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Quaking the wave

오리지널 (w.윤묵)

희게 쌓여 꽁꽁 얼어붙다 종내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눈의 빈자리를, 안온한 온기 좇아 움트는 생명력이 채워나가며 푸릇하게 물들일 무렵이었다. 그 말은 곧 희연이 대학생의 신분을 벗고 요원 훈련생의 신분을 입게 된지 반 년 정도가 지났다는 뜻이다. 그와 더불어 부모님과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기간이기도 했다. 희연은 자신이 센티넬임을 알게 되었던 바로 다음 날 빠르게 자퇴서를 제출했고, 이튿날 곧장 기숙사에 입소했다. 그간 부모님으로부터 종종 메시지나 전화가 오긴 했더랬다. 잘 지내냐던가, 기숙사는 어떠냐던가. 그때엔 엄마가 말실수를 했다 전해오는 사과, 걱정되니 한 번은 연락을 해주면 좋겠다는 부탁에 가까운 메시지들이 희연의 답장을 물고 돌아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희연도 스스로의 마음을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염려와 걱정,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속내의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당신들의 딸을 바라보는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미운가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는데, 또 어느 날은 원망이 마음의 밑바닥에서 자글자글 끓기도 했고 때로는 스스로의 치졸하고 어린 모습에 혐증이 일기도 했다. 하여 희연은 매일같이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을 끌어안은 채 홀로 삭히길 반복했다. 어려서부터 여러 운동을 거쳐 온 덕인지 몸을 쓰는 훈련은 딱히 고되지 않았다. 몸이라도 못 견딜만큼 힘들면 매일 밤 금세 곯아떨어지기라도 할 텐데 그마저도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사희연 훈련생, 잠시만 이리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론 교육을 마친 후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던 희연은 저를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멈춰섰다. 말간 낯에 의문이 서린 것도 잠시, 희연은 곧 이유를 짐작한 듯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저를 불러세운 이에게로 다가갔다. 

“능력 통제 훈련에 동행할 가이드가 배정됐어요. 다른 안내사항은 다 들었죠? 장소 같은 거.”

“네. 미리 안내 받아서 알고 있어요.” 

“훈련 시작일이 언제였죠?” 

“다음주 화요일이요.”

“그럼 가이드 분께 열 시까지 그 곳으로 가라고 전달해둘게요. 시간 괜찮아요?” 

“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가볍게 묵례를 건넨 희연이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희연은 아직 자신의 능력을 완벽히 컨트롤하진 못하는 상태였다. 희연의 능력은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던 것을 이용하여 발생시키는 쪽이지, 무언가를 생성케 하는 쪽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거기 더해 피아구분이 어려운데다 능력의 규모를 아직 원활히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기관 내의 훈련장이 아닌 외부의 다른 곳에서 훈련을 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관 건물을 흔들고 훈련장의 바닥을 쪼개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리고 다가온 다음주 화요일. 약속된 훈련지에 도착한 희연이 바이크의 시동을 끄고 헬멧을 벗으며 눈을 찌푸렸다. 오전 특유의 부드러운 햇볕이 고스란히 내리쬐여 눈이 부셨던 탓이다. 희연은 눈썹 위로 손차양을 만들며 높은 철책이 둘러싸고 있는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군데군데 군집을 이루고 있는 이름 모를 풀들과 벌겋게 드러난 땅이 뒤섞인 나대지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기관의 소유 아래에 있는 통제지역이라던가. 민간인 접근을 막고 있기 때문에 희연과 비슷한 성질을 띠고 있는 능력을 위한 훈련장으로 종종 쓰이곤 한다 설명을 들었다. 철책 앞에 다다르기 전―아마도 약 3km 지점이 아닐까 가늠하는―부터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니 자신의 능력에 누군가 휘말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바이크에 올라탄 채 멍하니 철책 너머를 훑고 있던 희연은 저만치서 들려오는 차량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차 한 대가 울퉁붕툴한 흙길을 밟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흘긋 손목시계를 확인한 희연은 바이크에서 내려서며 헬멧을 시트 위에 적당히 올려두었다. 아직 약속된 시간보다 30분이 이른데.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하나씩 꽂아넣고서 그런 생각을 가벼이 흘려보내는 사이, 멀지 않은 곳에 차가 멈춰섰다. 사전에 이름과 연락처를 전달받긴 했으나 먼저 연락을 넣어보진 않았더랬다. 어차피 며칠 뒤면 만나게 될텐데 굳이 그래야할까 싶었던 탓이다. 뭐, 저쪽에서도 딱히 연락을 취해오진 않았으니 피장파장이리라. 

“일찍 와 있었네요. 희연 씨, 맞죠?” 

“네. 안녕하세요. 박윤묵 가이드님.”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않아도 되는데.” 

웃음기 띤 얼굴이 상당히 부드럽고 유하다는 인상을 안기긴 했는데, 한편으로는 마냥 유하기만 할 것 같진 않기도 했다. 희연은 제쪽으로 다가오는 윤묵의 얼굴을 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분명 어디서 느껴본 이미지인데. 어디서 느껴봤더라. 고민의 답은 금세 나왔다. 교회 오빠. 그러니까, 흔히들 ‘교회 오빠’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그런 이미지 말이다. 두어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선 윤묵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부를 땐 그냥 선배라고 해도 돼요.” 

“전 아직 정식 요원이 아닌데도요.” 

“곧 될 거니까 예행연습이라고 하면 되지. 싫어요?” 

“아뇨, …선배님. 잘 부탁드릴게요.” 

가분하게 마주 잡았던 손을 놓으며 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훈련생에 불과한 신분으로 정식 요원을 선배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긴 했다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익숙해져야 할 일이니 조금 미리 부른다고 문제가 되진 않으리라. 시시콜콜한 신변잡기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희연은 윤묵과 나란히 철책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철책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윤묵이 갖고 있었으므로 희연은 그가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어젖힐 때까지 옆에 얌전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안으로 조금 걸어들어가서 하는 게 좋겠죠?”

“음…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검은 가죽 워커 아래에서 사박사박 짓눌리는 잡초의 비명을 배경음처럼 내리깔고서 걸어들어가길 얼마간, 희연은 둥치가 제법 커다란 나무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저 정도면 좀 흔들려도 쓰러지진 않겠지. 

“되도록 저 나무 근처에 서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선뜻 고갤 끄덕인 윤묵이 나무 아래로 걸음을 뗀다. 되묻지 않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희연은 도리어 조금 안심했다. 부탁의 이유를 되묻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제 능력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잘 파악하고 숙지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윽고 나무 아래에 다다른 윤묵이 이쪽을 향해 돌아서며 언제든 시작해도 좋다는 듯 가볍게 손짓한다. 고개를 끄덕인 희연이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상냥하고 포근한 봄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와 뺨을 어루만지고 멀어진다. 제각각의 키로 솟은 잡초들이 몸을 흔들었다. 

희연은 아직도 자신의 능력이 발동되는 기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쓰고자 하면 능히 쓸 수 있을 뿐. 분명 낯설기 그지없는 능력임에도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하고 기이한 감각이었다. 물론 아직까진 세밀한 범위 조절이나, 발동 범위 주변으로 퍼지는 여진과 같은 것들을 완벽히 제어하는 것이 미흡하긴 했지만 말이다. 괜히 뒷목을 주물러 풀어낸 희연이 두 발로 단단히 땅을 딛고 선 채 눈을 내리감았다. 방금 전까지 시야에 담기던 땅을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려낸다. 굳이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어려움은 없었으나, 희연은 조금이라도 빠르게 제 능력의 목줄을 손에 감아쥐고 싶었다. 

땅의 흔들림을 상상한다. 깊고 닿을 수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진동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번져 표면으로 치닫는다. 땅은 낮고도 무거운 울음을 토해내며 떨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치밀한 조직처럼 짜여진 땅은 찢어지고, 갈라져 종내엔……. 낮고 엷은 숨을 내쉰 희연의 귓가로 우르릉, 나직한 소리가 스민다. 감고 있던 눈을 뜬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산들거리던 잡초들이 바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두려움을 느끼듯, 가느랗던 떨림은 점점 더 진폭을 키우고 저만치 떨어진 철책들이 삐걱이며 덩달아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희연은 넓게 퍼진 지진의 범위를 감각한다. 땅에 접한 모든 것이 흔들리는 가운데 곧게 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저 하나 뿐이다. 진동을 켜켜이 쌓는다. 더하고 더하여 그 어떤 것도 오롯이 설 수 없도록. 

“우와, 와. 헉, 우와…악. 희연 씨!” 

제 이름에 반응하듯 눈을 깜빡인 희연이 빙글 돌아섰다. 나무 아래에 서있기만 했던 윤묵이 어느샌가 두꺼운 나무를 껴안은 채 흔들림을 견디고 있었다. 희연의 얼굴 위로 미미한 낭패의 빛이 스친다. 제 뒤로는 진동이 안 가게 하려고 했는데. 등 뒤로 쩌적이며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연 씨, 그만! 아이고.” 

숫제 주저앉은 윤묵이 한 번 더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일시에 능력을 거둬들였다. 주변을 흔들던 떨림이 잦아듦과 비슷하게 핑 도는 시야가 어지러워 희연은 휘청이다 풀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능력을 사용하고 찾아드는 패널티에는 익숙해지지 못한 탓이다. 과연 이걸 정신력으로 견뎌낼 수 있는 날이 올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기도 했고. 눈앞이 어질어질하니 금세 속까지 울렁거려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손으로 땅을 짚고 패널티를 감내하는 사이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희연 씨, 잘했어.” 

잘했을 리가 없는데요. 어지러워 내뱉지 못한 말이 입안만 맴돌다 바스라진다. 희연은 들쭉날쭉한 감각으로 윤묵이 제 앞에 다다라 눈높이를 맞추었음을 간신히 느꼈다. 이윽고 낯선 감각이 피부로 스며들듯 밀려들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무형의 어떠한 것이 보드랍게 닿아온다. 가이딩을 받을 때면 느낄 수 있었던 묘한 감각. 이를 파장이라 부른다는 것은 익히 배워 알고 있다. 제게도 파장이 있음을 안다. 희연은 낮고 무겁게 아래로 내리깔린 자신의 파장 위로 스미듯 번지는 감각에서 불현듯 포말을 떠올렸다. 사붓하게 달려와 감싸안는 파도 같기도 했다. 긴 거리를 달리고 달려 갈증 끝에 메마른 목을 적시는 물처럼 달았다. 

울렁임과 어지럼이 서서히 잦아들면, 잔잔해진 표면 위로 엷은 혐증이 서릿발처럼 내려앉는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가이드의 파장을 달게 느끼는 스스로를 향한 불쾌감. 이능을 사용함에 있어 페널티를 떠안는 것은 센티넬과 가이드가 같다. 그러나 센티넬의 페널티는 가이드의 이능으로 상쇄할 수 있다. 희연은 이 사실을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기이한 구조라고 생각했다. 센티넬의 페널티를 위해 가이드는 능력을 사용하고 페널티를 온전히 떠안는다. 그들의 페널티를 상쇄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이드를 갉아먹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제 괜찮아요. 가이딩 그만하셔도 돼요.” 

“…응. 괜찮아졌으면 다행이네요.” 

가이딩을 진행하는 동안 마치 명상하듯 눈을 내리감고 있던 윤묵이 고개를 든다. 시선을 마주하며 희연은 그가 떠안을 페널티라는 부담에 대해 생각했다. 페널티는 몇 가지 패턴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으니 자신이 배워 알고 있는 증상들 중 어떠한 것이 나타나리라.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요?”

“임무도 아니고 훈련일 뿐인데 능력 쓰시게 해서요….”

사과를 건네는 사이 시선을 내리깔았던 희연은 제 앞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웃음소리에 눈만 슬금 들어 윤묵을 쳐다보았다. 읏차,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윤묵이 잡고 일어서라는 듯 손을 내민다. 

“미안해할 일 아니에요. 적절한 가이딩을 받지 않아서 폭주하게 되는 일이 더 위험하니까.”

“……네….”

“얼른 일어나요. 다음 훈련은 언제가 편해요?” 

티나지 않게 볼 안쪽을 꾹 씹은 희연이 내밀어진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가이딩을 받지 않아 폭주의 위험도를 높이는 것은 분명 삼가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제 손을 붙잡은 상냥하고 부드러운 손길을 감각하며 희연은 예감했다. 가이딩이라는 행위가 자신의 뿌리 깊은 딜레마가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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