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지수]

나의 낭만아, 아프지 말아,

https://www.youtube.com/watch?v=iFyo02cPJmw
October-Time
to Love.

 도연재는, 원래 그리 성격이 급한 편이 아니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것을 좋아했으나, 그것이 빠른 판단이나 행동을 바라는 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리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다면 랩실에 오래도록 틀어박혀 한 가지 프로젝트를 성공할때까지, 완성할때까지 붙잡고 있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었겠지. 그래, 사족이 길었으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연재가 지금 이상하리만치 마음 급한 태를 보이고 있는 탓이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빨리 해. 오늘까지 보고서 제출하는 거 몰랐던 거 아니잖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행동이 굼뜨니. 평소 하지도 않던 재촉이며 타박이다. 그 후배들에게 그리 다정한 편은 못 되었어도 못된 선배는 결단코 아니었는데. 그런데.

 후배들의 시선이 바쁘게 오간다. 아무래도 선배의 상태가 이상했다. 시선은 자꾸만 슬금슬금 핸드폰을 향하고, 핸드폰을 확인하는 것으로는 부족한지 5분 사이에도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 게다가 초조한지 입술을 물어뜯고, 잠시간 손이 쉬는 동안에는 토도독, 토도독, 손톱이 바쁘게 책상을 두드렸다. 야, 네가 물어봐. 미쳤냐? 내가 어떻게 물어봐, 네가 물어봐. 저들끼리 소곤대며 그녀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은데, 평소와 영 상태가 달라보이니 쉽사리 물을 수도 없다. 아, 이럴 땐 지수 씨한테 연락해봐야 하는데. 지수 씨 얼굴 보면 좀 풀리지 않을까?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나.

"…안 되겠다. 미안한데, 보고서 마무리 너희끼리 할 수 있겠어?"
  "네? 아, 네. 그런데 혹시…왜요?"
 "빨리 가봐야 해. 미안해서 웬만하면 끝까지 같이 하려고 했는데…다음에 밥 사줄게."
  "괜찮아요, 저희끼리 할 수 있어요. 급한 일 있으시면 미리 가시라고 할 걸……."

 그래도, 미안. 급하면 연락해. 짧게 말을 내뱉고서 그녀가 바쁘게 짐을 챙겨들었다. 답지 않게 허둥지둥 하는 모양새다. 언뜻,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프신가? 정말 무슨 큰 일 있으신거 아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도연재다. 책임감 강하고, 성실하고, 제 몫을 완전히 해내야 만족하는. 뛰는 듯한 걸음으로 랩실을 빠져나가는 뒷모습를 바라보며 저들은 고개를 기울일 뿐이다. 하여간에, 뭐 하나 쉽게 이야기해주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도 평소에 워낙 열심히 하는 사람이니 이 정도야 저들끼리 마무리 해본다지만. 혹시 지수 씨한테 무슨 일 있나? 헐, 그런가? 추측들이 난무하다 저 멀리 사라진 도연재의 뒷모습마냥 이내 사그라들었다.

*

 "도선배, 왜 이제 와요?"
 "…최대한 빨리 온거야. 지수는?"
 "선배 방에 누워있어요. 좀 전에 죽이랑 약 먹고."

 어떻게 꽃길까지 도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드물게도 초조한 기색에 숨까지 몰아쉬며 집에 들어서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수가 도선배 얼마나 찾았는지 모르죠. 그 목소리엔 알듯 모를듯한 감정이 녹아있었으나, 도연재에겐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제 사랑하는 연인이, 그 어린 연인이 아프다고 했다. 오래도록,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냈던 제 연인은 또 그것을 혼자 꾹꾹 눌러 참았었겠지.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제가 아니었다. 다른 하우스 메이트들이었지. 괜찮다며 손사래치는 제 연인을 업고 병원에 간 것이 유하였고, 제가 비운 자리를 내내 곁에서 지킨 것이 새결이었다. 죽은 누가 끓여주었을까, 아, 다들 요리는 못하니까 사왔으려나. 문득 제 빈 손이 부끄러웠다. 네 곁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나는 네 연인이라면서.
 너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해놓고서.

 핑계라면 있었다. 중요한 프로젝트였으며, 저는 그 곳에서 중요한 일을 맡은 터였다. 총 책임자였고, 후배들을 이끌어 프로젝트를 진행할 의무가 있었으며, 개인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망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1층 거실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서 2층을 올려다본다.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네 얼굴이 보고싶고, 네 상태가 걱정되고, 네 곁을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채우고 싶으면서도 두려웠다. 네가 나를 원망하면 어쩌나. 네가 내게 정이 떨어졌으면 어쩌나. 내 모든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네가, 나의 낭만이 더 이상 나를 그리 여기지 않으면 어쩌나.

 "안 올라가고 뭐해요. 계속 지수 옆에 내가 있어요?"

 나는 그러면 좋긴 한데, 지수가 바라는 건 내가 아니잖아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목소리에 어렸던 씁쓸함, 서글픔. 그런 것을 읽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 표정에 어린 아픔 또한 읽지 못할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모른 체 해온 사실이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야 할텐데. 긴장에 아랫입술만 짓씹는다. 빨리 가요. 재촉하는 목소리와, 제 손에 쥐어주는 서늘한 물수건에 등을 떠밀리듯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

 한 걸음, 너는 많이 아플까.
 두 걸음, 네가 아프다는데 왜 나는 빨리 오지 못했을까.
 세 걸음, 네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네 걸음, 네가 보고싶어.
 다섯 걸음, 너도 나를 보고싶어했으면 좋겠어. 

*

 방에 들어섰을 때, 너는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잠들어있었다. 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나는 이렇게 가슴이 떨려서. 어른스러운 척 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내 마음 끌리는 대로 네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이미 네 이마에 올라앉은 물수건을 살짝 걷어내고서, 이새결이 새로 준 물수건을 네 이마에 얹는다. 발갛게 물들어있는 네 볼에 손을 대자 따끈한 열기가 전해진다. 열이, 이만큼 났었구나. 아마 이것도 내린거겠지. 열이 올라 힘들어했을 네 생각에 가슴이 갑갑했다. 열을 내리는데는 몸을 계속 닦아주는 것도 좋으니까. 이불 밖으로 드러난 팔을 물수건으로 살살 쓸어내린다.

 그 감각이 낯설었던 걸까, 거슬렸던 걸까. 으응, 하고 얕게 앓는 소리와 함께 네 입술이 달싹인다. 언니이, 옹알대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너 아플 때 바로 달려와주지도 못한 언니가 뭐가 예쁘다고, 뭐가 좋다고, 그 입술은 나를 부르는지. 아, 혹시. 욕하는건가? 싶어 귀를 기울여보았으나 너는 다시금 잠에 빠지는 모양이었다. 그 모양이 귀여워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어느 때나, 네가 원할 때 곧바로 달려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지수야. 그래도 언니는 네가 항상 일순위니까. 언제 어느 때에든 네 일이면 언제나 첫번째가 되고 마니까. 조금 늦더라도 꼭 언니가 네 곁에 달려올 테니까.

언니 싫어하지마, 미워하지도 말고. 그리고 아프지 말자. 빨리 낫자, 내 예쁜 여자친구.
 내 사랑스러운 낭만, 내 사랑.

 

속삭이며, 네 입술에 내 입술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