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울지 않는 땅

1.5 오리지널 (w.이안, 지안)

삼척의 특수 임무 이후 희연에겐 첫걸음에 디딘 땅을 문질러 흙을 확인하는 버릇이 들었다. 꼭 운동선수의 루틴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기실 이는 희연에겐 증명의 수단이었다. 신발 굽 아래에서 뭉그러지는 흙의 존재를 감각하며, 자신의 이능이 제 거느림 아래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 말이다. 하필이면 같은 동해라는 사실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으나 임무라는 건 취향이라던가 입맛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 막대사탕이 아니니까. 

희연은 자신의 전 생에 걸쳐, 딱히 행복을 좇진 않았어도 굳이 불행을 사서 끌어안은 적은 없었노라 단언할 수 있다. 그렇기에 부모에게서 단호히 등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끌어안고 곁을 맴돌며 다정을 갈구하는 건 제 성격에 맞지 않았으니까. 매달리지 않을 수 있었기에 센티넬로서의 삶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는 상태로도 홀로 서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낯선 능력을 다루는 과정은 어려울 것이고, 힘들거나 괴로우리란 것 또한 알았다. 그럼에도 희연은 자신이 있었다. 발 딛고 선 이 땅에 제 능력이 가 닿는다면 결국 제가 다스리게 되리라고. 응당 그리 될 것이라고. 그것이 과연 스물두 살의 패기였을지 자만이었을지는, 글쎄. 십 년의 세월을 보내도 딱 잘라 나눌 수 없는 영역에 발을 걸친 문제였다. 

크리처가 휩쓸고 간 땅을 보며, 그것들의 힘에 무참히 찢겨나간 채 널브러진 시신들을 보며 희연은 매 걸음마다 땅에게 귀를 기울였다. 마치 그리하면 모든 흔적과 증거를 끌어안아야 했을 땅이 위로받기라도 한다는 듯. 그리고 그때마다 희연은 정식 요원으로 내디뎠던 최초의 걸음을 떠올리곤 했다. 걸음 한 번에 땅을 느낀다. 또 한 발자욱에 땅은 촘촘한 거미줄처럼 제 모든 촉각을 일으켜 세운다. 서서히 저를 중심으로 번져나가는 땅울음과 진동을 감각한다. 고요히 몸을 낮추고 있던 땅을 깨우고 흔들어 일으키는 순간 사희연의 존재는 허물어지고, 진앙에 선 것은 센티넬이다. 


사희연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가이아라는 이명을 안은. 


능력의 전개 범위 안은 오롯이 희연의 영역이다. 거대한 자연 안에 기생하여 오직 한 존재의 이능에만 몸을 일으키는 또 다른 가이아의 세계. 기존의 질서 위로 새로운 규율을 덧그린다. 제 힘 닿은 모든 땅이 환희와 공포에 진동하는 순간을 마주할 때면 희연은 늘 곱씹었다. 한낱 인간이 지기엔 너무 무거운 이름이 아니었을까, 하고. 


가이아Gaia, 테라Terra, 부미Bhumi, 게Γῆ. 세계 각국의 신화, 역사에서 대자연 혹은 세계 그 자체를 부르는 이름. 세계의 시작, 만물의 근원. 이는 곧 자연의 질서이며 그 무엇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법칙. 흙에서 난 것은 흙에서 자라 흙의 품으로 돌아온다. 대지는 어째서 곧 세계일까? 왜 모든 생은 흙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걸까. 왜 죽음은 흙으로 회귀하는 걸까. 어째서 파괴는 곧 새로운 시작과 재생의 단초가 되는 거지. 이름은 고작 호칭일 뿐인데. 그러나 말에는, 부름에는 힘이 있다. 발화는 그 무엇보다 선연히 존재를 그리는 질서가 아니던가. 


자신이 가른 균열 사이사이 스미는 의문을 삼키고 바스라뜨려 무로 되돌린다. 언제나의 반복이다. 희연의 세계에선 늘 상념이 무수히도 생몰生歿했다. 제석천이 늘어뜨린 인다라망의 그물코를 세는 짓과 다름없음을 스스로도 알았다. 그러나 앎과 실천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으므로. 희연은 여신의 이름을 등에 업었을지언정 번뇌하고 사유하게끔 만들어진 인간의 역할에 충실했다. 



……………

…………

…………

………

……

.



아, 어쩌면 너무 충실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ㅆ,”



그러니 울컥 날뛰는 힘의 고삐를 또 움켜쥐질 못하고……. 



몸을 울려 뒤흔들고 사라지는 날카로운 울음 뒤로 해일이 일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 어찔하다. 소리가 멀어진다. 둔통과 탈력감이 번갈아 근육 사이를 헤집는다. 광증이 도진 말처럼 날뛰며 온 신경줄을 짓밟고 뭉개는 제 힘을 몸 안에 꾸역꾸역 갈무리한다. 바다 위다. 폭주해선 안 돼. 사위가 흔들리고 코피가 터져 호흡마다 쇳내가 코를 찌른다. 자꾸만 꺾이려는 다리를 움직여 섬의 가장자리를 향해 물러선다. 흙이 가장 희박한 곳으로 가야 했다. 


폭주한다 해도 휘말리는 이가 없어야 했다. 징징 울리는 머릿속에서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다. 벽을 내달리는 균열과 붙잡을 수 없었던 흔들림, 비명과 울음이 뒤섞여 파장에 잡아먹히면 남는 것은 무저갱이다. 삼키는 균열. 아무도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미친 거지. 돌았어. 억지로 긁어모아 본들 얼마 되지도 않을 초라한 분량의 흙뿐인 곳에서 미쳐 날뛰겠다고. 거대한 바위 사이로 스민 흙은 이 섬의 큰 조각들을 이어붙인 실이다. 무릇 생이란 대지를 딛어야만이…. 


“아무도 오지 마!! 휘말리지 마!!” 


성대가 진동했으나 들려오는 것이라곤 귀청을 찢는 이명이 다였다. 짓눌린다. 감히 만물의 근원, 무결한 법칙에 손을 댄 대가를 받기라도 하는 양 거센 압력이 모든 감각을 뭉개고 할퀸다. 의식이 얇고 가늘게 늘어진다. 억누르던 힘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린다. 범람한다. 불온한 진동이 땅을 흔든다. 넘쳐흐르는 것은 어떻게 주워 담아야 하지? 


“……”


감각과 인지가 어긋나 무언가에 떠밀려 주저앉았다는 사실조차 일시에 입력되지 않았다. 벌벌 떨리는 몸을 웅크리기 위해 애썼다. 파괴하면 안 돼. 해치면 안 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조금이라도 힘을 제 안으로 품어 보려 안간힘을 다했다. 고작 발밑쯤 무너진다고 수장될 이들이 아니다. 누구보다 잘 아는 사실임에도, 그럼에도. 무서워. 다치게 하기 싫어. 제발. 지키고 싶어. 


“아……”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감각이 거세게 널을 뛰는 제 파장 위로 밀려든다. 스민다. 번진다. 마치 발목을 간질이는 시원한 물길처럼, 얕게 떨리는 어느 봄날의 실바람처럼. 마구잡이로 이지러지던 제 존재의 균열마다 차오른다. 어긋난 감각과 인지가 느리게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면 그제야 제 팔을 단단히 붙든 힘과 몸을 감싸 안은 가벼운 무게를 알아차린다. 새하얗게 번진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가물가물 세상을 되찾고 있었다. 


나는 결국, 기어이 또. 그들을 소모시켜 나를 채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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