 눈동자로 그들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길고 지리멸렬한 밀고당기기와 같은 논의 끝에 여섯 시가 되자 핀갈은 거두절미하고 ‘어머니가 기다리시니 내일 이어 얘기하자’며 집으로 훌렁 돌아가버렸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루머들에는 그날로 ‘지독한 마마보이’라는 평판이 추가되었다.
그는 다음날 아침식사 후에 다시 나타났다. 잉크워스 가문에서 그나마 가장 양호한 인물로 꼽히는 호버트 잉크워스가 새벽부터 절절매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인어들과 싸우다 독을 바른 작살에 맞은 뒤 법으로는 금지된 모종의 ‘요법’으로 연명하다가 죽음을 먹는 자들의 패퇴 이후 더 이상 처치를 받지 못해 사경을 헤매는 조카를 구할 방법을 알아내고 싶어했다. 핀갈 모레이가 래번클로적이고 외교적인 표현으로 꺼지라는 말을 한 시간쯤 되풀이하고 있을 무렵 머글 선박의 통행을 둘러싼, 북해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어들과의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던 마법 사고 및 재난부의 직원이 그가 마법부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 다음에는 일군의 오러들이 그에게 몰려와 숲속으로 도주한 죽음을 먹는 자들을 찾는 데 켄타우로스들의 협조를 받을 방법이 없겠느냐며 그를 닦아세웠다.
“아니, 갈수록 점점 더 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는데요. 그런데 이 서류들은 반출해도 되는 겁니까?”
그가 사람들이 떠안긴 한아름의 양피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것은 실제로 곤란했기 때문에 마법부 직원들은 급한 대로 그에게 책상 한 칸을 내어주었다. 지하4층의 쓰지 않는 사무실 어딘가에 있는 그 책상은 핀갈에게 쏟아지는 온갖 요청들에 관련된 문건들에 더하여 협상이 계속되는 동안 핀갈 모레이가 조약의 ‘해석’에 관한 서류의 초안을 작성하고 관련 자료들을 보관하는 작업 공간이 되었다. 그러다 이번 전쟁의 최고 영웅으로 세간의 집중적인 관심과 숭배에 가까운 사랑을 받고 있는 세실 브라이언트가 쳐들어와서 책상을 뒤엎고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그 자리에서 반환 절차를 개시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논쟁을 종결시켜 버린 이후로는 민원 문서들만 남게 되었다.
한 번 눈 뜨고 코 베일 뻔하면서 교훈을 얻은 핀갈 모레이는 그 뒤로도 계속 마법부에 출입했다. 그는 뭍과 바다를 오가면서 해역의 반환을 감시하고 관계자들을 독촉하고 돌발 상황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들에 대한 의논을 중개했다. 호버트는 핀갈에게서 기어이 조카를 구할 해독제를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오러국은 무죄를 가장하고 있던 죽음을 먹는 자들 몇몇을 기소하는 데 도움이 될 증거들을 핀갈을 통해 은밀하게 건네받았다. 남쪽 바다의 인어들은 머글 선박이 유입되더라도 공격하지 않고 온건하게 유도해서 돌려보내는 대신 생활권을 종전보다 크게 확장하여 보장받기로 합의했다. 켄타우로스들은 핀갈을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반쪽이 보듯이 쳐다보았지만 머글 정부를 압박해 숲에 깔짝거리는 개발업자들을 규제하게 만드는 것과 교환해서 숲에 침범한 외부자가 있으면 통지하겠다는 데 마지못해 동의해주었다. 핀갈은 또한 산으로 숨어들어간 거인 둘과 교섭해 마법부에서 추적을 중단하는 대가로 다음 전쟁에서는 최소한 중립을 지킬 것을 다짐받았다. 그는 근미래에 있을 모르가나 가민의 귀환과 전쟁의 재발을 그 시점부터 진지하게 상정하고 있던 소수에 들었다.
북해의 인어들이 마지막 하나까지 조상이 살던 바다로 돌아가고 옛 군락들의 부흥이 궤도에 오른 다음에도 핀갈 모레이는 책상을 빼지 못했다. 그것이 놓인 사무실 문 앞에는 ‘인어 연락 사무소’라는 명판이 붙었고, 핀갈 모레이의 몹시 대담하고 직접적인 화법과 행동거지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형태로 완화해서 전달해주거나 ‘창잡이’ 식의 거침없는 구상이 어떤 법률의 어느 조문에 어긋나는지 지적하며 제동을 걸어줄 만한 심지와 수완을 가진 두세 명의 직원들이 보조역이라는 명분으로 배치되었다. 푸르딩딩하고 칙칙한 살빛과 물갈퀴며 아가미를 그대로 드러내고 마법부를 활보하는 이 이방인은 길들지 않는 골칫덩어리였고 대개 마법사들보다 그 상대들을 편들었으나 바로 그 이유에서 대체불가능한 통로였다. 이쪽의 충성스러운 일원은커녕 우호적인 중개인조차 아닐지언정, 그는 전혀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상대, 공생할 수 없는 상대들과 적어도 거래하고, 타협하고, 불가침을 약속받을 수 있게 했다. 그것이 종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많은 가능성들을 열었다.
그리하여, 십수년 뒤 정말로 마왕이 돌아오고 멎은 줄만 알았던 싸움이 재개되었을 때, 살아남은 소녀의 등뒤에 선 것은 서로 사랑하는 의로운 인간들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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