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하율세랴 1주년 기념
하율은 아침부터 스승이 수선을 떠는 것을 오랜만에 보았다. 충청도에서 알 사람은 다 아는 거물 중 하나가 온단다. 하율, 재액을 품은 남자를 보고.
가게 안으로 들어 온 손님은 풍채가 대단하거나 기골이 장대한 이는 아니었으나 샛보라색 눈이 사람을 꿰뚫고 긴 수염에서 연륜이 느껴져 천안 호두과자 다음으로 유명한 무당, 백건중을 더욱 중후한 무당으로 보이게 했다. 감 색 한복은 척봐도 관리가 잘 되어 보였고 손은 말랐으나 관절 하나 도드라진 부분이 없어 험한 일이라곤 줄곧 안 한 무당의 세월을 보여줬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 아니, 분이라면 바로 그것이겠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영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낮게 울리는 호랑이의울음 소리를 듣고 백건중의 뒤에서 새카맣게 불타는 사신의 눈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먼저 쇼파의 가장 상석에 앉고 마실 것은 됐다며 짧은 인사치레를 모두 생략했다. 스승은 긴장한 기색도 없이 재빠르게 하율을 데려다 자신과 맞은 편에 앉혔다.
“XX년 8월7일생, 재액에 씐 친구가 이 친구 맞습니다. 저주가 워낙 촘촘해서 망일은 보실 수 없을 거고요. 집에 부모님은 전부 살아계십니다.”
“알았네.”
백건중은 하율을 천천히 아래위로 훑었다. 하율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으나 자신은 맡은 일을 하면 그만이고, 몸 안에 들어있는 재액으로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었다. 고객은 초침이 육십번 정도 흔들거린 후에야 소매에서 사진을 하나 꺼냈다. 그와 똑 닮은 얼굴이지만 젊고, 어리지만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보랏빛 눈동자. 눈은 앞쪽으로 약간 뾰족하며 굽이치는 머리카락은 나름 관리를 하는 듯했지만, 어딘가 푸석푸석한 감을 숨길 순 없었다.
“손녀일세. 백화연, 올해로 스물다섯 살.”
“네. 손녀…”
“곧 죽어.”
“아.”
한숨을 쉬던 노인이 입을 다물자 옆에서 새카만 팔이 나왔다. 천안의 자랑이 모시는 신, 사신 기우는 백화연의 사진을 들고 침통한 무당 대신 냉정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본래 그림을 잘 그리던 아이, 어릴 적부터 각국을 돌아다녀 온갖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아이. 하지만 몸이 너무 약했다. 어릴 적부터 피가 나면 멈추질 않았고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몸살로 일주일은 38도가 넘는 열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좋아하는 그림도 사절 캔버스를 채우기 전에 손발이 저려 붓을 떨궜고 갑자기 열 발작을 일으켜 응급실에 가길 수십번. 병원에선 병마가 아니라 타고난 몸이 약하다고, 평생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젊었고 꿈이 있었다. 백화연은 백호랑이 집안의 몇 안 되는 영안 보유자로 자신이 꼭 기우를 받아 무당으로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이 일로 일 년 넘게 가족과 싸웠으나 가족은 툭 치면 부러질 거 같은 그녀가 사신을 받는 걸 강경히 반대했다. 외려 이 싸움이 더 독이 되어 돌아올 줄 몰랐던 거겠지.
“독이라고 하면은…”
“크게 상심해서 몸이 더 안 좋아졌다. 앓아눕기를 2주, 나는 이리 두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해 건중에게 아이의 망일을 말해주었다.”
“석 달 남았다고 하더군.”
입을 다물고 있던 백건중이 한숨 쉬듯 뱉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벌레가 기어들어가 죽은 조명이 무당들을 내리쬐었다. 스승은 자질구레한 사연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으나 의뢰자가 할 말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무당은 다시 수염을 쓰다듬다가 입술을 뗐다.
“하율, 자네가 내 손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줬으면 하네. 선금은 천만 원, 그 이후에 화연이가 죽으면서 행복하게 간다면 삼천만 원 더 얹어주지. 물론 만족하지 못했다면 이천만 원으로 줄어들고.”
“네?”
하율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여행을 가면 죽는 몸이라고 설명했는데 멀리 떠난다는 것은 이상했다.
“무당으로서의 여행이야. 기우 님의 힘 일부를 화연이에게 내려주고, 내가 젊었을 때 했던 것처럼,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거지. 자네는 이런 거 안 해봤지? 나이 든 무당들이나 하는 성지순례 같은 거라서.”
백건중 말대로 하율은 해본 적 없는 일이다. 옆에 있는 스승은 해보았을까? 표정으로 물어보아도 그는 백건중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백건중은 짧게 약도를 알려주었다. 서울에서 시작해서 팔도의 가장 힘 있는 토지신과 해신을 만나고, 마지막 제주도의 성산일출봉에서 설문대할망께 인사를 드리면 끝. 하율은 그녀를 곁에서 지켜주고 몸 상태를 살피어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면 막고, 쓰러지면 근처에 있는 병원에 데려가는 것이었다.
“자네는 화연이랑 사주 궁합이 좋거든. 분명 좋은… 젊은 애들 말로 뭐라고 하더라.”
“시너지다, 건중.”
“기우 님은 참 별걸 다 아십니다.”
“화연이가 알려줬다.”
하율은 대충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일은 이주 뒤,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강원도 강릉시로 향해 성황당으로 가는 것부터 시작한다. 스승은 백건중이 돌아간 뒤 대박 손님이라며, 여기서 네가 좀 더 잘하면 보너스를 팍팍 쳐주실 거라고 했다. 하율은 또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가야 하는 사람의 곁을 지켜주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주 뒤에서 하루가 지난 화요일. 건중과 같이 서울에서 첫인사를 드린 백화연은 아팠고, 월요일에 간신히 열이 떨어져 화요일로 날짜가 밀렸다. 하율은 예상하던 일이라 별로 짜증이 나지도 않았다. 강릉으로 가는 버스 승강장 앞에서 30분 뒤의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10분 정도 남았을 즈음, 사진과 똑같이 생긴 여자가 분홍색 백팩, 연두색 캐리어를 끌고 등장했다. 미술을 했다더니 미적 감각은 확실히 있는 듯 위아래로 입은 편한 옷도 제법 스타일리쉬하고 색채가 짙어 하율과 대비되어 보이고 눈빛 또한 환자치고는 생기가 돌아 그나마 나은 날 나온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 하율 씨 맞으세요?”
“네, 안녕하세요. 하율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목소리는 생기가 맴돌지 않는다. 그녀가 쥐어짤 수 있는 최선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의 고생길은 훤할 텐데 과연 괜찮을까. 하율은 선금으로 받은 천만 원에 후에 있을 삼천만 원까지 생각하며 기뻐하는 스승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짐은 이리 주세요.”
“제가 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화연이 제법 고집이 세다는 백건중의 설명이 다시 떠올랐다. 이 정도는 내버려둬도 되나. 아직 그녀가 어느 정도로 병약한지 파악하지 못해 잠깐 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몸만한 캐리어를 들지 못해 낑낑거려 결국 그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석 달간 여행 짐이라기엔 정말 최소한만 가져온 것인 듯, 성인 남자가 들기에 무리인 정도는 아니었다. 호랑이는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율과 화연은 나란히 버스에 탔다. 생각보다 많이 약한데. 화연에 대한 첫인상은 대략 이러하다. 그녀는 버스에 타자마자 멀미가 심하다며 귀미테와 마시는 멀미약을 먹고 하율에게도 멀미하면 고생한다며 필요하지도 않은 멀미약을 쥐여 줬다. 곧 버스가 출발하자 화연은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하율은 버스가 달리는 내내 옆에 있는 화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다가 발작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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