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3

“어, 대전으로 가는 게 아니라 부산으로 가요? 저는 바로 다음은 대전일 줄 알았는데요.

“부산에서 광주로 바로 가는 기차가 없거든요. 강릉에서 부산으로 갔다가, 부산에서 대전을 가면 거기서 광주가는 기차는 있으니까요. 그 후에 군산 공항에서 제주도로 향하면 돼요.”

“우와, 하율 씨 진짜 지리 잘 안다.”

“기본이죠.”

화연의 컨디션에 맞춰 일주일 만에 다시 개시한 여행이다. 다행히 하율과 화연은 딱 사흘만 함께 잤고 그 다음부터는 빈 방이 생겨 인당 침대 하나라는 당연한 호사를 누리며 잘 수 있었다.

그럼 문제가 없었느냐. 그건 또 아니다. 건중이 일주일 째 연락이 안 되고 있다. 스승은 건중에게 연락을 했을 때 문제 없다고 했는데 하율의 연락만 피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찜찜하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스승에게 건중이 자신의 연락을 피하는 거 같다고 전해도 스승 또한 알아보겠다고 할 뿐, 별다른 회신이 없다. 허나 눈 앞에 있는 화연이 다시 힘내서 움직여보자고 방방거리는 것을 보면 첫 번째, 할아버지에게 연락을 안 하고 있거나 두 번째, 연락이 되니까 별 다른 걱정이 없는 것일텐데 하율은 이걸 어떻게 물어볼지도 고민해야 한다.

두 번째로 난감한 것은 화연이 너무 오랜 만에 바깥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묘하게 허물이 없다. 물론 사교적인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어떻게 사람이 겨우 일주일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이리 친밀하게 굴 수 있는건지. 하율은 진심으로 경이로움을 느꼈다. 특히 샤워하고 나와 젖은 머리에 에센스 바르는 것을 도와달라고 할 때나, 발이 아프니 같이 주물러 달라고 할 때는 제 아무리 목석같은 하율이라도 조금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긴 할테지만 화연이라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이러나? 당사자에게 “원래 그리 허물 없으십니까?” 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앞으로의 여행도 하율 혼자 첩첩산중이다.

화연은 하율의 속을 알리 없으니 부산 물떡을 먹어보고 싶다, 거기 맛있는 만두집이 있단다, 아이패드를 꺼내 톡톡 두드리며 그녀 혼자 종알거렸다. 4자리를 빌린 기차는 짐을 여유롭게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쾌적했고 화연은 흔들리는 버스보다 멀미가 덜한지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지나가는 풍경을 소중히 눈에 담았다.

“새삼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한국도 참 넓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가요.”

“저는 어렸을 적에 외국에서 살았거든요. 미국이랑 스페인, 그 외에 여러군데… 그땐 세상이 넓다고 생각 못했던 거 같아. 내가 언제든 걸어서, 뛰어서, 날아서 다닐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죽을 날을 받아두고 보니까 한국조차 제대로 정복하기 어려운 거였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아파도 계속 다녀볼걸.”

밝은 표정으로 말하는 음울한 이야기. 하율은 둘 중 어느 것이 화연이 내비치고 싶은 모습인지 생각해보다가 둘 다 진짜 화연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화연 또한 별 다른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혼자 말을 이어갔다.

“외국에선 화연 발음이 잘 안 된대요. 지금 생각해보면 지들이 발음하기 어려우면 뭐 어쩔거야, 내 원래 이름인데. 근데 그때는 외국 친구들과 쉽게 친해지고 싶어서 이름을 새로 지어서 세리아 라고 소개했어요. 백 세리아. 예쁘죠? 지금 날 세리아라고 불러주던 그 친구들은 날 기억하고 있을까요? 기억한다면, 활발하게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내가 곧 죽는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어줄까요. 나는 이제 친구가 별로 안 남아서요,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누군가 나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의 소음, 커지다 줄어들다를 반복하는 어린 아이들의 웃음, 햇빛이 내리쬐는 오후가 지나가는 시간의 소리.

“하율 씨는 나를 기억할까요.”

“…네.”

하율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간결한 대답이나 거짓이 느껴지진 않아 철부지 고용주는 몹시 만족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 하율은 계속 눈을 감았는데도 잠들지 못했다. 재액이 들끓는 거 같이 불편했다.


부산에 도착하니 저녁 시간이다. 둘은 부산역 앞에 있는 차이나 타운에서 저녁을 먹고 내일 태종대로 가 해신을 만나기로 했다. 차이나 타운은 방학기간이라 평일에도 사람이 많았고 화연은 다섯 군데의 리뷰를 계속 비교해보다 제일 깔끔하다는 리뷰가 많은 곳으로 가 하율과 만두를 먹었다. 새우만두, 고기만두, 뭐시기 뭐시기.

"그렇게 많이 먹으면 이따 숙소 갈 때 멀미하는 거 아녜요?“

“택시 타고 십오분 밖에 안 걸린다고 하는 걸요. 그정도로 멀미하진 않을 거예요. 와, 근데 하율 씨 진짜 입이 크긴 하다.”

“네?”

“이것 봐요.”

화연은 먹던 만두를 보여주었다. 반을 깨물어 갈라진 만두 안에서 육즙이 촉촉히 베어나오는 좋은 부추만두였다. 하율이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화연은 남자들은 이래서 안된다느니, 세심하지 못하다느니 종알대며 하율의 주둥이에 손을 댔다.

“저보다 두배는 길어서 이 긴 만두를 한 입에 먹잖아요. 안 뜨거워요?”

“아, 그런 얘기였구나. 이제 알았네요.”

하율은 시선을 살짝 피하며 부추만두를 하나 더 집었다. 화연은 너무 갑작스레 하율의 주둥이를 잡았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떼며 작게 사과했다. 어째선지 손이 살짝 뜨거운 거 같다. 온기를 인식하고 부턴 자신이 부쩍 하율에게 손을 닿으려고 하는 일이 잦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고, 삶의 열이 묻어있는 손을 쥐면 하율이 눈 앞에서 커다란 만두를 한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어 눈길이 간다. 화연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란색 종이에 붉은 글씨로 ‘물은 셀프’라고 씌여져 있는 코팅 종이가 붙어있는 정수기로 가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역시 잘생기긴 했지. 하지만 내 취향은 좀 더 다정한… 곧 속으로 핑계를 대는 것 조차 구질구질한 일인걸 깨닫자 아예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둘은 식사를 끝마치고 택시에 타기 전 지난 번과 같은 일이 없도록 예약 확인 전화까지 마치고, 안에서 나누어 먹자며 부산역 안에 있는 비앤씨에서 빵을 한가득 사 숙소로 이동했다. 결국 과식한 화연은 체했고 하율은 밤새 손을 주물러줬다.

그동안 화연은 기묘한 꿈을 꾸었다.

처음 보는 부드러운 손이 계속 자신을 쓸어주었는데, 화연은 거리낌 없이 그를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는 화연을 꼭 끌어안고 곧 볼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호랑이는 그이가 기뻐하는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엄마’ 품 속 어린 아이는 계속 그 존재에게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했다. ‘엄마’는 연신 감탄하며 수고가 많았다고 했다. 화연은 문득 의문이 들어 입을 열었다.

“엄마, 그럼 이번 여행이 끝나면 나는 가는 거잖아.”

“응, 그렇지.”

“남은 이들은 어떡해? 할아버지나, 아빠나, 엄마나, 하율 씨나…”

“남은 이들은…”

그 존재의 대답을 듣기 전에 화연은 잠에서 깼다. 옆에선 하율이 피곤한 내색도 없이 차가운 손을 계속 주무르고 있었고 화연은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화연 씨, 왜 그래요. 많이 아파요?”

“아냐, 아픈게 아니라…”

“있어봐요, 소화제를 좀 더 사올테니까…”

“아니래도!”

그녀는 높은 소리를 내지르며 하율의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하율은 가만히 그녀를 살피다 곧 겁에 질렸다는 것을 눈치채고 등을 쓸어주었다. 화연이 눈물을 떨굴 때마다 또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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