聽思必聰
오리지널 (w.지안)
검은 보스턴백과 함께 택시에 몸을 실은 희연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도로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하늘은 눈이 시릴만치 파랬고, 군데군데 솜을 찢어둔 것처럼 흩어진 구름이 퍽 운치 있었다. 딱 어딘가로 떠나기에 적절한 날씨라는 소리다. 얼마간 도로를 달리는가 싶던 택시가 신호에 걸려 서서히 멈춰 섰다. 제각각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눈으로 좇는다. 바쁘게, 혹은 여유롭게 걷는 사람들을 볼 때면 종종 낮과 밤의 대비를 떠올리곤 한다.
드물게 밤잠 이룰 수 없는 날이면 홀로 산책을 하거나 바이크를 끌고서 가벼운 드라이브를 할 때가 있었다. 새벽 서너시쯤이 되면 도로를 달리는 차의 수도 확연히 줄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는데, 희연은 그 순간 느낄 수 있는 도시의 적막이 좋았다. 딱히 감수성이 풍부하고 말랑한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희연은 밤이 가져오는 어떠한 감상이나 기분이 사람의 마음을 무르게 만든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쪽이긴 했다. 새벽에 잠긴 도시는 어딘지 모르게 안온하다고 해야 할까.
“한이관에 가시는 거면 거기 직원이신가 봐요?”
상념 속에서 유영하던 의식을 건져올리는 택시 기사의 음성에 희연이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었는지 주행을 이어가느라 정면을 주시하던 눈이 룸미러를 통해 마주친다. 감추려는 노력은 하는 듯했지만, 호기심이 스며든 눈빛을 몰라보기란 쉽지 않았다. 요원이 된 이후 수도 없이 마주쳐온 감정이 바로 호기심이었으니까.
“네. 한이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럼 센티넬이나 가이드들도 보겠네요?”
희연의 얼굴에 모호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 사람이 가진 호기심의 기저는 과연 어느 쪽일까.
“아무래도요. 같은 한이관 소속이니까요.”
방향지시등이 딸깍딸깍 규칙적인 소리를 낸다. 곧 좌측으로 꺾이는 차의 움직임을 따라 몸이 가벼이 기울었다.
“그 사람들은 국가에서 뭐, 특혜 엄청 받는다면서요. 돈도 돈이고 다른 지원도 잔뜩 몰아준다던데. 진짜예요? 아무리 그 사람들이 크리처 잡는데 고생한다고는 하지만 좀 그렇지 않나? 뭐 세상에 고생하는 게 그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닌데 뭔 대단한 벼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 그런 쪽인가. 벌써부터 비난의 기색이 가득한 음성에 희연이 식은 웃음을 입에 걸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들려오곤 하는 의혹이었다. 사람들은 으레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의혹이나 음모론에 대해 떠들기를 좋아하곤 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능력자들이나 한이관에 대한 정보는 상당수 국가적 차원의 정보였으므로 대중에 낱낱이 공개되기엔 무리가 있게 마련이고, 본디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을수록 사람들의 입에도 쉽게 오르내리는 법이다.
“글쎄요. 그런 게 있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제가 모르면 없는 사실 아닐까요?”
“아가씨가 뭔데요?”
“센티넬이요.”
때마침 신호에 걸린 차가 급정거에 가까운 기세로 멈춰선다. 손 뻗어 조수석 등받이를 가벼이 짚고 쏠림을 버텨낸 희연과 택시 기사의 눈이 또 한 번 룸미러를 통해 마주쳤다.
“아가씨가 센티넬이라고요?”
황망함 가득한 눈빛하며 목소리가 그의 당혹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희연은 퍽 선한 웃음을 얼굴에 띄워 올렸다.
“그냥 봐서는 모르시겠죠? 센티넬도 가이드도 보통 사람이랑 다르지 않거든요.”
“…….”
“그리고 특혜나 지원도 없어요. 말씀하신 대로 고생하는 직업이 저희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니, 뭐…나도 그냥 그렇다고 들어서 하는 소리…”
“기사님. 신호 터졌네요.”
변명조의 중얼거림을 잘라내며 턱짓해 보인 희연이 뒤로 몸을 기대자, 택시 기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이후 택시 안은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고 희연은 느긋한 태도로 기관에 가까워질수록 익숙해지는 풍경을 훑을 따름이었다. 적어도 희연에게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원래 세상의 모든 것엔 양면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능력자들에게 호감과 긍정적 방향의 호기심을 가진 이들이 있으면 반대로 적대감에 가까운 부정적 인식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저 정도면 양반 축에 든다고 볼 수 있었다. 침묵 속에서 택시는 이십여 분을 더 달려 기관 정문 부근에 도착했다. 내미는 카드로 택시비를 계산한 기사가 카드를 돌려주며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그…아까 기분 상했으면 미안해요, 아가씨.”
“괜찮아요. 더한 사람들도 많아서 익숙해요. 그리고…기사님이 이능력자를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자유지만, 저희들은 이능력 가진 게 벼슬이라고 생각 안 해요. 그것만 알아주세요.”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낯에 짧은 인사를 건넨 희연이 옆에 내려둔 보스턴백의 끈을 한쪽 어깨에 걸치며 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긴 했다만 다시 마주칠 가능성도 희박한 사람에게 굳이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익숙하게 치미는 것들을 삼켜낼 뿐이었다. 도중에 내리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딱히 악의를 가진 부류도 아닌 듯했고.
금세 멀어지는 택시의 꽁무니를 좇던 희연의 시선이 자연스레 정문 앞 갓길에 세워진 소형 SUV로 옮겨갔다. 기다렸다는 듯 점멸하기 시작하는 비상등을 확인한 희연이 가방을 한번 추켜매고는 차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걸어가자 운전석 창문이 부드럽게 내려가며 지안의 말간 낯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볍게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넨 희연이 뒷좌석에 제 가방을 싣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결국 렌트했어? 차량번호가 렌트카네.”
“차 빌리기로 한 지인이 갑자기 지방으로 출장을 간대서요.”
희연이 고개를 주억거리곤 안전벨트를 당겨 맸다. 아무래도 지방 출장을 가는 사람에게서 차를 뺏을 순 없지.
“지안 씨 믿어도 되는 거지? 잘 부탁해, 내 목숨.”
부러 짓궂게 던지는 말에 지안이 머리끝을 매만지며 눈을 깜빡였다.
“내 목숨도 귀해요.”
“응. 알지.”
피식 웃는 희연의 반응에 짐짓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나 싶던 지안이 결국 짤막하게 따라 웃고는 핸들을 잡고 기어를 변경한다.
“옆에서 졸지 마요.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졸기야 하겠어?”
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설정해둔 내비게이션 화면 귀퉁이에 약 두 시간 삼십 분이 소요될 예정이라 표시되어 있었다. 그간 지안이 직접 차량 운전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던지라, 희연은 지안에게 운전면허가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더랬다. 운전을 할 줄 안다는 것도 이번 일정을 잡으며 처음 들은 내용이었다. 물론 운전면허라면 희연도 갖고 있긴 했다. 애초에 면허를 딸 때 1종 보통으로 시험에 응시했으니까. 하지만 면허를 딴 이래로 줄곧 바이크만 타고 다닌 탓에 희연의 운전 능력은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었다.
지안의 운전 실력은 딱히 흠잡을 곳 없이 부드럽고 무난했다. 부러 통상적인 출근시간을 지난 때에 만나 출발을 했음에도 서울 도심을 완전히 벗어나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대체 이 많은 차들이 어디서 다 쏟아져 나와 도로 위를 달리는 건지. 느릿하게 가다 서길 반복하는 움직임에 지안은 제법 짜증이 솟는 얼굴이었는데, 희연은 내심 지안의 짜증이 어디까지 쌓이다 터질지 궁금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정체가 서서히 풀리며 차는 곧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차가 점점 달리는 속도를 더하자 지안이 손을 뻗어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을 바꿔 틀었다. 조금 더 톡톡 튀는 듯한 느낌의 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핸들을 가벼이 감싼 손끝이 맨들거리는 핸들을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희연이 조수석의 창문 쪽으로 고갤 돌리며 소리 없이 슬쩍 입매를 휘었다. 지안이 고속도로 주행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 너무 잘 들여다보인 탓이다. 물론 어느 누가 정체 심한 길을 운전하길 즐기겠냐만서도, 짜증이 확연히 묻어나던 좀 전의 얼굴과 지금의 분위기를 비교하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희연 씨, 자는 거 아니죠?”
“안 자. 눈 잘 뜨고 있어.”
결국 희연이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자동차 운전자들은 다 조수석의 동승객이 자는 걸 못 봐주는 걸까. 제가 운전하는 바이크야 운전자든 동승객이든 잠에 들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나가떨어진다고 봐야 했으니 딱히 동승객이 잠에 들까 걱정한 적이 없었으므로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능경연대회 끝나고 몸살 안 왔어?”
“괜찮았어요. 그날 밤에 따뜻하게 씻고 잤거든요.”
“다행이네.”
“희연 씨야말로 괜찮았어요? 그때 심하게 넘어진 거. 아직도 멍 남아있죠?”
“뭐…그렇지.”
잠시 뺨을 긁적인 희연이 순순히 시인했다. 대회 당시 설원 필드에서 얼음을 밟고 미끄러져 호되게 넘어진 탓에 한쪽 허벅지 옆이며 몸 곳곳이 시퍼렇게 멍들어 한동안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림을 달고 살았더랬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으니 상당수 삭은 멍이 누렇게 마지막 흔적을 남긴 상태긴 했지만, 힘주어 누르지 않는 이상 이젠 딱히 아프진 않았다. 희연에게로 흘긋 시선을 던진 지안이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우리 발리 가는 거 확정인 거죠? 날짜는 톡으로 알려준 그때로?”
희연이 고갤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 보니 지안은 해외여행이 처음이라고 했던가. 발리는 저 또한 가본 적이 없긴 했다만, 느긋하게 리조트에서 휴양을 즐기고 오기에 나쁜 곳은 아니리라.
“응. 날짜 변동 없을 거야.”
“예전에 같은 타투를 받으러 온 커플이 있었어요. 와서는 시술 내내 신혼여행을 어디로 갈지 이야기를 했었는데…그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후보지 중에서 발리가 있었어요.”
“신혼부부가 많이들 가긴 하지.”
“지난번에 희연 씨가 발리 이야길 꺼냈을 때, 그 커플 생각이 나더라고요.”
“왜 생각이 났는데?”
“그냥, 계획대로 신혼여행을 갔을지 아니면 헤어졌을지 궁금해서요.”
“커플타투까지 할 정도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까?”
지안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가벼이 웃음 지었다.
“커플타투 받고서 헤어지게 되는 커플이 얼마나 많은데요.”
“진짜? 의외네. 사람 일이야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라곤 하지만….”
희연은 오묘한 낯으로 턱을 매만졌다. 말마따나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영역에 걸쳐있다지만, 서로 영구적인 흔적을 나누어 가질 정도라면 그만큼 확고하고 깊은 애정을 품었을 텐데 왜 이별을 결심하게 되는 걸까.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으나, 글쎄. 스스로를 연애에 재주가 없다고 생각하는 희연으로선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지안과 희연이 이후로도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차는 일일이 셀 수 없는 무수한 터널을 지나고, 고속도로를 두어 번 갈아탄 다음 톨게이트를 지나 일반 국도에 접어들었다. 어느덧 목적지까지의 예상 소요 시간이 삼십 분 안쪽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지나는 표지판에 ‘월정사’라는 이름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희연은 불현듯 떠오른 것을 내뱉었다.
“그러고보니 지안 씨 신원증 챙겼지?”
핸들을 우로 천천히 꺾으며 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정사에서는 여러 가지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공무원을 대상으로 필요 서류를 제출하면 참가비를 할인해 주는 혜택이 존재했다. 기실 한이관의 요원들이 가지는 신원증은 통상적인 공무원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성격만을 따지자면 공무원으로 분류되었으니 공무원 할인 자격을 충족하긴 한다는 뜻이다. 템플스테이의 참가비 자체는 크게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었지만, 간단한 서류 제출만으로도 받을 수 있는 할인을 굳이 걷어찰 이유도 없었으므로.
산길에 접어들자 계절의 변화에 걸맞게 조금씩 우거지기 시작한 나무가 도로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바람이 부는지 살랑이는 나뭇잎들의 움직임을 따라 빛줄기가 이리저리 일렁이며 들이치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퍽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템플스테이를 찾아온 목적에 상당히 부합하는 모습이랄까. 사찰의 초입, 매표소를 지난 차는 그러고도 얼마간을 더 산길을 거슬러 오른 다음에서야 템플스테이 참가객을 위해 마련된 주차장에 멈춰 설 수 있었다.
차 문을 여는 순간 산과 숲이 가진 특유의 청량하고 맑은 향이 바람결을 따라 코끝을 어루만지고 사라졌다. 기지개를 쭉 편 희연이 크게 호흡해 깨끗한 공기를 만끽하곤 뒷좌석에서 제 가방을 챙겨들었다. 그 사이 지안은 트렁크에서 작은 사이즈의 캐리어를 꺼내 내려두는 중이었다. 숲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재잘거린다.
“공기 좋다. 여기 있는 만큼은 일 생각 절대 안 해야겠어.”
“희연 씨가 그게 될까요?”
“시작도 하기 전부터 의욕 꺾을래?”
정곡을 찔린 희연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지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낯으로 눈을 깜빡일 따름이다. 짐짓 무구한 사람인 양 천연덕스러운 눈빛에 희연이 고갤 절레절레 저으며 템플 스테이 운영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뗐다. 사무실에 도착해 예약자의 이름을 대고, 신분 확인을 위해 각자의 신원증을 제시한 두 사람은 사무직원의 휘둥그레진 시선을 받았다.
“아까는 제가 너무 빤히 쳐다봤죠. 실제로 처음 봬서….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숙소 안내를 위해 앞장서 걷던 직원이 부끄러운 목소리로 기어들듯 사과를 건네와 희연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가벼운 어투로 대꾸했다. 아침에 봤던 택시 기사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니 한결 너그러워진 덕분이다. 숙소는 기본이 2인 1실을 배정받는다 했다. 하여 지안과 희연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각자의 침구 위에 놓여있던 개량한복을 펼쳐 보인 지안의 낯이 빠른 속도로 어두워졌다. 제 짐을 뒤적이다 그 모습을 본 희연이 가벼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유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렇게 싫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걸 어떻게 입어요.”
“어쩌겠어, 템플스테이를 왔으면 절 규칙을 따라야지.”
물론 조금 전 안내받았던 규칙 중엔 반드시 사찰에서 제공하는 활동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은 없었던 것 같지만. 불만이 가득한 지안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은 희연이 등을 보이고 서서 웃옷 뒷덜미를 잡아당겨 훌렁 벗었다.
“그냥 참고 입어, 지안 씨. 언제 또 그걸 입어보겠어.”
“…….”
희연이 옷을 거의 다 갈아입었을 무렵 등 뒤에서 그제야 옷을 갈아입는 듯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두 사람은 같은 기간 동안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체험할 여섯 명의 사람들과 사찰의 큰 스님을 만나 담소 및 인사의 시간을 갖고, 곧장 중년의 보살에게 사찰에 대한 기본 안내와 더불어 사찰 예절까지 구구절절 들은 뒤에야 저녁공양이 시작되는 다섯 시 전까지 자유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희연 씨, 템플스테이는 왜 오고 싶어했던 거예요?”
흙길을 자박자박 걸어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법당을 둘러보고도 시간이 남아, 산책로를 따라 걷던 중이었다. 불쑥 들려오는 지안의 질문에 잠시 시선을 마주친 희연이 설핏 웃음기를 띄운다.
“음…마음의 평화가 좀 필요할 것 같아서? 일이랑 잠시 떨어져 있고 싶기도 했고.”
“삼척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무래도 그렇지.”
“아직도 그때 일로 자책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희연은 입 밖으로 대답을 꺼내는 대신 가만히 걸음을 옮기며 말을 골랐다. 정말 이제 자책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이번 일이 희연의 어떠한 생각을 좀 더 뚜렷하고 선명하게 만들었을 뿐.
“그냥. 충전하고 싶었던 거지. 나도 한 번씩 이렇게 쉬어줘야 할 것 같아서.”
정식 요원으로 일했던 지난 9년간 센티넬 요원의 폭주 사고는 종종, 잊을만하면 한 차례씩 전해지곤 했다. 폭주 사고 같은 소식이 민간에야 공개될 일이 거의 없다지만 기관 내에서까지 말이 도는 것을 막을 순 없으니까. 그러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희연은 센티넬이 가진 가치와 위험성을 저울의 접시에 각각 올려두고 무게를 가늠해 보곤 했다. 제 눈에는 그것이 꼭 비등비등한 무게로 위태롭게 유지되는 균형인 것만 같았다. 가벼운 깃털 하나의 무게가 더해지는 것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 때문에 희연은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망설임 없이 자신을 사살시킬 수 있는 동료가 있어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리고 생각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어렴풋하게 남아있을 수 있던 것을 선명히 드러나도록 만든 것은 이번 삼척 임무에서의 일이다. 희연에게는 반드시 필요했다. 언제든 자신을 사살해 줄 수 있을 사람이. 하지만 지안은 저를 돕겠다 달려왔고, 아마 같은 상황이 반복되어도…….
“지안 씨.”
“응. 듣고 있어요.”
때마침 얼기설기 우거진 숲 너머에서 저녁공양을 알리는 징 소리가 무겁게 공기를 흔들었다. 희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저녁 먹으러 가야겠다. 갈까?”
聽思必聰 들을 때는 반드시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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