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훌라바바
너는 일만 중요하지. 내가 너한테 중요하긴 해? 너는… 연애하기에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나만 너 사랑하는 것 같아서 힘드네. 입관 후 경험한 연애가 하나같이 비슷한 내용의 말로 끝을 맞았다는 건 아무래도 저 자신에게 귀책사유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어쩌면 아주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아닐지도 몰랐고. 물론 이에 대해 할
삼척의 특수 임무 이후 희연에겐 첫걸음에 디딘 땅을 문질러 흙을 확인하는 버릇이 들었다. 꼭 운동선수의 루틴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기실 이는 희연에겐 증명의 수단이었다. 신발 굽 아래에서 뭉그러지는 흙의 존재를 감각하며, 자신의 이능이 제 거느림 아래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 말이다. 하필이면 같은 동해라는 사실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으나 임무라는 건 취향
세상을 구성하는 몇 요소들 가운데엔 그 존재가 너무나도 당연하여 새삼스럽게 인식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으레 사람들이 호흡하는 공기가 그러하고, 밤낮을 가르는 빛과 어둠이 그러했으며, 모든 것의 기틀이 되는 땅이 그러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삶이 땅을 딛고 살아간다. 땅은 곧 흙이고, 흙은 뭇생명들이 태어나고 자라며 종내에 죽음을 맞이하는 가장 긴밀한
희게 쌓여 꽁꽁 얼어붙다 종내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눈의 빈자리를, 안온한 온기 좇아 움트는 생명력이 채워나가며 푸릇하게 물들일 무렵이었다. 그 말은 곧 희연이 대학생의 신분을 벗고 요원 훈련생의 신분을 입게 된지 반 년 정도가 지났다는 뜻이다. 그와 더불어 부모님과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기간이기도 했다. 희연은 자신이 센티넬임을 알게 되었던 바
검은 보스턴백과 함께 택시에 몸을 실은 희연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도로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하늘은 눈이 시릴만치 파랬고, 군데군데 솜을 찢어둔 것처럼 흩어진 구름이 퍽 운치 있었다. 딱 어딘가로 떠나기에 적절한 날씨라는 소리다. 얼마간 도로를 달리는가 싶던 택시가 신호에 걸려 서서히 멈춰 섰다. 제각각의 목적지를 향해
*이탤릭 표기는 영어대화 “한 번 더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태국이능력관리기관 소속 가이드이고, 그냥 지미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저랑 같이 온 요원은 메이라고 합니다. 센티넬이에요. 머무시는 동안은 저희가 동행할 예정입니다.” “예, 파견 기간 동안 잘 부탁합니다.” 운전석에 앉아 뒤를 돌아보며 다시 인사를 건네오는 목소리가 제법 쾌활했다. 조수석에
비온 뒤 땅이 굳는다고 했다. 희연이 그 말을 믿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다. 땅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된 이후에도 한동안은 믿지 않았으니, 삶의 대부분에서 불신해왔던 셈이다. 진짜 땅은 비가 온 뒤 굳어질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은 비가 내린 뒤 그저 진창으로 남아있을 뿐이라고. 줄곧 그렇게 믿었고 생각해왔다. 저 자신이 그랬으니까. 한이관의 정식 요원이
제야의 타종 행사를 지나 보내고 새해가 밝아오면 한국이능력관리기관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기색으로 부산스러워진다. 아카데미에서 모든 과정을 수료한 학생들이 성인이 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한이관 소속의 요원이 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입관식은 3월 초—대개 2일—에 이뤄지므로, 그전까지 한이관의 여러 부서가 동시에 바빠지곤 했다. 강당
명사 1. 쓰임의 정도나 쓰이는 바. 한이관의 홍보대사 역할을 한다는 것은 사실 제법 민망하고, 때론 귀찮으며 생각보다 다양한 일을 부가적으로 해야 했다. 예를 들자면 티비로 송출되는 공익광고를 찍는다던가 브로셔 또는 홍보물용 촬영을 한다든지, 드물게 인터뷰를 하거나 외부로 강연을 나가는 식이었다. 기실 강연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문 편이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