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2
하율세랴 1주년 기념
백화연은 하율이 네 번 정도 흔들었을 때 간신히 눈을 떴다. 멀미가 워낙 심해 기절하듯 잠들고 일어날 때도 고생을 깨나 한다고 했다.
그녀는 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주소를 찍고 버스로 가는 길을 검색했다. 하지만 성황당 같은 사당은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는 있겠으나 교통이 좋은 곳에 있을 리는 만무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서 삼십분. 하율 혼자라면 왕복 세 번도 우스울 거리였으나 옆에 있는 환자에겐 부담이 큰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걸어보고 나중에 택시 타면 안 돼요?”
“그땐 택시가 안 잡힐 텐데요.”
“그럼 쉬면서 가죠.”
하율의 성격이 조금만 모난 사람이었다면 고집쟁이 호랑이라며 속으로 혀를 찼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다행히 그는 맡은 바 임무는 충실히 하고 의뢰인의 뜻을 따라주는 좋은 무당이었다. 버스가 올 때까지 한 시간, 그들은 터미널에서 파는 팔천 원짜리 우동과 김밥 세트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듣기론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 하더니 제법 의욕적으로 우동면을 씹어 넘기는 모양새가 화연이 이 여행에 얼마나 열의를 띄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식사를 이어가던 중 화연은 창밖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하율에게 물었다.
“하율 씨는 무당이잖아요.”
“네, 그렇죠.”
“무당이어서 좋아요?”
“…”
알 수 없는 질문을 하는 화연의 표정은 어딘가 희망에 차 보였다. 곧 죽을 사람에게 어떠한 대답이 필요한지 하율로서는 알 수가 없어 솔직하게 제 심정을 전하기로 했다.
“좀 힘들긴 한데 산사람 죽은 사람 다 잘되라고 하는 일이니까 뿌듯하기도 하고 나쁘지는 않아요.”
“그렇구나.”
“왜요?”
“그냥요, 눈앞에 내가 목표하는 걸 이룬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어지잖아요.”
“그런가요.”
“진짜 말주변 없다. 하율 씨 그런 이야기 많이 듣죠?”
대뜸 타박을 뱉는 얼굴은 생명이 꺼져가는 사람이라기엔 짓궃고 웃음기가 가득해서 하율은 그녀의 농담에 불쾌한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우동을 먹던 젓가락으로 김치를 한 입 집어 먹으며 피식 웃곤 마주 장난을 칠 뿐이다.
“너무하시네, 화연 씨는 상식적인 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고용주한테 몰상식이라고 한 건가요?”
“알겠어요, 취소할게요.”
화연은 크게 웃으며 자신이 다 먹지 못한 김밥 꽁다리를 원래 끝부분이 제일 맛있는 거라면서 하율에게 넘겼다. 하얀 여우는 자신도 좀 배가 불러 있었으나 석 달을 함께할 남의 집 귀한 손녀의 익살이 나쁘지 않아 마지막 꽁다리까지 입에 넣었다. 단무지가 평소보다 더 달게 느껴졌다.
버스는 빙빙 돌며 산길을 오르다 ‘이윤자 씨 댁 앞’이라는 정류장 앞에 그들을 내려주었다. 사람 이름이 정류장일 정도로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화연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지 하율은 계속 익숙지 않은 핸드폰을 뒤적이며 긴급 핫라인과 고용주의 번호를 외고 있었고, 화연은 보디가드의 걱정은 전혀 모른채 힘차게 발을 딛었다.
“이 여행 때문에 신발까지 새로 샀어요.”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나이키 한정판이라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워킹할 때 신기술이 들어가서 발에 부담이 안 가고 좋대요.”
“그래서 그 신기술이 잘 느껴지나요?”
“음, 조금은요. 발이 좀 더 가벼운 거 같아요.”
그녀는 스물 이후로 병원 외엔 집 반경 1km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율은 등산이 취미일 정도로 아웃도어인 사내라 갇혀있듯 사는 삶이 답답하지 않았냐, 걱정 어린 말을 뱉고 싶었지만 가여운 새끼 무당의 삶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참견은 그만두기로 했다.
다행히 새로 산 신발이 톡톡히 효과를 발휘했는지 백호는 걸은 지 이십 분이 지나도 주저앉을 기색이 보이진 않았다. 하율은 미리 챙긴 물을 건네기도 하고, 추운 날씨에도 꺼지지 않는 군용 핫팩을 열심히 흔들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화연은 분명 지친 듯 했으나 칙칙한 눈매엔 점점 생기가 돌고 헐떡이는 숨을 뱉는 입은 호선을 그렸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요.”
“으아, 죽겠다. 우리 한 번만 쉬었다 가요.”
“좋아요, 여기까지 안 쉬었으니까 조금 오래 쉬어도 돼요. 막차 시간 6시랬으니까 여유 있어요.”
“어떻게 막차가 6시야. 저는 정말 시골 체질이 아닌가 봐요.”
서울깍쟁이는 썩은 나무덩이에 앉아 투덜거리며 맑고 차가운 공기를 폐 안으로 있는 힘껏 들이켰다. 습, 후. 그녀의 호흡이 끝난 직후, 하율은 갑작스럽게 화연 안에서 ‘화연’이 밀려난 것을 눈치챘다. 곁에서 막을 새도 없이 너무 갑작스러운 빙의다. 사신 기우의 힘이라고 느끼기엔 하율은 이미 기우를 만난 적이 있었다. 푸르른 산의 냄새,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의 코골이 같은 것이 주변에서 부쩍 크게 들렸다.
“성황당을 찾은 무당들, 여긴 어쩐 일이냐?”
이어 고개를 돌린 화연은 이미 화연이 아니었다. 산의 주인, 토속 신앙에서 군림하는 신께서 그녀의 몸을 잠깐 빌려 들어왔다. 하율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산신에게 인사를 하러 가서 문전박대당하는 일이야 흔히 있으니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었으나 대뜸 빙의를 해서 들어오는 것은 악귀나 용건이 없는 이상 굳이 하지 않는 일이다. 이 산에 모셔진 신은 악귀도 아니고, 하율에게 용건을 묻는 것을 보니 본신이 할 말이 있어 들어온 것은 아니다.
하율은 최대한 본체의 체력을 빼지 않는 선에서 이 신을 어떻게든 돌려보내야 했다. 일단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두어 걸음 정도 떨어져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원 백씨, 사신의 아이 백화연과 영도 하씨, 재액의 그릇 하율. 인사를 드리러 등산 중이었습니다.”
“그래? 사신의 강아지 치고는…”
산신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웃었다.
“사신의 것으로 품을 수 없는 것이구나.”
“예?”
“됐다. 난 또, 갑자기 와서 사당이라도 내놓으라고 하는 줄 알았더니…”
빙의하던 신은 시시할 정도로 쉽게 몸을 빠져나갔다. 화연이 앞으로 고꾸질 뻔한 것을 하율이 재빨리 잡았고, 품에 안긴 호랑이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아직 점심 때니 한 시간 정도 이리 자게 두면 충분히 회복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신의 말이 찜찜했다. 사신의 것으로 품을 수 없는 아이.
간혹 그런 이들이 있긴 하다 들었다. 태어날 적부터 세상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라서 신이 잠깐 인세 구경을 시켜주고 금방 거둬들인다는 명 짧은 아이들. 대개는 금방 가버린 자식을 품에 묻은 부모들에게 위로처럼 하는 말인데, 이 사람은 진짜인 것일까? 품에 쓰러져 지친 얼굴로 숨을 뱉는 이 여자도 신이 잡은 아이인 것일까? 신이 이십 오년 정도면 충분히 놀았다고 생각해 그녀를 거두려는 걸까? 하율은 갖가지 생각이 스쳤으나 안겨있던 여자가 움찔거리며 입술이 새파래져 잡념을 지우고 가방에서 목도리를 꺼내 두르고 핫팩으로 차가워지는 손을 녹여주었다. 어느 쪽이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다행히 화연은 한 시간 반 만에 눈을 떴고,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사당에 인사를 드리고 하산한 시간이 다섯 시였다. 화연은 자신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자기효능감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며 핫팩을 흔들었다.
“봤어요? 사당 앞에서 절했더니 갑자기 주변이 좀 따듯해졌었잖아요. 정말 봄이 오는 기분이었다니까요. 저는 살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 느껴봐요.”
“네, 대단하던데요. 역시 기우 님의 아이입니다.”
“아이, 부끄럽게 그러지 말아요! 점도 못 보고 굿도 못 하는 사람한테 기우 님의 이름을 붙이다간 누가 될 거 같아요.”
호랑이는 여우의 팔을 퍽퍽 치며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웃었다. 하율은 웃으며 고용주에게 특수한 사항을 전했으나 상대에게선 답이 오지 않았다. 설마 백건중 씩이나 되는 인물이 잠적할 리는 없고, 바쁜 일이 있겠거니 싶어 일단은 핸드폰을 집어넣은 채 둘은 숙소로 향했다.
“네? 방이 하나가 나가다니요? 이중 예약받으신 거예요?”
어째 일이 잘 풀리나 싶더니. 가끔 양심 없는 업소들이 앱을 통해 이중 예약을 받아두는 일이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나 그 일을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함께 겪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율은 기막혀하면서도 빠른 대처를 위해 주변 업소들에 전화를 돌려보았고 화연은 비양심적인 사장에게 비판과 보상안을 퍼부으라며 성을 내었다. 하지만 배 째라는 사장과 주변에 변변찮은 숙소가 없는 불행에 불행이 겹쳐 둘은 한 방, 한 침대에서 같이 잘 수밖에 없게 되었고, 하율은 그날 담배 전 내가 나는 소파에 누워 베개도 없이 잠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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