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葉息

오리지널 (w.일지)

*이탤릭 표기는 영어대화




“한 번 더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태국이능력관리기관 소속 가이드이고, 그냥 지미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저랑 같이 온 요원은 메이라고 합니다. 센티넬이에요. 머무시는 동안은 저희가 동행할 예정입니다.”

“예, 파견 기간 동안 잘 부탁합니다.”

운전석에 앉아 뒤를 돌아보며 다시 인사를 건네오는 목소리가 제법 쾌활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메이라는 이름의 센티넬 또한 뒤를 돌아보며 가벼이 두 손을 모아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뒷좌석에 앉은 이들이 반사적으로 고갤 조금 수그리며 인사를 되돌리고, 이번 팀을 이끄는 리더 자리에 앉혀진 일지가 두어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차가 숙소를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틀 전, 태국이능력관리기관으로부터 핫라인을 통한 파견 요청이 있었다. 치앙마이 인근의 임야에서 초대형 크리처 1마리의 출현을 확인했는데, 인력 부족으로 인해 크리처의 이동을 저지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처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사살을 위해 적절한 인력을 파견해 줄 수 있느냔 내용이었다. 대체로 크리처 출몰은 시각을 다투는 경우가 많았고, 이번 일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크리처의 발견지가 치앙마이와 직선거리로 고작 110킬로미터쯤 떨어진 위치라고 하니 태국 정부 입장에는 내심 애가 탔을만했다. 치앙마이는 ‘북방의 장미’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태국 북부의 문화 중심지가 되는 주요 관광지다. 크리처가 만에 하나 치앙마이 도심으로 향하기라도 하면 인명과 재산 피해가 상당하긴 할 것이다. 

긴급 파견 요청을 받아들인 기관에서는 급하게 파견 팀을 꾸렸다. 인원은 총 다섯 명, 구성은 두 명의 센티넬과 세 명의 가이드로. 당장 차출이 가능한 가이드를 모으는데 제법 애를 먹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든 구성이 되긴 한 모양이었다. 과속방지턱을 넘는 차가 부드럽게 꿀렁이며 몸이 가벼이 흔들렸다. 희연은 옆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는데 여념이 없는 일지를 흘긋 일별했다. 인원 모집도 모집이었지만 파견 준비 역시 급박하게 준비되었으므로 이번 파견팀의 리더답게 이래저래 신경 쓸 것이 많긴 할 터였다. 팀원인 희연조차 한국에서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파견 준비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현장으로는 언제 출발합니까?” 

“그렇잖아도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윗선에서 가능한 빠르게 현장으로 이동해 주면 좋겠다고 하거든요. 하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누적된 피로도 있으실 테니, 제가 두 시간 정도는 벌어보겠습니다.”

조수석에 앉은 메이가 몸을 틀어 미안한 기색 역력한 얼굴을 내비치는 것이 보였다. 하여튼, 어딜 가나 책상 앞에 둘러앉아 손가락만 놀리는 윗선들이 문제다. 생각은 속으로만 삼킨 채 희연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일지의 옆얼굴을 본다. 으레 고민에 빠진 듯한 사람의 낯이었다. 오래지 않아 일지의 시선이 팀원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다들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초대형 개체고, 도심과 그리 멀지 않으니 우리 입장에서도 가능한 빨리 처치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요.”

“숙소에 짐만 두고 바로 준비해서 출발하자는 뜻이죠?” 

“예. 혹 무리가 될 것 같다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초대형급이라면 발을 묶어두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태국 측에서는 자국의 이능력자들로 크리처를 처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했으나,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사살에 성공했을 때 떠안아야 할 물적, 인적 피해를 따져보았을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으리라. 비행기 내에서 이미 일지와 비슷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고. 그런 상황이라면 파견된 입장에서도 빠르게 처리를 하는 게 나았다. 

“저는 바로 출발해도 괜찮아요.” 

“센티넬 요원들이 괜찮으면 그렇게 움직여도 될 것 같네. 아무래도 이번은 초대형이니 화기로 대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거고.”

“네. 그렇게 하죠.” 

“저도 좋습니다.” 

팀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일지가 대표로 뜻을 전달했다. 그렇게 움직여도 괜찮겠냐 물어오는 목소리 가득 묻어나는 염려의 기색이 다정했다. 메이라고 했던가. 그녀 역시 센티넬이라 했으니 피차간의 입장이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카일. 한국 측에서 배려해 주신 점 윗선에서 꼭 알 수 있도록 제가 잘 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빠르게 해결하는 게 저희도 좋으니까요.”

운전 중인 지미와 태국어로 빠르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메이가 곧 어딘가 전화를 걸어 짧은 통화를 마친다. 빠르게 끝난 통화와 썩 마음이 편치 않은 듯한 얼굴을 보며 희연은 아마 윗선에선 휴식시간 없이 현장으로 가겠다는 전언을 반색하며 수용했으리라 생각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태국의 윗선이라고 뭐가 그리 다를까 싶었다. 

낯설기 그지없는 풍경을 한참 가로질러 달린 차가 느릿하게 어느 호텔의 정문을 넘어 안으로 진입했다. 딱 봐도 정부의 관계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주차장의 한쪽에 모여 저들끼리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차가 적당한 곳에 멈춰 서고, 지미가 주차를 하는 동안 파견팀은 메이의 안내를 받아 짐을 풀어둘 방으로 올라갔다. 

두 개의 넓은 방이 거실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는 깔끔한 스위트룸이었다. 아무래도 방을 나누어 배정해두면 연락을 두 번 해야 한다는 게 번거로웠을 것이다. 사전에 논의를 마친 대로 일지와 희연을 비롯한 팀원들은 각자의 전투복으로 환복을 마친 다음 다시 거실로 모였다. 그 사이 주차를 마친 지미가 다른 자국 요원과 함께 두 사람이 함께 들어야 할 크기의 총기 박스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용하실 총기들입니다. 요청주신 총기들과 비슷한 것들로 준비하려 하긴 했습니다만….”

준비 기간이 충분한 파견이었다면 무기 반출을 위한 적법한 절차를 거쳐 각자가 주로 사용하는 화기를 챙겨올 수 있었겠으나, 이번만큼은 급박한 파견 일정을 맞출 수 없어 개인 화기는 태국 측에서 제공하는 것을 사용하기로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활짝 펼친 총기 박스 안에는 몇 정의 권총과 자동 산탄총 서너 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산탄총의 모델을 알아본 희연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USAS-12네요, 이거.”

“요즘 국내에서도 보기 힘든 건데.”

희연의 옆으로 다가온 6년 차 전업 가이드 이정수가 퍽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국내 회사가 개발과 생산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마따나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총기였다. 아시아 쪽을 비롯한 몇 국가에 어느 정도 팔린 적이 있다고는 들은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그 실물을 보게 될 줄이야. 두 사람이 한국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지켜보던 지미가 기민하게 반응을 캐치해 질문을 던져왔다.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괜한 불안이나 걱정을 안기는 일이 될까 고갤 저어 별일 아니라는 것을 피력해 보인 희연은 메이와 다른 요원이 브리핑 준비를 끝마친 것을 보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치앙마이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서류로 준비된 간략한 정보를 확인하긴 했었다. 이번에 출현한 크리처는 초대형으로 분류되며 확인된 바에 의하면 약 130미터의 몸체를 가진 개체였다. 초대형 치고는 작은 축에 들었으나 상대하기에 녹록찮은 크기인 것은 분명했다. 

“약 10분 전 업데이트 된 최신 정보로 브리핑 진행하겠습니다. 크리처는 현재 치앙마이 중심지와 약 80킬로미터까지 거리를 좁힌 상태예요. 현재 저희 요원들이 이동을 최대한 저지하고는 있지만, 시간을 오래 끌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민간인 대피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그게… 당국에서 아직까지 민간인 대피를 허락해주지 않아서….”

“아니, 고작 80킬로미터인데 대피를 안 합니까?”

브리핑을 듣고 있던 이정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반쯤 들며 반문했다. 

“그게…관광 중심지이다보니 대피령을 내렸을 때 야기될 혼란과 피해비용을 고려해서 50킬로미터 진입 전까지는 대피령을 불허한다는 결론이 내려졌어요.”


메이의 착잡함 묻어나는 음성을 듣는 팀원들의 낯에 감출 수 없는 곤혹이 떠올랐다. 초대형 개체는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이동거리 또한 너르다. 만에 하나 크리처가 곧장 도심을 향해 돌진하기라도 하면 천문학적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인 것이다. 희연은 태국 당국의 결정이 역겨웠다. 결론적으로 치앙마이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의 안전과 대피령으로 인해 발생할 손해를 저울질해 결정을 내렸다는 게 아닌가. 

치앙마이에 거주하는 인구 수는 최소 14만 명이다. 태국 당국에서는 정말 크리처가 50킬로미터 안으로 진입했을 때 그 많은 수의 민간인이 충분히 대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건가. 물론 크리처가 정말 도심으로 진입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많은 인원을 대피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지만 이건 도박이나 매한가지였다. 상황을 파악하며 잠시 계획을 세운 일지가 잠시 관자놀이를 매만지다 고개를 들었다. 

“현재 상황과 태국 당국의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 크리처가 더 접근하는 걸 막아야 하니 여유가 많진 않겠군요.” 

“네, 발을 잘 묶어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급박하게 상황이 바뀌었어요.”

일지의 시선이 팀원들을 차례로 훑는다. 일지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지만, 희연은 그가 팀을 이끄는 리더 직에 적합한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눈이 어떤 임무에서도 동요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초대형 개체이니 가까이 접근하여 공격하는 것은 허가하지 않겠습니다. 가이아와 제가 이능을 사용해 처치하는 방법으로 가고, 다른 분들은 화기로 보조 및 엄호합니다. 태국 측 요원들이 벌써 상당수 부상을 입은 상태라고 하니, 오래 견제하지 못할 겁니다. 현장 도착하면 부상 입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가벼이 손을 말아 쥐었다 편 희연이 각자 사용할 화기를 챙기는 사람들 틈에서 권총 하나를 집어 들어 홀스터와 함께 착용했다. 어차피 능력을 주로 사용할 예정이라면 부피가 큰 총을 챙겨들 필요가 없었다. 짐을 내린 숙소에서 현장까지는 헬기를 통해 이동했다. 종종 국내에서도 빠른 이동을 위해 헬기를 이용하긴 했다만, 함께 파견된 비전업 가이드 주은지는 헬기를 타보는 것이 처음이라며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헬기 아래로 시가지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숲이며 들 같은 것들이 시야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과거 한때 희연은 임무를 나설 때면 은근한 긴장이 사지를 휘감아오는 것을 느끼곤 했으나 이제는 현장으로의 파견에서 긴장을 느끼지 않는다. 적응이라면 적응일 것이고, 무뎌진 것이라면 무뎌진 것이리라. 더 이상 긴장감에 손끝이 식거나 입이 메마를 일이 없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겠으나. 

살아있는 것을 해치는 일에도 무감히 익숙해진다는 걸 좋은 일이라 볼 수 있을까. 분명 크리처는 인명피해를 야기하고, 재산상의 피해를 끼친다. 그러니 사살하여 피해를 막는다. 이는 지극히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물론 희연이라고 해서 크리처들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거나, 크리처에 대한 동정심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크리처는 사살하는 것이 맞았다. 인명 앞에 크리처를 세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십여 분을 더 비행했을 무렵, 팀원들은 어렵지 않게 크리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크리처 특유의 기이한 울음이 공기를 흔든다. 헤드셋을 쓰고 있음에도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울리며 파고들었다. 숲 한가운데 불쑥 솟은 형체가 부르르 몸을 떨다 다리 하나를 들어 올려 땅을 쿵 찍어내리는 것이 보인다. 주위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크리처의 다리를 휘감았다. 

“공격 사정권 밖에서 하강하실 수 있도록 할게요. 3분 내 도착합니다. 전원 패스트로프 가능하십니까?”

“예, 가능합니다.”

일견 무미건조하게 들릴 법한 어조로 차분히 대꾸한 일지가 팀원들에게 준비할 것을 눈짓으로 알려왔다. 레펠보다 빠른 속도로 강하할 수 있고 여러 사람이 같은 밧줄을 동시에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밧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이 따르는 강하 방식이었다. 헬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출수록 저만치서 크리처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태국 측 이능력자들이 다수 보이기 시작했다. 헤드셋을 통해 강하를 예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하 후 무전 채널 3으로 변경바랍니다.” 

“30초 후 강하 지점 도착합니다.”

방열 장갑을 비롯한 장비 착용을 마친 일지와 희연을 비롯한 팀원들이 활짝 열리는 헬기 문 앞으로 다가섰다. 강하게 들이치는 바람이 고글 앞으로 잔머리를 흩날리게 했다.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거친 바람에 주위의 키 큰 나무들이 가지를 휘청이며 춤을 추었다. 현재 고도 15미터, 강하 시작합니다. 인간이 심리적으로 가장 큰 공포를 느끼는 높이는 11미터라고들 한다. 강하 훈련을 11미터에서 시행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던가. 

레펠이든 패스트로프든 공중에서 강하하는 일 역시 이제 두려움을 느끼기엔 너무 익숙해진 뒤였으므로. 희연은 묵직하게 흔들리는 밧줄을 단단히 감아쥐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헬기 밖으로 걸음을 떼듯 몸을 움직였다. 방열 장갑을 낀 손안에서 굵직한 밧줄이 마찰한다. 익숙한 추락감을 체감하며 희연은 발을 이용해 하강 속도를 조절하여 땅에 발을 딛는다. 착지까지의 시간은 고작 몇 초였을 뿐이다. 

착지와 동시에 밧줄을 놓고 물러나 다음으로 하강하는 이에게 자리를 내어준 희연이 방열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팀원들이 차례차례 지상으로 착지하는 동안 무전 채널을 바꾼 희연이 가벼이 무전 테스트를 끝마쳤다. 마지막으로 땅을 디딘 일지가 헬기를 향해 수신호를 보내고, 멀어지는 헬기 소음 사이로 특유의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가 짧은 인사를 건네왔다.

[한국 파견팀 현장 도착 확인. 환영 인사는 추후에 합시다. 한국 팀 작전은 어떻게 됩니까?]

“예, 센티넬 카일과 가이아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다른 분들께서는 크리처 이동 저지 및 공격 무산에 계속 힘써주시면 될 듯합니다. 다만 능력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호 시 후방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카피. 작전 승인. 자국 요원 전원 현재 자리 지키며 후퇴 신호 놓치지 않도록 합니다.]

“라저.”

무전을 마친 일지가 권총을 빼들며 팀원들에게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무성히 솟은 나무들 사이를 지나 거리를 좁혀갈수록 고함과 총성, 크리처의 울음이며 지축을 흔드는 소리 따위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현장음은 적당한 긴장을 불러와 신체 상태를 전투에 최적화 시킨다. 심장이 점차 크게 고동치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언제든 대응할 수 있게끔 달라진다. 

“가이아입니다. 능력 전개 시점까지 약 30미터.”

[라저. 전방 인원 모두 후퇴 시작합니다.]

희연의 능력 전개 범위는 약 150제곱미터. 크리처를 온전히 능력의 범위에 들게 하려면 가능한 가까이 다가서야 했다. 크리처의 거대한 다리가 위협적인 바람을 일으키며 머리 위를 빠르게 지나친다. 시선 한 번 들지 않고 달려나가는 팀의 머리 위로, 강한 힘에 맥없이 부러진 나무의 잔해들이 떨어져내리다 공중에 멈춰 섰다. 능력을 사용한 반향으로 일지가 자연스럽게 뒤처지는 사이 희연은 목표한 지점에 다다라 오른발로 땅을 콱 내리찍었다. 

발끝에서 빠르게 시작된 균열이 크리처를 향해 뻗어갈수록 점점 깊어지고 커져간다. 희연이 땅을 갈라 크리처의 발을 묶고, 일지가 대기를 운용해 거대한 몸체를 짓누르는 것이 두 사람의 계획이었다. 일지와 희연은 국내 임무에 자주 함께 배정되어 합을 맞춰왔으므로 서로가 필요한 때를 맞추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갈라진 땅이 크리처의 다리를 삼키며 무게중심을 흩트린다. 큰 덩치가 기울며 십수 그루의 나무가 부러지고, 희연의 존재를 눈치챈 크리처가 앞발을 크게 휘둘렀다. 

[가이아, 백업합니다. 능력 유지하세요.]

“카피.”

희연은 제 쪽을 향해 쇄도해 드는 크리처의 앞발을 눈으로 좇는다. 살벌한 파공음의 끝이 정확히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두려움을 품기에 희연의 역치는 무수한 위험 속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다. 그러니 피하지 않는다. 거기 더해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저를 백업하겠다지 않은가. 예상대로, 내리꽂히던 다리가 우뚝 멈춰 선다. 보이지 않는 것과 힘겨루기를 하듯 잘게 떨리던 다리가 이내 빈 캔이라도 되는 양 우그러지고 찌그러져 본래의 형태를 잃었다. 

크리처의 괴성이 숲을 뒤흔든다. 희연은 스멀스멀 감각을 이지러뜨리는 페널티를 감각하면서도 능력의 범위를 더욱 확장했다. 현재 마주하고 있는 것은 대형도 아닌 초대형이다. 국내에서 임무를 한다 쳐도 쉽게 생각해선 안 될 크기인데, 하물며 해외 파견 임무는 어떻겠는가. 허투루 상대할 수 없었다. 희연이 갈라낸 땅이 곧 크리처를 삼킬 만큼 시커멓고 거대한 아가리를 벌려낸다. 

발버둥 하는 거대한 몸체와 발의 자유를 속박한 일지가 절리곡 속으로 크리처를 끌어내린다.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깊고 깊은 틈, 다시는 되돌아 나올 수 없는 무저갱의 바닥으로. 저항을 허하지 않는 대기의 엄징과 제물을 삼킨 대지의 환희가 이치 거스른 괴이를 우그러뜨리고 짓씹어 벌한다. 크리처가 망가뜨린 모든 생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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