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Bad end?

이걸 드림글이라고 해도 되는가

드림용 by Garn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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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낙원에 있다는 당신에게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편지의 처음엔 이렇게 안부를 물었습니다만, 당신은 이 편지를 받아보지 못할 거에요.

난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생각이거든요.

당신과 나는 사는 세계가 다르니 당신은 이 편지에 손 댈 수 없을 것이고, 난 이 편지를 부치거나 태우지 않고 서랍에 넣어두었어요.

편지봉투에 넣어서 서랍에 넣는게 아니라 노트에 쓴 편지를 넣을 것이니 편지가 사라져 당신에게 도달할 일은 없겠죠.

당신의 이름을 한번도 쓰지 않은 것을 보고 눈치채셨을 지도 모르지만, 사실 난 당신이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듣기로는, 당신과 함께 하던 낙원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그곳에서 얻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무력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그곳에서 배운 것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기억마저도.

선생님은 살다보면 친구와의 사소한 일에도 교훈은 얻을 수 있기 때문 아니겠냐고 하셨습니다만, 솔직히 그 말을 이해하진 못했습니다.

가끔 내가 나를 이루던 모든 것을 버린 채 선생님이 낙원이라고 부르는 곳을 떠난 이유가 궁금해져요.

선생님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산 거라고 했지만. 글쎄요. 적어도 당신이 알고 있는 나는 죽은 거 아닐까요.

만약 당신에게 편지가 닿는다면 이쯤에서 왜 내가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지 궁금해졌을까요?

언젠가부터 나는 그 낙원에 무언가를 두고 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요.

그리고 내가 두고 온 것은 어쩌면 당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이미 고백했듯, 난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요.

다만, 아주 애매한 기억 하나가 남아있어요.

아주 따스하고 너른 품에 안긴 채 행복했던 기억이에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햇살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내 기억 속 품이 딱 그만치 따스했거든요.

아주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있는 따스한 당신. 나의 햇살. 당신은 날 기억하고 있나요?

솔직히 그러질 않기 바랍니다.

날 잊었거나 미워하고 있길 바랍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너무 잔혹한 일이니까요.

기억을 잃기 전의 나도 같은 사람이니 아마 당신의 기억이 지워지게 손을 쓰거나 당신에게 미워해야 마땅할 최악의 모습을 보였겠지요.

바로 그래서 이 편지는 어디에도 부쳐지지 못하는 겁니다.

날 잊거나 미워하는 사람에게 이런 편지를 전할 순 없으니까요.

다만 나의 기억 속엔 당신의 따스함만 남았기에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며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읽을 당신이 없으니 이 편지는 나의 일기와 다를 바 없겠으나 당신에게 쓰는 것이라 여기는 나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겠죠.

모든 것을 잃은 뒤로,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직장에서 쓰던 능력도 떠나온 낙원으로부터 비롯된 거라 지금의 나는 전혀 쓸 수 없거든요.

대신 선생님에게 수업을 듣고 있어요. 첫 수업엔 내가 수업을 들어야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셨는데, 아직도 전혀 이해가 안 돼요.

모든 걸 잃은 내가 사라졌어야하는 존재로 수렴하지 않게, 다른 길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란 것까지는 이해했는데….

에휴. 어렸을 땐 어른이 되면 공부 안 해도 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두번째 수업부터는 아주 어렵진 않았습니다.

수업도 식사시간 간식시간을 다 챙겨서 느긋한 페이스로 진행되고 어려운 용어도 없는 덕이지요.

선생님이 수업을 굉장히 잘 하세요. 제게 꼭 맞춘 듯이 수업을 하셔서 정신차려보면 수업이 끝날 시간이곤 해요.

적절하게 휴일도 주시고요.

그러고보니 당신에게 선생님이 누구인지 소개하는 걸 잊은 채로 선생님과 수업 이야기를 늘어놨네요.

당신이 우리 세계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으니까 기초부터 소개하자면, 이곳은 홈플래닛.

인생에 단 한 번 다른 세계로 끌려들어가버리는 여행자들이 태어나는 여행자의 고향이에요.

내가 당신이 사는 낙원에 갔던 것도 그런 여행자이기 때문이고요.

모두가 그런 여행자로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만약 여행자로 태어나도 괜찮아요.

태아시절에 병원에서 검사를 해서 여행자 체질이란 걸 바로 알 수 있거든요.

여행자 체질 검사는 기술의 발전 덕분에 정확도가 높은 편이지만, 가끔 저처럼 병원에서도 잡아내지 못하는 여행자가 나타나곤 해요.

3대 안에 여행자 체질이 없으면 정확도가 조금 더 낮은 간이검사를 받거든요.

간이검사 해당자도 정식 검사를 받을 순 있지만, 임신 중 검사가 태아에게 해가 될까봐 간이검사를 더 선호한다고 들었어요.

저도 간이검사 해당자였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제 친척들은 이제 제 덕에 전부 정밀검사를 해야할거래요. 히히. 웃기죠?

그렇다고 간이검사나 정밀검사에서 여행자가 아니라고 밝혀진 사람이 아무 조치 없이 방치되는 건 아니에요.

모든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체질이 발현되지 않게 하는 마법 시술을 받거든요.

여행자 체질이면 이 마법이 갑자기 풀리지 않게 몇년에 한 번 보강을 하는게 의무지만, 여행자 체질이 아니면 딱히 그러지 않아도 돼요.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 차원이동지원국의 보조를 받으면서 차원이동 여행을 다녀오는 거에요.

그런데 저는 어른이 되기 전에 이 마법이 갑자기 풀려서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가게 됐던 거래요.

여행자 체질이 아니라서 보강을 게을리했다가 너무 일찍 마법이 풀려버린거라네요.

난 그곳에서 어떤 여행자였나요? 당신이 햇살처럼 대해줄만큼 좋은 사람이었길 바랄 뿐이에요.

선생님 소개를 하겠다고 하고선 엉뚱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네요? 이래서 졸릴 때 편지를 억지로 이어나가면 안 되나봐요.

차원이동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여행자들이 도착하는 세상도 다양하죠. 간혹 그런 여행을 하다가 엄청나게 강해져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초월자라고 불러요. 인간을 초월한 강자들이란 뜻이죠.

선생님은 이런 초월자들이 모인 조직의 수장이에요. 우리나라 말로는 초월자 협회라고 부르는 조직이에요. 한마디로 협회장이죠.

초월자협회는 주로 이 세계를 외부 세계의 존재들로부터 지키는 일을 해요.

차원이동을 했던 여행자에게 반해서 홈플래닛까지 쫓아오는 대단한 존재들이나 홈플래닛 자체를 노리고 침략하는 존재들을 막는 일이래요.

선생님은 내가 다시 초월자가 되어서 그런 일에 힘을 보태줬으면 하는 거에요.

다만, 내가 다시 초월자가 될 때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원래는 사라져야했을 존재이기 때문에 위험해질 수 있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개화해야하는거래요.

그 덕에 수업시간엔 우리 둘만 있는게 아니라 엄청난 기계들이 있는 곳에서 수업을 해요.

이 정도면 초월자 안 하면 안 되나 싶은데, 그러면 예전에 초월자로서 받은 지원들을 다시 뺏어가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힘을 길러야한대요.

에효.

수업을 들었다가 집에서 쉬었다가 친구들과 놀았다가 하다보니 벌써 기억을 잃었을 때부터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이렇게 적으면 나의 일상이 퍽 평화로워 보이겠지만, 실은 얼마전부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의 햇살, 이 편지를 받지 않았으니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 편지를 여러 날에 걸쳐서 쓰고 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졸려서 눕기 전에 노트에 조금씩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편지를 쓴 페이지의 다음 페이지에 검은색으로 글자 같은 것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노트는 나만 드나드는 내 방에서 자물쇠로 잠기는 서랍에 보관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쓴 것일 순 없습니다.

글자의 모양을 갖춘걸 보면 내 볼펜 자국이 확실하지만, 어쩐지 찜찜하군요.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안녕, 나의 햇살? 음. 찜찜한 기분을 날리기 위해서 말투를 좀 바꿔봤어요. 어색하죠? 헤헤.

오늘은 혹시 전에 쓰던 펜이 문제일까봐 문구점에 가서 펜을 잔뜩 사왔어요! 일부러 어두운 보라색 펜을 사와보았는데 어떤가요?

전 밤하늘색 같아서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도 종종 써야겠네요.

사실 만년필에 사용하는 펄잉크라는게 탐이 났는데, 만년필이 여기에 적합할지 모르는 상태로 그런 걸 사는 건 좀 아닌거 같아서 사지 않았어요.

으음~. 만년필 같은 걸 쓸 땐 잉크를 버틸만큼 두껍고 좋은 종이를 써야겠죠?

그럼 당신을 위한 편지엔 쓰지 못하겠네요. 전에도 말했지만, 이 편지는 문구점에서 사온 노트에 쓰고 있거든요. 이거 되게 얇아요.

말 나온 김에 확인해봤더니 뒷페이지에 자국이 생기거나 잉크가 묻어나지 않은거 같아요.

대신 지금 쓴 면의 뒷면에 글자가 그대로 비쳐보이네요. 역시 종이가 너무 얇은가봐요. 이 노트를 다 채우고 나면 좀 좋은 종이인걸로 바꿔볼까요?

이 편지의 뒷면에는 글을 쓸 수 없겠네요. 앞으로는 편지에 이 펜을 쓰면 안 되겠어요.

아쉽다. 이렇게 예쁜데.

오늘 다시 보니까 또 뒷면에 잉크 자국이 생겨있네요. 근데 왜 내가 쓴 펜이랑 색깔이 다르지?

일단 오늘은 종이 사이에 책받침을 끼우고 자보려구요.

잉크 자국 때문에 볼펜도 바꿔보고 종이 밑에 받침도 깔았는데 계속 자국이 생겨요.

선생님이랑 상의를 하자니 아무리 보내지 않았더라도 다른 세계의 존재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냐고 혼낼거 같아서 싫단 말이죠….

전에도 썼지만 선생님은 외부 세계로부터 이 세계를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보내지 않더라도 여지가 될 수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엄청 잔소리하실 거 같네요.

일단 글자 같은 게 생긴 페이지에는 편지를 쓸 수 없으니 종이를 뜯어내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종이낭비 아닌가요?

그러니 어떤 해결법이 뿅하고 나와주면 좋겠지만. 저 혼자서 해결하기엔 어려울 거 같아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좀 더 찾아볼게요.

그 때까진 편지 쓰는 걸 잠시 쉬려고 해요.

이게 정말 당신에게 보내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죠? 아니었다면 편지를 받지 못한 당신이 외로워질지도 모르니까요.

이 편지는 본디 시시콜콜한 제 일상을 적어볼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세상의 존재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 외엔 이 미스테리의 원인을 짐작할 바가 없어 편지는 이만 줄이고자 합니다.

어렴풋한 기억 속 따듯했던 나의 햇살. 부디 머나먼 곳의 완성된 낙원에서 행복하기를.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한 때 당신의 곁에 있었을 이 씀

편지에 마지막 한 자까지 쓰고 난 뒤, 그는 노트를 덮었다.

문구점에서 저렴하게 사 온 아무 무늬 없는 노트엔 실존 여부조차 불투명한 이를 향한 편지가 담겨있다.

앞머리도 없는 이마를 괜히 쓸어올리며 노트를 노려본 그는 의자에 편하게 기대었다.

그 움직임으로 인해 조금 흘러내린 안경을 추어올리는 대신 아예 안경을 벗어서 렌즈를 닦은 그가 안경을 고쳐 썼다.

여전히 의자에 기댄 채로, 그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생각할 것이 있을 때의 오랜 습관이다.

‘이제 누워서 휴대폰을 조금만 하다가 자야겠다. 내일은 수업이 없는 날이지만…. 대신 직장에서 친했었다는 사람들과 만나기로 했으니까 일찍 자야지.’

기억을 잃기 전에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독립했다는 부모님의 집, 기억을 잃은 자신에게도 익숙한 아늑한 침실.

의자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그는 옷장을 열었다.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골라볼 요량이었다.

수업을 들으러 다니느라 편하게 입는 옷 대신 오랜만에 원피스를 입어볼까 싶어져서, 그는 옷장의 옷들을 훑어보았다.

그때였다. 닫혀있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부모님은 그를 향한 걱정이 많은 탓에 문을 완전히 닫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딸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가 사라져 버릴까 염려하는 탓이었다.

이 방엔 에어컨이 없어 방문을 열고 거실 에어컨이 겸사겸사 이 방도 시원하게 해주길 바라야 한다.

그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문이 닫혀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이 노크는 부모님의 노크일지도 몰랐다.

혹시나 굳이 문을 닫아둬야 하는 일(예를 들면 옷을 갈아입는다거나)을 하고 있을까 미리 배려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은 어떤 위화감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그의 방문을 두드릴 땐 언제나 그를 공주라 부르며 뭐하냔 말도 덧붙였는데, 문을 두드린 상대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마침 오늘은 부모님이 두 분 다 집에 오지 못하는 날이었다. 평소엔 꼭 둘 중 하나 이상이 집에 있곤 했다는 걸 고려하면 특이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동생을 불렀고 그 애가 노크하는 거라기엔 그 애는 먼 타지에 살고 있었고, 애초에 그냥 문을 열었을 것이다. 서로 거리낄 것 없는 자매 사이이므로.

이런저런 생각들에 사로잡힌 그가 가만히 문고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옷장 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단 두 번만 두드리는 단정한 소리였다.

“…누구세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문 앞의 상대는 그저 똑같은 박자로 다시 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단정하게, 두 번. 똑똑.

“누구냐니까요?”

긴 침묵 끝에 문 너머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어주세요.”

질문에 전혀 답이 되지 않는 말이었음에도 그는 홀린 것처럼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울고 있는 상대의 품에 뛰어들며 그를 꽉 안았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큰 몸이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펄쩍 뛰느라 떠오른 어깨를 덮는 흑발이 허리까지 오는 백금발로 완전히 변하기도 전에 문이 다시 닫혔다.

그러나 주인 잃은 방의 문은 열려 있다. 아무도 없는 복도만이 그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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